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707자)

한 칼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받침돌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서른 해 전에는 두 손으로 겨우 들었는데⁠, 오늘은 무릎을 받침돌에 대고 허리를 써서 밀자 한 번에 옆으로 밀려났다⁠. 서른 해 동안 맷돌을 돌린 몸이었다⁠. 칼은 못 쥐었어도 돌은 날마다 밀었다⁠.

밑에 흙이 있었다⁠. 철운은 손바닥으로 흙을 긁어냈다⁠. 손톱 밑에 흙이 차고 손등에 땀이 흘렀다⁠. 한 자쯤 파 들어가자 손끝에 기름 먹인 천이 닿았다⁠. 천을 들추자 길쭉한 꾸러미가 나왔다⁠. 꾸러미를 감싼 바깥 천은 삭아서 손가락이 닿는 대로 부스러졌다⁠. 안쪽 천은 멀쩡했다⁠. 쪽빛으로 물들인 무명이었고⁠, 칼자루부터 칼집 끝까지 한 겹 한 겹 감겨 있었다⁠.

철운은 꾸러미를 무릎에 놓고 칼자루에 오른손을 얹었다⁠. 천 너머로 칼자루의 결이 손바닥에 올라왔다⁠. 손가락 뿌리 밑 굳은살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서른 해가 손바닥 한 장 두께였다⁠.

“⁠아버님⁠.⁠”

부엌 문턱에 채향이 서 있었다⁠. 잠옷 위에 겉옷을 걸치고⁠, 손에 물바가지를 들고 있었다⁠. 소석이 밤새 물을 찾아서 떠 주러 나온 길이었다⁠. 채향의 눈이 철운의 무릎 위에 가 있었다⁠.

“⁠그게 뭐예요⁠?⁠”

“⁠빨랫방망이다⁠.⁠”

“⁠빨랫방망이를 땅에 묻어요⁠?⁠”

“⁠오래 쓰려고⁠.⁠”

채향은 웃지 않았다⁠. 바가지를 든 손이 떨려서 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철운은 칼을 두부 판 위에 눕히고 젖은 베로 덮었다⁠. 베 위에 두부 여섯 모를 얹었다⁠. 칼은 보이지 않았다⁠.

“⁠얘야⁠, 소석이 신발 끈은 두 번 매 줘라⁠. 오늘은 잘 풀릴 거다⁠.⁠”

“⁠아버님⁠, 지금 신발 끈이 문제예요⁠?⁠”

“⁠신발 끈이 풀리면 아이가 넘어진다⁠.⁠”

“⁠아버님⁠, 저 칼이면 사람이 죽어요⁠.⁠”

“⁠사람 안 죽인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서른 해 동안 안 죽였다⁠. 두부만 죽였지⁠.⁠”

철운은 받침돌을 다시 밀어 제자리에 앉혔다⁠. 파낸 구멍이 맷돌 밑으로 숨었다⁠. 맷돌 위짝에 손바닥을 얹어 한 바퀴 돌려 보았다⁠. 돌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았다⁠. 채향은 시아버지의 손을 보았다⁠. 날마다 보던 손이었다⁠. 소석의 코를 닦아 주고⁠, 엿을 몰래 쥐여 주고⁠, 두부를 받쳐 들던 손이었다⁠. 오늘은 처음 보는 손 같았다⁠.

“⁠승로 아범한테는 제가 말해요⁠, 아버님이 말해요⁠?⁠”

“⁠내가 하마⁠.⁠”

“⁠아버님은 안 하실 거잖아요⁠. 서른 해 동안 안 하셨잖아요⁠.⁠”

철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향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당 밖에서 포졸들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당 아이가 있는 집은 해 뜨기 전에 아이를 데리고 나루로 나오라는 소리였다⁠.

*

새벽 나루에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 끝이 물에 잠겨 있었고⁠, 물 위로 지붕을 씌운 큰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뱃머리에 금의위의 붉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배 가운데에 대나무로 엮은 우리가 있었다⁠. 사람을 싣는 우리였다⁠.

학동 열한 명이 나루 계단 아래 한 줄로 세워졌다⁠. 아이들 뒤에서 할머니들이 울었다⁠. 곽 노파는 울지 않고 포졸에게 삿대질을 했다⁠.

