9화(5,334자)

사월 구일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새벽 한 시 이십 분⁠, 재묵은 식당 구석 상에 엎드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권 법무사에게 빌린 돋보기를 코끝에 걸었다⁠. 돋보기가 커서 재묵의 얼굴이 한층 놀란 사람처럼 보였다⁠.

“⁠누나⁠, 메신저 사진이 기간 지나면 안 열리잖아⁠. 근데 내 폰은 받은 사진을 사진첩에 저절로 저장하게 해 놨다⁠. 가게 할 때 손님 주문 사진 받으려고⁠. 그때 설정을 안 바꿨다⁠.⁠”

“⁠그래서⁠?⁠”

“⁠그래서 사월 사진이 사진첩 어딘가에 있다는 거지⁠. 문제는 이거다⁠.⁠”

재묵이 사진첩을 열어 내 쪽으로 돌렸다⁠. 화면 가득 커피였다⁠. 라테 위의 하트⁠, 라테 위의 백조⁠, 라테 위의 하트 같은 백조⁠. 원두 봉투⁠, 원두 봉투를 든 재묵⁠, 원두 봉투를 든 재묵의 발⁠. 사진 수가 화면 위에 떠 있었다⁠. 「⁠사진 31⁠,482장⁠」

“⁠삼만 장⁠?⁠”

“⁠가게를 두 번 하면 그래 된다⁠.⁠”

재묵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 올렸다⁠. 2027년 5월에서 거꾸로 올라갔다⁠. 커피가 흘러갔다⁠. 미송이 옆 상에서 보다가 혀를 찼다⁠.

“⁠오빠⁠, 날짜로 검색해라⁠.⁠”

“⁠날짜로 검색하는 거 어떻게 하는데⁠?⁠”

미송이 휴대전화를 빼앗아 검색창에 「⁠2027년 4월 10일⁠」을 쳤다⁠. 사진 열한 장이 떴다⁠. 열 장은 커피였다⁠. 연남동 가게 마지막 날 사진이었다⁠. 빈 진열장⁠, 셔터에 붙인 종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재묵 로스터리⁠」 열한 번째 사진은 밤 열한 시 오십삼 분에 저장되어 있었다⁠.

미송이 사진을 눌렀다⁠. 화면에 미색 편지지가 떴다⁠.

*

나는 휴대전화를 받아 상 위에 눕혔다⁠. 형광등이 화면에 비쳐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누군가 침대 위 흰 시트에 편지지를 놓고 위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시트 귀퉁이에 「⁠낙강병원⁠」이라는 파란 글씨가 찍혀 있었다⁠. 병실 시트였다⁠.

편지지는 같았다⁠. 솔잎 무늬가 사진에서도 희미하게 비쳤다⁠. 글씨도 같았다⁠. 굵고 반듯한⁠, 쓰러지기 전 아버지를 닮은 글씨⁠. 「⁠나 금판술은 금목토건 주식회사와 회사가 쓰는 모든 땅을 막내 금태구에게 물려준다⁠. 회사는 태구가 끌고 간다⁠.⁠」

다음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2027년 4월 9일⁠.⁠」

저고리 안에서 원본을 꺼냈다⁠. 원본의 같은 자리에는 「⁠2023년 9월 2일⁠」이 있었다⁠. 사진과 원본을 나란히 놓았다⁠. 미송이 숨을 들이켰고⁠, 재묵이 돋보기를 벗었다⁠.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사진 속 유언장에는 이름 옆에 도장이 없었다⁠. 「⁠금판술⁠」 석 자 뒤가 비어 있었다⁠. 원본에는 매끈한 테두리의 새 도장이 붉게 찍혀 있었다⁠.

“⁠4월 9일 밤에 쓴 종이를 4월 10일 밤에 사진 찍어 보냈고⁠, 날짜는 그 뒤에 고쳤고⁠, 도장은 그 뒤에 찍었네⁠.⁠”

미송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수간호사가 투약 기록을 읽는 말투였다⁠.

나는 확대경을 꺼냈다⁠. 원본을 형광등 바로 밑에 대고 날짜 줄을 들여다보았다⁠.

