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36자)

추석 아침, 남자친구가 명상 중입니다

명절용 대여 애인 로봇 · 소예찬

상담 전화는 신호가 두 번 가고 바로 연결됐다⁠. 2029년 9월 22일 추석 새벽 두 시 십오 분⁠, 받은 사람은 상담원이 아니라 한재필이었다⁠.

“⁠고객님⁠, 점검 순서가 대구·경북 마흔한 건 가운데 서른일곱 번째입니다⁠. 아침 열 시쯤 해솔 차례가 옵니다⁠.⁠”

“⁠차례가 여덟 시예요⁠. 엄마 차례요⁠. 제사요⁠.⁠”

수화기 너머에서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재필은 한숨을 쉬지 않았다⁠. 대신 마우스를 두어 번 딸깍거렸다⁠.

“⁠해솔이 수성구 범어동에 있지요⁠. 저희 정비 밴이 지금 수성구에 있습니다⁠. 네 시까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시겠습니까⁠?⁠”

“⁠제가 들고 내려가요⁠? 해솔을⁠?⁠”

“⁠저희가 올라가겠습니다⁠. 어머님 깨시지 않게⁠.⁠”

재필은 해솔이 왜 설 예약 로봇인지⁠, 왜 추석 새벽에 본부장이 직접 대구에 내려와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소현도 묻지 않았다⁠. 묻기에는 손에 쥔 해솔의 손이 너무 따뜻했다⁠.

*

새벽 네 시⁠, 현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엔지니어 우선재가 접이식 운반 수레를 펼쳤고⁠, 재필은 구두를 벗어 들고 양말 바람으로 들어왔다⁠. 안방에서 엄마의 코 고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셋은 작은방에서 해솔을 일으켜 수레에 앉혔다⁠. 해솔은 깍지 끼던 손 모양 그대로 굳어 있어서 선재가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어야 했다⁠.

“⁠무겁네요⁠.⁠” 재필이 속삭였다⁠.

“⁠팔십이 킬로예요⁠. 그게요⁠, 배터리가 반이에요⁠.⁠” 선재도 속삭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경비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고 서 있었다⁠. 순찰 중이었다⁠. 아저씨의 손전등이 수레에 앉은 해솔의 얼굴⁠, 양말 바람의 재필⁠, 똥머리가 반쯤 풀린 소현을 차례로 비췄다⁠.

“⁠명절에 술을 얼마나 먹였노⁠?⁠”

“⁠막걸리를⁠…⁠…⁠” 소현이 입을 열었다⁠.

“⁠세 병이요⁠.⁠” 재필이 이어받았다⁠.

아저씨는 혀를 차고 1층 버튼을 대신 눌러 주었다⁠. 소현은 수레 손잡이를 잡은 손에 땀이 찼다⁠. 거짓말이 이제 남의 입에서도 하나씩 붙고 있었다⁠.

*

지하 2층 주차장 구석에 흰 정비 밴이 서 있었다⁠. 옆구리에 「⁠소담로보틱스 · 명절 긴급 출동⁠」이 찍혀 있었다⁠. 밴 안은 형광등이 하얗고⁠, 작은 냉장고만 한 진단 장비가 웅웅거렸다⁠. 선재가 해솔의 목덜미에 선을 꽂자 모니터에 글줄이 쏟아졌다⁠.

“⁠이탈 세 건 다 봤어요⁠.⁠” 선재가 화면을 내렸다⁠. “⁠어머님 손이 차다⁠, 부모님 모시고 온다⁠, 그리고⁠…⁠… 고객님한테 한 말이요⁠. 고장은 아니에요⁠. 해솔이 배운 걸로 대답한 거예요⁠.⁠”

“⁠배운 걸로 대답하는 게 이탈입니다⁠.⁠” 재필이 조수석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고객님⁠, 해솔을 지금 데려가겠습니다⁠. 계약서대로면 원격 점검 세 번째에서 회수할 수 있습니다⁠.⁠”