“⁠우리 손주 감기 들면 너희 현령 집 장독에 다 쳐들어간다⁠!⁠”

도각은 나루 끝에서 애체를 손에 쥐고 서 있었다⁠. 얼굴이 밤새 한 뼘은 늙어 있었다⁠. 금의위 하나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배에 태웠다⁠. 한 아이가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미끄러지자 도각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이 닿기 전에 금의위가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독고소석⁠.⁠”

채향이 소석을 끌어안았다⁠. 승로는 염방에서 뛰어오는 중이었다⁠. 쪽물 든 손을 씻지도 못한 채 나루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왔다⁠. 금의위 둘이 채향의 팔을 떼어 냈다⁠. 소석은 엄마를 돌아보며 신발 끈을 내려다보았다⁠. 끈은 두 번 매여 있었다⁠.

현곡이 뱃머리에서 내려다보았다⁠.

“⁠배를 띄워라⁠.⁠”

*

철운이 나루 계단 꼭대기에 나타났다⁠. 어깨에 두부 판을 얹고 있었다⁠.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두부 장수가 아침 장사를 나온 걸음이었다⁠. 철운은 계단을 다 내려와서 두부 판을 내려놓고 현곡을 올려다보았다⁠.

“⁠천호 나리⁠, 어제 말씀드렸소⁠. 아이들을 태우시려면 나를 태우시오⁠. 훈장 입을 여는 데 아이 열한 명은 많소⁠. 늙은이 하나면 되오⁠. 내가 훈장 옆에 앉아 있으면 훈장은 내가 불쌍해서 다 불 거요⁠.⁠”

“⁠늙은이는 증인이 될 수 없다⁠.⁠”

“⁠왜 못 되오⁠?⁠”

“⁠늙은이는 거짓말을 할 줄 안다⁠. 아이는 모른다⁠.⁠”

현곡이 손을 들었다⁠. 사공들이 삿대를 밀었다⁠. 배가 나루에서 한 자⁠, 두 자 떨어졌다⁠. 뱃머리와 나루 말뚝 사이에 맨 굵은 밧줄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사공 하나가 밧줄을 풀려고 말뚝으로 뛰어오르는 순간⁠, 철운이 밧줄을 두 손으로 잡았다⁠.

밧줄이 팽팽해졌다⁠. 배가 멈췄다⁠.

“⁠노를 저어라⁠!⁠”

사공 넷이 노를 저었다⁠. 물이 뒤로 밀려났다⁠. 밧줄이 철운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삼으로 꼰 밧줄의 결이 손바닥 굳은살을 긁고 지나가며 살갗을 태웠다⁠. 철운은 발을 나루 돌 틈에 박고 허리를 낮췄다⁠. 무릎이 뚝 소리를 냈다⁠. 배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곽 노파가 소리를 질렀다⁠.

“⁠당겨⁠, 영감⁠! 두부 누르듯이⁠!⁠”

“⁠두부는 누르는 거지 당기는 게 아니오⁠!⁠”

철운이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할멈들이 울다 말고 웃었다⁠. 사공들이 노를 젓다 말고 서로 얼굴을 보았다⁠. 노를 저어도 배가 꿈쩍하지 않는 일은 사공 노릇 이십 년에 처음이라는 얼굴이었다⁠.

“⁠밧줄을 끊어라⁠.⁠”

현곡의 말에 금의위 하나가 칼을 뽑아 뱃머리 쪽 밧줄을 내리쳤다⁠. 밧줄이 끊어지며 철운이 뒤로 넘어질 뻔했다⁠. 배가 물살을 타고 미끄러져 나갔다⁠. 우리 안에서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소석이 우리 대나무 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할아버지⁠!⁠”

*

철운은 두부 판 앞에 쪼그려 앉았다⁠. 두부 여섯 모를 한 손으로 쓸어 계단에 내려놓았다⁠. 젖은 베를 걷었다⁠. 쪽빛 천으로 감은 장검이 드러났다⁠.

나루가 조용해졌다⁠. 채향이 숨을 들이쉬었다⁠. 승로가 아버지를 보았다⁠. 도각의 손에서 애체가 떨어져 계단을 굴렀다⁠.

