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26자)

공중전화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상가 앞 공중전화 부스는 유리 한 장이 금 가 있었고⁠, 금 간 틈으로 십일월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냈다⁠. 용준은 편우곤의 슬리퍼를 끌고 나와 부스 문을 당겼다⁠. 동전 구멍 위에 「⁠카드 전용⁠」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카드가 없었다⁠. 용준은 츄리닝 바지 주머니를 뒤지다가 거실 탁자에 있던 편우곤의 지갑을 떠올리고 도로 뛰어 올라갔다⁠. 계단을 다섯 층 뛰어 올라가서 지갑을 들고 다섯 층을 뛰어 내려왔다⁠. 숨이 조금 찼고⁠, 무릎은 끝까지 조용했다⁠. 지갑 안에는 앞니 빠진 아이의 증명사진⁠, 지난주 주택복권 두 장⁠, 꼬깃꼬깃한 만 원 한 장⁠, 그리고 「⁠전화카드 3⁠,000원⁠」이라고 찍힌 플라스틱 카드가 있었다⁠. 용준은 복권을 꺼내 번호를 보았다⁠. 하나도 맞을 리가 없었다⁠. 당첨 번호까지 외워 오지 못한 것이 처음으로 아까웠다⁠.

카드를 꽂자 액정에 남은 금액이 떴다⁠. 용준은 삐삐의 녹색 화면을 보면서 버튼을 하나씩 눌렀다⁠. 공⁠, 일⁠, 공⁠. 손가락이 떨려서 두 번 틀렸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뚜⁠, 뚜⁠, 하는 대신 물속처럼 먹먹한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 어디선가 일정한 박자로 삑⁠, 삑 하는 소리가 들어왔다⁠. 병원 기계였다⁠. 심장이 뛰는 대로 화면에 선을 긋는 기계⁠. 2027년 봄에 장인어른 병실에서 사흘을 들은 소리였다⁠.

“⁠보호자분⁠, 잠깐 나와 계시겠어요⁠?⁠”

모르는 여자 목소리 뒤로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스물여덟 해를 같이 산 목소리였다⁠.

“⁠여보⁠. 내 말 들려⁠? 의사 선생님이 열흘 안에 안 깨면 어렵대⁠. 열흘이래⁠. 알아들었어⁠?⁠”

“⁠여보⁠, 나야⁠. 나 여기 있어⁠.⁠”

용준은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2027년의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렸고⁠, 아내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아내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다른 숨소리가 수화기 가득 찼다⁠. 깊고 느린 숨이었다⁠. 용준의 숨이 아니었다⁠. 이윽고 전화카드 액정의 숫자가 깎이는 소리 같은 딸깍과 함께 선이 끊겼다⁠.

부스 유리에 용준의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 액정에 남은 금액이 이백 원 줄어 있었다⁠. 일 분이었다⁠.

열흘⁠. 오늘이 18일이니 열흘째 되는 밤은 28일 금요일이었다⁠. 원사 어음이 돌아오는 날과 같은 밤이었다⁠.

*

11월 19일 수요일 아침⁠, 본사 옥상의 물탱크 뒤는 영업부 사람들이 담배 피우는 자리였다⁠. 순구가 라이터를 두 번 헛켜고 세 번째에 불을 붙였다⁠. 용준이 손사래를 치자 순구가 담뱃갑을 도로 넣었다⁠.

“⁠니 진짜 이상하다⁠. 어제 저녁에 끊었나⁠?⁠”

“⁠스무 해 전에 끊었어⁠.⁠”

“⁠니 나이가 서른일곱이다⁠. 열일곱에 끊었다꼬⁠? 국민학교 때 피웠나⁠?⁠”

용준은 웃을 수가 없었다⁠. 몸은 담배를 원했다⁠. 손가락이 저절로 안주머니를 더듬었고⁠, 편우곤의 버릇이 손끝에서 꼼지락거렸다⁠. 용준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28일이야⁠, 순구야⁠. 원사 어음 십이억⁠. 대서은행이 26일에 만기 연장을 안 해 준다⁠. 그리고 금요일 밤에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에 돈 꿔 달라고 발표한다⁠.⁠”

국제통화기금은 나라에 달러가 바닥났을 때 돈을 꿔 주는 국제기구였다⁠. 순구는 국제기구 이름을 처음 듣는 얼굴이었다⁠. 대신 숫자는 알아들었다⁠. 영업 십 년이면 어음 금액이 무슨 뜻인지는 몸이 먼저 알았다⁠.

