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17자)

결격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비상계단은 장례식장에서 유일하게 불이 반쯤 꺼진 곳이었다⁠. 초록색 비상구 표지등이 계단참을 물들였다⁠. 자정 오 분 전⁠, 범곤은 2층과 3층 사이 계단참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서 주운 부의금 봉투들을 고무줄로 다시 묶어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봉투 몇 장은 모서리가 구겨졌고⁠, 범곤은 구겨진 모서리를 엄지로 한 장씩 폈다⁠.

“⁠다 주웠어⁠. 하나도 안 빠졌어⁠.⁠”

“⁠알아요⁠. 당신은 봉투는 안 잃어버리잖아요⁠.⁠”

나는 범곤보다 두 칸 위에 앉았다⁠. 상복 치마가 계단 모서리에 걸려 자락을 끌어당겼다⁠. 범곤은 나를 올려다보지 않고 봉투만 폈다⁠.

“⁠장인어른이 맡기신 도장이야⁠. 은행 일에 쓰라고⁠. 찍을 권한이 있었어⁠.⁠”

“⁠유언장에 찍는 게 은행 일이에요⁠?⁠”

“⁠태구가 아버지가 쓰신 거라고 했어⁠. 도장만 빠졌다고⁠. 나는 도장만 찍어 줬어⁠.⁠”

“⁠언제요⁠?⁠”

“⁠사월⁠. 병실에서⁠. 장인어른도 계셨고⁠.⁠”

“⁠아버지가 보시는 앞에서 찍었어요⁠?⁠”

범곤의 엄지가 봉투 모서리 위에서 멈췄다⁠.

“⁠주무시고 계셨어⁠. 깨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깨시고 나서는 기침이 심하셔서⁠.⁠”

“⁠그럼 허락은 언제 받았어요⁠?⁠”

“⁠선희야⁠.⁠”

“⁠아까 제단 앞에서는 장인어른이 맡기신 도장이라고만 했어요⁠. 지금은 사월에 병실에서 허락을 받았다고 하고⁠, 방금은 주무시고 계셨대요⁠. 셋 중에 뭐가 맞아요⁠?⁠”

범곤이 봉투 묶음을 계단에 내려놓았다⁠. 고무줄이 탁 소리를 냈다⁠. 비상구 표지등 불빛에 범곤의 얼굴이 초록색이었다⁠. 서른두 해 동안 나는 범곤이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은행 창구에서 화를 내면 하루 실적이 떨어진다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땅만 파서 몰라⁠. 장인어른 회사 넘어가면 직원 여든 명이 길에 나앉아⁠. 하청 백사십 명은 넉 달 치를 영영 못 받아⁠. 은행은 이번 주 안에 담보 안 들어오면 대출 접는다고 했어⁠. 그 여자 유언장 하나 때문에⁠. 나는 도장 하나로 이백이십 명을 살리려고 한 거야⁠.⁠”

“⁠사억도 같이요⁠.⁠”

범곤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계단에서 일어났다⁠. 치마 자락이 계단 모서리에서 풀렸다⁠.

“⁠당신이 살리려고 한 사람들 이름⁠, 하나라도 알아요⁠? 컨테이너에서 발톱 깎던 아저씨 딸 기숙사비가 이번 주까지래요⁠.⁠”

범곤은 대답하지 않았다⁠. 봉투 묶음을 다시 무릎에 올리고⁠, 맨 위 봉투의 구겨진 모서리를 엄지로 폈다⁠. 펴진 모서리는 엄지를 떼자 도로 구부러졌고⁠, 범곤은 같은 모서리를 다시 폈다⁠.

*

새벽 열두 시 반⁠, 권 법무사가 돌아왔다⁠. 아버지 친구들은 밤샘을 하는 게 도리라고 했다⁠. 소주 냄새는 빠져 있었고 대신 박하사탕 냄새가 났다⁠. 식당 구석 상에 자리를 잡고 앉자⁠, 미송이 혈압계를 들고 다가갔다⁠. 권 법무사는 팔을 내주며 말했다⁠.

