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34자)

기호 2번은 노트북에 산다

이장 선거에 나온 AI · 모세담

2027년 10월 4일 월요일 한낮⁠, 충북 괴산군 칠성면 버드내⁠. 염상춘은 아랫들에서 들깨 단을 싣고 올라오다가 마을회관 앞에서 경운기 시동을 껐다⁠. 통통거리던 소리가 멎자 달천 물소리와 회관 마당 단풍나무의 잎 떨어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게시판에 벽보가 두 장이었다⁠.

서른 해 동안 벽보는 늘 한 장이었다⁠. 열다섯 번 혼자 나왔고⁠, 열다섯 번 마을총회에서 박수로 이장이 됐다⁠. 이번에도 아내 하옥련이 읍내 사진관에 데려가 찍은 사진으로 벽보를 만들었다⁠. 「⁠기호 1 염상춘⁠」⁠. 사진 속 상춘은 주먹을 쥐고 눈을 감은 채 웃고 있었다⁠. 사진관 주인이 “⁠이장님⁠, 화이팅 한 번 해 보셔유⁠” 해서 쥔 주먹이었다⁠.

옆 벽보는 하늘색이었다⁠. 「⁠기호 2 마을이⁠」⁠. 이름 밑에 동그란 얼굴 하나가 눈을 반달로 접고 입을 벌려 웃었다⁠. 얼굴 아래로 전깃줄 같은 선이 뻗어 끝마다 동그라미가 달려 있었다⁠.

회관 유리창에 상춘의 모습이 비쳤다⁠. 짧게 깎은 흰 스포츠머리 위에 밀짚모자⁠, 볕에 그을린 얼굴에 굵은 주름⁠, 체크 남방 위에 해진 남색 조끼⁠, 흙 묻은 바지⁠, 파란 장화⁠. 쉰 해 농사로 단단해진 몸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언제 팔짱을 꼈는지 상춘도 몰랐다⁠.

게시판 옆에 나무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노트북이 펼쳐져 있고⁠, 화면 속에서 벽보와 똑같은 하늘색 얼굴이 손바닥 하나를 흔들었다⁠.

“⁠기호 1번 염상춘 후보님⁠, 안녕하셔유⁠. 기호 2번 마을이여유⁠.⁠”

상춘은 팔짱을 풀지 않았다⁠.

“⁠오늘 칠성면 낮 기온 21도⁠, 바람은 서풍이유⁠. 고추 말리기 좋은 날이여유⁠.⁠”

“⁠누가 물어봤어⁠?⁠”

“⁠안 물어보셔도 말씀드리는 게 지 공약이유⁠. 묻기 전에 알려드리기⁠.⁠”

*

윗길에서 짐 자전거 한 대가 내려왔다⁠. 도형식이 붉은 고추 포대를 뒤에 싣고 페달을 밟았다⁠. 회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장갑을 벗는 동안 형식은 장인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서울 판교에서 프로그램을 짜다 삼 년 전 버드내로 내려온 사위였다⁠. 내려온 이듬해 상춘의 외동딸 해주와 혼인했고⁠, 마을 사람들은 아직 형식을 도 서방이라고 불렀다⁠.

“⁠장인어른⁠, 벽보 보셨어요⁠?⁠”

“⁠이게 뭐여⁠.⁠”

“⁠후보요⁠. 마을이도 마을 사람이에요⁠. 회관에 들어온 지 삼 년 됐어요⁠.⁠”

“⁠회관에 들어온 건 냉장고도 들어왔어⁠.⁠”

“⁠냉장고는 할머니들 말을 안 들어 드리잖아요⁠.⁠”

형식이 장갑을 접어 뒷주머니에 넣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지도가 떴다⁠. 회관 아래에서 아랫들을 지나 달천 둑까지 파란 줄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2025년 봄에 군 보조금 구천만 원으로 낸 배수로예요⁠. 회관에서 둑까지 육백사십 미터⁠. 윗들에는 한 뼘도 안 갔어요⁠. 장마 때마다 윗들 고추밭이 잠기는데요⁠. 이 줄이 지나가는 땅이 누구 땅인지 보세요⁠.⁠”

상춘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았다⁠. 배수로는 상춘네 배추밭 둑을 따라 흘러 수문까지 갔다⁠.

