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42자)

자줏빛 넥타이

IMF 전날로 회귀한 부장 · 노범우

고깃집 불판이 치익 소리를 낼 때마다 반용준의 휴대전화가 같이 울었다⁠. 「⁠부장님 감사했습니다⁠」 밑으로 큰절하는 곰이 열한 마리 줄을 이었고⁠, 누가 손가락이 미끄러졌는지 생일 축하 폭죽이 하나 터졌다가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로 바뀌었다⁠. 용준은 휴대전화를 팔 길이만큼 밀어 놓고 눈을 가늘게 떴다⁠. 돋보기는 양복 안주머니에 있었고⁠, 안주머니를 뒤지는 사이 옆자리 막내 사원이 화면을 대신 읽어 주었다⁠.

“⁠부장님⁠, 1팀에서 곰 또 보냈어요⁠. 이 곰은 절을 두 번 해요⁠.⁠”

“⁠한 번만 해도 고맙다고 전해⁠.⁠”

2027년 4월⁠, 을지로 3가 뒷골목이었다⁠. 서른 해 원단을 팔았고⁠, 쉰여덟 살 봄에 명예퇴직 봉투를 받았다⁠. 회사는 「⁠명예⁠」라는 글자를 봉투 겉에 제일 크게 찍었다⁠. 후배들이 소주잔을 들고 차례로 와서 첫 계약 이야기와 넥타이 매는 법 이야기를 하고 갔다⁠. 마지막으로 온 과장이 용준의 목을 가리켰다⁠.

“⁠오늘도 그 넥타이시네요⁠. 큰일 있는 날은 꼭 자주색⁠.⁠”

용준은 넥타이 끝을 엄지로 쓸었다⁠. 실이 일어나 보풀이 잡혔고 색은 바래서 팥죽 빛이 되었다⁠. 1997년 겨울⁠, 첫 직장의 과장이 제 목에서 풀어 걸어 준 넥타이였다⁠. 과장은 이태 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사 현장으로 갔고⁠, 2001년에 거기서 돌아오지 못했다⁠.

“⁠준 사람이 있어⁠. 좋은 넥타이 하나는 매고 다니라고⁠.⁠”

밖으로 나오니 을지로 골목에 인쇄소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용준의 발이 저절로 골목 안으로 꺾였다⁠. 첫 직장 탁산섬유의 본사가 있던 사 층 건물은 헐리고 호텔 공사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가림막 끝에 공중전화 부스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을지로에 하나 남은 공중전화라고 누가 동영상 채널에 올린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용준은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댔다⁠. 뚜우 하는 신호음이 났다⁠. 신호음 뒤에서 무언가가 갈비뼈 안쪽을 쥐어짰고⁠, 수화기가 손에서 빠져나가 줄 끝에서 흔들렸다⁠.

*

누가 이불을 걷었다⁠.

“⁠편우곤 씨⁠, 일곱 시 사십 분이야⁠. 오늘 회장님 내려오신다며⁠.⁠”

용준은 눈을 떴다⁠. 형광등 갓에 날벌레 두 마리가 붙어 있었고⁠, 벽에는 은행 이름이 찍힌 달력이 붙어 있었다⁠. 「⁠1997년 11월⁠」 18일에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돋보기 없이 달력 밑의 깨알 같은 음력 글씨까지 읽혔다⁠. 용준은 그게 제일 먼저 무서웠다⁠.

일어나 앉는데 무릎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침마다 두 번은 뚝뚝 꺾이던 무릎이었다⁠. 용준은 다리를 폈다 굽혔다 하다가 화장대 거울 앞으로 갔다⁠. 짙은 검은 머리가 2⁠:8로 갈라져 있었고⁠, 굵은 뿔테 안경 너머로 서른 남짓한 남자가 용준을 보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1997년⁠,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을 데리고 동대문 원단 시장을 돌던 영업2과 과장 편우곤이었다⁠.

용준은 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아팠다⁠.

“⁠아빠 머리 뽑아⁠?⁠”

방문 앞에 책가방을 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홉 살쯤 되어 보였고 앞니 하나가 빠져 있었다⁠. 아이 뒤로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프라이팬을 든 채 지나갔다⁠. 여자가 아이를 보고 짧게 말했다⁠.

“⁠아롬아⁠, 아빠 원래 아침에 이상해⁠. 신발 신어⁠.⁠”

협탁 위에 검은 플라스틱 상자 하나가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았고⁠, 녹색 화면에 숫자 몇 개가 떠 있었다⁠. 용준은 습관대로 화면을 엄지로 밀었다⁠. 숫자는 그대로였다⁠. 한 번 더 밀었다⁠.

“⁠삐삐를 왜 문질러⁠? 때 밀어⁠?⁠”

프라이팬을 든 여자가 문간에 다시 와 있었다⁠. 서른다섯쯤⁠,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고 눈이 빨랐다⁠. 용준은 여자의 이름을 몰랐다⁠. 편우곤 과장의 아내를 본 것은 서른 해 전 부도 난 다음 해⁠, 상계동 아파트를 내놓는다는 전단지 앞에서 한 번이었다⁠.

