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76자)

할머니들이 노트북 앞에 줄을 섰다

이장 선거에 나온 AI · 모세담

2027년 10월 7일 목요일 밤 열 시 반⁠, 버드내 마을회관⁠. 상춘이 회관 문을 밀자 보일러 바닥의 훈김이 얼굴로 확 올라왔다⁠. 노인회 방에 할머니 넷이 벽을 따라 앉아 있었고⁠, 저마다 손에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씩을 쥐고 있었다⁠. 달력을 오려 매직으로 숫자를 쓴 종이였다⁠.

“⁠이장⁠, 번호표 뽑아⁠.⁠”

방문 옆 밥상 위에 달력 종이가 수북했다⁠. 길장수의 글씨였다⁠. 맨 위 종이에 「⁠8⁠」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뭐유⁠.⁠”

“⁠하소연 번호표여⁠. 줄 서다 싸움 나서 장수 회장이 만들었어⁠.⁠”

방 안쪽 탁자에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하늘색 얼굴이 화면에서 눈을 반달로 접고 있었고⁠, 노트북 앞에 탁오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여든여섯⁠, 아랫말 끝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등이 둥글게 굽어 노트북과 눈높이가 같았다⁠.

“⁠그려서 내가 그랬어⁠. 추석에 오면 송편 쪄 놓는다고⁠. 안 왔어⁠. 전화도 안 혀⁠.⁠”

“⁠아드님 공장이 추석에 특근이셨대유⁠. 할머니가 지난주에 말씀하셨슈⁠.⁠”

“⁠내가 그랬어⁠?⁠”

“⁠그러셨슈⁠. 다 들었슈⁠.⁠”

“⁠아이고⁠, 나보다 낫네⁠.⁠” 오순 할머니가 손등으로 콧등을 문질렀다⁠. “⁠그럼 이번 주말엔 올까⁠?⁠”

“⁠그건 지도 모르겄슈⁠. 대신 부산 날씨는 알려드릴게유⁠. 내일 부산 맑음⁠, 최고 기온 24도유⁠. 아드님 퇴근길 우산 안 챙겨도 되겄슈⁠.⁠”

오순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우산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말에 할머니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상춘은 번호표를 쥔 채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오순 할머니가 저렇게 오래 앉아 말하는 것을 서른 해 동안 본 적이 없었다⁠. 상춘이 찾아가면 할머니는 늘 “⁠나는 그런 거 몰러⁠” 한마디로 문을 닫았다⁠.

*

맹덕님 할머니가 오순 할머니를 밀어내고 앉았다⁠. 번호표 「⁠2⁠」를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우리 영감 코 고는 소리 녹음해 왔어⁠. 들어 봐⁠.⁠”

할머니가 휴대전화를 노트북에 들이댔다⁠. 경운기 시동 거는 소리 같은 것이 방 안을 채웠다⁠. 할머니들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들었슈⁠. 사십 초에 두 번 숨이 멎으셨슈⁠. 이건 하소연이 아니라 병원 가셔야 하는 소리유⁠. 화요일 열 시 괴산 읍내 이비인후과⁠, 버스는 아홉 시 십 분이유⁠.⁠”

“⁠거봐⁠. 이장은 영감 코골이 들어 본 적 있어⁠?⁠”

“⁠남의 집 영감 코 고는 걸 왜 들어유⁠.⁠”

“⁠들어야 이장이지⁠.⁠”

덕님 할머니가 상춘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할머니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상춘은 번호표를 주머니에 넣었다⁠.

“⁠니가 할 줄 아는 게 뭐여⁠?⁠” 상춘이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경운기 몰어⁠? 상여 메⁠? 보일러 고쳐⁠?⁠”

“⁠경운기는 못 몰아유⁠. 상여도 못 메유⁠.⁠” 마을이가 대답했다⁠. “⁠대신 올봄 공익직불금 신청서 스물여덟 장을 지가 맞췄슈⁠. 병원 예약은 이 년 동안 백열 번 했구유⁠. 보일러는 못 고쳐두 고장 날 집은 알어유⁠. 윗말 끝에서 세 번째 집 보일러가 그저께부터 쇳소리가 난대유⁠. 내일 아침 기온이 4도유⁠.⁠”

“⁠나도 알어⁠.⁠”

“⁠아셨으면 가셨어유⁠?⁠”

상춘은 대답하지 못했다⁠. 윗말 끝에서 세 번째 집은 귀촌한 지 두 해 된 젊은 부부 집이었다⁠. 상춘은 젊은 부부 집 대문을 한 번도 두드린 적이 없었다⁠.