“⁠니 그거 어디서 들었노⁠? 자금부 김 상무가 술 먹고 흘렸나⁠?⁠”

“⁠꿈에서 봤다고 해 두자⁠.⁠”

순구는 담배를 꺼내지 않은 손으로 물탱크를 짚었다⁠. 한참 있다가 순구가 고개를 들었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볼이 붉었다⁠.

“⁠그라믄 오늘 뺀다⁠.⁠”

“⁠뭘⁠?⁠”

“⁠사내 예금⁠. 사백 다 빼고⁠, 사표 쓰고⁠, 대구 내려간다⁠. 엄마 허리 올해 안에 수술시키고 원단 가게 하나 차린다⁠. 니 꿈은 내가 믿는다⁠. 니가 십 년 동안 거짓말한 적 없다⁠.⁠”

순구는 벌써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용준이 순구의 팔을 잡았다⁠.

“⁠지금 빼면 안 돼⁠.⁠”

“⁠와⁠?⁠”

“⁠네가 빼면 자금부 미스 정이 본다⁠. 미스 정이 점심때 경리 언니들한테 말한다⁠. 오후에 공장에서 전화 온다⁠. 내일 아침 창구에 줄이 선다⁠. 줄이 서면 은행이 그날로 알고⁠, 그러면 열흘이 아니라 하루야⁠.⁠”

말을 다 하고 나서야 용준은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누구의 말인지 알았다⁠. 어제 창가에서 탁재황이 블라인드 한 칸을 벌리며 한 말이었다⁠. 순구도 알았다⁠. 순구의 눈이 가늘어졌다⁠.

“⁠니 지금 회장님 말 하나⁠?⁠”

“⁠그게 아니라⁠.⁠”

“⁠아이믄 뭔데⁠? 부도 난다캐서 내 돈 내가 빼겠다는데⁠, 니가 와 막노⁠? 니도 회장님 줄 섰나⁠?⁠”

옥상 문이 끼익 열리고 총무부 직원 둘이 담배를 물고 나왔다⁠. 순구가 입을 다물었다⁠. 용준은 순구의 팔을 놓지 않고 목소리를 낮췄다⁠.

“⁠월요일까지만⁠. 월요일까지 내가 다 빼낼 길을 만든다⁠. 너 혼자 말고 이백 명 다⁠.⁠”

“⁠이백 명을 니가 우째 빼는데⁠?⁠”

“⁠모르겠어⁠. 그러니까 닷새만⁠.⁠”

순구는 한참 용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편우곤의 얼굴이었다⁠. 순구는 결국 담배를 꺼내 물었고⁠, 이번에는 라이터가 한 번에 켜졌다⁠.

“⁠월요일⁠. 니 그날 아무것도 몬 내놓으면 내는 뺀다⁠. 그라고 2차 신청서는 내 안 쓴다⁠.⁠”

*

영업2과 회의실 화이트보드에는 지난달 매출 그래프가 지워지다 만 채 남아 있었다⁠. 용준은 과원 열한 명을 앉혀 놓고 신청서 묶음을 탁자 가운데 놓았다⁠.

“⁠이거 쓰지 마⁠. 이유는 묻지 말고⁠.⁠”

과원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영업 3년 차 대리가 손을 들었다⁠.

“⁠과장님⁠, 회장님이 목요일까지라고 하셨는데요⁠. 안 쓰면 저희 고과는요⁠?⁠”

“⁠고과는 내가 진다⁠.⁠”

“⁠그럼 과장님도 안 쓰십니까⁠?⁠”

“⁠안 써⁠.⁠”

과원들이 술렁거렸다⁠. 술렁거림이 잦아들 무렵⁠, 맨 끝자리에서 막내가 신청서 한 장을 끌어당겼다⁠.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이었다⁠.

