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33자)

두부 판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닭이 울기 전에 맷돌이 먼저 돌았다⁠. 철운은 오른손바닥을 맷돌 손잡이에 얹고 몸으로 밀었다⁠. 서른 해를 같은 자리에서 쥔 나무 손잡이는 손바닥 모양으로 패어 있어서⁠, 손을 얹으면 나무가 먼저 손을 알아보았다⁠. 불린 콩이 위짝 구멍으로 한 줌씩 들어가 갈리는 소리가 부엌 바닥을 타고 발바닥까지 올라왔다⁠. 흰 콩물이 아래짝 홈을 따라 돌다가 양동이로 떨어졌다⁠.

솥에 콩물을 붓고 불을 올린 다음⁠, 철운은 손바닥을 솥 위에 펴서 김을 쬐었다⁠. 손바닥 한가운데가 따끔해지면 끓기 직전이었다⁠. 막대로 저으며 거품을 걷고⁠, 간수를 세 번에 나눠 부었다⁠. 콩물이 몽글몽글 엉기기 시작하면 손을 멈춰야 했다⁠. 젓는 손이 한 번 더 가면 두부가 거칠어진다⁠.

“⁠아버님⁠, 저 나가요⁠.⁠”

며느리 채향이 부엌 문턱에 서서 머리를 매만졌다⁠. 성안 직방에 가려면 첫 나룻배를 타야 했다⁠. 채향은 소매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철운의 앞치마 주머니에 꽂았다⁠.

“⁠오늘 것이에요⁠. 엿 주지 마시고요⁠. 소석이 이 썩어요⁠.⁠”

“⁠엿은 내가 먹지⁠.⁠”

“⁠아버님 이는 이미 썩으셨잖아요⁠.⁠”

아들 승로가 뒤따라 나오며 하품을 했다⁠. 손톱 밑까지 쪽물이 든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승로는 염방에서 비단 실에 쪽물을 들였다⁠. 올봄에는 궁에서 올리는 도교 제사에 바칠 비단이 늘어서 해 뜨기 전부터 쪽물 독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승로는 아버지에게 고개만 꾸벅하고 나갔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침마다 고개 한 번으로 인사를 끝냈다⁠.

철운은 종이를 펴서 팔을 쭉 뻗었다⁠. 글자가 팔 길이만큼 멀어져야 겨우 읽혔다⁠.

「⁠하나⁠, 엿 금지⁠. 둘⁠, 서당 늦지 않게⁠. 셋⁠, 돌아오면 낮잠⁠. 넷⁠, 엿 금지⁠.⁠」

엿 금지가 두 번이었다⁠. 철운은 종이를 다시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찬장 위 단지에서 엿 한 조각을 꺼내 소매에 넣었다⁠.

*

소석은 할아버지의 왼쪽 어깨에 얹힌 두부 판 옆에서 걸었다⁠. 두부 판에는 갓 누른 두부 여섯 모가 젖은 베에 싸여 있었다⁠. 서당 가는 길에 세 집에 넣어 주고⁠, 남는 것은 서당 앞에서 팔았다⁠.

“⁠할아버지⁠, 천하제일검은 칼을 한 번만 휘둘렀대요⁠.⁠”

“⁠누가 그러더냐⁠?⁠”

“⁠나루 이야기꾼이요⁠. 칼을 한 번 휘두르면 산이 둘로 갈라졌대요⁠.⁠”

“⁠산은 안 갈라졌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아요⁠?⁠”

철운은 대답 대신 소매에서 엿을 꺼내 손주 입에 넣었다⁠. 소석은 엿을 볼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엿을 받으면 묻던 것을 잊는 나이였다⁠. 손주 목에 걸린 은자물쇠가 걸음마다 가슴팍에서 달랑거렸다⁠. 아이 목숨이 길라고 거는 은붙이였다⁠. 승로가 아기 때 하던 것을 소석이 물려받았다⁠.