「⁠2023⁠」의 마지막 「⁠3⁠」 위쪽 곡선의 시작점에서 가로로 짧은 선이 하나 삐져나와 있었다⁠. 「⁠3⁠」을 쓰는 사람의 손은 곡선이 시작하는 자리에서 가로로 가지 않는다⁠. 「⁠7⁠」의 머리 가로획이 지나간 자리였다⁠. 「⁠7⁠」 위를 「⁠3⁠」이 덮었다⁠. 덮은 자리의 잉크가 다른 획보다 진했다⁠. 볼펜이 같은 자리를 두 번 지나가면 잉크가 두 겹으로 쌓인다⁠.

「⁠9월⁠」의 「⁠9⁠」는 동그라미가 유난히 굵었다⁠. 동그라미 왼쪽 아래로 곧은 세로획 끝이 살짝 비어져 나와 있었다⁠. 「⁠4⁠」의 세로획이었다⁠. 「⁠2일⁠」의 「⁠2⁠」 밑에는 「⁠9⁠」의 꼬리가 희미하게 휘어져 있었다⁠.

편지지를 들어 형광등에 비췄다⁠. 날짜 줄 숫자 주변만 종이 결이 일어나 있었다⁠. 한지의 섬유가 보풀처럼 서서 빛을 흐리게 받았다⁠. 무언가로 긁거나 문지른 자리였다⁠. 발굴할 때 흙벽을 붓으로 쓸면 원래 흙과 덧댄 흙의 결이 다르게 일어난다⁠. 종이도 그랬다⁠.

“⁠날짜를 고쳤어⁠.⁠”

“⁠어떻게 알아⁠?⁠”

재묵이 물었다⁠.

“⁠숫자 세 개 밑에 다른 숫자가 있어⁠. 7⁠, 4⁠, 9⁠. 사진에 있는 날짜 그대로야⁠.⁠”

권 법무사가 언제 왔는지 내 뒤에서 확대경 너머를 넘겨다보았다⁠. 박하사탕 냄새가 났다⁠.

“⁠자필 유언장을 고칠 때는 유언하는 사람이 고친 자리에 고쳤다고 손으로 쓰고 도장을 찍어야 된다⁠. 돌아가신 분 말고 다른 사람이 고쳤으면 그건 변조다⁠. 위조하고 같은 줄에 있다⁠. 결격⁠.⁠”

권 법무사는 결격 한마디만 남기고 박하사탕 봉지를 내 앞에 놓고 갔다⁠.

*

범곤이 식당 입구에 서 있었다⁠. 비상계단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부의금 묶음은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었다⁠. 범곤의 눈이 상 위의 휴대전화와 원본 유언장을 오갔다⁠. 범곤은 겨드랑이의 봉투를 상 끝에 내려놓고 걸어왔다⁠.

“⁠처남⁠, 그거 지워⁠.⁠”

“⁠형부가 보낸 거잖아요⁠.⁠”

“⁠잘못 보낸 거야⁠. 초안이야⁠. 지워⁠.⁠”

“⁠초안이요⁠? 아버지 유언장에 초안이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초안 쓰시면 왼손 연습장에 쓰시지⁠.⁠”

범곤의 손이 휴대전화로 뻗었다⁠. 재묵이 휴대전화를 낚아채 머리 위로 들었다⁠. 재묵은 범곤보다 한 뼘이 컸다⁠. 범곤은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내렸다⁠. 예순 살 사위가 쉰네 살 처남의 손 위 휴대전화를 잡으려고 두 번 뛰었고⁠, 두 번 다 닿지 않았다⁠. 하청 사장 상에서 누가 웃음을 삼키다가 기침을 했다⁠.

“⁠형부⁠, 나 키 컸다고 엄마가 맨날 쓸데없다 캤는데⁠, 오늘 쓸 데가 있네⁠.⁠”

“⁠처남⁠.⁠”

“⁠형부⁠, 사월 십일 밤에 이 사진 보내면서 뭐라 캤는지 기억나요⁠? 처남 몫은 태구가 챙긴다⁠. 혼자만 봐라⁠. 나는 그 문자 받고 아버지한테 전화를 안 했어요⁠. 회사가 태구 거라니까 할 말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그때 7층에 누워서 기침하고 계셨는데⁠.⁠”

재묵의 목소리가 떨렸다⁠. 휴대전화를 든 팔은 떨리지 않았다⁠.