“⁠간호사 양반⁠, 일흔다섯 노인 혈압은 재 봐야 마음만 상한다⁠.⁠”

“⁠법무사님⁠, 백사십육에 팔십팔⁠. 좋으신데요⁠.⁠”

“⁠그럼 한 잔 더 해도 되겠네⁠.⁠”

“⁠안 됩니다⁠.⁠”

접객실 긴 의자에서 형틀 사장이 코를 골았다⁠. 재묵이 지나가다 형틀 사장 이마에 드립백 하나를 올려놓았다⁠. 「⁠콜롬비아 · 고소함 · 산미 낮음⁠」 형틀 사장은 깨지 않았고⁠, 드립백은 코 고는 숨에 맞춰 이마 위에서 들썩였다⁠. 미송이 이마 위 드립백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권 법무사 맞은편에 앉았다⁠. 법무사는 제단 앞에서 벌어진 일을 이미 들었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소문은 육개장보다 빨리 돈다고⁠.

“⁠법무사님⁠, 하나만 여쭤볼게요⁠. 가정해서요⁠.⁠”

“⁠가정은 공짜다⁠. 해 봐라⁠.⁠”

“⁠상속인 하나가 유언장을 꾸몄으면 어떻게 돼요⁠?⁠”

권 법무사가 박하사탕을 입안에서 굴렸다⁠. 딱 소리를 내며 깨물었다⁠.

“⁠민법에 상속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을 정해 놨다⁠. 부모를 해친 자식⁠, 속여서 유언을 하게 한 자식⁠, 그리고 유언장을 위조하거나 고치거나 찢거나 숨긴 자식⁠. 그런 자식은 처음부터 상속인이 아닌 걸로 친다⁠. 법이 정한 몫도 없고⁠, 유류분도 없다⁠. 한 푼도 없다⁠.⁠”

“⁠한 푼도요⁠.⁠”

“⁠거기다 형사 문제다⁠. 남의 이름으로 문서를 만들면 사문서 위조⁠, 그걸 은행이나 법원에 내밀면 위조 사문서 행사⁠. 둘 다 징역이 붙을 수 있는 죄다⁠. 도장을 몰래 찍어 준 사람도 같이 걸린다⁠. 상속인이 아니어도⁠.⁠”

미송이 혈압계를 접다가 손을 멈췄다⁠. 재묵이 드립백 탁자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럼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어떻게 가려요⁠? 법원에서⁠.⁠”

“⁠먼저 검인이다⁠. 유언장 가진 사람이 가정법원에 내면⁠, 판사가 상속인들 불러 놓고 종이 상태를 확인하고 조서를 쓴다⁠. 몇 장인지⁠, 무슨 종이인지⁠, 어디가 고쳐졌는지⁠, 도장이 어떤지⁠. 검인은 진짜다 가짜다를 정하는 게 아니고⁠, 그날 그 종이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법원이 사진 찍듯 남겨 두는 거다⁠. 나중에 누가 손을 못 대게⁠.⁠”

“⁠다투면요⁠?⁠”

“⁠그다음이 유언 무효 소송이고⁠, 거기서 필적 감정을 한다⁠. 법원이 감정인을 정하고⁠, 돌아가신 분이 비슷한 시기에 쓴 글씨를 대조 자료로 낸다⁠. 감정인은 획의 순서⁠, 누르는 힘⁠, 떨림⁠, 띄어 쓰는 버릇⁠, 받침 모양을 하나씩 맞대 본다⁠. 사람 글씨는 같은 글자를 열 번 써도 열 번 다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모양이 똑같은 글자가 여러 번 나오면 오히려 의심한다⁠. 다른 데서 베껴 그렸을 수 있으니까⁠.⁠”

권 법무사는 내 손을 보았다⁠. 확대경을 쥔 손이었다⁠.

