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08자)

회장실 문턱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회장실에서는 가위 소리가 났다⁠. 사각⁠, 사각⁠. 탁재황이 창가 탁자에 놓인 분재 소나무의 잔가지를 치고 있었다⁠. 벽시계 초침 소리가 가위 소리 사이를 메웠고⁠, 책상 위에는 벽돌만 한 휴대전화가 안테나를 세운 채 누워 있었다⁠. 벽에는 흑백 사진 한 장이 액자에 들어 있었다⁠. 판자 공장 안에 직기 네 대가 놓였고⁠, 직기 앞에 앞치마를 두른 여공 넷과 머리를 빡빡 민 젊은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1968⁠. 대구 비산동⁠」

“⁠앉아⁠.⁠”

용준은 소파에 앉았다⁠. 막내가 남기고 간 신청서는 탁재황의 책상 한가운데 있었다⁠. 모서리가 찢어져 있었다⁠.

“⁠네가 오늘 비서실에서 김 상무한테 어음 얘기를 했다며⁠. 금액도 아나⁠?⁠”

“⁠십이억입니다⁠. 원사 업체 세 곳 어음이 한꺼번에 28일에 돌아옵니다⁠.⁠”

가위 소리가 멈췄다⁠.

“⁠은행은⁠?⁠”

“⁠남창은행 만기가 이번 금요일입니다⁠. 그건 회장님이 연장하십니다⁠. 운봉은행이 다음 주 화요일⁠, 대서은행이 수요일입니다⁠. 대서은행은 연장을 안 해 줍니다⁠.⁠”

탁재황은 가위를 내려놓고 소나무 가지에 묻은 송진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오래 닦았다⁠.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은 다음에야 탁재황이 용준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오래 보는 사람이었다⁠.

“⁠이 숫자는 이 건물에서 나하고 김 상무만 안다⁠. 김 상무는 입이 무겁고⁠. 너는 어디서 들었나⁠?⁠”

“⁠원사 업체 사장들 술자리에서 들었습니다⁠. 영업 십 년이면 들리는 게 있습니다⁠.⁠”

“⁠거짓말을 해도 영업부 과장답게 하네⁠.⁠”

탁재황이 책상 서랍을 열고 인삼 사탕을 두 개 꺼내 하나를 용준 앞에 놓았다⁠. 다른 하나는 까서 입에 넣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까부터 생각했다⁠. 자르면 네가 밖에 나가서 떠든다⁠. 떠들면 하루다⁠. 그냥 두면 네가 안에서 떠든다⁠. 그것도 하루다⁠.⁠”

“⁠떠들 생각 없습니다⁠.⁠”

“⁠그럼 뭘 원하나⁠?⁠”

용준은 사탕을 쥐었다⁠. 비닐이 손바닥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영업2과 신청서 열두 장⁠, 안 받겠습니다⁠. 우리 과 사람들 이름으로 빚 안 지게 해 주십시오⁠.⁠”

“⁠열두 장이면 일억 이천이다⁠. 그 돈은 네가 구해 오나⁠?⁠”

“⁠구해 오겠습니다⁠.⁠”

탁재황이 웃음소리를 냈다⁠. 소리 없이 웃던 사람이 처음으로 낸 소리였다⁠.

“⁠좋다⁠. 내가 하나 배운 게 있어⁠. 모르는 놈보다 아는 놈이 무섭다⁠. 아는 놈은 옆에 둬야 한다⁠.⁠”

탁재황은 비서실 인터폰을 눌렀다⁠. 김 상무를 불렀고⁠, 김 상무가 오자 종이 한 장에 만년필로 몇 줄을 썼다⁠. 「⁠자금 대책반장 편우곤⁠. 회장 직속⁠. 1997⁠. 11⁠. 19⁠」

“⁠오늘부터 너는 대책반장이다⁠. 반원은 너 하나⁠. 은행 세 곳 서류⁠, 공장 셋 원가표 다 봐도 된다⁠. 대신 봐도 입은 다문다⁠. 열흘 안에 돈 나올 구멍을 찾아와⁠. 영업2과 신청서는 그때까지 내 서랍에 둔다⁠.⁠”

탁재황은 막내의 찢어진 신청서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 용준에게는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꼭 감옥 문 잠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김 상무가 문 앞에서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하나만 더 묻자⁠. 아롬이 피아노 학원은 계속 다니나⁠?⁠”

용준은 한 박자 늦었다⁠. 편우곤의 딸이 피아노를 치는지 용준은 몰랐다⁠.

“⁠예⁠. 다닙니다⁠.⁠”

“⁠그만둔 지 석 달 됐다고 지난달 네가 그러더라⁠. 학원비 아끼려고⁠.⁠”

탁재황은 사탕을 와작 깨물었다⁠. 눈가 주름은 그대로였다⁠.

“⁠나가 봐⁠, 대책반장⁠.⁠”

*

3층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순구가 옆자리로 왔다⁠. 회장 직속 대책반장 발령은 점심 전에 사내 방송으로 나갔다⁠. 방송이 나간 뒤로 3층 사람들은 용준을 보면 인사를 한 번 더 했다⁠.