“⁠형부 때문에 나는 아버지 마지막 한 달을 날렸어요⁠.⁠”

범곤이 손을 내렸다⁠. 재묵은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안주머니의 약정서를 꺼냈다⁠. 「⁠상속분 양도 약정서⁠」 금 삼억 원정⁠. 재묵은 약정서를 이빨로 물고 한 손으로 찢으려다 잘 안 되자⁠, 휴대전화를 미송에게 넘기고 두 손으로 찢었다⁠. 두 번⁠, 네 번⁠. 종잇조각이 육개장 국물 자국 위에 떨어졌다⁠.

“⁠나 각서 안 쓴다⁠. 태구한테 그렇게 전해 주세요⁠.⁠”

미송이 휴대전화를 품에 안고 있다가 내게 내밀었다⁠.

“⁠언니⁠, 이거 지금 언니 폰으로 보내라⁠. 권 법무사님한테도⁠. 한 군데만 두면 안 된다⁠.⁠”

재묵이 사진을 나와 권 법무사에게 보냈다⁠. 내 휴대전화가 떨었다⁠. 「⁠사진 1장⁠」 범곤은 상 끝의 부의금 묶음을 집어 들었다⁠. 고무줄이 끊어져 봉투 몇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범곤은 이번에는 줍지 않고 식당을 나갔다⁠.

*

나는 사진에서 눈을 떼고 내 휴대전화의 통화 기록을 열었다⁠. 4월로 내려갔다⁠. 4월 10일 토요일 오전 일곱 시 십이 분⁠, 「⁠아버지 · 부재중⁠」 아버지 휴대전화 번호였지만⁠, 아버지는 오른손을 못 쓰게 된 뒤 전화를 직접 거는 일이 드물었다⁠. 하소옥이 걸어 바꿔 주거나 왼손 엄지로 단축 번호 하나를 오래 눌렀다⁠. 단축 번호 1번이 나였다고⁠, 하소옥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4월 10일 아침⁠, 나는 경주 고분 발굴장의 트렌치 바닥에 있었다⁠. 깊이 삼 미터⁠, 휴대전화는 트렌치 밖 배낭 속에 있었다⁠. 점심때 부재중 표시를 보고 저녁에 다시 걸었을 때 하소옥이 받았다⁠. 아버님이 주무신다고 했다⁠. 아침에 큰따님한테 뭘 물어보신다고 하셨는데 다시 주무신다고⁠. 나는 다음 주말에 가겠다고 했다⁠. 다음 주말에는 발굴장에 비가 와서 덮개를 치느라 못 갔다⁠.

4월 9일 밤에 병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4월 10일 아침 일곱 시 십이 분에 아버지가 왼손 엄지로 단축 번호 1번을 오래 눌렀다⁠. 나는 삼 미터 아래에서 천오백 년 전 흙을 긁고 있었다⁠.

부재중 표시 위에 엄지를 얹었다⁠. 화면이 체온에 데워졌다⁠. 다시 걸 수 없는 번호였다⁠.

*

하소옥은 휴게실 소파 끝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가 들어가자 눈을 떴다⁠. 나는 4월 9일 밤을 물었다⁠. 하소옥은 날짜를 듣자마자 약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어요⁠. 저녁 아홉 시에 태구 씨하고 사위분이 오셨어요⁠. 오늘은 우리가 지킬 테니 들어가 쉬시라고⁠. 석 달 만에 처음이었어요⁠, 태구 씨가 밤에 병실 지키겠다고 한 거⁠.⁠”

“⁠그래서 가셨어요⁠?⁠”

“⁠가라고 하시니까요⁠. 아버님이 저를 보시고 고개를 저으셨는데⁠, 저는 그게 미안하다는 뜻인 줄 알았어요⁠. 사흘 밤을 새운 뒤라⁠.⁠”

하소옥이 약통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갔더니 아버님이 저를 보자마자 휴대전화를 달라 하셨어요⁠. 큰따님한테 거셨는데 안 받으셨어요⁠. 그러고 나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오른손등에 볼펜 자국이 있었어요⁠. 파랗게⁠. 제가 물수건으로 닦아 드렸어요⁠.⁠”

“⁠오른손등에요⁠?⁠”

“⁠네⁠. 아버님은 오른손으로는 볼펜을 못 쥐시는데⁠.⁠”

하소옥은 볼펜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하소옥의 손가락이 약통 뚜껑의 「⁠아버님 저녁⁠」 글씨를 문질렀다⁠.