“⁠들어 주는 건 나도 혀⁠.⁠” 상춘이 말했다⁠.

방 끝에서 오순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니는 들으면서 딴 데 보잖여⁠.⁠”

할머니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덕님 할머니는 보행기를 붙잡고 웃었다⁠. 상춘이 고개를 돌리는데 방문 옆 구석에 낯익은 꽃무늬 조끼가 보였다⁠. 옥련이 번호표를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다⁠. 「⁠7⁠」이었다⁠.

“⁠당신 여기서 뭐 혀⁠.⁠”

“⁠번호표 뽑았어⁠. 칠 번⁠. 당신은 팔 번이니까 내 뒤여⁠.⁠”

*

열한 시가 되자 화면 구석에 「⁠하소연 마감⁠」이 떴다⁠. 할머니들이 번호표를 밥상에 도로 올려놓고 하나둘 일어났다⁠. 회관 마당에 짐 자전거가 멈췄고⁠, 도형식이 충전기를 들고 들어왔다⁠. 밤마다 노트북 전원을 갈아 끼우러 오는 길이었다⁠.

“⁠장인어른도 하소연하러 오셨어요⁠?⁠”

“⁠감시하러 왔어⁠.⁠”

형식이 노트북 뒤에 충전기를 꽂았다⁠. 상춘은 화면 구석의 작은 빨간 점을 가리켰다⁠. 낮에도 깜박이던 점이었다⁠.

“⁠저 빨간 불은 뭐여⁠?⁠”

“⁠듣고 있다는 표시예요⁠.⁠”

“⁠잘 때도 켜 놔⁠?⁠”

“⁠열한 시 지나면 꺼져요⁠.⁠” 형식이 노트북 덮개를 반쯤 내렸다⁠. “⁠장인어른⁠, 마을이는 할머니들한테 아무것도 안 줘요⁠. 돈도 떡도요⁠. 들어 드리기만 해요⁠. 그게 표가 되는 거면⁠, 그동안 아무도 안 들어 드렸다는 얘기예요⁠.⁠”

“⁠말 길다⁠.⁠”

“⁠짧게 하면 안 들으시잖아요⁠.⁠”

형식이 노트북을 덮었다⁠. 하늘색 얼굴이 닫히는 덮개 사이로 마지막까지 웃고 있었다⁠.

*

이튿날 아침 일곱 시⁠, 상춘은 공구 가방을 들고 윗말 끝에서 세 번째 집 대문 앞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대문을 두드렸다⁠. 밤새 기온이 내려가 대문 쇠고리가 손가락에 차게 붙었다⁠. 털 조끼를 입은 젊은 아내가 문을 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장님이시죠⁠? 마을이가 오늘 누가 올 거라고 했어요⁠.⁠”

“⁠누가 온다고 혔는디⁠.⁠”

“⁠보일러 볼 줄 아는 사람이요⁠. 이름은 안 알려 줬어요⁠. 선거 중이라 특정 후보 이름은 말 못 한대요⁠.⁠”

상춘은 대꾸 없이 보일러실로 들어갔다⁠. 순환 펌프에서 쇠 긁는 소리가 났다⁠. 펌프 덮개를 열자 녹이 엉긴 날개가 보였다⁠. 상춘은 날개를 빼서 철솔로 문지르고 기름 두 방울을 떨어뜨렸다⁠. 손등에 녹물이 번졌다⁠. 젊은 남편이 잠옷 바람으로 보일러실 문간에 나와 서서 손을 비볐다⁠.

“⁠저희 처음 왔을 때 이장님이 마을발전기금 이백만 원 내라고 하셨잖아요⁠.⁠”

“⁠냈어⁠?⁠”

“⁠못 냈어요⁠. 그래서 첫해엔 회관에 못 갔어요⁠. 할머니들이 우리를 회관 안 오는 집이라고 불렀어요⁠.⁠”

상춘은 펌프 덮개를 닫았다⁠. 쇳소리가 멎고 물 도는 소리가 낮게 났다⁠.

