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530자)

수결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직방의 베틀 마흔 대가 한꺼번에 돌면 바닥이 떨렸다⁠. 채향은 바디를 당길 때마다 발바닥으로 바닥의 떨림을 받았다⁠. 북이 날실 사이를 지나가고⁠, 바디가 씨실을 내리치고⁠, 발판이 바뀌었다⁠. 손바닥에 실이 쓸려 붉은 줄이 생겨도 손을 멈추면 감독이 대나무 자로 베틀 기둥을 두드렸다⁠.

“⁠궁에서 내려온 무늬다⁠. 구름 속에 학이 날아야 한다⁠. 학 다리 하나 틀리면 한 필을 통째로 버린다⁠.⁠”

감독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말을 했다⁠. 비단은 북쪽으로 올라가 황제가 신선에게 올리는 제사의 제단을 덮는다고 했다⁠. 채향은 제단을 본 적이 없었다⁠. 채향이 아는 것은 학 다리 하나에 손바닥 실 자국이 몇 줄 늘어나는지였다⁠.

옆 베틀의 직녀가 북을 던지다 말고 속삭였다⁠.

“⁠채향이⁠, 너희 서당에 포졸이 왔다며⁠? 소석이가 금서를 썼다며⁠?⁠”

“⁠누가 그래⁠?⁠”

“⁠나루 사공이⁠. 사공은 너희 동네 곽 노파한테 들었대⁠.⁠”

채향은 북을 놓쳤다⁠. 북이 날실 사이에서 멈췄다⁠. 감독의 대나무 자가 기둥을 두 번 두드렸다⁠.

*

채향은 해가 진 뒤에야 나룻배에서 내렸다⁠. 비단 징발이 곱절로 늘어 직방의 베틀은 등불을 켜고도 돌았다⁠. 마을 어귀에서 우물가 할멈들에게 붙잡혔을 때 채향은 이미 모든 것을 들은 얼굴이었다⁠. 소주 땅에서 소문은 나룻배보다 빨랐다⁠.

“⁠아버님⁠.⁠”

채향이 부엌 문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매를 걷은 팔뚝에 실에 쓸린 붉은 줄이 여러 개 있었다⁠.

“⁠엿 주셨죠⁠?⁠”

“⁠그게 먼저냐⁠?⁠”

“⁠그것부터 확인해야 다음 얘기를 하죠⁠. 주셨죠⁠?⁠”

“⁠한 조각⁠.⁠”

“⁠한 조각이 두 조각인 거 저 다 알아요⁠.⁠”

채향은 마루에 털썩 앉아 이마를 짚었다⁠. 승로가 뒤늦게 들어와 손을 씻었다⁠. 쪽물 든 손이 물속에서 더 파랬다⁠.

“⁠가서 엎드리면 됩니다⁠. 현령 나리 앞에서 우리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고⁠, 훈장이 시켜서 썼다고 하면 그만이에요⁠.⁠”

“⁠그럼 훈장님은요⁠?⁠”

채향이 남편을 보았다⁠. 승로가 입을 다물었다⁠. 채향은 소석이 옮겨 쓴 시를 할멈들에게 다시 들었다고 했다⁠. 어미 손바닥엔 실 자국만 남아⁠. 채향은 자기 손바닥을 펴서 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런 시를 왜 애들한테 가르쳐요⁠? 가르칠 거면 남몰래 가르치든가⁠. 아니⁠, 남몰래도 안 되지⁠. 아⁠, 몰라요⁠.⁠”

채향은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붓으로 몇 줄을 적어 철운의 앞치마 주머니에 꽂았다⁠. 철운은 팔을 뻗어 읽었다⁠.

「⁠하나⁠, 관아에서 고개 숙이기⁠. 둘⁠, 말대꾸 금지⁠. 셋⁠, 흥정 금지⁠. 넷⁠, 엿 금지⁠.⁠」

“⁠흥정은 오늘 이겼다⁠.⁠”

“⁠그러니까 금지예요⁠. 이긴 사람은 다음에 꼭 져요⁠.⁠”

*

관아 마당은 아침부터 장터 같았다⁠. 학동 열한 명과 보호자들이 섬돌 아래 줄지어 앉아 있었다⁠. 보호자 가운데 일곱이 할머니였고⁠, 셋이 할아버지였고⁠, 아이 부모가 직접 온 집은 하나뿐이었다⁠. 부모들은 직방과 염방에 매여 하루를 빠질 수 없었다⁠. 곽 노파는 장아찌 단지를 들고 와서 포졸들에게 한 젓가락씩 돌렸다⁠.