*

새벽 한 시 오십 분⁠, 미송이 상주 휴게실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 달력을 보고 있었다⁠. 병원 근무표 앱이었다⁠.

“⁠4월 9일⁠. 금요일이다⁠. 나는 그 주에 낮 근무였다⁠. 금요일 밤에 아버지 병실 야간 간호사가 누구였는지 볼게⁠.⁠”

미송이 화면을 밀었다⁠. 수간호사라 다른 병원 동기 단톡방에도 들어 있었고⁠, 낙강병원 7층 근무표를 아는 동기가 하나 있었다⁠. 미송은 문자를 쳤다⁠. 「⁠4/9 금 나이트 7병동 누구였노⁠? 급하다⁠」 답장은 삼 분 만에 왔다⁠.

「⁠동기⁠: 효서⁠. 오늘도 나이트다⁠. 일곱 시 인계⁠」 「⁠동기⁠: 근데 니 아버님 상중 아이가⁠? 근무표는 와 묻노⁠」 「⁠미송⁠: 묻지 마라⁠. 나중에 밥 살게⁠」 「⁠동기⁠: 장례식장 육개장 말고 한우로⁠」

미송은 한우 이모티콘 대신 소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동기가 「⁠소는 소지⁠」라고 답했고⁠, 미송은 휴대전화를 엎었다⁠.

“⁠오늘 밤에도 근무래⁠. 같은 병원⁠, 7층⁠.⁠”

“⁠여기서 복도 하나네⁠.⁠”

“⁠일곱 시에 인계하고 나오면 늦다⁠. 이사회가 여섯 시다⁠.⁠”

미송이 일어났다⁠. 혈압계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빈소에 와서 처음으로 혈압계를 몸에서 뗐다⁠.

“⁠내가 7층 올라가 볼게⁠. 휴게 시간에 잠깐이라도 내려오라고⁠. 근데 언니⁠.⁠”

“⁠응⁠.⁠”

“⁠태구가 4월 9일 밤에 아버지 병실에서 뭘 했는지⁠, 그거 듣고 나면 우리 넷이 다시는 한 상에 못 앉는다⁠.⁠”

“⁠알아⁠.⁠”

“⁠언니는 맨날 안다 카네⁠.⁠”

미송이 휴게실을 나갔다⁠. 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의 사진을 다시 열었다⁠. 병실 시트 위의 편지지⁠, 도장 없는 이름⁠, 2027년 4월 9일⁠. 사진 귀퉁이에 침대 난간이 찍혀 있었다⁠. 난간에 환자 이름표가 붙어 있었고⁠, 이름표의 글씨는 흐렸지만 끝 글자 하나가 읽혔다⁠. 「⁠술⁠」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태구였다⁠. 휴게실 문 앞에서 멈췄다가 들어오지 않고 지나갔다⁠. 재묵이 찢은 약정서 조각을 한 장 주워 손에 쥐고 있었다⁠. 조각에는 「⁠금 삼억 원정⁠」 가운데 「⁠억 원정⁠」만 남아 있었다⁠. 태구는 조각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비상계단으로 걸어갔다⁠. 계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 끝에서 한 번 울렸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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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솔아2026.11.01· 9화

    돋보기를 코끝에 걸어서 더 놀란 얼굴이 된 재묵 씨 때문에 긴장하다 웃었어요.

    • 노범우작가2026.11.01

      재묵 씨는 놀란 얼굴로 제일 중요한 걸 찾는 사람이에요. 사진첩 자동 저장이 이번 화의 열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