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32자)

사흘짜리 남자친구가 엄마한테 송편을 먹여 줬다

명절용 대여 애인 로봇 · 소예찬

2029년 9월 20일 목요일 밤 아홉 시⁠, 판교 소담로보틱스 출고 센터는 명절 전날 기차역 대합실처럼 붐볐다⁠. 「⁠명절 동행 · 출고⁠」 전광판 아래로 번호표를 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줄 끝에서 옥소현은 대본 열두 쪽을 둘둘 말아 쥐고 있었다⁠. 회색 후드티에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 정수리에 질끈 묶어 올린 검은 똥머리⁠, 콧등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뿔테 안경⁠. 퇴근하자마자 오피스텔에서 갈아입고 나온 차림이라 마른 어깨 위로 후드티가 헐렁하게 처져 있었다⁠.

앞사람은 쉰 줄의 남자였다⁠. 남자가 든 서류철 표지에 「⁠장인어른 대응 · 고급형⁠」이라고 찍혀 있었다⁠. 뒤에서는 대학생 둘이 「⁠명절 친구 2인 세트⁠」를 두고 다퉜다⁠. 한 사람은 친구가 하나면 이모들이 안 믿는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둘이면 이모들이 둘 다 소개해 달라고 한다고 했다⁠.

“⁠백삼십칠 번 고객님⁠.⁠”

창구 직원은 대본을 받아 한 장씩 넘기다가 일곱 번째 장에서 손을 멈췄다⁠. 형광펜 뚜껑이 딸깍 열렸다⁠. 직원이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자 안쪽 유리문이 열리고 남색 조끼를 입은 남자가 나왔다⁠. 목에 헤드셋⁠, 가슴에 「⁠명절사업본부장 한재필⁠」 사원증⁠. 남자는 웃는 얼굴로 대본을 받아 들었다⁠.

“⁠고객님⁠, 대본 검수에서 한 줄이 나왔습니다⁠.⁠”

재필이 형광펜으로 그은 줄을 소현 앞으로 돌려 보였다⁠. 「⁠다음 설에도 내가 운전할게요⁠. 어머님 무릎에 담요 덮어 드리고⁠.⁠」

“⁠다음 명절 약속은 대본에 넣으실 수 없습니다⁠.⁠”

“⁠그냥 말이잖아요⁠. 엄마 입 막으려고 넣은 거예요⁠. 설 되면 헤어졌다고 하면 돼요⁠.⁠”

“⁠고객님은 그렇게 하시겠죠⁠.⁠” 재필의 목소리는 상담 전화 연결음처럼 매끄러웠다⁠. “⁠어머님들은 설에 진짜로 담요를 꺼내 놓고 기다리십니다⁠.⁠”

재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현을 유리문 안으로 데려갔다⁠. 복도 끝 창 너머로 반납 창고가 보였다⁠. 정비 의자에 사람처럼 생긴 로봇 하나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는데⁠, 왼손 약지에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가슴팍에 테이프로 붙인 쪽지가 하나 펄럭였다⁠. 「⁠우리 아들 한 번만 더 보내 주이소⁠」⁠.

“⁠작년 설에 반납이 안 된 열한 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찰이랑 같이 가서 찾아왔습니다⁠. 어머님이 반지를 끼워 주셨더라고요⁠. 저 반지 하나 돌려 드리는 데 석 달 걸렸습니다⁠.⁠” 재필이 형광펜 뚜껑을 닫았다⁠. “⁠로봇한테 정이 붙으면 다음 명절에 빌려 드릴 로봇이 없습니다⁠. 저희 직원 이백 명이 석 달 동안 월급을 반만 받았고요⁠.⁠”

소현은 펜을 받아 일곱 번째 장의 형광펜 줄을 두 번 그었다⁠. 담요는 지웠는데⁠, 바로 아랫줄은 그대로 두었다⁠. 「⁠연락 없으면 내가 먼저 할게요⁠.⁠」 재필은 아랫줄을 한 번 보고 넘어갔다⁠.