“⁠짜게 먹어야 기운이 나⁠. 우리 손주 잘 봐 줘⁠.⁠”

“⁠노파⁠, 그건 뇌물이오⁠.⁠”

“⁠장아찌가 무슨 뇌물이야⁠? 은자를 줘야 뇌물이지⁠.⁠”

할멈들 사이에서 누구 손주가 천자문을 어디까지 뗐는지 견주는 소리가 났다⁠. 철운은 섬돌 끝에 앉아 소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덮고 있었다⁠. 소석은 관아 처마 끝의 용머리 기와를 올려다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구경하는 얼굴이었다⁠.

옆에 앉은 할멈 하나가 철운에게 몸을 기울였다⁠.

“⁠영감⁠, 소석이는 천자문 어디까지 뗐수⁠?⁠”

“⁠다 뗐소⁠.⁠”

“⁠에이⁠, 여덟 살이 어떻게 다 떼⁠?⁠”

“⁠두부 누르는 동안 옆에서 외웠소⁠. 두부 한 판에 여덟 줄씩⁠.⁠”

“⁠그럼 우리 손주도 영감네 가서 두부나 눌러야겠네⁠.⁠”

“⁠콩부터 불리고 오라 하시오⁠. 콩은 밤새 불려야 하오⁠.⁠”

할멈이 손주 등짝을 때리며 들었느냐고 했다⁠. 손주는 장아찌를 씹다가 사레가 들렸다⁠. 철운은 웃으면서도 대청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서리가 붓을 적시는 소리⁠, 현령이 애체를 내렸다 올리는 소리⁠, 포졸이 방망이를 바꿔 쥐는 소리가 하나하나 들렸다⁠. 귀가 서른 해 전처럼 밝아지고 있었다⁠. 철운은 밝아지는 귀가 반갑지 않았다⁠.

대청에서 도각이 애체를 눈으로 내렸다⁠. 옆에 서리 하나가 붓을 들고 앉아 있었다⁠.

“⁠독고소석⁠.⁠”

철운이 손주를 데리고 대청 앞으로 나갔다⁠. 도각은 아이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물었다⁠. 소석은 천자문과 습자와 시 한 수를 배웠다고 했다⁠.

“⁠그 시를 훈장이 뭐라고 하며 가르쳤느냐⁠?⁠”

“⁠너희 엄마 손 이야기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크게 쓰라고 하셨어요⁠.⁠”

서리의 붓이 멈췄다⁠. 도각이 헛기침을 했다⁠. 마당의 할멈들이 숨을 죽였다⁠.

*

도각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짧게 묻고 내려보냈다⁠. 해가 대청 기둥 그림자를 한 뼘쯤 옮겼을 때⁠, 서리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보호자들은 이 진술 아래에 수결하시오⁠. 수결하면 아이들은 오늘 바로 집에 가오⁠.⁠”

서리가 진술을 소리 내어 읽었다⁠.

「⁠훈장 육계담은 요사한 글 『⁠기저음⁠』을 학동들에게 퍼뜨렸다⁠. 학동들은 뜻을 모르고 따라 썼다⁠.⁠」

할멈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곽 노파가 먼저 일어나 붓을 받아 들고⁠, 글을 몰라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다른 할멈들도 줄줄이 일어났다⁠. 동그라미⁠, 가위표⁠, 손도장⁠. 아홉 번째 보호자까지 수결을 마치는 데 차 한 잔 마실 동안도 들지 않았다⁠. 아이 부모 하나가 진술 아래에 이름을 쓰다가 철운을 돌아보았다⁠.