철운은 칼자루를 오른손으로 쥐었다⁠. 천을 풀지 않았다⁠. 칼집만 왼손으로 잡아 뺐다⁠. 서른 해 동안 기름 먹인 천 속에 있던 칼날이 안개 속에서 젖은 빛을 냈다⁠.

배와 나루 사이가 벌써 한 길 반이었다⁠. 철운은 끊어진 밧줄 끝을 왼손으로 잡아채 말뚝에 한 바퀴 감고⁠, 밧줄을 밟고 뛰었다⁠. 늙은 몸이 공중에 떴다가 뱃전에 내려앉았다⁠. 발바닥이 뱃전을 디딜 때 배가 한 번 기울었다⁠.

금의위 셋이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철운의 칼이 한 번 움직였다⁠. 셋의 허리띠가 동시에 끊어졌다⁠. 비어복 아랫도리가 발목까지 흘러내렸다⁠. 셋이 바지를 붙잡느라 칼을 놓쳤다⁠.

나루에서 할멈들이 비명을 질렀다가 손뼉을 쳤다⁠.

철운은 우리로 가지 않았다⁠. 사공들 쪽으로 갔다⁠. 칼이 다시 한 번 움직였고⁠, 노 네 자루가 물속으로 떨어졌다⁠. 노 끝만 잘려 나갔다⁠. 사공들은 손에 남은 막대기를 내려다보았다⁠.

“⁠배는 이제 안 가오⁠. 사공들은 헤엄을 치시오⁠.⁠”

사공들이 물로 뛰어들었다⁠. 철운은 그제야 우리 앞으로 갔다⁠. 칼끝으로 우리 문 자물쇠의 고리를 툭 쳤다⁠. 고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문이 열렸다⁠.

“⁠얘들아⁠, 저기 할멈들한테 헤엄쳐라⁠. 헤엄 못 치는 놈은 이리 와⁠.⁠”

헤엄을 칠 줄 아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철운은 한숨을 쉬었다⁠. 나루에서 승로와 마을 장정들이 물에 뛰어들었다⁠. 배는 노가 없어 물살에 떠밀려 나루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승로가 뱃전에 매달려 아이들을 하나씩 받아 장정들에게 건넸다⁠. 소석이 맨 마지막이었다⁠. 승로가 아들을 받아 안고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

현곡이 칼을 뽑았다⁠. 칼날이 좁고 휘어 있었다⁠. 금의위가 차는 수춘도였다⁠. 현곡은 말없이 철운에게 다가왔다⁠. 발이 갑판을 디딜 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첫 칼이 철운의 목으로 왔다⁠. 철운은 몸을 반 걸음 뒤로 뺐다⁠. 두 번째 칼이 허리로 왔다⁠. 철운은 칼등으로 받았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운하 위로 퍼졌다⁠. 현곡의 손목이 빨랐다⁠. 세 번째 칼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

철운의 칼이 한 번 움직였다⁠.

현곡의 머리에서 관이 떨어졌다⁠. 관끈만 끊겨 있었다⁠. 관이 뱃전을 굴러 물에 빠졌다⁠. 현곡의 상투가 풀려 머리카락이 어깨로 흘러내렸다⁠. 현곡은 칼을 든 채로 멈췄다⁠.

갑판 위에 아무 소리가 없었다⁠. 현곡의 눈이 철운의 칼끝을 보다가⁠, 칼자루에 감긴 쪽빛 천을 보다가⁠, 철운의 얼굴로 올라왔다⁠. 눈동자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한 칼⁠.⁠”

현곡이 중얼거렸다⁠.

“⁠한 번 벤 자리를 두 번 베지 않는다⁠. 서른 해 전 강호에서 그렇게 칼을 쓰는 사람은 하나였다⁠.⁠”

배가 나루에 닿았다⁠. 소석이 아빠 품에서 빠져나와 뱃전으로 뛰어왔다⁠. 할아버지 다리를 끌어안았다⁠. 소석의 목에서 은자물쇠가 흔들렸다⁠. 현곡의 시선이 은자물쇠에 닿았다가 거기 멈췄다⁠. 숨 한 번 쉴 동안이었다⁠. 현곡이 눈을 돌렸다⁠.