*

정비실은 따뜻했고 기름과 새 고무 냄새가 났다⁠. 정비 의자에 앉은 남자는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 서른 살쯤 된 얼굴⁠,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 흰 셔츠 위에 베이지 꽈배기 니트⁠. 엔지니어 우선재가 남자의 왼쪽 손목에 하늘색 띠를 감았다⁠. 띠에 바코드와 글자가 찍혀 있었다⁠. 「⁠대여 3일⁠」⁠.

“⁠띠는 가위로만 잘려요⁠. 그게요⁠, 마지막 여섯 시간에는 노래지고요⁠, 반납 시간을 넘기면 빨개져요⁠.⁠” 선재는 말끝을 자꾸 흐렸다⁠. “⁠빨개지면 해솔이 혼자 걸어서 판교로 돌아와요⁠. 고객님이 붙잡으셔도 걸어요⁠.⁠”

“⁠대구에서 판교까지 걸어서요⁠?⁠”

“⁠경로는 길벗지도가 잡아 줘요⁠. 실내 지도 하는 회사요⁠.⁠”

소현은 대답을 삼켰다⁠. 길벗지도 백엔드 팀⁠, 아홉 해째⁠. 반납 로봇이 걸어서 돌아오는 경로 계산은 작년 봄에 소현의 팀이 짠 것이었다⁠.

휴대전화에 대여 앱이 깔렸다⁠. 「⁠해솔 · 반납 9월 23일 밤 10시 · 판교 반납 센터 · 남은 시간 71⁠:58 · 대본 이탈 0/3⁠」⁠. 선재가 남자의 목덜미를 가볍게 눌렀다⁠. 목 안쪽에서 작은 팬이 웅 돌기 시작했다⁠. 남자가 눈을 떴다⁠. 갈색 눈이 소현을 찾아 초점을 맞췄다⁠. 대본 첫 장 첫 줄이 나왔다⁠.

“⁠자기야⁠, 많이 기다렸지⁠?⁠”

소현은 대본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기야를 쓴 사람은 소현 자신이었다⁠. 지난주 금요일 새벽 두 시⁠, 맥주 두 캔째에 쓴 대본이었다⁠.

*

9월 21일 금요일 새벽 다섯 시⁠,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은 벌써 주차장이었다⁠. 소현의 낡은 경차 조수석에 앉은 해솔은 무릎이 앞 수납함에 닿아 있었다⁠. 다리를 접으라고 하자 해솔은 반듯하게 접었고⁠, 접은 자세 그대로 세 시간을 움직이지 않았다⁠.

라디오가 명절 교통 상황 사이에 뉴스를 끼워 넣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다음 달 「⁠인간형 로봇 동반자 등록법⁠」 공청회를 연다고 했다⁠. 법안을 낸 맹남희 의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외로움은 이제 국가가 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어서 일본에서는 여름 명절 오봉이 끝난 뒤 대여 로봇을 돌려주지 않은 손님들을 상대로 소송이 잇따른다는 소식이 지나갔다⁠.

“⁠대구 말을 배워야겠습니다⁠.⁠” 해솔이 말했다⁠. “⁠대본에 어머님이 대구 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소현은 엄마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틀어 주었다⁠. 「⁠니 올 때 사람 데꼬 오나 안 데꼬 오나⁠. 대답 안 하나⁠? 엄마가 송편 쌀 몇 되 불릴지 알아야 될 거 아이가⁠.⁠」 해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섯 번을 다시 들었다⁠.

“⁠어머님⁠, 소현 씨 데꼬 왔심더⁠.⁠”

“⁠거꾸로잖아⁠. 내가 너를 데꼬 가는 거야⁠.⁠”

“⁠어머님⁠, 저를 데꼬 왔심더⁠.⁠”

추풍령휴게소에서 소현은 호두과자 한 봉지를 샀다⁠. 해솔은 봉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차까지 걸었다⁠. 먹지는 못했다⁠. 대신 봉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꼭 맞게 접힌 귀퉁이를 몇 번이고 다시 접었다⁠.