“⁠잉크하고 종이도 본다⁠. 그 볼펜이 언제 나온 물건인지⁠, 그 종이가 언제 만든 물건인지⁠. 날짜보다 뒤에 나온 물건이 나오면 거기서 끝이다⁠. 병원 기록⁠, 요양 기록하고 날짜를 맞대 보고⁠, 그날 옆에 있던 사람 말을 듣는다⁠. 하나만 가지고는 잘 안 되고⁠, 여러 개가 한쪽으로 모이면 판사가 본다⁠.⁠”

‘⁠한쪽으로⁠’라는 말에서 권 법무사는 나를 보며 웃었다⁠. 이미 모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얼굴이었다⁠.

“⁠선희야⁠. 니가 지금 저고리에 품고 있는 거⁠, 발인 끝나면 바로 안동지원에 내라⁠. 둘 다⁠. 하나만 내고 하나 숨기면 숨긴 사람도 결격이다⁠.⁠”

“⁠알아요⁠.⁠”

“⁠그리고⁠.⁠”

권 법무사가 박하사탕 봉지를 접었다⁠.

“⁠판술이가 나한테 3월에 전화를 했다⁠. 공증하려면 뭐가 필요하냐꼬⁠. 손을 잘 못 쓰니 공증인 앞에서 말로 하고 싶다꼬⁠. 내가 증인 둘 데리고 가라 캤다⁠. 그 뒤로 소식이 없어서⁠, 그냥 마음이 바뀌었나 했다⁠.⁠”

*

열두 시 오십 분⁠, 엘리베이터에서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내렸다⁠. 컨테이너에서 발톱을 깎던 쉰 줄의 노동자였다⁠. 검은 양복이 없어서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쳤다고 했다⁠. 향을 꽂고 절을 두 번 하고⁠, 재묵을 찾아 커피 잘 마셨다고 고개를 숙였다⁠. 재묵이 드립백 다섯 개를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노동자는 가기 전에 나를 불렀다⁠.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큰따님⁠, 이거는 말씀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2월에 회장님이 컨테이너에 오셨어요⁠. 휠체어 타고⁠, 아주머니가 밀고요⁠.⁠”

“⁠소옥 씨요⁠?⁠”

“⁠네⁠. 회장님이 컨테이너 안을 한참 둘러보시더니⁠, 라면 상자 보시고 왼손으로 제 어깨를 치셨어요⁠. 풍산 과수원에는 공장 못 짓게 할 거라고⁠. 그래도 너거 돈은 내가 다른 데서 마련한다고⁠. 옥동 건물 팔아서라도 준다고 하셨어요⁠.⁠”

“⁠옥동 건물이요⁠?⁠”

“⁠회사 옛날 사옥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고 나서 석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노동자는 점퍼 주머니의 드립백을 손으로 한 번 눌러 보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혔다⁠. 아버지는 풍산을 막으면서 하청의 빚을 다른 데서 갚으려 했다⁠. 태구는 풍산을 열어 같은 빚을 갚으려 했다⁠. 같은 빚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반대 방향으로 땅을 팠다⁠.

*

새벽 한 시⁠, 상주 휴게실 문을 닫았다⁠. 태구는 접이식 침대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를 풀어 무릎에 감고 있었다⁠. 침대 옆 탁자에 은행 지점장이 보낸 이사회 자료가 놓여 있었다⁠. 「⁠풍산 일반산업단지 사업 시행 관련 담보 제공 승인의 건⁠」

나는 침대 맞은편 방석에 앉았다⁠. 둘 다 오래 말이 없었다⁠.

“⁠권 법무사 얘기 들었제⁠?⁠”

태구가 먼저 말했다⁠.

“⁠결격⁠.⁠”

“⁠응⁠.⁠”

“⁠누나가 그거 법원에 내면 나는 상속인이 아니다⁠. 회사 주식⁠, 내가 십 년 동안 피 말려 가며 키운 거⁠, 내 몫은 하나도 없다⁠. 거기다 형사⁠.⁠”

“⁠알아⁠.⁠”

“⁠아는 사람이 왜 이래⁠?⁠”

태구가 넥타이를 손에서 풀었다⁠. 넥타이가 침대 밑으로 미끄러졌다⁠. 태구는 줍지 않았다⁠.