“⁠축하한다⁠, 반장님⁠.⁠”

“⁠순구야⁠.⁠”

“⁠반장님은 오줌도 회장실 가서 누시지⁠, 와 서민 화장실을 쓰십니꺼⁠?⁠”

순구는 바지 지퍼를 올리면서 용준을 보지 않았다⁠.

“⁠옥상에서는 니가 내 팔 잡고 회장님 말 하더라⁠. 오후에는 회장님이 니 어깨에 손 얹고 나오더라⁠. 내는 그 두 개가 같은 얘기 같다⁠.⁠”

“⁠내가 들어가야 공장 서류를 볼 수 있어⁠.⁠”

“⁠서류 보고 뭐 할 낀데⁠? 니는 반장 되고⁠, 내 사백은 월요일까지 묶여 있다⁠. 니가 막아서⁠.⁠”

순구는 손을 씻지 않고 나갔다⁠. 문이 닫히다 말고 도로 열렸다⁠. 순구가 고개만 들이밀었다⁠.

“⁠그라고 손 씻어라⁠, 반장님⁠. 회장님 악수하실 끼다⁠.⁠”

*

영업2과로 돌아오니 막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과장님⁠, 아니 반장님⁠. 제 신청서는요⁠?⁠”

“⁠회장님 서랍에 있어⁠.⁠”

“⁠찢어졌던데요⁠. 다시 써서 올릴까요⁠?⁠”

“⁠열흘만 기다려⁠. 열흘 뒤에도 쓰고 싶으면 그때 내가 볼펜 빌려줄게⁠.⁠”

막내는 입을 삐죽거리다 자리로 돌아갔다⁠. 볼펜을 귀에 꽂고 전화를 돌렸다⁠. 「⁠네⁠, 탁산섬유 영업2과 반용준입니다⁠」 하는 목소리가 사무실을 건너왔다⁠. 서른 해 동안 수천 번 한 인사였다⁠. 용준은 제 인사를 남의 입으로 처음 들었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높았고⁠, 생각보다 성실했다⁠.

*

퇴근 시간⁠, 김 상무가 주차장 기둥 옆에서 용준을 불러 세웠다⁠. 쉰 남짓⁠, 머리를 짧게 깎았고 양복 소매가 반질반질했다⁠. 손에 누런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회장님이 주라고 하셔서 주는 거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게 아니고⁠.⁠”

“⁠알겠습니다⁠.⁠”

“⁠편 과장⁠, 아니 반장⁠. 하나만 묻자⁠. 너 회장님 등에 칼 꽂으러 들어온 거냐⁠?⁠”

주차장 천장에서 형광등이 지지직거렸다⁠. 회장의 검은 세단 옆에서 운전기사가 걸레로 유리를 닦고 있었다⁠. 용준은 봉투를 받지 않고 김 상무를 보았다⁠.

“⁠상무님은 28일 넘기면 회사가 산다고 보십니까⁠?⁠”

“⁠나는 회장님이 산다고 하면 산다고 본다⁠.⁠”

김 상무는 봉투로 자기 손바닥을 툭툭 쳤다⁠.

“⁠나는 1971년에 대구 공장 경리로 들어왔다⁠. 장판 깔린 사무실에서 주판 놓을 때부터 회장님 밑에 있었어⁠. 오일쇼크 때도⁠, 팔십 년 불경기 때도 회장님은 웃으면서 은행 갔다 오셨고 회사는 살았다⁠. 너는 그걸 못 봤지⁠.⁠”

“⁠이번엔 은행이 먼저 죽습니다⁠.⁠”

김 상무가 웃었다⁠. 탁재황의 웃음을 닮은 웃음이었다⁠. 오래 같이 산 부부가 얼굴이 닮듯 오래 같이 일한 사람은 웃음이 닮았다⁠.

“⁠은행이 죽는다고⁠? 반장⁠, 은행은 안 죽어⁠. 나라가 안 죽이거든⁠.⁠”

김 상무는 봉투를 용준의 가슴에 밀어 붙이고 돌아갔다⁠. 몇 걸음 가다가 고개만 돌렸다⁠.

“⁠거기 든 거 다 보고⁠, 집에 두지 말고 내일 도로 가져와⁠. 반장 마누라가 수학 선생이라며⁠. 숫자 보면 다 알아⁠.⁠”

용준은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을지로 3가역 계단 입구에 붙은 벽보가 바람에 펄럭였다⁠. 대통령 선거가 한 달 남았다는 선관위 벽보였다⁠. 용준은 선거가 누구의 승리로 끝나는지 알았고⁠,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

상계동 아파트 식탁에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와 콩자반이 올라왔다⁠. 아롬은 콩자반을 하나씩 집어 밥 위에 줄을 세웠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부총리가 바뀐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었다⁠. 금채가 리모컨으로 소리를 줄였다⁠.