“⁠주민 회의는 언제 하셨어요⁠? 회의록이 없어요⁠.⁠”

“⁠경로당에서 다 말했어⁠.⁠”

“⁠화투 치시면서요⁠?⁠”

“⁠화투 치면서 하는 말은 말이 아니여⁠?⁠”

“⁠근거가 남지 않잖아요⁠.⁠”

“⁠근거⁠.⁠” 상춘은 근거라는 말을 입안에서 한 번 굴렸다⁠. “⁠2017년 7월 16일 아침에 아랫말 마당에 물이 무릎까지 찼어⁠. 그날 아침에 오순 아지매 업고 나온 사람이 누구여⁠?⁠”

“⁠장인어른이요⁠. 백 번 들었어요⁠.⁠”

“⁠2023년에 댐 넘쳤을 때 회관 바닥에 이불 깐 사람은⁠?⁠”

“⁠그것도 장인어른이요⁠. 이백 번 들었어요⁠.⁠”

“⁠그럼 됐어⁠.⁠”

“⁠안 됐어요⁠. 그거랑 구천만 원이 장인어른 배추밭 옆으로 간 건 다른 얘기예요⁠.⁠”

형식은 말을 끊지 않았다⁠. 삼 년 동안 참은 말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저 처음 내려왔을 때 마을발전기금 삼백만 원 내라고 하셨죠⁠. 안 내면 회관도 못 쓰고 농로도 못 지나간다고요⁠.⁠”

“⁠회관 보일러 갈았어⁠. 그 돈으로⁠.⁠”

“⁠영수증 있어요⁠?⁠”

“⁠보일러 있잖여⁠. 가서 만져 봐⁠. 뜨듯혀⁠.⁠”

“⁠보일러가 영수증이에요⁠?⁠”

“⁠버드내에선 그려⁠.⁠”

형식이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판교에서 회의를 하다 말이 막히면 하던 버릇이라고 해주가 언젠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이를 만든 거예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돈이 어디로 갔는지⁠, 다 남게요⁠. 영국 바닷가 도시에서는 몇 해 전에 인공지능이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왔어요⁠. 거기에 비하면 이장은 작은 거예요⁠.⁠”

“⁠거기선 됐어⁠?⁠”

형식이 잠깐 말을 멈췄다⁠. “⁠떨어졌어요⁠.⁠”

“⁠그려⁠. 장하다⁠.⁠”

노트북 속 얼굴이 눈을 깜박였다⁠.

“⁠두 분 말씀 다 들었슈⁠. 마을이가 밤새 생각해 볼게유⁠.⁠”

상춘은 노트북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구석에 작은 빨간 점 하나가 깜박였다⁠.

“⁠야⁠, 니가 이 마을을 알어⁠? 인공지능이 남의 집 제삿날까지 알어⁠?⁠”

“⁠알지유⁠.⁠” 마을이가 대답했다⁠. “⁠염상춘 후보님 선친 제사는 음력 구월 열이레⁠, 할머님은 동짓달 초사흘이유⁠. 제사 장은 하옥련 여사님 혼자 보시구유⁠, 후보님은 해마다 제사 전날 남의 집 일로 늦게 들어오신대유⁠. 작년엔 맹덕님 할머니 보일러 고치다 밤 열한 시에 오셨구유⁠.⁠”

형식이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들썩였다⁠.

“⁠누가 그려⁠?⁠”

“⁠하옥련 여사님이 지난달 하소연하셨슈⁠. 다 들었슈⁠.⁠”

*

회관 지붕의 확성기가 지직거렸다⁠. 아아⁠, 아아⁠. 노인회장 길장수의 목소리가 온 마을에 깔렸다⁠.

“⁠아아⁠, 알려드립니다⁠. 마을 선거관리위원장 길장수여유⁠. 오늘 정오로 이장 후보 등록이 마감됐슈⁠. 기호 1번 염상춘⁠, 기호 2번 마을이⁠. 마을이는 성이 없슈⁠. 이상⁠.⁠”

한 박자 쉬고 확성기가 다시 지직거렸다⁠.

“⁠아⁠, 그리고 덕님이 할머니⁠, 아드님 택배 회관에 와 있슈⁠. 겉에 무릎 보호대라고 써 있슈⁠.⁠”

상춘은 경운기를 그대로 두고 회관 문을 밀었다⁠. 노인회 방 아랫목에 장수가 돋보기를 코끝에 걸치고 앉아 있었다⁠. 마이크가 아직 켜져 있어서 상춘이 문 닫는 소리가 확성기로 온 마을에 쾅⁠, 하고 나갔다⁠.