버드나무 사이로 해가 들어와 운하 물 위에 길게 누웠다⁠. 물가에는 벌써 빨래하는 할멈들이 앉아 있었다⁠. 우물가와 물가 할멈들의 입은 버들나루에서 가장 빨랐다⁠. 누구네 며느리가 직방에서 은자를 얼마 받았는지⁠, 누구네 손주가 서당에서 회초리를 몇 대 맞았는지⁠, 해가 지기 전에 온 마을이 알았다⁠.

“⁠독고 영감⁠, 오늘 두부 단단해⁠?⁠”

장아찌 장수 곽 노파가 빨랫방망이를 들어 보였다⁠.

“⁠어제보다 단단하오⁠.⁠”

“⁠어제도 그 말 했어⁠.⁠”

“⁠어제도 그제보다 단단했소⁠.⁠”

할멈들이 웃었다⁠. 소석도 따라 웃다가 엿을 삼킬 뻔했다⁠.

*

두부 세 모 가운데 첫 모는 이장 집에 들어갔다⁠. 이장은 마루에 앉아 성안에서 받아 온 방문 베낀 종이를 팔 길이만큼 떼어 놓고 읽고 있었다⁠. 이장도 눈이 철운만큼 멀었다⁠.

“⁠독고 영감⁠, 올해 비단 징발이 또 늘었소⁠. 궁에서 신선께 올리는 제사가 한 해에 몇 번인지 아오⁠? 제사마다 비단이 들어가오⁠. 직방마다 석 달 안에 비단을 곱절로 바치라는 거요⁠.⁠”

“⁠며느리가 요즘 밤에 들어오는 까닭이 그거였군⁠.⁠”

“⁠그뿐이 아니오⁠. 남경에서 금의위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있소⁠. 황제의 귀와 칼이라는 금의위 말이오⁠. 바다에서는 왜구가 고을을 친다 하고⁠, 위에서는 금의위가 내려온다 하고⁠, 우리는 가운데서 두부나 먹어야지⁠.⁠”

이장이 두부를 받아 들고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았다⁠. 철운은 남의 손가락이 자기 두부를 누르는 것이 늘 싫었다⁠. 두부는 손바닥으로 받쳐 들고 눈으로 보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자국이 남는다⁠. 철운은 말하지 않았다⁠. 서른 해 동안 입을 닫아 온 일이 두부 말고도 많았다⁠.

소석이 이장 집 개를 보고 뛰어가다가 할아버지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철운의 손이 먼저 나갔고⁠, 소석은 왜 잡혔는지도 모르고 공중에서 발을 버둥거렸다⁠. 이장이 혀를 찼다⁠.

“⁠영감 손은 늙지도 않소⁠.⁠”

“⁠두부를 누르면 손이 안 늙소⁠. 이장도 해 보시오⁠.⁠”

“⁠나는 허리가 먼저 늙었소⁠.⁠”

*

서당 앞 마당이 시끄러웠다⁠. 붉은 띠를 맨 포졸 여남은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기와집 대문을 막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 훈장 육계담이 포승에 묶여 꿇어앉아 있었다⁠. 갓이 비뚤어져 있었고⁠, 한쪽 신이 벗겨져 있었다⁠. 서당 담벼락에는 새 방문이 붙어 있었다⁠.

「⁠조정의 명⁠. 요사한 글 『⁠기저음⁠』을 짓거나 지니거나 가르치는 자는 대명률에 따라 엄히 다스린다⁠.⁠」

『⁠기저음⁠』은 베틀 소리를 노래한 시집이었다⁠. 철운은 글을 잘 몰랐지만 이름은 들었다⁠. 성안 문인들이 몰래 돌려 읽는다는 시집이었다⁠.

대청 앞에 관복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키가 작고 배가 조금 나왔고⁠, 이마에 둥근 알 두 개를 끼운 애체를 올려 쓰고 있었다⁠. 눈앞에 대고 글을 크게 보는 유리알이었다⁠. 소주 관아 현령 사마도각이었다⁠. 철운은 도각을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세금 방을 붙일 때였고⁠, 한 번은 두부를 사 갈 때였다⁠. 두부를 사 갈 때는 값을 깎았다⁠.

