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17자)

열두 마을

무림맹 민원실 · 하로운

4월 3일 아침⁠, 등봉현 남쪽 고갯길에서 다름은 매향의 등에 업혀 있었다⁠. 처음에는 나귀를 타겠다고 했다⁠. 나귀가 고개 들머리에서 주저앉자 매향이 말없이 등을 내밀었다⁠. 경공으로 고개 하나를 넘는 데 향 반 대가 들지 않았다⁠. 고개 꼭대기에서 내려놓자 다름은 길가 소나무를 붙들고 한참 숨을 골랐다⁠. 속이 불편했다⁠.

“⁠다음 마을은 걸어가겠습니다⁠.⁠”

“⁠걸어가면 해 져⁠.⁠”

“⁠해가 져도 걸어가겠습니다⁠.⁠”

매향은 대답 대신 다름의 사모를 바로 씌워 주었다⁠. 사모 끈이 바람에 엉켜 턱 밑에서 매듭이 되어 있었다⁠.

석교촌은 고개 너머 개울가에 집 스무 채가 엎드린 마을이었다⁠. 우돌은 감자밭에서 김을 매다가 관복을 보고 호미를 떨어뜨렸다⁠. 다름이 마흔 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돌은 호미 자루만 만지작거렸다⁠.

“⁠맹에 가면 칼 찬 사람들이 줄에 있잖아요⁠.⁠”

“⁠있습니다⁠.⁠”

“⁠무서워요⁠.⁠”

“⁠칼 찬 사람도 번호표를 뽑습니다⁠. 남궁세가 집사도 뽑았습니다⁠. 백팔십칠 번이었습니다⁠. 돼지 치는 아저씨 옆에 앉아서 고구마를 얻어먹었습니다⁠.⁠”

우돌의 손이 멈췄다⁠. 매향이 옆에서 거들었다⁠.

“⁠진짜야⁠. 내가 봤어⁠. 세 번째 고구마는 받아먹더라⁠.⁠”

우돌이 웃었다⁠. 웃고 나서 호미를 주워 들었다⁠.

“⁠보리 거두고 갈게요⁠. 유월 초면 끝이에요⁠.⁠” 우돌이 호미로 밭고랑을 가리켰다⁠. “⁠그리고 나도 번호표 하나 갖고 싶어요⁠. 남궁 집사도 뽑았다던 나무패요⁠. 우리 애들한테 보여 주게⁠.⁠”

*

열두 마을은 서로 다른 이유로 무서워했다⁠. 안골 닭 주인은 다리를 절어 삼십 리를 못 걷는다고 했다⁠. 매향이 업고 가겠다고 하자⁠, 다리 절룩이는 노인이 젊은 여자 등에 업혀 맹에 들어가면 마을 체면이 뭐가 되느냐고 했다⁠. 다름이 나귀를 빌려 오겠다고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의 나귀가 아니라 마을 나귀라는 조건을 붙였다⁠.

소금고개에는 점창 제자들이 먼저 다녀가 있었다⁠. 맹에 가서 흑석곡 편을 들면 고개 아래 물길도 막겠다는 말이었다⁠. 소금고개 이장은 다름을 문 안으로 들이지도 않았다⁠. 버들내는 마을 어른이 앓아누워 아무도 정하지 못했다⁠. 돌다리 사람들은 가겠다고 했다가 다음 날 못 가겠다고 했고⁠, 그다음 날 다시 가겠다고 했다⁠. 다름은 돌다리를 세 번 갔다⁠. 세 번째 날 돌다리 사람들은 마을 정자에 모여 콩으로 정했다⁠. 갈 사람은 오른쪽 바가지에⁠, 안 갈 사람은 왼쪽 바가지에 콩을 하나씩 넣었다⁠. 다름은 민원실 창구 옆 만족·보통·불만 콩 통을 떠올리고 웃음을 참았다⁠. 바가지 둘에 콩이 똑같이 열한 개씩 들어갔다⁠. 이장이 난감한 얼굴로 다름을 보았다⁠.

