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08자)

경운기에 트로트를 싣고

이장 선거에 나온 AI · 모세담

2027년 10월 12일 화요일 아침 여덟 시⁠, 버드내 상춘네 마당⁠. 경운기 앞 짐받이에 빨간 현수막을 묶는 데 삼십 분이 들었다⁠. 「⁠기호 1 염상춘 · 서른 해 맨 먼저⁠」⁠. 읍내 현수막 집에서 글자를 너무 크게 뽑아 「⁠먼저⁠」의 「⁠저⁠」가 짐받이 모서리에서 접혔다⁠. 멀리서 보면 「⁠서른 해 맨 먼⁠」으로 읽혔다⁠.

“⁠맨 먼은 뭐여⁠.⁠” 옥련이 부엌 문간에서 말했다⁠.

“⁠가까이 오면 보여⁠.⁠”

“⁠가까이 올 사람은 원래 당신 찍어⁠.⁠”

상춘은 대꾸 대신 앰프 단추를 눌렀다⁠. 창고에서 찾은 USB에는 2019년 면민 체육대회 때 넣은 트로트가 딱 한 곡 들어 있었다⁠. 반주가 마당에 쾅 퍼지자 닭장 닭들이 한꺼번에 날개를 쳤다⁠.

“⁠당신도 타⁠. 짐칸에 앉아서 손이라도 흔들어⁠.⁠”

“⁠나 아직 누구 찍을지 안 정했어⁠.⁠”

옥련은 부엌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트로트가 끝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

경운기는 윗말 골목을 천천히 돌았다⁠. 상춘은 핸들을 잡은 채 마이크를 입에 댔다⁠. 연설문은 따로 없었다⁠. 밤새 써 보려다 종이 석 장을 버렸다⁠.

“⁠염상춘이유⁠. 서른 해 했슈⁠. 더 할 말 없슈⁠.⁠”

트로트가 다시 시작됐다⁠. 담장 너머에서 감 따던 아저씨가 장대를 든 채 손을 흔들었다⁠. 상춘은 고개를 까딱하고 다음 골목으로 꺾었다⁠.

“⁠염상춘이유⁠. 서른 해 했슈⁠. 더 할 말 없슈⁠.⁠”

세 번째 골목을 돌 때 회관 지붕 확성기가 지직거렸다⁠.

“⁠아아⁠, 알려드립니다⁠. 선거관리위원장 길장수여유⁠. 기호 1번 후보님께 알려드립니다⁠. 경운기 유세는 낮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 하지 마셔유⁠. 덕님이 할머니 낮잠 주무셔유⁠. 그리고 노래가 한 곡뿐이라 듣는 사람 머리가 아프다는 하소연이 들어왔슈⁠. 이상⁠.⁠”

상춘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하소연이 어디로 들어갔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아랫말 끝집 앞을 지날 때 탁오순 할머니가 대문간 의자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상춘은 경운기를 세우고 앰프를 껐다⁠. 할머니가 휴대전화를 들어 흔들었다⁠.

“⁠이장⁠, 이거 좀 읽어 봐⁠. 아들이 뭐라고 보냈는디 글씨가 쬐깐혀⁠.⁠”

글씨가 작아서가 아니었다⁠. 오순 할머니는 글을 몰랐다⁠. 서른 해 동안 할머니 앞으로 오는 고지서와 편지는 상춘이 읽었다⁠. 상춘은 장갑을 벗고 화면을 보았다⁠.

「⁠엄마 이번 주도 못 가요⁠. 공장 일이 밀렸어요⁠. 미안해요⁠.⁠」

상춘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번 주는 바쁘댜⁠. 다음 달 초에 온다고⁠, 김장 때 온다고⁠.⁠”

“⁠그려⁠? 김장 때⁠?⁠”

“⁠그려유⁠.⁠”

할머니가 휴대전화를 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춘은 장갑을 끼고 경운기에 올랐다⁠. 문자 어디에도 김장이라는 말은 없었다⁠. 상춘은 김장 날 아침에 오순 할머니 아들에게 전화부터 걸어 둘 생각을 하며 시동을 걸었다⁠. 서른 해 동안 할머니가 들을 말은 상춘이 골랐다⁠.