“⁠이 서당은 오늘부로 닫는다⁠. 학동들은 보호자와 함께 관아로 간다⁠. 무엇을 배웠는지 하나하나 묻겠다⁠.⁠”

학동들이 하나둘 도착하며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붙잡고 뒷걸음질 쳤다⁠. 소석이 철운의 앞치마 자락을 쥐었다⁠.

철운은 두부 판을 어깨에서 내렸다⁠. 그리고 두부 판을 대문 앞에 가로로 놓고 판 위에 걸터앉았다⁠.

“⁠나리⁠, 두부 한 모 드시고 가시지요⁠.⁠”

도각이 애체를 눈으로 내려 철운을 보았다⁠.

“⁠비키시오⁠.⁠”

“⁠아이들은 오늘 아침을 못 먹었소⁠. 서당에서 먹이는 죽을 먹으러 왔으니까요⁠. 관아에 데려가시려면 두부라도 먹여서 데려가시오⁠.⁠”

“⁠관아에서 먹이겠소⁠.⁠”

“⁠관아 밥은 내가 아오⁠. 콩이 덜 불었소⁠.⁠”

포졸 하나가 킥 웃었다가 도각이 돌아보자 입을 닫았다⁠. 곽 노파가 어느새 따라와 담 밑에서 소리쳤다⁠.

“⁠나리⁠, 우리 손주는 천자문도 아직 못 뗐수⁠! 요사한 글을 무슨 수로 배워⁠?⁠”

“⁠맞아요⁠, 우리 애는 하늘 천 땅 지에서 석 달째예요⁠!⁠”

할멈들이 담 밑에 모여 웅성거렸다⁠. 도각의 이마에 땀이 났다⁠. 도각은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다가 애체를 떨어뜨렸고⁠, 포졸 둘이 엎드려 애체를 찾았다⁠.

*

“⁠두부 장수⁠.⁠”

도각이 애체를 다시 이마에 올리고 대문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목소리가 낮았다⁠.

“⁠내가 이 아이들을 미워서 데려가는 줄 아시오⁠? 남경에서 공문이 왔소⁠. 누가 이 서당을 밀고했소⁠. 이 서당에서 『⁠기저음⁠』을 가르친다고⁠. 밀고가 남경까지 간 다음이오⁠. 내가 여기서 눈을 감으면 다음 달 이 자리에 내 목이 있소⁠. 내 목만 있으면 다행이지⁠. 내 뒤로 오는 현령은 이 마을 장정을 다 묶어 갈 거요⁠.⁠”

“⁠그러니 아이들을 묶어 가시겠다⁠.⁠”

“⁠묶지 않소⁠. 데려가서 묻겠다는 거요⁠. 훈장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아이들 입에서 나온 말이 훈장 혼자 한 일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그날로 돌아가오⁠.⁠”

“⁠아이들 입으로 훈장을 베라는 말씀이오⁠.⁠”

도각이 입술을 깨물었다⁠. 철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마당 한가운데에서 육계담이 고개를 들었다⁠.

“⁠독고 어른⁠, 저 때문에 아이들이 고생입니다⁠. 저를 데려가시라 하세요⁠.⁠”

“⁠훈장님은 가만히 계시오⁠. 지금 흥정하는 중이오⁠.⁠”

포졸 하나가 참지 못하고 방망이를 들어 철운을 밀어내려 했다⁠. 철운은 두부 판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방망이 끝이 어깨에 닿기 전에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받았다⁠. 탁⁠, 소리가 작았다⁠. 방망이가 손바닥에 붙은 것처럼 멈췄다⁠. 포졸이 힘을 주어 당겼지만 방망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철운이 손을 펴자 포졸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엉덩이 밑에 떨어져 있던 두부 한 모가 짓뭉개졌다⁠.

“⁠그건 돈 내시오⁠.⁠”

할멈들이 손뼉을 쳤다⁠. 도각은 웃지 않았다⁠. 애체 너머로 철운의 손을 오래 보았다⁠.