*

오전 열한 시⁠, 수성구 범어동 아파트 14층 현관문이 열리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왔나⁠? 니 그 꼬라지로 사람을 데꼬 왔나⁠?⁠”

구복순은 짧은 곱슬 파마에 꽃무늬 블라우스에 자주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송편 반죽을 치대다 나왔는지 두 손에 쌀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복순은 딸의 후드티를 한 번⁠, 츄리닝 무릎을 한 번 훑고 나서 해솔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님⁠, 저를 데꼬 왔심더⁠.⁠”

복순은 잠깐 굳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쌀가루 묻은 손으로 해솔의 니트 팔을 두드렸다⁠. 베이지 니트에 하얀 손자국이 났다⁠.

“⁠아이고⁠, 서울 사람이 대구 말을 다 하네⁠. 들어온나⁠, 들어온나⁠.⁠”

거실 바닥 낮은 밥상 위에 반죽 그릇과 소 그릇이 놓여 있었다⁠. 깨와 설탕을 버무린 소⁠, 껍질 벗긴 콩 소⁠. 장식장 위 아버지 사진 앞에도 송편 쟁반이 먼저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 옥창수가 떠난 지 아홉 해가 지났는데⁠, 엄마는 지금도 첫 접시를 아버지 앞에 놓았다⁠.

반죽을 떼어 동그랗게 굴리는 동안 질문이 쏟아졌다⁠. 어디서 만났노⁠, 몇 살이고⁠, 집은 어데고⁠, 무슨 일 하노⁠. 해솔은 대본대로 대답했다⁠. 판교 회사 앞 국밥집에서 만났고⁠, 소현 씨가 제 깍두기를 말없이 드셔서 말을 걸었고⁠, 나이는 서른이고⁠, 판교에서 지도 일을 한다고 했다⁠. 깍두기 대목에서 복순이 딸을 째려보았다⁠. 째려보는 눈이 딸의 손에서 멈췄다⁠. 소현이 콩 소 그릇을 슬그머니 밀어내고 있었다⁠.

“⁠니는 서른여섯 묵고도 아직 콩 골라내나⁠? 어릴 때부터 콩만 쏙쏙 빼서 아부지 밥그릇에 넣더마는⁠.⁠”

“⁠남의 깍두기를 와 묵노⁠?⁠”

“⁠엄마⁠, 대본⁠…⁠… 아니⁠, 그날 내 깍두기가 덜 익었었어⁠.⁠”

해솔이 빚은 송편은 하나같이 반달이었다⁠. 크기도 같고 주름 수도 같았다⁠. 쟁반 위에 반달이 줄을 맞춰 늘어나자 복순이 하나를 들어 불빛에 비춰 보았다⁠.

“⁠니 손은 무슨 기계로 찍었나⁠?⁠”

소현의 손에서 분홍 송편이 찌그러졌다⁠. 해솔은 웃었다⁠. 대본 세 번째 장에 적힌 웃음⁠, 눈꼬리부터 접히는 웃음이었다⁠.

*

해솔이 송편 하나를 집어 무릎을 꿇은 채 복순 앞으로 내밀었다⁠. 소현은 분홍 송편을 입 앞에 든 채로 굳었다⁠. 대본에 「⁠어머님께 송편 먹여 드리기⁠」 같은 줄은 없었다⁠.

“⁠어머님⁠, 이건 깨입니다⁠. 콩은 소현 씨가 어릴 때부터 다 골라냈다고 하셨잖아요⁠.⁠”

복순은 두 손을 모으고 입을 벌렸다⁠. 송편이 엄마 입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씹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해솔은 손을 거두다 말고 복순의 손등에 손가락 끝을 잠깐 댔다⁠.

“⁠어머님 손이 차십니다⁠. 반죽은 제가 치대겠습니다⁠.⁠”

소현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떨었다⁠. 「⁠대본 이탈 1/3 — 어머님 손이 차십니다⁠. 반죽은 제가 치대겠습니다⁠」

복순은 송편을 삼키고도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손을 빼서 조끼 주머니에 넣고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소현이 따라갔다⁠.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등을 돌리고 서서 수돗물을 틀어 놓고 있었다⁠. 손은 씻지 않았다⁠.