“⁠저는 쓰겠습니다⁠.⁠”

용준은 막내를 보았다⁠. 스물여덟 살의 자기는 볼이 홀쭉했고⁠, 넥타이 매듭이 엄지만 하게 뭉쳐 있었다⁠. 넥타이 하나 제대로 맬 줄 모르던 때였다⁠.

“⁠반용준⁠. 쓰지 마⁠.⁠”

“⁠어머니가 화곡동 반지하 전세에 사십니다⁠. 주식이 오르면 지상으로 옮겨 드릴 수 있습니다⁠. 회장님이 오른다고 하셨습니다⁠.⁠”

“⁠안 올라⁠.⁠”

“⁠과장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용준은 대답 대신 막내 책상 서랍을 떠올렸다⁠. 둘째 칸 서류철 뒤에 컵라면 세 개⁠, 맨 밑 칸에 자금부 경리 직원에게 줄까 말까 석 달째 망설인 손수건 한 장⁠. 용준은 손수건을 끝내 주지 못한 사람이 자기라는 것도 알았다⁠.

“⁠너 둘째 서랍에 컵라면 숨겨 놨지⁠. 그거 오늘 먹어⁠. 유통기한 지났어⁠.⁠”

막내의 귀가 빨개졌다⁠. 과원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순구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쳤다⁠. 막내는 웃음이 잦아들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신청서에 볼펜을 대고 또박또박 이름을 썼다⁠.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은 지는 것을 싫어했다⁠.

“⁠과장님은 주식 사셔야 할 이유가 없으시겠지요⁠. 아파트도 있으시고⁠.⁠”

“⁠아파트 있는 사람이 더 망해⁠.⁠”

막내는 신청서를 들고 일어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꼰대⁠.⁠”

회의실 문이 닫혔다⁠. 순구가 입을 막고 웃다가 용준의 표정을 보고 손을 내렸다⁠.

“⁠니 저 아 와 그래 잡노⁠? 저 아는 니가 키운 아다⁠.⁠”

“⁠그래서 잡는 거야⁠.⁠”

*

점심이 끝나자 용준은 혼자 4층으로 올라갔다⁠. 회장실 앞 비서실에는 가죽 소파 두 개와 수족관 하나가 있었고⁠, 수족관 산소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가는 소리가 방 안의 유일한 소리였다⁠. 비서는 용준이 문을 열기도 전에 일어나 있었다⁠.

“⁠편 과장님⁠, 약속 있으세요⁠?⁠”

“⁠회장님께 오 분만⁠.⁠”

“⁠회장님은 오늘 은행 세 군데 도셔요⁠. 저녁엔 대서은행 지점장님이랑 약주 하시고요⁠. 내일 다시 여쭤 볼게요⁠.⁠”

비서 책상 위에 일정표가 펼쳐져 있었다⁠. 용준은 거꾸로 놓인 글씨를 눈만 굴려 읽었다⁠. 남창은행 열한 시⁠, 운봉은행 두 시⁠, 대서은행 엄우택 지점장 일곱 시⁠. 은행 이름 셋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원래의 1997년에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은 이 일정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회장이 날마다 은행 세 곳을 돌며 웃는 얼굴로 한 달씩 만기를 미뤄 온다는 것도⁠, 부도가 나고 한참 뒤에야 신문에서 읽었다⁠.

“⁠기다리겠습니다⁠.⁠”

“⁠과장님⁠, 그러시면 제가 곤란해요⁠.⁠”

비서는 웃으며 인삼 사탕 그릇을 내밀었다⁠. 용준은 사탕을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소파에 앉았다⁠. 사탕은 쓰고 달았다⁠. 사십 분이 지나도록 두꺼운 나무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복도 끝에서 자금부 상무가 걸어왔다⁠. 상무는 용준 앞에 멈추고 넥타이를 고쳐 맸다⁠.