“⁠이번엔 누구 찍을 거여⁠?⁠”

부부가 서로 얼굴을 보았다⁠. 아내가 먼저 웃었다⁠.

“⁠이장님⁠, 그건 비밀투표잖아요⁠.⁠”

“⁠그려⁠. 장하다⁠.⁠”

상춘은 공구 가방을 닫고 나왔다⁠. 대문을 나서는데 아내가 뒤에서 말했다⁠.

“⁠기금 얘기⁠, 마을이한테 하소연한 거예요⁠. 이장님이 오실 줄 몰랐어요⁠.⁠”

상춘은 돌아보지 않고 손만 들었다⁠. 펌프 날개에서 묻은 녹물이 손바닥에 말라 붙어 있었다⁠.

*

아홉 시⁠, 상춘은 마당 평상에 앉아 괴산군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가고 젊은 남자 목소리가 받았다⁠. 지도계장이라고 했다⁠.

“⁠버드내 이장 염상춘이유⁠. 우리 마을 이장 선거에 노트북이 나왔슈⁠.⁠”

“⁠네⁠, 들었습니다⁠. 저희도 아침 회의에서 그 얘기 했어요⁠.⁠”

“⁠그러니께 이거 막아 줘유⁠. 부정선거유⁠.⁠”

“⁠이장님⁠, 이장 선거는 공직선거가 아니라서 공직선거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저희 소관이 아니에요⁠. 마을 규약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 노트북이 할머니들 병원 예약을 백열 번 해 줬댜⁠. 그거 향응 아녀⁠?⁠”

수화기 너머에서 잠깐 말이 없었다⁠.

“⁠공직선거라면 기부 행위를 따져 볼 텐데요⁠, 이장 선거는요⁠…⁠… 마을 분들이 정하실 일입니다⁠. 투표함하고 기표대는 빌려 드릴 수 있어요⁠. 필요하시면 공문 보내 주세요⁠.⁠”

“⁠투표함 빌려주는 데가 선관위여⁠?⁠”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라서요⁠. 아⁠, 이장님은 공직선거 때 선거운동 못 하시는 거 아시죠⁠? 내년 봄엔 국회의원 선거가 있으니까 미리 조심하시고요⁠.⁠”

“⁠알어⁠. 작년 군수 선거 때도 입 다물었어⁠.⁠”

상춘은 전화를 끊었다⁠. 옥련이 부엌에서 내다보며 말했다⁠.

“⁠선관위가 뭐랴⁠.⁠”

“⁠투표함 빌려준댜⁠.⁠”

“⁠그럼 됐네⁠. 투표함 생겼잖여⁠.⁠”

*

열 시 반⁠, 상춘은 경운기를 몰고 칠성면 행정복지센터로 갔다⁠. 주차장 끝에 경운기를 대고 민원실 문을 밀자⁠, 창구 안쪽 책상에서 해주가 고개를 들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 목에 건 공무원증⁠, 아버지를 닮아 굵은 눈썹⁠. 해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구로 나왔다⁠.

“⁠아버지⁠, 경운기 타고 오셨어요⁠?⁠”

“⁠차가 없잖여⁠.⁠”

“⁠엄마 차 있잖아요⁠.⁠”

“⁠엄마가 회관 간댜⁠.⁠”

해주가 웃음을 참으며 창구 의자를 가리켰다⁠. 상춘은 앉지 않았다⁠.

“⁠그 노트북⁠, 면에서 안 받으면 되잖여⁠.⁠”

“⁠면은 마을 규약에 손을 못 대요⁠. 이장 선거는 마을총회 일이에요⁠. 면장님은 총회 결과를 보고 임명만 하세요⁠. 지방자치법 시행령에 이장은 주민 가운데에서 면장이 임명한다고 돼 있어요⁠.⁠”

“⁠그럼 끝났네⁠. 저건 주민이 아니잖여⁠.⁠”

“⁠그러니까 문제예요⁠.⁠” 해주가 창구 유리에 손을 짚었다⁠. “⁠마을이가 이기면 면장님이 임명할 사람이 없어요⁠. 총회 결과를 버리면 마을 자치에 손대는 거고요⁠. 그래서 면장님이 직접 해석을 내겠대요⁠. 화요일에 회관에 가신대요⁠.⁠”