“⁠맹에서 온 나리가 하나 넣으시오⁠.⁠”

“⁠저는 돌다리 사람이 아닙니다⁠. 못 넣습니다⁠.⁠”

매향이 듣자마자 다름의 손에서 콩을 빼앗아 이장 손에 쥐여 주었다⁠. “⁠이장님이 아직 안 넣으셨잖아⁠.⁠” 이장은 콩을 쥐고 한참 망설이다가 오른쪽 바가지에 넣었다⁠. 정자 아래서 이장 부인이 박수를 쳤다⁠.

다름은 마을 하나를 다녀올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사월이 끝나 갈 무렵⁠, 접은 손가락은 다섯이었다⁠.

“⁠열두 개 다 접을 수 있을까⁠?⁠” 매향이 물었다⁠.

“⁠발가락도 있습니다⁠.⁠”

“⁠발가락은 짚신 안에 있잖아⁠.⁠”

“⁠그래서 아무도 못 봅니다⁠. 마음 편히 접을 수 있습니다⁠.⁠”

매향이 다름의 정강이를 부채로 톡 쳤다⁠.

*

4월 28일⁠, 다름은 처음으로 흑석곡에 들어갔다⁠. 하촌 무너진 둑 자리를 지나 나룻배로 강을 건너고⁠, 개울을 따라 반 시진을 올라가자 골짜기가 열렸다⁠.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 감자밭을 일궈 놓았고⁠, 밭마다 돌담을 무릎 높이로 쌓았다⁠. 서른 채 지붕은 짚으로 이었는데⁠, 몇 채는 아직 지붕 끝이 덜 다듬어져 삐죽했다⁠. 산채에서 쓰던 망루 하나가 마을 어귀에 남아 있었고⁠, 망루 꼭대기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다⁠.

“⁠망루가 빨래 말리기에 좋아⁠. 바람이 잘 들어⁠.⁠” 매향이 말했다⁠.

마을 한가운데 우물은 돌로 둥글게 쌓은 것이었다⁠. 다름이 들여다보니 바닥에 물이 손바닥 깊이밖에 없었고⁠, 진흙이 드러나 있었다⁠. 우물 옆에 물동이 열 개가 엎어져 있었다⁠. 강에서 길어 온 물을 담는 동이였다⁠.

“⁠물길이 저 위에서 내려와⁠.⁠” 매향이 산자락을 가리켰다⁠. 골짜기 위 숲 사이로 새 기와지붕이 보였다⁠. 점창 분타였다⁠. “⁠분타 바로 밑에서 갈라져서 우리 우물로 오는데⁠, 거기다 돌을 쌓았어⁠.⁠”

밭에서 귀 한쪽이 없는 노인이 괭이를 짚고 올라왔다⁠. 산채 시절 부두목이었다는 노인은 다름의 관복을 위아래로 훑었다⁠.

“⁠맹에서 온 사람이 우리 골짜기에 발 들인 건 처음이오⁠. 예전엔 맹 사람이 오면 칼을 들고 마중 나갔지⁠.⁠”

“⁠지금은요⁠?⁠”

“⁠감자를 들고 나가지⁠.⁠” 노인이 품에서 감자 하나를 꺼내 다름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우리 산채에서 제일 잘 키운 감자요⁠. 칼 쥐던 손으로 키웠소⁠.⁠”

저녁에 서른 가구가 마을 공터에 상을 펴고 다름을 먹였다⁠. 찐 감자⁠, 구운 감자⁠, 감자전⁠, 감자 국⁠, 감자 떡이 차례로 나왔다⁠. 다름이 다섯 번째 그릇을 받아 들었을 때 귀 없는 노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산채 시절에는 고기를 먹고 감자를 버렸는데⁠, 지금은 감자로 못 만드는 게 없다고⁠. 옆자리 아낙이 노인 옆구리를 찔렀다⁠. 고기를 어디서 났는지는 맹 사람 앞에서 말하지 말라는 눈짓이었다⁠.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감자 떡을 다름 그릇에 하나 더 얹었다⁠.

