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07자)

위조라고 하시면

무림맹 민원실 · 하로운

3월 20일 축시⁠, 감찰원 뒷방에는 등불이 하나뿐이었다⁠. 위소강의 등불이었다⁠. 천무량은 상자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무릎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감찰관⁠, 오늘 몇 번 열쇠를 돌렸소⁠? 자시에 투함 한 번⁠, 지금 여기 한 번⁠.⁠”

“⁠실장도 두 번이오⁠. 축시에 투함 한 번⁠, 지금 여기 한 번⁠.⁠” 위소강이 문틀에 등불을 걸었다⁠. “⁠맹규에 따르면 감찰원 뒷방에 허락 없이 든 자는 직을 잃소⁠. 두 분 다⁠.⁠”

“⁠직을 잃기 전에 한 마디 하리다⁠.⁠” 천무량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는 30년 동안 대청에서 번호를 불렀소⁠. 이 목소리로 이백 번까지 부르면 정문 밖 버드나무 밑에서도 듣소⁠. 감찰관이 사람을 부르면⁠, 나는 그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서 부르겠소⁠. 흑석곡 일은 선거 전날 밤에 끝낸다⁠, 부터⁠.⁠”

위소강의 눈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상자 뚜껑 안쪽을 보았다⁠. 풀 자국만 남아 있었다⁠.

“⁠편지는 어디 있소⁠?⁠”

“⁠무슨 편지⁠?⁠”

위소강은 다름 앞으로 와서 소매를 털게 했다⁠. 다름의 소매에서 감자 반쪽이 굴러 나왔다⁠. 위소강은 감자를 내려다보다가 천무량의 소매도 털게 했다⁠. 열쇠 하나와 빈 보자기가 나왔다⁠. 위소강은 시렁 위⁠, 상자 사이⁠, 문 뒤를 차례로 등불로 비췄다⁠. 들보까지는 올려다보지 않았다⁠. 감찰관의 눈은 사람 키 높이에서 일하는 눈이었다⁠.

“⁠가져가시오⁠.⁠” 위소강이 마침내 말했다⁠.

다름은 귀를 의심했다⁠.

“⁠상자를 가져가란 말이오⁠. 원로회에 들고 가시오⁠.⁠” 위소강이 등불을 다시 들었다⁠. “⁠접수 도장 없는 두루마리는 맹에서 종이요⁠. 누가 썼는지⁠, 언제 넣었는지⁠, 정말 투함에 들어갔는지 아무도 모르오⁠. 나는 원로회 앞에서 위조라고 하겠소⁠. 맹규로 이기는 싸움이 있고⁠, 목소리로 이기는 싸움이 있소⁠. 실장은 목소리를 고르셨고⁠, 나는 맹규를 고르겠소⁠.⁠”

“⁠오늘 일은요⁠?⁠”

“⁠도둑질은 원로회가 끝나고 따지겠소⁠. 순서대로⁠.⁠” 위소강이 처음으로 웃었다⁠. 입꼬리만 웃었다⁠. “⁠남 주사가 좋아하는 말 아니오⁠?⁠”

위소강의 발소리가 회랑으로 멀어졌다⁠. 한참 뒤 들보에서 매향이 거꾸로 매달려 내려왔다⁠. 품에서 편지 귀퉁이가 비죽 나와 있었다⁠.

“⁠사람 키 위로는 안 보던데⁠? 감찰관이 다 저래⁠?⁠”

“⁠천장 보는 감찰관은 못 봤소⁠.⁠” 천무량이 다시 무릎을 짚었다⁠. “⁠30년 동안⁠.⁠”

*

4월 1일 사시⁠, 원로당 대청은 민원실 대청보다 천장이 두 배 높았다⁠. 아홉 대문파와 다섯 세가에서 온 원로 열넷이 반달 모양으로 앉았고⁠, 가운데 상석에 소림의 노승이 원로 수석으로 앉았다⁠. 오른편에 무당 장문 청송 진인이⁠, 왼편에 남궁세가 가주 남궁태열이 있었다⁠. 맹주 후보 둘이 양옆에 앉으니 노승이 가운데서 겨우 보였다⁠. 총관은 노승 뒤에 서 있었고⁠, 위소강은 문 옆에 서 있었다⁠.

다름은 정직이 끝나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사흘 동안 다름은 아침마다 담에 박힌 투함부터 보았다⁠. 자물쇠 둘레 닳은 자리는 그대로였다⁠. 원로당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도장은 돼지 치는 사내의 것이었다⁠. 이웃집 돼지가 자기 돼지와 눈이 맞아 같이 달아났으니 둘 중 어느 집 돼지로 할지 정해 달라는 민원이었다⁠. 원로당 문을 들어서며 저도 모르게 문 옆을 두리번거렸다⁠. 번호패 통이 없었다⁠. 천무량이 뒤에서 소매를 잡아당겼다⁠.