“⁠이장⁠.⁠” 할머니가 뒤에서 불렀다⁠. “⁠마을이는 문자도 소리 내서 읽어 줘⁠. 한 글자도 안 빼고⁠.⁠”

상춘은 대답하지 않고 앰프를 켰다⁠. 트로트가 처음부터 다시 나왔다⁠.

*

아랫들로 내려가는 농로는 경운기 한 대가 지나가면 꽉 찼다⁠. 양옆은 추수를 끝낸 논이었다⁠. 볏짚 묶음이 하얀 비닐을 쓰고 군데군데 엎드려 있었다⁠. 농로 중간쯤에서 맞은편으로 짐 자전거 한 대가 다가왔다⁠. 자전거 짐받이에 노트북이 끈으로 묶여 있었고⁠, 노트북 옆에 손바닥만 한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도형식이 페달을 밟고 있었다⁠.

“⁠기호 2번 마을이유⁠.⁠” 스피커에서 마을이 목소리가 났다⁠. “⁠오늘 칠성면 미세먼지 좋음⁠, 오후 세 시부터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어유⁠. 볏짚 태우실 분은 오전에 태우셔유⁠. 아⁠, 불법 소각은 과태료가 있으니 태우지 마셔유⁠.⁠”

경운기와 자전거가 농로 한가운데에서 서로 마주 보고 멈췄다⁠. 상춘은 시동을 끄지 않았다⁠. 형식은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았다⁠. 경운기 앰프의 트로트와 자전거 스피커의 날씨 안내가 겹쳐서 논 위로 퍼졌다⁠.

“⁠비켜⁠.⁠”

“⁠장인어른이 비키세요⁠. 경운기는 후진이 되잖아요⁠.⁠”

“⁠자전거는 들면 되잖여⁠.⁠”

“⁠노트북이 묶여 있어요⁠.⁠”

“⁠그럼 노트북을 내려⁠.⁠”

“⁠후보를 길바닥에 내리라고요⁠?⁠”

스피커에서 마을이가 끼어들었다⁠.

“⁠두 분⁠, 통계적으로 보면유⁠, 이 농로에서 경운기가 후진한 횟수가 자전거가 비킨 횟수보다 여섯 배 많아유⁠. 이장님이 서른 해 동안 비키셨슈⁠.⁠”

“⁠니가 그걸 어떻게 알어⁠.⁠”

“⁠덕님이 할머니가 말씀하셨슈⁠. 이장은 길에선 늘 비켜 준다구유⁠.⁠”

상춘은 마이크를 꺼 버렸다⁠. 트로트가 뚝 끊기자 논 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백로 한 마리가 논바닥에서 날아올랐다⁠. 상춘은 기어를 후진에 넣었다⁠. 경운기가 덜컹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형식이 비켜난 자리로 자전거를 밀고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형식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장인어른⁠.⁠”

“⁠표 하나 줄 거여⁠?⁠”

“⁠그건 비밀투표예요⁠.⁠”

“⁠다들 비밀투표래⁠.⁠”

*

오후 세 시⁠, 회관 노인회 방에 사람이 꽉 찼다⁠. 할머니들은 아랫목에⁠, 할아버지들은 문 앞에⁠, 귀촌한 젊은 부부들은 벽에 붙어 서 있었다⁠. 탁자 위에는 노트북이 놓였고⁠, 노트북 옆에 칠성면장과 군청 자치행정과 주무관이 앉았다⁠. 해주는 서류철을 안고 면장 뒤에 서 있었다⁠. 상춘은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형식은 맞은편 창가에 서 있었다⁠.

