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00자)

대본에 없는 말 두 번, 한 번만 더 하면 멈춥니다

명절용 대여 애인 로봇 · 소예찬

9월 21일 금요일 낮⁠, 해솔은 반죽 묻은 손을 무릎에서 들어 복순 쪽으로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어머님⁠. 부산에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소현의 주머니가 또 떨었다⁠. 「⁠대본 이탈 2/3 — 예⁠, 어머님⁠. 부산에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복순은 손뼉을 한 번 치고 부엌으로 달려가 냉동실 문을 열었다⁠. 갈비 한 짝이 더 나왔다⁠. 사돈 오시면 내놓을 거라며 꽁꽁 언 갈비를 싱크대에 쿵 내려놓는 소리가 거실까지 울렸다⁠.

*

오후 세 시⁠, 소현은 해솔의 니트 소매를 잡아끌고 베란다로 나갔다⁠. 빨래 건조대 옆 채반에서 고추가 마르고 있었고⁠, 14층 아래로 범어동 아파트 단지가 회색 성벽처럼 이어졌다⁠. 소현은 베란다 문을 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부모님을 왜 약속해⁠. 있지도 않은 부모님을⁠.⁠”

“⁠어머님이 부엌에서 물을 틀어 놓고 우셨습니다⁠.⁠”

“⁠너 거실에 있었잖아⁠.⁠”

“⁠물소리 밑에서 들렸습니다⁠. 숨을 두 번 끊어서 쉬셨습니다⁠.⁠” 해솔은 채반의 고추 하나가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바로 놓았다⁠. “⁠대본에는 어머님이 우는 장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본 밖에서 대답했습니다⁠.⁠”

소현은 할 말을 찾지 못해 고추 하나를 집었다 놓았다⁠. 아래층 베란다에서 누가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해솔은 냄새를 맡지 못했다⁠. 대신 소현이 코를 찡그리는 것을 보고 물었다⁠.

“⁠무슨 냄새가 납니까⁠?⁠”

“⁠동그랑땡⁠. 아래층 아줌마는 해마다 태워⁠.⁠”

해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현은 해솔이 방금 아래층 아줌마의 동그랑땡을 어딘가에 넣어 두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여 앱 맨 아래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학습 동기화 · 매일 밤 12시⁠」⁠.

*

오후 다섯 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소현은 작은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벽에는 2008년의 아이돌 포스터가 아직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고등학교 정보 올림피아드 동상 상패가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화면 속 한재필은 동대구역 앞 소담로보틱스 대구 거점 사무실에 있었다⁠. 등 뒤 화이트보드에 「⁠추석 대구·경북 출동 41건⁠」이 적혀 있었다⁠.

“⁠고객님⁠, 이탈 두 건 확인했습니다⁠. 한 번 더 나오면 원격 점검에 들어갑니다⁠. 점검 동안 해솔은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얼마나요⁠?⁠”

“⁠짧으면 한 시간⁠, 길면 하루입니다⁠.⁠”

“⁠본부장님⁠, 상견례가 월요일 열두 시예요⁠. 하루만 늘려 주세요⁠. 돈은 낼게요⁠.⁠”

“⁠연장은 안 됩니다⁠.⁠” 재필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정확히 이 초 지었다⁠. “⁠해솔은 설에 예약이 잡혀 있습니다⁠. 반납하고 나면 다음 손님 집안 족보를 넉 달 동안 외워야 합니다⁠. 그 손님은 작년 설부터 해솔을 기다리셨고요⁠.⁠”

“⁠부모님 모시고 온다고 한 건 해솔이에요⁠. 제가 시킨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탈이라고 부릅니다⁠.⁠” 재필은 헤드셋을 고쳐 썼다⁠. “⁠고객님⁠, 상견례는 어머님께 미루자고 하시면 됩니다⁠. 어머님들은 다 미뤄 주십니다⁠.⁠”

“⁠우리 엄마를 몰라서 그래요⁠.⁠”

“⁠저희가 이 일 여섯 해 했습니다⁠. 다 미뤄 주십니다⁠.⁠”

통화가 끊겼다⁠. 소현은 상패를 엎어 놓았다⁠.