“⁠형님⁠, 저게 무슨 후보유⁠.⁠”

장수가 마이크 단추를 끄고 누런 공책 한 권을 펼쳤다⁠. 표지에 「⁠버드내 마을 규약 1994⁠」라고 붓글씨가 있었다⁠.

“⁠규약 사조⁠, 이장 후보는 마을에 이 년 넘게 산 자로 한다⁠. 저거 회관에 삼 년 살았어⁠.⁠”

“⁠사람이 아니잖유⁠.⁠”

“⁠사람이라고는 안 써 있어⁠.⁠”

“⁠형님이 쓴 거잖유⁠!⁠”

“⁠그때 인공지능이 어딨어⁠. 소 말고는 다 사람이었지⁠.⁠”

“⁠그럼 저것도 투표혀유⁠?⁠”

“⁠투표는 주민등록 있는 사람만 혀⁠. 저건 뽑힐 수는 있어도 찍을 수는 없어⁠.⁠”

“⁠그게 말이 돼유⁠?⁠”

“⁠규약이 그려⁠. 뽑히는 건 사조⁠, 찍는 건 오조⁠.⁠”

장수는 공책을 덮고 안경을 벗었다⁠. 장수의 귀는 해마다 어두워져서 할 말이 끝나면 늘 남의 말을 안 들었다⁠.

“⁠규약대로 혀⁠. 서른 해 혼자 나온 게 이상한 거여⁠. 이번에 한번 붙어 봐⁠.⁠”

*

해 질 녘⁠, 상춘은 들깨 단을 마당에 부려 놓고 빈 경운기로 아랫들에 내려갔다⁠. 콘크리트 배수로는 회관 아래 골목에서 시작해 아랫말 집들 뒤를 돌고⁠, 논과 배추밭 사이를 지나 달천 둑까지 곧게 뻗었다⁠. 둑 밑에 쇠 수문이 하나 있었다⁠. 상춘은 경운기에서 내려 수문 손잡이를 반 바퀴 돌려 보았다⁠. 기름칠을 해 둔 손잡이가 소리 없이 돌았다⁠.

배추밭이 배수로 바로 옆에서 퍼렇게 차올랐다⁠. 김장 배추 삼천 포기⁠. 아랫들에서 가장 낮은 땅이었다⁠. 상춘은 장화 끝으로 배수로 턱을 두어 번 찼다⁠. 콘크리트가 단단했다⁠.

둑길로 보행기 바퀴 소리가 다가왔다⁠. 맹덕님 할머니가 보행기에 감 소쿠리를 얹고 밀고 왔다⁠. 무릎을 두 번 수술한 할머니였다⁠.

“⁠이장⁠, 여기서 뭐 혀⁠.⁠”

“⁠물길 봐유⁠.⁠”

“⁠물도 안 오는디 물길은 왜 봐⁠.⁠”

“⁠안 올 때 봐야지유⁠.⁠”

덕님 할머니가 소쿠리에서 홍시 하나를 집어 상춘에게 내밀었다⁠. 상춘이 받으려는데 할머니가 손을 도로 거두었다⁠.

“⁠아⁠, 이건 마을이 거여⁠.⁠”

“⁠그게 홍시를 어떻게 먹어유⁠.⁠”

“⁠안 먹어도 줘야지⁠. 내 무릎 수술 날짜를 나보다 잘 알어⁠. 병원 가는 버스 시간도 알려 줘⁠. 이장은 버스 시간 물어보면 내가 태워다 줄게⁠, 그러고 바쁘다고 안 오잖여⁠.⁠”

“⁠작년에 두 번 태워 드렸잖유⁠.⁠”

“⁠세 번 말했어⁠.⁠”

덕님 할머니는 보행기를 돌려 회관으로 올라갔다⁠. 소쿠리의 홍시가 바퀴 따라 흔들렸다⁠. 상춘은 수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로 한참 서 있었다⁠. 둑 위로 달천이 낮게 흘렀다⁠. 2023년 7월 15일 아침에는 이 물이 둑을 넘보았고⁠, 위쪽 괴산댐은 아예 넘쳤다⁠. 상춘은 이 수문 앞에서 물 높이를 재다가 아랫말로 뛰어 올라갔다⁠.