“⁠충전기가 어딨더라⁠.⁠”

“⁠무슨 기⁠?⁠”

“⁠아니⁠, 건전지⁠.⁠”

“⁠어제 갈았잖아⁠. 당신 진짜 이상하다⁠. 밥 먹어⁠.⁠”

*

탁산섬유 본사는 그대로 있었다⁠. 가림막 대신 「⁠탁산섬유주식회사⁠」라는 금박 간판이 사 층 건물 이마에 붙어 있었다⁠. 용준은 계단을 두 칸씩 뛰어 3층까지 올라갔다⁠. 숨이 차지 않았다⁠. 웃음이 나서 계단참에서 한 번 웃고 다시 뛰었다⁠.

영업2과 문을 열자 담배 연기가 먼저 나왔다⁠. 팩스가 종이를 밀어내는 소리⁠, 다이얼 전화가 돌아가는 드르륵 소리⁠, 누가 볼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꺼번에 귀로 들어왔다⁠. 서른 해 동안 잊고 산 소리였다⁠. 창가 책상에서 머리가 반쯤 벗어진 남자가 호빵을 반으로 가르며 손을 들었다⁠.

“⁠우곤아⁠, 니 늦었다⁠. 회장님 열 시에 내려오신단다⁠. 이거 반 묵어라⁠.⁠”

곽순구 대리였다⁠. 편우곤의 입사 동기였고⁠, 승진 시험에 세 번 떨어진 사람이었다⁠. 용준은 순구가 대구로 내려가 원단 가게를 하다 접었다는 소식까지 알았다⁠. 순구는 호빵을 내밀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니 와 그래 쳐다보노⁠? 내 얼굴에 팥 묻었나⁠?⁠”

“⁠아니⁠. 반가워서⁠.⁠”

“⁠어제 봤다 아이가⁠. 미칫나⁠.⁠”

용준의 눈이 사무실 맨 끝 책상으로 갔다⁠. 무스를 발라 넘긴 머리⁠, 어깨가 남는 남색 양복⁠, 서류를 넘기며 손톱을 깨무는 버릇⁠. 스물여덟 살의 반용준이었다⁠. 영업2과 막내는 과장의 눈길을 느끼고 손을 입에서 뗐다⁠.

“⁠과장님⁠,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손톱 그만 물어⁠. 서른 해 지나도 못 고친다⁠.⁠”

막내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얼굴로 손을 책상 밑에 넣었다⁠. 순구가 킥킥 웃었다⁠.

책상 위에 조간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환율 1⁠,000원 돌파⁠」 어제 처음으로 1달러에 천 원을 넘었다는 기사였다⁠. 용준은 신문을 접었다⁠. 날짜는 다 알았다⁠. 외환 위기 기록 영상을 동영상 채널 알고리즘이 하도 보여 줘서⁠, 밤마다 졸면서 보다가 외워 버린 날짜들이었다⁠. 사흘 뒤 밤에 정부가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리고⁠, 열흘 뒤 금요일에 탁산섬유가 원사 어음을 막지 못한다⁠. 원사 업체에 약속한 날 돈을 주겠다고 써 준 종이가 은행으로 한꺼번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월요일 아침 공장 문에는 쇠사슬이 감겼다⁠.

*

열 시 정각에 복도에서 인삼 사탕 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회장 탁재황이 자금부 상무를 데리고 들어왔다⁠. 예순 남짓⁠, 반백의 머리를 단정히 빗었고⁠, 웃을 때 눈가 주름이 귀까지 갔다⁠.

“⁠우리 영업2과 식구들⁠, 아침은 먹었나⁠?⁠”

탁재황은 책상마다 사탕을 하나씩 놓으며 이름을 불렀다⁠. 순구에게는 대구 어머니 허리를 물었고⁠, 막내에게는 지난달 첫 계약을 칭찬했다⁠. 직원 이백 명의 이름과 집안일을 다 외운다는 말은 소문이 아니었다⁠. 자금부 상무가 서류 묶음을 과장 책상에 내려놓았다⁠.

「⁠우리사주 2차 청약 신청서⁠」

“⁠지난봄에 1차로 우리 식구들이 회사 주인이 됐지⁠. 이번엔 1인당 천만 원이야⁠. 은행 대출은 회사가 다 주선해 놨고⁠, 이자는 회사가 반을 대⁠. 주식이 오르면 다 너희 거다⁠.⁠”

우리사주는 직원이 제 회사 주식을 사는 제도였다⁠. 이번에는 직원 이름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회사 주식을 사라는 말이었다⁠. 원래의 1997년에⁠, 편우곤 과장은 오늘 오후 과원 열한 명을 회의실에 앉히고 신청서를 받았다⁠. 부도가 나고 주식은 휴지가 됐고 대출은 사람 이름에 남았다⁠. 과장은 부하들의 빚을 갚느라 상계동 아파트를 팔았다⁠.

순구가 신청서를 한 장 집어 들었다⁠.