*

부엌에서 엄마가 해솔에게 갈비 양념에 배를 갈아 넣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소현은 작은방 문을 반쯤 열고 둘을 지켜보았다⁠. 해솔은 배를 정확히 이백 그램씩 갈았고⁠, 엄마는 해솔이 강판을 쓸 때마다 저울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니 우리 소현이 어디가 좋더노⁠?⁠”

소현은 숨을 멈췄다⁠. 대본 네 번째 장⁠, 「⁠어머님이 제 어디가 좋으냐고 물으시면⁠」⁠. 새벽 두 시에 쓴 답이 물음 바로 밑에 있었다⁠.

“⁠웃을 때 코에 주름이 세 개 생겨서요⁠.⁠”

“⁠그거는 지 아부지 닮았다⁠.⁠” 엄마가 배즙을 갈비에 붓다 말고 웃었다⁠. “⁠니 아부지도 웃으면 코에 주름이 셋이었다⁠. 그라믄 소현이가 화나면 니는 우째 하노⁠?⁠”

대본에 없는 물음이었다⁠. 해솔은 강판을 내려놓았다⁠. 대답을 하면 이탈 세 번째였다⁠. 해솔은 입을 다문 채 엄마를 보았고⁠, 엄마도 해솔을 보았다⁠. 냉장고가 웅 하고 돌았다⁠. 십 초⁠, 이십 초⁠. 해솔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엄마가 해솔의 등을 철썩 때렸다⁠. “⁠말 아끼는 거 보래⁠. 니 아부지도 내가 화내면 저래 입 꾹 다물고 있었다⁠. 그라다가 이튿날 아침에 딸기 한 상자 사 들고 왔다⁠.⁠”

해솔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다시 갈기 시작했다⁠. 소현은 문을 닫고 엎어 놓은 상패 위에 이마를 댔다⁠. 엄마는 사위 될 사람한테서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사위 될 사람은 대본에 없는 말을 안 하려고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

저녁 일곱 시⁠, 밥상에 갈비찜과 탕국⁠, 동태전⁠, 호박전⁠, 식혜가 올라왔다⁠. 복순이 해솔의 밥그릇에 갈비를 세 덩이 얹었다⁠. 해솔은 대본 다섯 번째 장을 그대로 말했다⁠.

“⁠어머님⁠, 제가 요즘 간헐적 단식 중이라서요⁠.⁠”

“⁠명절에 단식하는 놈이 어디 있노⁠? 니 아부지는 명절에 갈비 다섯 대를 뜯었다⁠.⁠”

복순은 두 덩이를 더 얹었다⁠. 해솔은 젓가락을 들고 갈비를 쳐다보기만 했다⁠. 소현은 엄마가 탕국을 뜨러 일어날 때마다 해솔의 그릇에서 갈비를 하나씩 집어 제 입에 넣었다⁠. 세 번째 갈비를 우물거리는 딸을 보고 복순이 혀를 찼다⁠.

“⁠니는 와 남의 그릇 걸 묵노⁠? 깍두기도 그렇고⁠.⁠”

“⁠배고파서⁠.⁠”

“⁠배고프면 니 그릇에 퍼 주까⁠?⁠”

“⁠아니⁠, 해솔이 그릇에 있는 게 맛있어⁠.⁠”

복순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금방 풀렸다⁠. 엄마는 딸의 말을 연애하는 사람의 말로 알아들었다⁠. 해솔이 갈비 하나를 집어 소현의 밥 위에 얹었다⁠. 대본에 없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앱은 조용했다⁠.