“⁠여기는 번호표 없다⁠.⁠”

“⁠그럼 순서를 어떻게 정합니까⁠?⁠”

“⁠목소리 큰 순서⁠.⁠”

남궁태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곧았으며⁠, 반백의 머리를 단정히 빗어 올렸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말은 낮고 느렸다⁠. 다름이 상자를 대청 가운데 내려놓자 남궁태열이 상자를 한 번 보고 다름을 한 번 보았다⁠. 보는 데 시간을 들이는 눈이었다⁠.

천무량이 일어나 상자를 열고 두루마리 마흔 건과 편지를 꺼내 놓았다⁠. 지난해 동짓달부터 투함에 들어간 흑석곡 둘레 열두 마을의 민원⁠, 감찰원 서리가 밤마다 빼낸 것⁠, 그리고 상자 뚜껑에 붙어 있던 편지⁠. 천무량의 목소리는 대청 끝 기둥까지 울렸다⁠. 다 듣고 나서 노승이 문 옆을 보았다⁠.

“⁠감찰관⁠.⁠”

위소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두루마리에는 접수 도장이 없습니다⁠. 투함에 넣었다는 사람의 말뿐입니다⁠. 사파 여자 하나가 열두 마을 이름을 빌려 쓰면 하룻밤에 마흔 건이 나옵니다⁠. 게다가 이 상자는 감찰원 뒷방에서 밤에 몰래 들고 나간 것입니다⁠. 맹규에 따르면⁠, 훔쳐서 얻은 것은 증거로 쓰지 않습니다⁠.⁠”

“⁠편지는⁠?⁠” 노승이 물었다⁠.

남궁태열이 손을 들었다⁠. 대청이 조용해졌다⁠.

“⁠내 인장이오⁠.⁠” 남궁태열이 말했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우리 세가 인장은 집사들이 서신을 대신 쓸 때도 찍소⁠. 누가 이 글을 쓰고 찍었는지는 내가 집에 가서 묻겠소⁠. 묻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오⁠. 집사가 서른이 넘으니⁠.⁠”

원로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은 천무량의 손을 뿌리치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원로 열넷의 눈이 한꺼번에 학 흉배로 쏠렸다⁠.

“⁠감찰관께서 훔쳐 얻은 것은 증거로 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름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대로 두었다⁠. “⁠이 마흔 건을 먼저 훔친 사람은 감찰원입니다⁠. 투함에서 밤마다 꺼내 갔습니다⁠. 민원실은 그 상자를 도로 가져왔을 뿐입니다⁠. 먼저 훔친 것이 증거가 못 되면⁠, 나중에 훔친 것도 죄가 못 됩니다⁠.⁠”

위소강이 다름을 보았다⁠. 맹규 어느 장에도 없는 말이었다⁠. 위소강은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원로 하나가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헛기침으로 덮었다⁠. 남궁태열은 웃지 않았다⁠. 다름을 보는 눈만 조금 길어졌다⁠. 다름은 손바닥에 땀이 났다⁠. 남궁태열은 편지를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편지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청송 진인이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쓸었다⁠.

“⁠감찰원이 민원을 빼돌렸다는 말이 나왔는데 감찰원이 스스로 감찰하겠소⁠? 남궁 가주의 인장이 나왔는데 남궁 가주가 스스로 묻겠소⁠? 허허⁠, 이러다가는 도둑이 제 도둑질을 감찰하는 세상이 되겠구려⁠. 빈도가 맹주가 되면 이런 일은 열흘 안에 다 밝히겠소⁠.⁠”

남궁태열은 청송을 보지 않았다⁠. 다름은 청송의 얼굴을 보았다⁠. 웃는 눈가에 흑석곡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청송이 원하는 것은 남궁의 인장이었다⁠.

노승이 염주를 한 바퀴 돌렸다⁠. 대청이 다시 조용해졌다⁠.

“⁠조정은 세자 하나를 10년째 못 정하고 있소⁠. 황상이 상소를 받아 두기만 하시니⁠.⁠” 노승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다들 몸을 기울여 들었다⁠. “⁠우리라도 맹주는 정해야 하오⁠. 선거 전에 판을 엎을 수는 없소⁠.⁠”

다름이 입을 열려는데 천무량이 다시 소매를 당겼다⁠.

“⁠그러니 이렇게 하겠소⁠.⁠” 노승이 말했다⁠. “⁠이 두루마리를 낸 사람들이 직접 맹에 와서 제 손으로 냈다고 하면⁠, 그날 날짜로 다시 접수하시오⁠. 선거 전까지⁠. 그동안 투함 열쇠는 원로당이 맡소⁠. 감찰관과 실장의 열쇠를 둘 다 거두시오⁠.⁠” 노승이 편지를 집어 총관에게 건넸다⁠. “⁠편지는 선거가 끝나고 원로회가 다시 보겠소⁠.⁠”

총관이 편지를 받아 소매에 넣었다⁠. 다름은 소매가 볼록해지는 것을 보았다⁠. 유중함이 원로당에도 하나 있었다⁠.

*

원로당을 나서는 복도에서 남궁태열이 다름을 불러 세웠다⁠. 호위도 없이 혼자였다⁠. 복도 창으로 숭산의 봄볕이 비스듬히 들어와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닥에 길게 늘였다⁠.