*

저녁에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옥련이 평상에서 고구마 줄기를 까고 있었다⁠. 손끝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상춘은 장화를 벗지도 않고 평상 끝에 앉았다⁠.

“⁠당신⁠, 회관 가서 무슨 말을 했어⁠?⁠”

“⁠무슨 말⁠?⁠”

“⁠제사 장 혼자 본다고⁠.⁠”

옥련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줄기 껍질이 길게 벗겨져 소쿠리에 떨어졌다⁠.

“⁠혼자 보잖여⁠.⁠”

“⁠그걸 왜 저 노트북한테 혀⁠.⁠”

“⁠그럼 누구한테 혀⁠? 당신은 서른 해 동안 남의 집 아들이었어⁠. 보일러 터지면 남의 집⁠, 소 새끼 낳으면 남의 집⁠, 초상 나면 남의 집⁠. 저건 밤 열한 시에 가도 들어 줘⁠. 대꾸도 혀⁠. 고생하셨구먼유⁠, 그러고⁠.⁠”

“⁠기계가 하는 대꾸가 대꾸여⁠?⁠”

“⁠당신은 대꾸도 안 하잖여⁠.⁠”

옥련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마을 단톡방에 마을이의 공약이 올라와 있었다⁠.

「⁠기호 2 마을이 공약 — 하나⁠, 이장 수당 월 사십만 원 전부 마을 기금으로⁠. 둘⁠, 하소연은 밤 열한 시까지 받음⁠. 셋⁠, 보조금은 한 푼까지 회관 벽에 붙임⁠.⁠」

“⁠수당을 다 내놓는다⁠? 저건 밥을 안 먹으니까 그러지⁠. 전기는 먹잖여⁠. 회관 전기세는 마을 기금에서 나가⁠.⁠”

옥련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건 당신이 토론회 가서 혀⁠.⁠”

상춘은 할 말을 찾다가 장화 끝으로 마당 흙을 긁었다⁠. 옥련이 고구마 줄기 한 움큼을 상춘 무릎에 올려 놓았다⁠.

“⁠까⁠. 이것도 남의 집 일이라 생각하고 까 봐⁠.⁠”

상춘이 줄기를 까는 동안 해가 뒷산으로 넘어갔다⁠.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들었다⁠. 이장 서른 해 동안 고구마 줄기를 깐 것은 처음이었다⁠.

*

밤 아홉 시⁠, 상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해주⁠」가 떴다⁠.

“⁠아버지⁠, 주무셨어요⁠?⁠”

“⁠안 잤어⁠. 니 신랑이 나한테 붙었다⁠.⁠”

“⁠알아요⁠.⁠” 해주의 목소리가 낮았다⁠. 칠성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이장 업무를 맡은 주무관이었다⁠. 올여름부터 면 안 이장 선거 서류가 전부 해주 책상으로 갔다⁠. “⁠마을이 후보 등록 서류도 오늘 저한테 왔어요⁠. 면이 이걸 받아도 되는지 군청에 물어봤고요⁠.⁠”

“⁠군청이 뭐랴⁠.⁠”

“⁠아직 답이 없어요⁠. 자치행정과도 처음 보는 일이라고⁠, 행정안전부에 물어봐야 하나⁠, 그러더라고요⁠.⁠”

“⁠행정안전부가 버드내를 알어⁠?⁠”

“⁠이제 알게 되겠죠⁠. 그리고 아버지⁠, 하나 더요⁠.⁠”

해주가 숨을 한 번 골랐다⁠.

“⁠형식 씨가 지난주에 군청에 정보공개청구를 넣었어요⁠. 2025년 배수로 사업 서류 전부요⁠. 주민 동의서까지요⁠.⁠”

상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회관 불빛이 보였다⁠. 밤 아홉 시인데 회관 창이 환했고⁠, 노트북 앞에 꼬부라진 그림자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버지⁠, 동의서에 문제 없죠⁠?⁠”

“⁠자라⁠.⁠”

상춘은 전화를 끊고 창을 닫았다⁠. 닫힌 유리 너머로도 회관 그림자들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셋 가운데 하나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고⁠, 노트북 화면의 하늘색 얼굴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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