“⁠회장님⁠, 주식 오르면 저도 마누라한테 큰소리 좀 칩니까⁠?⁠”

“⁠너는 장가부터 가야지⁠.⁠”

과원들이 웃었다⁠. 용준은 웃지 않았다⁠. 서류 묶음을 두 손으로 들어 탁재황 앞에 도로 내려놓았다⁠.

“⁠회장님⁠, 이건 제가 못 돌리겠습니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팩스 기계만 혼자 종이를 밀어냈다⁠. 탁재황은 웃는 얼굴을 그대로 둔 채 사탕 봉지를 접었다⁠.

“⁠편 과장⁠, 나랑 바람 좀 쐬자⁠.⁠”

창가로 가자 탁재황이 블라인드 한 칸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을지로 골목에 늦가을 햇빛이 비스듬히 들었고⁠, 인쇄소 앞에서 오토바이가 종이 뭉치를 싣고 있었다⁠.

“⁠너 뭘 들었나⁠?⁠”

“⁠들은 게 아니라 압니다⁠. 이달 28일⁠, 원사 어음 못 막습니다⁠.⁠”

탁재황의 눈가 주름이 그대로 있었다⁠. 목소리만 한 칸 낮아졌다⁠.

“⁠그 말 이 층 밖으로 나가면 사실이 된다⁠. 사내 예금 창구에 직원들 줄이 서면 은행이 그날로 알아⁠. 은행이 알면 열흘이 아니라 하루야⁠. 하루 만에 문 닫는다⁠. 너는 이백 명을 하루 만에 길에 앉히고 싶나⁠?⁠”

사내 예금은 직원들이 월급에서 떼어 회사에 맡긴 돈이었다⁠. 은행보다 이자를 더 쳐줬다⁠. 용준은 대답할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가 멈췄다⁠. 탁재황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목요일 정오까지 영업2과 열두 장⁠. 네 것까지⁠.⁠”

탁재황은 블라인드를 놓고⁠, 돌아서서 과원들에게 다시 웃었다⁠. 사탕 봉지가 부스럭거렸다⁠.

*

점심은 순구가 끌고 간 골목 다방이었다⁠. 금붕어 어항이 계산대 옆에서 보글거렸고⁠, 텔레비전에서는 오후 뉴스가 환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복 차림의 다방 주인이 쟁반을 들고 왔다⁠.

“⁠편 과장님은 늘 드시던 걸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주인이 쟁반을 든 채 순구를 보았다⁠. 순구가 손사래를 쳤다⁠.

“⁠이 사람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입니더⁠. 니 미국 갔다 왔나⁠? 아이스는 또 뭐꼬⁠, 동지섣달에⁠.⁠”

용준은 설탕과 프림이 둘씩 든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혀가 오그라들 만큼 달았고⁠, 이상하게 목이 따뜻해졌다⁠. 서른 해 전에 날마다 마시던 맛이었다⁠. 순구가 안주머니에서 사내 예금 통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도장이 줄줄이 찍힌 칸 끝에 사백만 원 남짓이 있었다⁠.

“⁠회장님 말씀 들었제⁠? 주식 오르면 이거 두 배다⁠. 우리 엄마 허리 수술은 내년 봄에 하고⁠, 내는 이번에 천만 원 넣는다⁠.⁠”

“⁠넣지 마⁠.⁠”

“⁠와⁠?⁠”

용준은 다방 창 너머로 맞은편 건물을 보았다⁠. 2층 원단 도매상 유리문에 「⁠점포 정리⁠」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지난주에는 없었을 종이였다⁠.

“⁠순구야⁠. 내가 오늘 밤 꿈 얘기를 하면 믿을래⁠?⁠”

“⁠니 꿈 얘기는 맨날 돼지 꿈이다⁠. 복권 사라는 거 아이가⁠.⁠”

“⁠이번엔 돼지가 아니야⁠.⁠”

순구는 호빵 먹던 얼굴로 용준을 한참 보다가 통장을 도로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텔레비전에서 앵커가 「⁠외환 당국은 시장 안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라는 원고를 읽었다⁠. 다방 주인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 트로트 가요 프로그램에 맞추었다⁠.

“⁠내는 니 말 들을 끼다⁠. 근데 니가 말을 해야 들을 꺼 아이가⁠.⁠”

용준은 단 커피를 다 마셨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쉰여덟 살의 용준은 지금 순구의 서른일곱 살 친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진짜 친구는 어디 있는지 몰랐다⁠.

*

밤 열두 시⁠, 상계동 아파트의 불이 다 꺼졌다⁠. 용준은 거실 소파에서 모로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안방에서 편우곤의 아내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협탁에서 들고 나온 삐삐가 손바닥 안에서 부르르 떨었다⁠.

녹색 화면에 숫자가 떴다⁠.

「⁠010⁠」

용준은 몸을 일으켰다⁠. 1997년의 전화번호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다⁠. 녹색 숫자가 하나씩 이어졌다⁠. 끝 네 자리까지 다 뜨고 나서야 용준은 숨을 쉬었다⁠. 스무 해 넘게 쓴 자기 휴대전화 번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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