*

해가 서당 기와 처마를 넘을 무렵⁠, 도각은 마침내 한 걸음 물러났다⁠. 아이들은 오늘은 집으로 간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보호자가 아이를 데리고 관아로 온다⁠. 훈장은 지금 데려간다⁠. 서당 문은 봉한다⁠. 포졸들이 대문에 종이를 엇갈려 붙이고⁠, 아이들이 쓰던 습자지 뭉치를 상자에 쓸어 담았다⁠.

곽 노파가 철운의 옆구리를 찔렀다⁠.

“⁠영감⁠, 두부 장수가 현령이랑 흥정을 해서 이겼네⁠. 내일 우물가에서 영감 얘기만 하겠수⁠.⁠”

“⁠이긴 게 없소⁠. 하루 미룬 거요⁠.⁠”

“⁠하루가 어디야⁠. 내 나이엔 하루가 금이야⁠.⁠”

“⁠노파는 나보다 어리잖소⁠.⁠”

“⁠여자 나이는 묻는 게 아니야⁠.⁠”

“⁠그럼 내 나이도 묻지 마시오⁠.⁠”

“⁠영감 나이는 온 마을이 알아⁠. 예순둘⁠. 허리는 일흔둘⁠.⁠”

철운은 허리를 펴 보였다⁠. 뚝 소리가 났다⁠. 할멈들이 또 웃었다⁠. 철운도 따라 웃었다⁠. 웃는 동안 눈은 포졸들이 습자지를 쓸어 담는 상자에 가 있었다⁠.

철운은 두부 판을 다시 어깨에 얹었다⁠. 뭉개진 두부 한 모는 포졸이 동전 두 닢을 내고 가져갔다⁠. 소석이 손을 잡아끌었다⁠.

“⁠할아버지⁠, 훈장님 어디 가요⁠?⁠”

“⁠관아에 간다⁠.⁠”

“⁠언제 와요⁠?⁠”

철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육계담이 포졸들 사이에 끼어 대문을 나서다가⁠, 소석을 보고 묶인 손으로 엄지를 들어 보였다⁠. 소석이 따라서 엄지를 들었다⁠.

*

“⁠두부 장수⁠, 잠깐⁠.⁠”

도각이 습자지 상자 앞에 서 있었다⁠. 맨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들어 애체를 눈으로 내렸다⁠. 아이 글씨였다⁠. 크고 비뚤었지만 한 획 한 획 눌러 쓴 글씨였다⁠. 도각이 종이를 철운 앞으로 들어 보였다⁠.

「⁠밤새 베틀 소리 그치지 않는데 / 짠 비단은 하늘 제단으로 올라가고 / 어미 손바닥엔 실 자국만 남아 / 아이는 맨발로 봄 진흙을 밟네⁠」

종이 귀퉁이에 이름이 있었다⁠. 독고소석⁠.

“⁠『⁠기저음⁠』의 첫 수요⁠. 하늘 제단은 폐하께서 도교 신선에게 제사를 올리는 단이오⁠. 이 시를 쓴 사람은 그 제단을 비웃었소⁠. 그래서 금서가 됐소⁠.⁠”

소석이 할아버지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거 우리 엄마 얘기예요⁠. 엄마 손에 실 자국 있어요⁠.⁠”

도각이 소석을 내려다보았다⁠. 철운은 손주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손바닥 밑에서 작은 어깨가 따뜻했다⁠.

“⁠서당 아이 열한 명 가운데 이 시를 끝까지 옮겨 쓴 아이는 이 아이 하나요⁠. 내일 관아에서 이 아이부터 부르겠소⁠.⁠”

도각은 종이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다시 철운을 보았다⁠. 시선이 철운의 오른손에 머물렀다⁠.

“⁠두부 장수 손바닥에는 맷돌 굳은살이 한가운데 박히오⁠. 당신 손바닥에는 손가락 뿌리 밑에 굳은살이 한 줄 더 있더군⁠. 맷돌은 그렇게 쥐지 않소⁠.⁠”

철운은 오른손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며느리의 잔소리 종이가 손끝에 닿았다⁠.

“⁠내일 아침⁠, 손주를 데리고 첫 번째로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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