철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고 영감⁠, 뭐 하는 거요⁠? 빨리 해⁠.⁠”

“⁠이걸 하면 훈장의 목이 날아가오⁠.⁠”

곽 노파가 철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영감⁠, 손주는⁠? 손주 생각을 해야지⁠.⁠”

“⁠하고 있소⁠.⁠”

포졸 둘 사이에 꿇어앉아 있던 육계담이 고개를 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어른⁠, 하십시오⁠. 제가 한 일입니다⁠. 소석이를 데리고 가십시오⁠.⁠”

“⁠훈장님⁠, 퍼뜨린다는 게 무슨 뜻이오⁠?⁠”

육계담이 눈을 깜빡였다⁠. 글자 하나에 풀이를 셋씩 붙이던 훈장이 처음으로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다⁠.

“⁠여러 사람에게 널리 알려서 마음을 흐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아이 열한 명에게 시 한 수를 불러 준 게 그런 거요⁠?⁠”

*

철운은 대청 섬돌 아래까지 걸어가 도각을 올려다보았다⁠.

“⁠나리⁠, 대명률을 아시지요⁠. 요사한 글을 지어 퍼뜨려 사람을 홀린 자는 목을 베고⁠, 지니기만 하고 관에 내지 않은 자는 곤장을 치고 귀양을 보낸다고 들었소⁠.⁠”

“⁠두부 장수가 대명률을 어떻게 아시오⁠?⁠”

“⁠두부를 사 가는 서리가 많소⁠. 서리들은 두부를 먹으며 율문을 외우지요⁠.⁠”

마당 끝에서 서리 하나가 얼굴을 붉혔다⁠. 도각이 애체를 이마로 올리고 철운을 오래 보았다⁠.

“⁠그래서 무얼 원하시오⁠?⁠”

“⁠한 글자만 바꾸시오⁠. 퍼뜨렸다가 아니라⁠, 글씨 연습으로 불러 주었다⁠. 학동들은 받아 썼다⁠.⁠”

“⁠그러면 아이들이 시를 외운 것은 그대로요⁠.⁠”

“⁠아이들은 그 시를 외워서 누구를 홀리겠소⁠? 제 어미를 홀리겠소⁠?⁠”

도각이 한참 말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서리에게 진술을 다시 쓰게 했다⁠. 철운은 서리가 붓을 놀리는 동안 도각의 얼굴을 보았다⁠. 이 현령은 아이들을 놓아줄 구실을 찾고 있었다⁠. 구실을 철운이 주었을 뿐이었다⁠.

새 진술이 마당으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철운이 붓을 받았다⁠. 철운은 글을 쓸 줄 알았지만 쓰지 않았다⁠. 붓끝을 종이에 대고 옆으로 한 번 그었다⁠. 짧고 곧은 한 획이었다⁠. 붓이 종이를 떠날 때 먹이 튀지 않았다⁠.

도각이 한 획을 애체로 내려다보았다⁠.

“⁠곤장 백 대와 귀양 삼 년이오⁠. 훈장의 목은 붙어 있소⁠.⁠”

육계담이 꿇어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마당을 빠져나갔다⁠. 소석이 훈장을 돌아보며 엄지를 들었다⁠. 육계담도 묶인 손으로 엄지를 들었다⁠.

*

해 질 녘이었다⁠. 관아 대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말 탄 사내 여섯이 대문 앞에 멈췄다⁠. 붉은 바탕에 물고기 무늬를 놓은 옷을 입고⁠, 허리에 휘어진 칼을 차고 있었다⁠. 북쪽 사람들이 비어복이라 부르는 금의위의 옷이었다⁠. 금의위는 황제가 직접 부리는 친위 관원들이었다⁠. 백성을 잡고 묻고 가두는 데 현령의 허락이 필요 없었다⁠.

맨 앞의 사내가 말에서 내렸다⁠. 서른 중반쯤⁠, 키가 크고 턱이 각졌다⁠.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각이 허둥지둥 대청을 내려와 허리를 굽혔다⁠.

“⁠금의위 천호 위지현곡이다⁠. 『⁠기저음⁠』 사건은 이제 금의위가 맡는다⁠.⁠”

현곡은 서리가 들고 있던 진술을 받아 읽었다⁠. 아래에 그어진 한 획을 보더니 종이를 두 손으로 찢었다⁠.