면장이 안경을 고쳐 쓰고 종이 한 장을 펼쳤다⁠.

“⁠버드내 이장 선거와 관련해 칠성면의 해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이장 선거는 마을 규약에 따라 마을총회가 합니다⁠. 규약 사조에는 후보가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총회는 마을이를 후보로 둘 수 있습니다⁠.⁠”

아랫목에서 박수가 나왔다⁠. 덕님 할머니였다⁠. 면장이 손을 들어 박수를 멈췄다⁠.

“⁠다음⁠, 지방자치법 시행령에 따라 이장은 주민 가운데에서 면장이 임명합니다⁠. 면장은 사람만 임명할 수 있습니다⁠. 노트북에 임명장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문 앞에서 할아버지들이 박수를 쳤다⁠. 면장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래서⁠, 마을이가 총회에서 이기면⁠, 총회가 마을이를 대신해 일할 사람 한 분을 다시 추천해 주십시오⁠. 면장은 그분을 이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분은 마을이가 내건 공약을 지켜야 합니다⁠. 마을이가 지면 지금처럼 이기신 분을 임명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다들 이 말이 누구에게 좋은 말인지 따져 보는 얼굴이었다⁠. 상춘이 문지방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장은 결국 도 서방이여⁠?⁠”

“⁠제가 아니어도 돼요⁠.⁠” 형식이 창가에서 말했다⁠. “⁠총회가 정하면 돼요⁠. 누가 되든 마을이가 들은 걸 그대로 하면 돼요⁠.⁠”

“⁠니가 손이고 저게 머리면⁠, 버드내는 누구 거여⁠?⁠”

“⁠마을 사람 거죠⁠. 마을이는 들은 걸 전할 뿐이에요⁠.⁠”

“⁠들은 걸 전한다⁠.⁠” 상춘이 노트북을 보았다⁠. “⁠그럼 니 머리는 어디 있어⁠?⁠”

“⁠지 머리는 바다 건너 큰 회사 서버에 있구유⁠, 말씨는 버드내서 배웠슈⁠.⁠” 마을이가 대답했다⁠. “⁠서버 있는 동네는 지금 새벽 한 시래유⁠. 지는 잠을 안 자니께 괜찮어유⁠.⁠”

할머니들이 웃었다⁠. 상춘은 웃지 않았다⁠.

“⁠바다 건너 회사가 우리 이장을 혀⁠?⁠”

“⁠회사가 하는 게 아니에요⁠.⁠” 형식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장인어른⁠, 그 회사는 말하는 법만 빌려줘요⁠. 무슨 말을 할지는 여기 할머니들이 정했어요⁠. 삼 년 동안 밤마다요⁠.⁠”

문 앞의 할아버지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럼 마을이가 되면⁠, 비 오는 날 경운기는 누가 몰어⁠?⁠”

“⁠추천받은 분이 모시겠죠⁠.⁠” 면장이 대답했다⁠.

“⁠그 사람이 경운기 몰 줄 알어⁠?⁠”

방 안의 눈이 일제히 형식에게 갔다⁠. 형식이 헛기침을 했다⁠.

“⁠배우면 돼요⁠.⁠”

“⁠삼 년 동안 안 배웠잖여⁠.⁠”

웃음이 터졌다⁠. 해주가 앞으로 나와 할머니들 눈높이로 몸을 낮췄다⁠.

“⁠투표용지에는 두 이름만 있어요⁠. 기호 1번 염상춘⁠, 기호 2번 마을이⁠. 동그라미 하나만 찍으시면 돼요⁠. 마을이가 되면 그다음에 총회를 한 번 더 해서 일할 분을 뽑아요⁠.⁠”

“⁠투표를 두 번 혀⁠?⁠” 장수가 귀에 손을 대고 물었다⁠.