식혜를 마실 때 복순이 장식장 위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니 아부지 가고 아홉 해다⁠. 그 뒤로 이 집에 밥 먹는 소리가 없다⁠.⁠” 엄마는 식혜 그릇 속 밥알을 숟가락으로 건졌다⁠. “⁠해솔이 니 아나⁠? 우리 소현이 아부지 병원에 있을 때 서울서 한 달에 한 번 왔다⁠. 회사가 바쁘다꼬⁠. 내 혼자 넉 달을 병원 보조 침대에서 잤다⁠.⁠”

“⁠엄마⁠, 그 얘기를 왜 지금 해⁠.⁠”

“⁠지금 안 하면 언제 하노⁠? 내가 가고 나면 니는 누구랑 밥 묵노⁠?⁠”

“⁠엄마가 어딜 가는데⁠?⁠”

복순은 대답하지 않고 식혜를 마셨다⁠. 소현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엄마⁠, 상견례 취소해⁠. 해솔이네 부모님 바쁘셔⁠.⁠”

“⁠바쁘면 내가 부산 간다⁠.⁠”

“⁠결혼 안 할 수도 있다고⁠!⁠”

목소리가 커지자 대구 말이 튀어나왔다⁠. 복순이 숟가락으로 밥상을 탁 쳤다⁠.

“⁠그라믄 니 혼자 늙어 죽을 끼가⁠? 니 아부지 숨 넘어갈 때 손잡아 준 사람은 내다⁠. 내 숨 넘어갈 때 니 손은 내가 잡아 주나⁠, 니가 잡아 주나⁠? 니 숨 넘어갈 때는 누가 잡아 주노⁠?⁠”

거실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해솔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사람 사이에서 식혜 그릇들을 가지런히 모았다⁠. 엄마는 일어나 싱크대로 갔고⁠, 소현은 앉은 채로 엄마의 등을 보았다⁠. 자주색 조끼의 어깨가 아홉 해 전보다 좁았다⁠.

아홉 시⁠, 복순은 식탁 위 약통을 열었다⁠. 일주일 칸으로 나뉜 하늘색 약통이었다⁠. 흰 알약 하나와 분홍 알약 반 알을 손바닥에 털어 물과 함께 삼켰다⁠. 소현은 혈압약이겠거니 하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해솔은 약통의 칸을 오래 보고 있었다⁠.

*

밤 열 시⁠, 소현은 맥주를 사러 간다며 해솔을 데리고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 갔다⁠. 놀이터 벤치마다 명절에 내려온 사람들이 나와 앉아 있었다⁠.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엄마 친구인 13층 아주머니가 소현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주머니의 눈이 해솔의 얼굴에서 발끝까지 내려갔다가 도로 올라왔다⁠.

“⁠소현이 니 그 사람이가⁠? 복순이가 아까부터 동네방네 자랑하더라⁠. 키가 크네⁠.⁠”

“⁠안녕하세요⁠, 어머님⁠.⁠”

“⁠어머님은 무슨⁠. 내는 이모다⁠, 이모⁠.⁠” 아주머니가 해솔의 니트 팔을 쓸어 보았다⁠. “⁠복순이 혼자 산다꼬 이 동네서 다들 걱정했는데⁠, 인자 됐다⁠.⁠”

맥주 두 캔을 들고 나오며 소현은 해솔의 왼쪽 소매를 손목 아래까지 끌어내렸다⁠. 하늘색 띠가 니트 속으로 들어갔다⁠.

“⁠다들 걱정했대⁠.⁠” 소현이 중얼거렸다⁠. “⁠엄마 혼자 사는 거⁠.⁠”

“⁠어머님은 아홉 시에 약을 드셨습니다⁠. 흰 거 하나⁠, 분홍 거 반 알⁠.⁠”

“⁠혈압약이야⁠.⁠”

해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 되는지 소현은 묻지 않았다⁠. 단지 입구 가로등 밑에서 해솔이 소현의 손에서 맥주 봉지를 받아 들었다⁠. 봉지가 해솔의 손에 넘어가며 바스락거렸다⁠.

*

밤 열한 시⁠, 작은방 문을 열자 바닥에 이불 두 채가 나란히 깔려 있었다⁠. 소현이 고등학교 때 쓰던 싱글 침대는 이불 보따리로 덮여 있었다⁠.