“⁠아이들은 증인이다⁠. 증인은 금의위가 데려간다⁠. 내일 새벽 버들나루에서 배에 실어 남경으로 보내라⁠.⁠”

“⁠천호 나리⁠, 아이들은 이미 진술을 마치고 집에⁠…⁠…⁠.⁠”

“⁠현령⁠. 이 고을에서 누가 이 시집을 찍었고 누가 돈을 댔는지⁠, 훈장 혼자서는 말하지 않는다⁠. 아이가 곁에 있으면 말한다⁠.⁠”

도각의 얼굴이 하얘졌다⁠.

“⁠아이들을 훈장 입을 여는 데 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증인을 쓰는 것이다⁠.⁠”

철운은 대문 기둥 옆에 소석과 함께 서 있었다⁠. 아이들이 먼저 나가고⁠, 철운은 손주 신발 끈을 다시 매 주느라 늦었다⁠. 현곡이 대문을 나서다 두부 장수 앞치마를 두른 늙은이와 마주쳤다⁠.

“⁠비키시오⁠.⁠”

“⁠아이들은 내 두부를 먹고 자랐소⁠. 내일 배에 태우신다면 나도 태우시오⁠.⁠”

현곡이 철운을 위아래로 훑었다⁠. 흰 앞치마와 걷은 소매와 쪽빛 무명 옷⁠. 시선이 소석에게 잠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늙은이⁠, 두부 장수는 두부나 파시오⁠. 강남 사람들은 나랏일에 너무 말이 많다⁠.⁠”

현곡이 지나갔다⁠. 비어복 자락이 철운의 앞치마를 스쳤다⁠. 철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석이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손주 손이 땀에 젖어 있었다⁠.

*

도각은 관아 안채 서재에 혼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현곡이 찢은 진술 두 조각이 놓여 있었다⁠. 도각은 두 조각을 맞대어 붙여 놓고 애체를 눈에 댔다⁠. 맨 아래의 한 획이 찢긴 자리에서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붓을 대고 뗀 자리가 어디인지 모를 만큼 곧은 획이었다⁠.

위가 쓰렸다⁠. 도각은 소매에서 볶은 쌀 한 줌을 꺼내 씹었다⁠. 의원은 쌀을 씹으면 위가 덜 쓰리다고 했고⁠, 효험은 반쯤 있었다⁠.

“⁠두부 장수가 쓴 획이 아니야⁠.⁠”

도각은 혼잣말을 하고 서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루 한 귀퉁이에 널빤지 하나가 다른 널빤지보다 조금 들떠 있었다⁠. 도각은 손을 뻗어 널빤지 끝에 손가락을 걸었다가 거두었다⁠. 문밖에서 금의위 하나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났다⁠. 북쪽 사람들은 발소리가 무거웠다⁠. 도각은 등잔을 끄고 어둠 속에 오래 앉아 있었다⁠.

*

자정이 넘었다⁠. 채향과 승로는 소석을 가운데 눕히고 잠들었다⁠. 채향은 자면서도 소석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철운은 부엌으로 갔다⁠. 등잔을 켜지 않았다⁠. 맷돌은 부엌 구석 넓적한 받침돌 위에 앉아 있었다⁠. 서른 해 전 이 집을 사던 날⁠, 철운은 받침돌 밑을 혼자 팠다⁠. 그리고 다시 덮었다⁠. 이튿날부터 맷돌은 하루도 쉬지 않고 돌았다⁠.

철운은 받침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뚝 소리를 냈다⁠. 오른손바닥을 받침돌에 폈다⁠. 돌은 차가웠다⁠. 손바닥 한가운데 맷돌 굳은살과 손가락 뿌리 밑의 다른 굳은살이 돌의 결을 하나씩 읽었다⁠. 엄지 아래 동그란 흉터 자리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새벽까지 두 시진이 남아 있었다⁠. 철운은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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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오2026.11.01· 2화

    베틀 마흔 대가 돌 때 바닥이 떨린다는 묘사로 시작하는 무협이라니 신선해요.

    • 노범우작가2026.11.01

      검왕 이야기지만 손주가 사는 마을은 베 짜는 마을이에요. 칼보다 베틀 소리가 먼저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