“⁠회사에서 반장 됐다며⁠? 김 대리 부인이 전화했어⁠. 반장이면 월급 올라⁠?⁠”

“⁠아직 몰라⁠.⁠”

“⁠반장인데 몰라⁠? 반장은 애들도 표 받아서 되는 거야⁠.⁠”

밥을 다 먹고 용준은 자기 그릇을 들고 개수대로 갔다⁠. 2027년에는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는 늘 용준 몫이었다⁠. 아내가 허리를 다친 뒤 스무 해 가까이 그랬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찌개 냄비부터 불렸다⁠. 등 뒤가 조용했다⁠. 돌아보니 금채가 행주를 든 채 서 있었고⁠, 아롬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아빠를 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설거지해⁠.⁠”

“⁠보고 있어⁠.⁠”

금채가 다가와 용준의 손에서 수세미를 빼앗았다⁠. 그리고 용준의 와이셔츠 깃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담배 냄새가 안 나⁠.⁠”

“⁠끊으려고⁠.⁠”

“⁠결혼 십 년 동안 세 번 끊는다고 했어⁠. 세 번 다 사흘 갔어⁠. 근데 이번엔 시작부터 냄새가 없어⁠.⁠”

금채는 숫자를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동네 보습학원에서 중학생들한테 방정식을 가르쳤다⁠. 금채의 눈은 문제를 풀 때처럼 한 줄씩 내려갔다⁠.

“⁠아롬이 보고 오늘 아침에 공주님이라 그랬지⁠?⁠”

“⁠그랬나⁠?⁠”

“⁠당신은 아롬이를 꼬맹이라 불러⁠. 꼬맹이 아니면 똥강아지⁠. 공주는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야⁠. 애 버릇 나빠진다고⁠.⁠”

아롬이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아빠 오늘 컵을 위 칸에 넣었어⁠. 우리 컵은 아래 칸이야⁠.⁠”

모녀가 나란히 용준을 보았다⁠. 용준은 젖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 거짓말을 해도 영업부 과장답게 해야 했다⁠.

“⁠회사가 좀 어려워⁠. 그래서 사람이 좀 바뀌었어⁠.⁠”

“⁠회사가 어려우면 사람이 설거지를 해⁠?⁠”

“⁠해 보니까 마음이 편하더라⁠.⁠”

금채는 수세미를 개수대에 내려놓고 행주로 손을 닦았다⁠. 한참 용준의 얼굴을 보다가 짧게 말했다⁠.

“⁠당신 누구야⁠?⁠”

반은 웃는 얼굴이었고 반은 웃지 않는 얼굴이었다⁠. 용준도 반만 웃었다⁠.

“⁠대책반장⁠.⁠”

“⁠웃기지 마⁠. 우리 사내 예금 천오백 있는 거 알지⁠? 지난봄에 우리사주 산다고 대출받은 이천도 있고⁠. 회사가 어렵다는 게 그 돈 얘기야⁠?⁠”

용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대답이 되었다⁠. 금채의 입술이 얇아졌다⁠.

“⁠내일 저녁에 다시 물을 거야⁠. 그때까지 생각해 와⁠.⁠”

*

밤 열한 시⁠, 식탁에 불 하나만 켜 두고 용준은 김 상무가 퇴근길에 넘겨준 서류 봉투를 열었다⁠. 누런 봉투 겉에 「⁠대책반 열람용 · 반출 금지⁠」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은행 세 곳의 대출 약정서 사본⁠, 공장 셋의 원가표⁠, 원사 업체 어음 목록⁠. 숫자는 2027년의 용준이 기억하는 것과 거의 같았다⁠.

맨 뒤에 클립으로 묶인 종이 몇 장이 따로 있었다⁠. 「⁠우리사주 2차 청약 접수 현황⁠」

대구 염색공장 쉰여덟 명 접수 완료⁠. 구미 직물공장 쉰두 명 접수 완료⁠. 안산 봉제공장 마흔 명 접수 완료⁠. 합계 백오십 명⁠. 합계 밑에 김 상무의 글씨로 한 줄이 더 있었다⁠.

「⁠21일(⁠금⁠) 대서은행 을지로지점 일괄 제출⁠. 대출 실행 24일(⁠월⁠)⁠.⁠」

대구 공장 접수 현황 옆에는 공장장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구미 공장 옆에는 도장 대신 굵은 볼펜 글씨로 「⁠직포반 반장 하소례 일괄 수거⁠」라고 적혀 있었다⁠. 용준은 하소례라는 이름을 몰랐다⁠. 서른 해 전의 막내는 본사 3층 밖으로 나가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공장 사람들의 이름은 부도가 나고 노동부 사무실 앞에서 같이 줄을 서면서 처음 알았다⁠.

용준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영업2과 열두 장은 서랍에 들어갔다⁠. 서랍에 들어간 것은 열두 장뿐이었다⁠. 백오십 장은 이미 공장 사무실 금고에서 금요일 아침 화물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재황은 웃으면서 열두 장을 내주었고⁠, 백오십 장은 말하지 않았다⁠.

식탁 위 벽시계가 열한 시 반을 쳤다⁠. 용준은 편우곤의 서류 가방에서 철도 시간표를 찾았다⁠. 서울역 아침 첫 새마을호⁠, 동대구 도착 열한 시 무렵⁠. 안방 문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열흘 가운데 이틀이 벌써 지나가고 있었다⁠. 용준은 새마을호 시간표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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