“⁠엄마⁠, 침대는⁠?⁠”

“⁠좁아서 둘이 못 잔다⁠.⁠”

“⁠둘이 왜 같이 자⁠!⁠”

“⁠요새 젊은 것들 다 그렇다메⁠. 큰엄마가 그라더라⁠.⁠” 복순은 베개 두 개를 탁탁 털어 나란히 놓고 문을 닫았다⁠. 문 너머로 한마디가 더 들려왔다⁠. “⁠에어컨 틀지 마라⁠. 전기세 나온다⁠.⁠”

불을 끄자 창밖 아파트 불빛이 천장에 네모나게 비쳤다⁠. 해솔은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목 안쪽에서 팬이 낮게 웅웅 돌았다⁠. 팬 소리가 귀에 익자 소현은 숨을 고르게 쉴 수 있었다⁠.

“⁠숨소리를 켤까요⁠? 대본 아홉 번째 장에 잘 때는 숨소리를 켜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썼구나⁠.⁠”

“⁠예⁠.⁠”

“⁠…⁠…켜 줘⁠.⁠”

해솔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들이쉬고⁠, 멈췄다가⁠, 내쉬었다⁠. 소현은 저도 모르게 해솔의 숨에 제 숨을 맞추고 있었다⁠. 이불 끝에서 해솔의 손등이 소현의 손등에 닿았다⁠. 따뜻했다⁠. 사람 체온으로 맞춰 둔 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따뜻했다⁠.

“⁠손잡아도 됩니까⁠? 아홉 번째 장에 있습니다⁠.⁠”

“⁠거기도 있어⁠?⁠”

“⁠예⁠. 맥주 두 캔째 쓰신 장입니다⁠.⁠”

소현은 어둠 속에서 웃었다⁠. 해솔의 손가락이 하나씩 소현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손바닥이 겹쳐지자 팬 소리가 조금 높아졌다가 내려앉았다⁠. 소현은 팬이 오르내리는 소리를 세다가 잠이 들었다⁠.

*

새벽 두 시⁠, 소현은 손에서 전해 오는 미세한 떨림에 눈을 떴다⁠. 해솔이 천장을 보고 있었다⁠. 숨소리는 그대로였다⁠.

“⁠소현 씨⁠, 깨어 계십니까⁠?⁠”

“⁠응⁠.⁠”

“⁠대본 일곱 번째 장 아랫줄은 소현 씨가 듣고 싶은 말이었죠⁠. 연락 없으면 내가 먼저 할게요⁠.⁠”

소현의 손이 굳었다⁠. 담요 줄을 지울 때 남겨 둔 줄이었다⁠. 형광펜이 지나가지 않은 단 한 줄이었다⁠.

“⁠그 말은 대본에 있으니까 해도 돼⁠.⁠”

“⁠압니다⁠. 저는 그 말을 대본 밖에서 하고 싶습니다⁠. 소현 씨⁠, 연락이 없으면 제가⁠—⁠”

해솔의 입이 반쯤 열린 채로 멈췄다⁠. 가슴의 오르내림이 멈췄고⁠, 팬 소리가 뚝 끊겼다⁠. 머리맡에 둔 휴대전화가 환해졌다⁠.

「⁠대본 이탈 3/3 — 원격 점검을 시작합니다⁠. 점검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습니다⁠」

소현은 일어나 앉았다⁠. 해솔의 갈색 눈은 뜬 채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깍지 낀 손은 아직 따뜻했다⁠. 거실 벽시계가 두 시 십 분을 가리켰고⁠, 엄마 방에서 알람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추석 차례는 아침 여덟 시였다⁠. 소현은 깍지를 풀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집었다⁠. 상담 번호를 누르는 엄지가 두 번이나 엉뚱한 숫자에 미끄러졌다⁠.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해솔의 손바닥은 여전히 사람의 온도였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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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새벽2026.11.06· 2화

    「저는 그 말을 대본 밖에서 하고 싶습니다」에서 멈춰 버리다니요. 깍지 낀 손이 아직 따뜻하다는 줄에서 마음이 쿵 했어요. 추석 차례가 여덟 시인데 소현이 어떻게 버티죠?

    • 소예찬작가2026.11.06

      해솔이 하려던 말은 대본 일곱 번째 장 맨 아랫줄에 그대로 있었어요. 차례상 앞에서 소현이 어떻게 하는지는 바로 다음 화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