*

물길은 분타 아래 바위틈에서 솟아 개울이 되어 흘렀다⁠. 갈라지는 자리에 어른 키만큼 돌이 쌓여 있었고⁠, 물은 돌 더미에 막혀 분타 쪽 도랑으로만 흘렀다⁠. 점창 제자 여섯이 돌 더미 위에 돌을 하나씩 더 얹고 있었다⁠. 주태곤은 바위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장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다름은 신을 벗고 바지를 걷고 물길로 들어갔다⁠. 물이 정강이까지 찼다⁠. 사월 산물은 발목뼈가 시리게 차가웠다⁠. 다름은 돌 더미 바로 앞⁠, 물이 갈라지는 자리에 가서 멈췄다⁠.

“⁠무림맹 민원실입니다⁠.⁠”

점창 제자들이 돌을 든 채로 굳었다⁠. 주태곤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민원은 무효 됐다며⁠.⁠”

“⁠무효가 됐습니다⁠. 그래서 처분도 없습니다⁠. 이레도 없습니다⁠. 지금 이 돌을 얹으셔도 맹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다름은 물속에서 발을 옮겨 돌 더미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니 맹 주사 하나가 여기 서 있어도 맹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제자 하나가 돌을 머리 위로 들었다⁠. 다름 앞에 내려놓으면 다름의 발등이 깨질 자리였다⁠. 매향의 부채가 펴졌다⁠. 주태곤의 칼이 뽑혔다⁠. 부채살이 칼날을 받아 쇳소리가 골짜기에 울렸고⁠, 두 번째 합에서 주태곤의 장발 몇 가닥이 잘려 물에 떨어졌다⁠. 세 번째 합이 오기 전에 다름이 소리쳤다⁠.

“⁠대사형님⁠! 아래를 보십시오⁠!⁠”

주태곤이 칼을 멈추고 내려다보았다⁠. 골짜기 아래 비탈길로 흑석곡 아낙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저마다 등에 물동이 둘을 지고 있었다⁠. 강에서 길어 고개 하나를 넘어온 물이었다⁠. 맨 앞의 노파는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동이에서 물이 넘쳐 등을 적셨다⁠.

“⁠저분들이 하루 세 번 저 길을 오릅니다⁠.⁠” 다름이 말했다⁠. “⁠대사형님 분타 물은 남아서 도랑으로 흘러갑니다⁠.⁠”

주태곤이 칼을 내렸다⁠. 잘린 머리카락이 물에 떠내려갔다⁠. 주태곤은 그제야 제 머리 끝을 만져 보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3년을 기른 머리라고 했다⁠. 매향이 부채를 접으며 다음엔 반대편도 맞춰 주겠다고 하자⁠, 제자 하나가 웃음을 참다가 들고 있던 돌을 제 발등에 떨어뜨렸다⁠. 제자가 한 발로 깡충거리는 동안 아무도 칼을 다시 들지 않았다⁠. 제자들이 대사형의 얼굴을 보았다⁠.

“⁠분타주님 명이오⁠.⁠” 주태곤이 낮게 말했다⁠.

“⁠분타주님은 누구 명을 받으십니까⁠?⁠”

주태곤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 칼을 칼집에 넣었다⁠.

“⁠지난달에 남궁세가 사람들이 분타에 다녀갔소⁠. 분타주님이랑 밤새 술을 마셨지⁠.⁠” 주태곤이 제자들에게 손짓했다⁠. “⁠오늘은 돌 그만 얹어⁠.⁠”

제자들이 돌을 내려놓고 올라갔다⁠. 쌓인 돌은 그대로였다⁠. 다름은 물에서 나왔다⁠. 발이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매향이 망토를 벗어 다름의 발을 싸며 투덜거렸다⁠.

“⁠너는 칼도 못 막으면서 왜 맨날 칼 앞에 서⁠?⁠”

“⁠칼을 못 막으니까 앞에 섭니다⁠. 막을 줄 알면 옆에 섰을 겁니다⁠.⁠”

*

4월 28일 밤 매향의 집 마루에 손님이 왔다⁠. 원로당 복도에서 본 무당파 젊은 도사였다⁠. 흰 도포에 먼지 하나 없었고⁠, 손에 청송 진인의 서신을 들고 있었다⁠. 마을 노인들이 마루 끝에 모여 앉았다⁠.