“⁠편 과장⁠, 영업부 과장이 여기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회장님 뵐 일이 있으면 부장 거쳐서 나한테 올려⁠.⁠”

“⁠상무님⁠, 28일 원사 어음 얼마인지 아십니까⁠?⁠”

상무의 눈꺼풀이 한 번 떨렸다⁠. 상무는 대답 대신 비서에게 손짓을 했고⁠, 비서가 사탕 그릇을 거둬 갔다⁠. 용준은 입 안에 남은 사탕을 깨물며 계단으로 내려왔다⁠. 과장 명함 한 장으로는 문 앞 소파까지가 끝이었다⁠.

*

로비 텔레비전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후 뉴스 자막이 바뀌었다⁠. 「⁠경제부총리 전격 교체⁠」 아나운서가 금융시장 안정 대책을 읽어 내려갔다⁠. 환율이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폭을 넓힌다는 대목에서 총무부장이 혀를 찼다⁠.

“⁠그럼 달러가 더 뛴다는 거 아이가⁠?⁠”

“⁠내린다는 거지⁠. 정부가 막겠다는 거잖아⁠.⁠”

“⁠막을 거면 사람을 와 바꾸노⁠?⁠”

경비 아저씨가 텔레비전 볼륨을 올리며 끼어들었다⁠.

“⁠우리 아들이 미국 유학 가 있는데 학비를 달러로 부치잖아요⁠. 지난달보다 벌써 한 달 치 밥값이 더 나가요⁠. 이러다 애가 라면만 먹겠어⁠.⁠”

“⁠라면도 달러로 사면 비싸지⁠.⁠”

누가 받아친 말에 몇이 웃었다⁠. 웃음은 짧았다⁠. 화면 밑으로 오늘 환율이 숫자로 지나갔고⁠, 경비 아저씨가 손가락을 접어 가며 아들 학비를 다시 따져 보다가 그만두었다⁠. 총무부장이 신문을 둘둘 말아 겨드랑이에 꼈다⁠.

용준은 텔레비전 앞을 지나가다 멈추지 않았다⁠. 다 아는 뉴스였다⁠. 모르는 것은 막내가 신청서를 어디로 들고 갔는지였다⁠. 3층 영업2과 막내 책상이 비어 있었다⁠. 서랍 둘째 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컵라면은 그대로 있었다⁠.

“⁠막내 어디 갔어⁠?⁠”

“⁠회장실이요⁠. 회장님께 직접 드리겠다고요⁠.⁠”

용준은 계단을 두 칸씩 뛰었다⁠. 4층 복도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어서 구두 소리가 묻혔다⁠. 비서실 문 앞에서 막내가 비서에게 신청서를 내밀고 있었다⁠. 비서가 웃으며 받으려는 순간⁠, 용준이 막내의 손목을 잡았다⁠.

“⁠내놔⁠.⁠”

“⁠과장님⁠, 이거 제 겁니다⁠.⁠”

“⁠네 거라서 내놓으라는 거야⁠.⁠”

막내가 손목을 비틀었다⁠. 스물여덟 살의 힘이 생각보다 셌다⁠. 신청서 모서리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비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다음 순간 비서실 안쪽⁠, 두꺼운 나무 문이 안에서 열렸다⁠. 인삼 사탕 냄새가 먼저 나왔다⁠. 탁재황이 돋보기를 이마에 올린 채 문간에 나와 있었다⁠. 눈가 주름이 귀까지 갔다⁠.

“⁠편 과장⁠, 들어와⁠. 반용준이는 내려가고⁠. 신청서는 두고⁠.⁠”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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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솔2026.11.01· 2화

    「카드 전용」 공중전화 앞에서 주머니 뒤지는 장면, 그 시절 겪어 본 사람만 아는 답답함이에요.

    • 노범우작가2026.11.01

      1997년 십일월에는 카드 전화가 막 늘던 때였어요. 회귀한 사람이 제일 먼저 막히는 게 그런 작은 것들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