“⁠면장이 뭘 안다고⁠.⁠”

“⁠아버지보다 법은 아시죠⁠.⁠”

민원실 대기 의자에 앉은 아저씨 둘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안쪽 방 문이 열리고 칠성면장이 서류 뭉치를 끼고 나왔다⁠. 쉰 줄의 면장은 상춘을 보자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이장님⁠, 화요일에 회관에서 뵙겠습니다⁠. 군청에서도 행정안전부에서도 처음 보는 일이라고 저더러 알아서 하랍니다⁠.⁠”

“⁠면장이 알아서 하면 되잖유⁠. 사람만 이장 하는 거라고⁠.⁠”

“⁠그렇게 쉬우면 제가 밤에 잠을 자죠⁠.⁠” 면장이 서류 뭉치를 고쳐 끼었다⁠. “⁠규약은 마을 것이고 임명은 제 것이라⁠, 둘이 안 부딪치게 해야 합니다⁠. 마을 분들이 뽑은 걸 면이 버렸다고 하면⁠, 그다음부터는 총회를 아무도 안 믿어요⁠.⁠”

면장은 다시 허리를 숙이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상춘은 목소리를 낮췄다⁠.

“⁠니 신랑이 군청에 서류 넣은 거⁠, 니는 알고 있었어⁠?⁠”

해주가 대답 대신 책상 위 서류철을 한 번 보았다⁠. 2025년이라고 적힌 누런 서류철이었다⁠.

“⁠아버지⁠, 그 동의서 제가 받았어요⁠. 아버지가 갖고 오셨잖아요⁠.⁠”

“⁠그려⁠.⁠”

“⁠제가 그때 한 장씩 다 확인했어야 했어요⁠.⁠”

“⁠확인할 게 뭐 있어⁠. 다 마을 사람들이여⁠.⁠”

해주는 더 말하지 않았다⁠. 창구 너머로 민원 번호 띵동 소리가 울렸고⁠, 해주는 서류철을 서랍에 넣고 다음 손님을 불렀다⁠. 상춘은 민원실을 나오면서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해주가 서랍을 닫다 말고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

점심때 집에 돌아오자 옥련은 회관에 가고 없었다⁠. 상춘은 평상에 앉아 휴대전화로 마을 단톡방을 열었다⁠. 마을이의 공약 밑에 하트가 스물여섯 개 달려 있었다⁠. 상춘의 벽보 사진 밑에는 장수가 단 「⁠규약대로⁠」 한 줄뿐이었다⁠.

상춘은 창고 문을 열었다⁠. 경운기 옆에 2019년 면민 체육대회 때 쓰고 넣어 둔 앰프와 나팔 스피커가 먼지를 쓰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먼지를 쓸자 「⁠칠성면 버드내⁠」라는 매직 글씨가 나왔다⁠.

저녁에 옥련이 들어오자 상춘이 말했다⁠.

“⁠읍내 가서 현수막 하나 맞춰⁠. 경운기에 달게⁠.⁠”

옥련이 신발을 벗다 말고 상춘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쓸 건디⁠?⁠”

“⁠기호 1번 염상춘⁠. 서른 해 맨 먼저⁠.⁠”

“⁠서른 해 만에 처음 표 달라고 하는구먼⁠.⁠”

옥련은 신발을 마저 벗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칼질 소리가 났다⁠. 상춘은 창고 앞에 쪼그려 앉아 앰프 전선을 경운기 배터리에 대 보았다⁠. 스피커에서 지직⁠, 하고 소리가 났다⁠. 마을 개 두어 마리가 따라 짖었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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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백솔2026.11.06· 2화

    노트북 앞에 번호표 돌리는데 칠 번이 이장 마누라 ㅋㅋㅋ 옥련 여사 최고예요. 「서른 해 만에 처음 표 달라고 하는구먼」 한마디에 상춘 이장 체면이 다 날아갔네요. 경운기 유세 기대됩니다.

    • 모세담작가2026.11.06

      옥련 여사가 마을이에게 무슨 하소연을 했는지는 상춘도 한참 뒤에 알게 돼요. 경운기에 트로트를 싣는 날은 바로 다음 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