“⁠장문께서 흑석곡을 무당 외문으로 받아 주시겠답니다⁠. 흑석당이라는 이름도 지어 두셨습니다⁠. 무당의 문 안에 들면 점창이든 남궁이든 함부로 못 건드립니다⁠.⁠”

“⁠대신⁠?⁠” 매향이 물었다⁠.

“⁠선거 뒤에 남궁이 사파를 치러 오면⁠, 무당이 막아 드립니다⁠. 그때 흑석곡 사내들은 무당 깃발 아래 다시 칼을 드시면 됩니다⁠.⁠” 도사가 공손히 웃었다⁠. “⁠장문께서는 칼 쓰는 법을 잊지 않은 사람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귀 한쪽 없는 노인이 무릎을 쳤다⁠. 노인 몇이 웅성거렸다⁠. 칼을 다시 든다는 말에 겁먹은 얼굴도 있었고⁠,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물동이를 지고 고개를 넘은 아낙들은 마루 밑에서 말없이 들었다⁠.

다름은 도사를 보았다가 매향을 보았다⁠. 매향은 서신을 받아 들고 펴 보지도 않은 채 무릎에 올려놓았다⁠.

“⁠생각해 볼게요⁠.⁠”

도사가 돌아간 뒤 다름은 마루에 남았다⁠. 매향은 우물가에 앉아 바닥의 진흙을 내려다보았다⁠.

“⁠그 문으로 들어가시면⁠,⁠” 다름이 말했다⁠. “⁠같은 줄이 못 됩니다⁠. 무당 줄입니다⁠. 정파 사람들 사이에 서는 게 아니고⁠, 무당 뒤에 서는 겁니다⁠. 칼을 들고⁠.⁠”

“⁠네 줄은⁠?⁠” 매향이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얼굴 반쪽이 희었다⁠. “⁠네 줄은 감찰관이 지웠잖아⁠. 원로회는 편지를 미뤘고⁠, 열두 마을 중에 다섯이 오겠대⁠. 그사이 우물은 바닥이야⁠.⁠”

다름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 쥔 감자가 차가웠다⁠. 귀 없는 노인이 준 감자였다⁠.

매향이 진흙에 손가락으로 줄을 하나 그었다가 손바닥으로 지웠다⁠.

“⁠미안⁠. 네 탓 아닌데⁠.⁠”

“⁠제 도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매향이 일어나 치마에 묻은 흙을 털었다⁠. “⁠내일 돌다리 또 가야 되지⁠? 일찍 자⁠.⁠”

5월 중순에 왕춘삼의 편지가 흑석곡까지 왔다⁠. 남궁 집사가 날마다 창구에 와서 남 주사 출장이 언제 끝나느냐고 묻는다는 것⁠, 정문에 선거 방이 하나 더 붙었다는 것⁠, 저보에 조선에서 돌아온 관군이 호광 산적 소탕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났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 편지 끝에는 「⁠점심은 잘 먹고 있음⁠」이 덧붙어 있었다⁠.

5월이 지나는 동안 다름은 나머지 마을을 다시 돌았다⁠. 소금고개 이장은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버들내 어른은 앓다가 일어나서는 가겠다고 했다⁠. 5월 그믐에 다름이 접은 손가락은 일곱이었다⁠. 일곱 마을과 흑석곡이 6월 10일⁠, 보리를 다 거두고 함께 맹에 오기로 했다⁠. 매향은 무당 서신을 아직 펴 보지 않았고⁠, 버리지도 않았다⁠. 서신은 매향의 집 부엌 선반⁠, 행주가 된 흑풍채 깃발 옆에 놓여 있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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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새벽2026.11.06· 9화

    열두 마을을 하나씩 도는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서 좋았어요. 물길에서 다름이 점창 제자들 앞을 막아서는 데서 소리 질렀고, 매향이 생각해 보겠다고 할 때 마음이 철렁했습니다.

    • 하로운작가2026.11.06

      마을 사람들을 맹으로 부르는 일은 매향에게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무당 사자의 제안이 어디로 가는지는 다음 화부터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