“⁠남 주사⁠. 자네 일하는 것을 들었네⁠. 금칠 패를 걷어 낸 주사⁠.⁠”

“⁠번호표 순서대로 할 뿐입니다⁠.⁠”

“⁠번호표⁠.⁠” 남궁태열이 번호표라는 말을 혀 위에서 굴렸다⁠. “⁠총관부에 주사 자리가 하나 비네⁠. 칠품이야⁠. 학 흉배도 그제야 제 품계를 찾는 게지⁠. 개봉 어머님께 집 한 채를 드리는 것도 어렵지 않고⁠.⁠”

다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궁태열은 기다렸다⁠. 기다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가주님 말씀을 들으려면⁠,⁠” 다름이 말했다⁠. “⁠번호표를 뽑으셔야 합니다⁠. 저는 지금 이백열 번째 손님하고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오늘 아침 민원실 통에서 마지막으로 나간 번호입니다⁠.⁠”

남궁태열의 눈썹 한쪽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보는 얼굴이었다⁠.

“⁠자네 실장한테 갈대울 이야기를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그럼 내 형 이야기도 들었겠군⁠.⁠” 남궁태열이 창밖을 보았다⁠. 숭산 남쪽 고개가 아지랑이 속에 흐렸다⁠. “⁠형님은 저 고개에서 죽었네⁠. 30년 전⁠, 맹이 갈라진 이듬해에⁠. 산에서 내려온 사파 무리가 길을 막았지⁠. 그때 사파들도 처음엔 감자를 심겠다고 내려왔다네⁠.⁠” 남궁태열이 다름을 보았다⁠. “⁠흑석곡 서른 가구⁠. 저 산 밑에 서른 가구가 있으면 다음 대란 때 서른이 삼백이 되고⁠, 삼백이 삼천이 되네⁠. 지금 서른을 산 밖으로 내보내면 삼천이 사네⁠. 나는 그 계산을 하는 사람이야⁠.⁠”

“⁠흑석곡은 칼을 내려놓았습니다⁠.⁠”

“⁠3년 전 겨울⁠, 우리 쌀 수레 셋을 턴 손으로 내려놓았지⁠. 그 손이 부채를 쥐고 있었다는 것도 아네⁠.⁠” 남궁태열의 목소리는 끝까지 낮았다⁠. “⁠남 주사⁠, 나는 바보가 아니네⁠. 사파 여자가 감자를 심는다고 믿을 만큼 젊지도 않고⁠.⁠”

남궁태열은 다름을 지나쳐 걸어갔다⁠. 몇 걸음 가다가 멈추고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총관부 자리는 선거 날까지 비워 두겠네⁠. 번호표 없이⁠.⁠”

남궁태열이 복도 모퉁이로 사라지자 반대편 기둥 뒤에서 흰 도포 자락이 나왔다⁠. 무당파 젊은 도사 하나가 다름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청송 진인의 제자라고 했다⁠.

“⁠장문께서 흑석곡 채주를 한번 뵙고 싶어 하십니다⁠. 산 밑 서른 가구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신답니다⁠.⁠”

“⁠채주는 깃발을 내렸습니다⁠. 매향 씨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럼 매향 씨께 전해 주십시오⁠. 무당은 문이 넓다고⁠.⁠”

도사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넓은 문이 무슨 말인지 다름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원로당 앞에서 청송이 웃던 눈가가 떠올랐다⁠.

*

정문 돌계단 아래 버드나무 밑에 매향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다가 다름이 내려오자 탁 접었다⁠.

“⁠어떻게 됐어⁠?⁠”

다름은 원로회의 결정을 말했다⁠. 민원인이 직접 와서 다시 내면 받는다⁠. 선거 전까지⁠. 편지는 선거 뒤로 미뤄졌다⁠. 남궁태열이 복도에서 한 말도 다 했다⁠. 쌀 수레 이야기에서 매향의 입술이 한 번 다물렸다가 풀렸다⁠.

“⁠열두 마을⁠, 마흔 건이야⁠.⁠” 매향이 손가락을 접어 보았다⁠. “⁠석교촌 우돌은 맹이 무섭대⁠. 안골 닭 주인은 다리를 절고⁠. 하촌 할멈은 아직 아들 사십구재도 안 지났어⁠.⁠”

“⁠압니다⁠.⁠”

“⁠선거가 6월 15일이지⁠? 두 달 반⁠.⁠” 매향이 다름의 관복 소매를 움켜쥐었다⁠. 학 두 마리가 구겨졌다⁠. “⁠가자⁠. 마을마다 업고라도 데려오지⁠.⁠”

“⁠지금 말입니까⁠? 저는 오후에 창구가 있습니다⁠.⁠”

“⁠오늘 창구는 왕 주사 아저씨가 봐⁠. 아까 정문에서 만났어⁠. 허리가 또 아프대⁠.⁠” 매향이 다름을 끌고 돌계단을 내려갔다⁠. “⁠거짓말이야⁠. 내가 만두 다섯 개 줬거든⁠.⁠”

정문 위 창에서 왕춘삼이 만두를 문 채 손을 흔들었다⁠. 다름의 창구 탁자에는 「⁠담당자 출장중⁠」 패가 새로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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