“⁠이기면 두 번이요⁠. 지면 한 번이요⁠.⁠”

“⁠그럼 투표용지를 두 번 찍어야겄네⁠. 인쇄소에 전화혀야겄어⁠.⁠”

장수가 수첩을 꺼내 무언가 적었다⁠. 면장이 헛기침을 했다⁠. 군청 주무관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저⁠,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요⁠. 군수님 지시로 조금 전에 보도자료가 나갔습니다⁠.⁠”

주무관이 휴대전화 화면을 면장에게 보였다⁠. 면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방 안 여기저기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상춘의 주머니에서도 울렸다⁠. 단톡방에 장수가 기사 하나를 올려 두었다⁠.

「⁠괴산군⁠, 전국 첫 ‘⁠AI 이장 후보⁠’ 나왔다 — 칠성면 버드내 마을총회 11월 6일⁠」

기사 사진에는 회관 게시판이 나왔다⁠. 하늘색 벽보 옆에 상춘의 벽보가 반만 잘려 있었다⁠. 주먹 쥔 손과 감은 눈 한쪽만 보였다⁠.

“⁠군수님이 이걸 왜 내유⁠.⁠” 상춘이 주무관에게 물었다⁠.

“⁠군이 인공지능 행정에 앞서간다는 걸 보여 주자고 하셔서요⁠. 버드내가 괴산 이름을 알릴 기회라고요⁠.⁠”

“⁠내 얼굴은 반만 나왔는디⁠.⁠”

“⁠사진 기자가 하늘색이 더 잘 나온다고⁠…⁠…⁠”

주무관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해주가 서류철을 고쳐 안았다⁠.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고 면장의 뒤통수만 보고 있었다⁠.

*

면장 일행이 돌아가고 사람들이 흩어졌다⁠. 회관 마당 단풍나무 아래에서 형식이 휴대전화를 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상춘은 경운기 시동을 걸려다 손을 내렸다⁠. 형식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뭐여⁠.⁠”

“⁠정보공개 결과 왔어요⁠. 2025년 배수로 사업 서류요⁠.⁠”

형식이 화면을 넘겼다⁠. 주민 동의서 사본이 한 장씩 지나갔다⁠. 이름과 서명 칸이 줄줄이 이어졌다⁠. 형식의 손가락이 어느 장에서 멈췄다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앞 장으로 돌아왔다⁠.

“⁠장인어른⁠.⁠”

“⁠말혀⁠.⁠”

“⁠토요일 토론회 때 말씀드릴게요⁠. 지금 하면 장인어른이 또 비키실 것 같아서요⁠.⁠”

형식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짐받이의 노트북 스피커에서 마을이가 마지막 날씨를 알렸다⁠. 오늘 밤 칠성면 최저 기온 3도⁠, 고추 덮개 덮으셔유⁠.

회관 현관에서 해주가 서류철을 안고 나왔다⁠. 면장 차가 마당을 빠져나가는 동안 해주는 차에 타지 않고 아버지 앞으로 왔다⁠.

“⁠형식 씨가 뭘 봤는지 저도 알아요⁠. 그 서류철⁠, 제 책상에서 나간 거예요⁠.⁠”

“⁠그려서⁠.⁠”

“⁠아버지가 먼저 말하시면 덜 아파요⁠. 토요일에 형식 씨 입에서 나오면 더 아파요⁠.⁠”

“⁠뭘 말혀⁠. 나는 할 말 없어⁠.⁠”

해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면장 차가 마당 끝에서 경적을 짧게 울렸다⁠. 해주는 서류철을 고쳐 안고 차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뒷모습에서 묶은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어릴 때 학교 늦은 아침마다 보던 모양 그대로였다⁠.

상춘은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앰프에서 트로트가 처음부터 다시 나왔다⁠. 상춘은 이번에는 끄지 않았다⁠. 경운기를 몰고 아랫들로 내려가 배수로 옆에 세우고⁠, 해가 질 때까지 수문 손잡이에 기름칠을 했다⁠. 기름칠이 필요 없는 손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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