“⁠지금요⁠? 차례상 앞에서 사위가 없어지면 엄마가 뭐라고 하겠어요⁠.⁠”

“⁠고객님⁠, 사위가 아니십니다⁠.⁠”

“⁠엄마한테는 사위예요⁠.⁠”

“⁠어머님한테는 그렇겠지요⁠.⁠” 재필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넘겼다⁠. 「⁠9/21 11⁠:42 상견례 예약 — 수성못 못둑집 · 9/24 12⁠:00 · 6인⁠」⁠. 예약 줄 밑에는 엄마가 단톡방에 올린 셀카와 큰엄마의 하트 일곱 개까지 남아 있었다⁠. 해솔이 본 것은 전부 저 화면에 있었다⁠. 재필은 셀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표정이 바뀌는 것이 형광등 아래서도 보였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라 무언가를 재는 얼굴이었다⁠.

“⁠고객님⁠, 저희가 이번 추석에 처음 내는 상품이 하나 있습니다⁠.⁠” 재필의 목소리가 다시 상담 전화 연결음이 되었다⁠. “⁠상견례 패키지입니다⁠. 부모님 역할 로봇 두 대를 하루 보내 드립니다⁠. 부산 사시는 걸로 대본 맞춰 드리고요⁠. 해솔 반납은 월요일 밤 열 시로 하루 늘려 드리겠습니다⁠.⁠”

“⁠아까는 연장 안 된다면서요⁠.⁠”

“⁠아까는 상견례 패키지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설 예약은요⁠? 족보 넉 달 외워야 한다면서요⁠.⁠”

“⁠하루 줄이면 됩니다⁠.⁠” 재필은 태블릿을 내밀었다⁠. 「⁠연장 1일 + 상견례 패키지(⁠부모 2⁠) · 2⁠,900⁠,000원⁠」⁠. 아래에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있었다⁠. 「⁠상견례 장면은 얼굴을 흐리게 처리하여 광고에 쓸 수 있습니다⁠」⁠.

“⁠광고요⁠?⁠”

“⁠설 광고입니다⁠. 이번 설에 싱가포르하고 베트남 손님들도 받습니다⁠. 그 나라도 설을 크게 쇠거든요⁠. 어머님 얼굴은 안 나옵니다⁠. 손만 나옵니다⁠.⁠”

소현은 태블릿을 받아 들고 화면을 오래 보았다⁠. 이백구십만 원이면 오피스텔 석 달 치 관리비에 적금 한 달을 깨야 했다⁠. 이 돈을 내면 해솔이 아침 여덟 시 차례상 앞에 앉는다⁠. 내지 않으면 엄마는 송편 쟁반 앞에서 사위가 왜 사라졌는지 묻는다⁠.

“⁠이탈은요⁠? 또 하면 또 멈춰요⁠?⁠”

“⁠세 번 다시 드립니다⁠. 대신 상견례 자리에서는 대본대로만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선재가 모니터를 끄다 말고 손을 멈췄다⁠. 화면 구석에 작은 사진 하나가 떠 있었다⁠. 엄마의 하늘색 약통이었다⁠. 해솔이 어제 저녁 아홉 시에 오래 본 것이었다⁠. 선재는 사진을 보다가 재필을 한 번 보고 화면을 껐다⁠. 소현은 선재의 눈을 보지 못하고 서명란에 손가락을 그었다⁠.

*

다섯 시⁠, 셋은 해솔을 다시 수레에 태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숫자가 14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 재필이 양말 바람으로 서서 엘리베이터 벽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본부장의 눈 밑이 거뭇했다⁠.