*

현곡은 물에 빠진 관을 건지게 하지 않았다⁠. 풀린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 나루 계단을 올라왔다⁠. 마을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도각이 계단에 떨어진 애체를 줍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독고철운⁠.⁠”

현곡이 나루 사람들 모두가 듣도록 이름을 불렀다⁠. 우물가 할멈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곽 노파의 입이 벌어졌다⁠. 나루 이야기꾼이 들려주던 이름이었다⁠. 산을 둘로 가르던 천하제일검의 이름이었다⁠.

“⁠서른 해 전 내 아버지를 벤 칼이다⁠. 칼자루에 감은 천까지 그대로군⁠.⁠”

철운은 칼을 칼집에 넣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사흘을 주겠다⁠. 사흘 안에 혼자 관아로 와라⁠. 오지 않으면 이 마을을 역적을 숨긴 소굴로 올리겠다⁠. 조정에 올라가면 버들나루라는 이름은 지도에서 지워진다⁠.⁠”

현곡이 말에 올랐다⁠. 금의위들이 바지를 추스르며 뒤따랐다⁠. 말발굽 소리가 안개 속으로 멀어졌다⁠.

채향이 소석의 젖은 머리를 소매로 닦았다⁠. 닦으면서 시아버지를 보았다⁠. 쉰 걸음 떨어진 사람을 보듯이 보았다⁠. 철운은 오른손을 폈다⁠. 밧줄이 지나간 자리가 붉게 부어 있었다⁠. 손바닥 한가운데 맷돌 굳은살 위로 피가 배어 나왔다⁠.

“⁠할아버지⁠, 산은 진짜 안 갈라졌어요⁠?⁠”

소석이 물었다⁠. 철운은 손주의 머리에 피 묻지 않은 왼손을 얹었다⁠.

“⁠안 갈라졌다⁠. 관 하나 떨어졌다⁠.⁠”

*

나루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도 도각은 계단에 남아 있었다⁠. 금이 간 애체를 소매로 닦으며 철운 앞으로 왔다⁠. 애체 한쪽 알에 금이 길게 나 있었다⁠.

“⁠어제 수결 대신 그은 한 획을 보고 알았어야 했소⁠. 두부 장수가 붓을 그렇게 떼지 않소⁠.⁠”

“⁠나리⁠, 두부 한 모 가져가시오⁠. 계단에 굴러서 팔지 못하오⁠.⁠”

“⁠두부 이야기 그만하시오⁠.⁠”

도각이 목소리를 낮췄다⁠.

“⁠천호가 왜 사흘을 줬는지 아시오⁠? 당신을 잡을 사람이 모자라서가 아니오⁠. 사흘이면 천하제일검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강남 땅 끝까지 퍼지오⁠. 서른 해 전 당신한테 원한을 진 자들이 다 이 마을로 몰려오겠지⁠. 천호는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되오⁠.⁠”

“⁠나리는 왜 그걸 나한테 말해 주시오⁠?⁠”

도각은 대답 대신 계단에 굴러 있던 두부 한 모를 집어 들었다⁠. 흙이 묻어 있었다⁠. 도각은 소매에서 동전 두 닢을 꺼내 두부 판 위에 놓았다⁠.

“⁠어제 깎은 값까지 쳤소⁠.⁠”

도각이 계단을 올라갔다⁠. 철운은 동전 두 닢을 손바닥에 올려 보았다⁠. 피가 묻어 동전이 손바닥에 붙었다⁠.

*

승로는 아버지 곁을 지나가며 걸음을 늦췄다⁠. 젖은 옷에서 쪽물이 흘러 나루 돌에 파란 자국을 남겼다⁠.

“⁠아버지⁠.⁠”

“⁠염방에 늦겠다⁠.⁠”

“⁠지금 염방이 문제예요⁠?⁠”

“⁠쪽물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독이 식으면 색이 안 든다⁠.⁠”

승로가 아버지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염방으로 가는 둑길을 걸어갔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철운은 아들의 등을 끝까지 보았다⁠. 서른 해 전 품에 안았을 때는 등이 손바닥 하나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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