“⁠엄마⁠.⁠”

“⁠저런 사람 놓치면 니 평생 혼자다⁠.⁠”

“⁠만난 지 석 달이야⁠.⁠”

“⁠석 달이면 됐다⁠. 니 아부지하고 나는 두 달 만에 날 잡았다⁠.⁠” 복순은 물을 잠그고 전화기를 들었다⁠. 냉장고 문에 붙은 수성못 한정식집 자석 전단을 보며 번호를 눌렀다⁠. “⁠못둑집이지예⁠? 월요일 낮 열두 시⁠, 여섯 사람⁠. 상견례라예⁠.⁠”

“⁠엄마⁠, 끊어⁠.⁠”

소현이 전화기를 잡았다⁠. 복순도 놓지 않았다⁠. 둘이 전화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당기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사장님이 몇 번이나 여보세요를 했다⁠. 복순이 마지막에 손목을 비틀어 전화기를 뺏어 귀에 댔다⁠.

“⁠예⁠, 창가 자리로 주이소⁠. 사돈 어른 오십니더⁠.⁠”

“⁠엄마⁠, 해솔이네 부모님은 부산에⁠…⁠…⁠”

“⁠부산이면 한 시간이다⁠.⁠”

복순은 전화를 끊자마자 가족 단톡방을 열었다⁠. 방 이름은 「⁠옥씨 집안 큰집 작은집⁠」이었고⁠, 사람은 열네 명이었다⁠. 엄마의 엄지가 독수리 타법으로 한 글자씩 내려앉았다⁠. 「⁠소현이 사람 데꼬 왔다⁠. 월요일 상견례 잡았다⁠.⁠」

십 초도 안 돼 답이 쏟아졌다⁠. 큰엄마였다⁠. 「⁠사진 올리라⁠」 「⁠뭐 하는 사람이고⁠」 「⁠키는⁠」 「⁠집은⁠」 「⁠차는⁠」⁠. 사촌 오빠 상길이 마지막에 한 줄을 보탰다⁠. 「⁠축하한다⁠. 혼인신고는 구청에서 받는다⁠」⁠. 구청 가족관계등록 창구에서 열다섯 해를 일한 오빠다운 축하였다⁠.

“⁠엄마⁠, 사진은 안 돼⁠.⁠”

“⁠와 안 되노⁠? 잘생겼는데⁠.⁠”

“⁠사진 잘 안 받아⁠. 얼굴이⁠…⁠… 렌즈를 싫어해⁠.⁠”

거짓말에 거짓말이 하나 더 붙었다⁠. 복순은 휴대전화를 들고 거실로 나가더니 해솔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셀카를 찍었다⁠. 해솔은 화면 속 엄마 얼굴에 맞춰 고개를 정확히 15도 기울였다⁠. 사진은 잘 나왔다⁠. 큰엄마가 하트를 일곱 개 보냈다⁠.

*

거실로 돌아오니 해솔이 반죽을 치대고 있었다⁠.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밀고 접고 다시 미는 동작이 엄마 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복순이 밥상 앞에 털썩 앉았다⁠.

“⁠해솔이⁠, 월요일 열두 시에 상견례다⁠. 부모님 모시고 온나⁠.⁠”

해솔이 소현을 보았다⁠. 소현은 고개를 아주 조금 저었다⁠. 대본에는 부모님이 부산에 계시다는 줄 하나뿐이었고⁠, 모시고 온다는 줄은 없었다⁠. 해솔의 갈색 눈이 소현에게서 엄마의 찬 손으로 옮겨 갔다⁠.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반납까지 58⁠:41 · 9월 23일 밤 10시 · 판교⁠」⁠. 상견례는 반납하고 열네 시간 뒤였다⁠.

복순은 일어나서 냉장고 옆 달력 앞으로 갔다⁠. 빨간 매직 뚜껑을 이로 물어 열고 24일 칸에 동그라미를 두 번 그렸다⁠. 「⁠상견례⁠」⁠. 해솔이 반죽 묻은 손을 무릎에 얹었고⁠, 베이지 니트 소매 끝에서 하늘색 띠가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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