“⁠작년 설에 반납 안 된 열한 대⁠, 제가 직접 찾으러 다녔습니다⁠.⁠” 재필이 거울을 보며 말했다⁠. “⁠영천 어느 할머니 댁에서는 로봇을 김장독 묻는 창고에 숨겨 두셨더라고요⁠. 열쇠를 안 주셔서 경찰 오실 때까지 마당에서 다섯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다섯 시간이요⁠?⁠”

“⁠할머니가 국수를 삶아 주셨습니다⁠. 우리 아들 데리러 온 사람도 밥은 먹여 보내야 한다고⁠.⁠” 재필은 수레 위 해솔의 굳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 국수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래서 고객님⁠, 정은 붙는 순간부터 저희한테는 사고입니다⁠. 저희 직원 이백 명 가운데 서른 명이 그 설에 그만뒀습니다⁠.⁠”

소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재필의 이유는 소현의 이유만큼 단단했다⁠. 14층에서 문이 열렸다⁠. 재필은 구두를 손에 든 채 수레를 밀고 복도로 나갔다⁠. 해솔의 운동화 바닥이 복도 타일에 닿지 않게 선재가 발목을 받쳐 들었다⁠.

소현의 휴대전화에 회사 메신저가 떴다⁠. 팀장이었다⁠. 「⁠연휴 중 소담 귀환 경로 호출 평소의 세 배⁠. 당직 확인 부탁⁠」⁠. 반납 시간을 넘긴 로봇들이 전국 고속도로 갓길을 걸어서 판교로 돌아오고 있었다⁠. 길은 소현의 팀이 짠 길이었다⁠. 소현은 「⁠확인했습니다⁠」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엎었다⁠.

*

해솔은 점검이 끝날 때까지 작은방 이불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어야 했다⁠. 선재 말로는 일곱 시 오십 분쯤 다시 깨어난다고 했다⁠. 엄마는 여섯 시 사십 분에 일어났다⁠.

작은방 문이 벌컥 열렸다⁠.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이불 위의 해솔을 내려다보았다⁠. 해솔은 갈색 눈을 뜬 채 앞을 보고 있었다⁠. 가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야가 와 이라노⁠?⁠”

“⁠명상 중이야⁠.⁠” 소현이 엄마와 해솔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침마다 한 시간씩 해⁠.⁠”

“⁠눈 뜨고 하는 명상도 있나⁠?⁠”

“⁠그게 고급이야⁠. 판교에서는 다 그렇게 해⁠.⁠”

엄마는 해솔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어 보았다⁠. 눈은 깜박이지 않았다⁠. 엄마는 감탄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우리 교회 권사님도 명상한다 카더라⁠. 그 양반은 십 분 만에 코 곤다⁠.⁠” 엄마는 부엌으로 나가다 돌아서서 한마디 보탰다⁠. “⁠명상 끝나면 지방 좀 쓰라 캐라⁠. 니 아부지 지방은 해마다 내가 쓰는데 손이 떨려서 글씨가 다 기어간다⁠.⁠”

소현은 문을 닫고 해솔 앞에 앉았다⁠. 손이 떨린다는 말이 귀에 남았다⁠. 해솔의 손등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따뜻했다⁠. 일곱 시 오십 분⁠, 목 안쪽에서 팬이 웅 하고 돌기 시작했다⁠. 해솔이 눈을 한 번 깜박이고 소현을 보았다⁠.

“⁠연락이 없으면 제가⁠—⁠”

소현이 해솔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입술이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다 멈췄다⁠.

“⁠이탈 세 번 다시 받았어⁠. 아껴 써⁠.⁠”

*

여덟 시⁠, 거실에 차례상이 차려졌다⁠. 해솔은 붓을 들고 한지에 지방을 썼다⁠. 「⁠顯考學生府君神位⁠」⁠. 아버지께서 벼슬 없이 가셨다는 여덟 글자가 인쇄한 것처럼 반듯하게 내려왔다⁠. 엄마는 지방을 들고 불빛에 비춰 보았다⁠.

“⁠니 서예 했나⁠? 우리 소현이는 붓만 잡으면 먹물을 지 얼굴에 바른다⁠.⁠”

“⁠엄마⁠.⁠”

차례는 엄마와 소현과 해솔⁠, 셋이었다⁠. 상을 차리는 동안 엄마와 소현은 해마다 하던 싸움을 또 했다⁠. 소현은 붉은 과일이 동쪽이라고 했고⁠, 엄마는 대구에서는 대추가 맨 앞이라고 했다⁠. 둘이 사과 한 알을 두고 밀고 당기는 사이 해솔이 상 끝에 서서 물었다⁠.