“⁠누나⁠, 내 얘기 한 번만 들어라⁠. 2017년에 아버지가 처음 쓰러질 뻔했을 때부터 내가 회사를 봤다⁠. 아버지는 회장실에 앉아 계셨고⁠, 현장은 내가 뛰었다⁠. 은행 가서 무릎 꿇은 것도 나고⁠, 사고 났을 때 유족 집 찾아가서 엎드린 것도 나다⁠. 2023년 9월 2일 기념식 때 아버지가 마이크 잡고 회사는 태구가 끌고 간다 캤다⁠. 여든 명이 들었다⁠. 녹화한 영상도 있다⁠.⁠”

“⁠그건 나도 믿어⁠.⁠”

“⁠그런데 아버지가 저 여자랑 풍산 들어가시고 나서 바뀌셨다⁠. 2월에 은행 담보 서류를 들고 갔더니 안 찍으신다 카더라⁠. 풍산은 안 된다꼬⁠. 이유도 안 말하시고⁠. 은행은 담보 없으면 산단 대출 못 준다 카고⁠, 하청은 넉 달째 못 받고⁠, 시청은 고시 날짜 박아 놨고⁠. 아버지 혼자 고집에 이백 명이 매달렸다⁠.⁠”

“⁠그래서 니가 썼어⁠?⁠”

태구가 나를 보았다⁠. 아버지를 닮은 눈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입으로 하신 말을 종이에 옮겼을 뿐이다⁠. 기념식에서 하신 말⁠. 회사는 태구가 끌고 간다⁠. 거기 한 글자라도 거짓말이 있나⁠?⁠”

“⁠날짜가 거짓말이야⁠. 도장이 거짓말이고⁠. 아버지가 그 종이에 손 하나 안 댔다는 게 거짓말이야⁠.⁠”

“⁠아버지 말은 진짜다⁠.⁠”

“⁠아버지 말이 진짜면⁠, 아버지 손으로 쓴 종이도 진짜여야지⁠.⁠”

태구가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들썩였다⁠.

“⁠누나는 늘 그렇다⁠. 흙이 맞으면 사람은 안 본다⁠. 누나⁠, 그 종이 법원에 내면 나는 한 푼도 없다⁠. 회사는 대출 날아가서 끝이다⁠. 하청은 레미콘 끌고 나온다⁠. 미송이 채헌이 마지막 학기 등록금도 내가 못 낸다⁠. 그래도 낼래⁠?⁠”

휴게실 형광등이 지지거렸다⁠. 나는 저고리 위로 두 봉투를 눌렀다⁠. 한 장은 동생을 살리고⁠, 한 장은 동생을 지운다⁠. 땅을 팔 때는 나온 것을 기록하면 끝이었다⁠. 유물은 누구의 목숨도 쥐고 있지 않았다⁠. 경주 고분에서 금귀걸이 한 쌍이 나왔을 때도 나는 흙만 털면 됐다⁠. 귀걸이 주인은 천오백 년 전에 죽었고⁠, 귀걸이 때문에 굶을 사람은 없었다⁠.

“⁠태구야⁠.⁠”

“⁠말해라⁠.⁠”

“⁠여섯 시까지 니 손으로 내려놔라⁠.⁠”

“⁠뭐를⁠?⁠”

“⁠이사회 안건⁠. 그리고 이 종이⁠. 니가 니 손으로 거두면⁠, 내가 내미는 것보다는 낫다⁠. 법원에 가서도⁠, 엄마 앞에서도⁠, 하청 앞에서도⁠.⁠”

“⁠내가 거두면 하청은⁠? 은행은⁠?⁠”

“⁠그건 같이 찾자⁠.⁠”

“⁠같이⁠.⁠”

태구가 ‘⁠같이⁠’를 따라 하고 다시 웃었다⁠. 침대 밑으로 손을 뻗어 넥타이를 주웠다⁠. 넥타이를 손에 감으며 일어났다⁠.

“⁠누나⁠, 여섯 시에 보자⁠. 누나가 다 파 올 때까지 나는 안 내려놓는다⁠.⁠”

태구가 휴게실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형틀 사장의 코 고는 소리가 들어왔고⁠, 드립백 봉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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