“⁠어머님⁠, 바나나는 어디에 둡니까⁠?⁠”

소현의 주머니가 떨었다⁠. 「⁠대본 이탈 1/3⁠」⁠. 소현이 해솔을 노려보았다⁠. 아껴 쓰라고 한 지 십 분 만이었다⁠. 엄마는 사과를 놓고 해솔을 보았다⁠.

“⁠니 우리 아부지 바나나 좋아한 거 우째 아노⁠?⁠”

“⁠장식장 사진 옆에 바나나 우유 빈 병이 있습니다⁠. 씻어서 말려 두셨습니다⁠.⁠”

엄마는 한참 해솔을 보다가 베란다 박스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꺼내 왔다⁠. 바나나는 대추와 밤 사이에 놓였다⁠. 홍동백서도 조율이시도 아닌 자리였다⁠. 엄마는 대추와 밤 사이가 아부지 자리라고 했다⁠. 살아 계실 때 바나나를 늘 밥상 한가운데 두고 드셨다고 했다⁠.

엄마가 술잔을 채울 때 주전자 주둥이가 잔 가장자리에 두 번 부딪혔다⁠. 소현은 엄마의 손을 보았다⁠. 술이 잔 밖으로 조금 흘렀다⁠. 해솔이 말없이 행주를 내밀었다⁠. 엄마가 술을 올리고 사진을 보며 말했다⁠.

“⁠여보⁠, 사위 왔다⁠. 서예도 한다⁠.⁠”

절을 할 차례가 되자 엄마가 해솔에게 손사래를 쳤다⁠. 사위 될 사람은 아직 절 안 해도 된다고 했다⁠. 해솔은 대본 여섯 번째 장을 떠올리는 얼굴로 잠깐 서 있다가⁠, 엄마와 소현 뒤에서 반 박자 늦게 엎드렸다⁠. 이마가 바닥에 닿는 각도가 엄마와 똑같았다⁠. 엄마는 절을 마치고 일어나며 한쪽 눈을 훔쳤다⁠. 사진 속 아버지는 코에 주름 세 개를 잡고 웃고 있었다⁠.

음복으로 엄마가 따라 준 술을 해솔은 입에 대는 시늉만 했다⁠. 소현이 잔을 받아 대신 비웠다⁠. 엄마는 이번에도 연애하는 딸이 사위 술을 대신 마셔 주는 줄 알고 흐뭇해했다⁠.

*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엄마 휴대전화가 울렸다⁠. 큰엄마였다⁠. 엄마가 고무장갑을 낀 채로 스피커를 켜는 바람에 큰엄마의 목소리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복순아⁠, 우리 오후 세 시에 너거 집으로 다 간다⁠. 큰집 차례 끝났다⁠. 사위 얼굴 보러⁠.⁠”

“⁠오이소⁠, 오이소⁠. 갈비 해 놨다⁠.⁠”

“⁠그라고⁠, 날 잡았으면 혼인신고는 했나⁠?⁠”

엄마의 고무장갑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현은 행주를 쥔 채로 굳었다⁠.

“⁠요새는 식보다 신고가 먼저다⁠.⁠” 큰엄마가 확성기 같은 목소리로 이어 갔다⁠. “⁠식 올리고 깨지는 집 많다 카더라⁠. 서류부터 넣어 놔야 남의 집 사람 안 된다⁠. 상길이가 구청에 있으니까 금방 된다⁠.⁠”

거실에서 해솔이 차례상 위 지방을 접고 있었다⁠. 접힌 지방이 해솔의 손 안에서 반듯한 네모가 되었다⁠. 소매 끝에서 하늘색 띠가 보였다⁠. 띠에 찍힌 남은 시간은 하루가 늘어 있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