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063자)

2,000m의 산맥

국토횡단 패러글라이딩 · 이수

섬강 가 밭은 위에서 보니 손바닥보다 작았다⁠. 강이 크게 휘는 안쪽⁠, 비닐을 덮은 고추밭 옆의 마른 밭이었다⁠. 밭 가장자리에 농막 하나와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삼 주 전 우한은 감나무 그늘에서 날개를 접었다⁠. 보람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울던 자리가 감나무 옆 농로였다⁠.

오늘 우한은 양배추밭을 1⁠,600m에서 지났다⁠. 바리오가 울고 있었다⁠. 섬강 너머 원주 시내 공업 단지에서 솟는 기둥이었다⁠. 우한은 밭을 내려다보며 원을 그렸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밭이 날개 아래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우한아⁠, 지금 어디냐⁠.⁠”

기철이 물었다⁠. 기철의 휴대전화에도 점이 떠 있을 텐데 기철은 굳이 물었다⁠.

“⁠섬강 가 밭 위요⁠.⁠”

“⁠거기가 지난번 그 밭이냐⁠.⁠”

“⁠예⁠.⁠”

기철은 더 묻지 않았다⁠. 보람이 작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우한은 원을 한 바퀴 더 돌고 동쪽으로 날개를 돌렸다⁠. 원주였다⁠. 수아의 공책에 적힌 원주⁠. 하윤의 공책에 「⁠아마도⁠」를 쓰게 한 원주⁠.

단톡방에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원주 시내를 지나자 땅이 일어섰다⁠. 들판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었다⁠. 산들은 처음엔 낮게 엎드려 있다가 동쪽으로 갈수록 등을 세웠다⁠. 남쪽으로 치악산 줄기가 길게 누워 있었다⁠. 능선이 칼날처럼 서서 남북으로 뻗었다⁠. 능선 위로 바위 봉우리 몇이 솟았다⁠.

산 위의 공기는 들판과 달랐다⁠. 산비탈은 해를 정면으로 받았다⁠. 남쪽과 서쪽 비탈이 먼저 데워졌다⁠. 데워진 비탈을 타고 공기가 기어올라 능선에서 하늘로 떨어져 나갔다⁠. 써멀이 능선마다 줄지어 있었다⁠. 기둥은 굵고 거칠었다⁠. 들판의 기둥이 엘리베이터라면 산의 기둥은 화물 승강기였다⁠. 날개가 들썩이고 하네스가 흔들렸다⁠. 바리오가 쉬지 않고 울었다⁠.

1⁠,800⁠, 1⁠,900⁠.

우한은 원을 그리며 위를 봤다⁠. 구름 바닥이 바로 머리 위였다⁠. 회색빛 평평한 바닥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구름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기둥은 더 세졌다⁠. 구름이 제 몸을 키우려고 아래 공기를 빨아들였다⁠.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앞이 안 보였다⁠. 위아래도 안 보였다⁠. 패러글라이더 조종사가 가장 무서워하는 곳이 구름 속이었다⁠.

1⁠,980⁠. 구름 바닥까지 몇십 미터였다⁠. 우한은 원을 넓게 풀며 기둥 가장자리로 빠져나왔다⁠. 날개가 구름 바닥 바로 아래에 수평으로 떴다⁠.

2⁠,000m⁠.

우한은 고개를 들었다⁠. 숨이 멎었다⁠.

산이 바다처럼 일어서 있었다⁠.

동쪽으로⁠, 끝없이⁠. 능선이 능선 뒤에 서고⁠, 뒤에 또 능선이 섰다⁠. 가까운 능선은 짙은 초록이었다⁠. 5월의 새잎이 산을 덮어 연둣빛이 섞인 초록이었다⁠. 다음 능선은 청록이었고⁠, 다음은 푸른빛이 돌았고⁠, 다음은 옅은 남색이었다⁠. 맨 뒤의 능선은 하늘과 거의 같은 색이었다⁠. 능선들이 모두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오듯 겹겹이 동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백두대간이었다⁠. 지도에서는 선 하나였다⁠. 북쪽 백두산에서 남쪽 지리산까지 한반도의 등뼈처럼 이어진 산줄기⁠. 하늘에서 보니 선이 아니었다⁠. 벽이었다⁠. 겹겹이 선 거대한 벽이 동쪽 바다를 막고 서 있었다⁠.

북동쪽으로 높은 봉우리 둘이 구름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하나는 둥글고 하나는 뾰족했다⁠. 오대산과 계방산이었다⁠. 둘 다 1⁠,500m가 넘었다⁠. 2⁠,000m에서 내려다보니 봉우리 꼭대기에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무들이 회색으로 남아 있었다⁠. 산 아래는 5월인데 산 위는 아직 4월이었다⁠.

동쪽 맨 끝 능선 위에 작고 하얀 것들이 서 있었다⁠. 성냥개비만 했다⁠. 하나⁠, 둘⁠, 셋⁠, 열⁠, 스물⁠. 능선을 따라 줄지어 선 풍력발전기들이었다⁠. 대관령이었다⁠. 날개가 돌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도 도는 게 보였다⁠. 서풍이 저 능선에서도 불고 있었다⁠.

우한은 뒤를 돌아봤다⁠. 서쪽 하늘은 아지랑이에 잠겨 있었다⁠. 들판과 강과 도시가 흐릿한 회청색 안개 속으로 가라앉았다⁠. 저 안개 끝 어딘가에 어섬이 있었다⁠. 갯벌과 포도밭과 소나무 숲이 있었다⁠. 오늘 아침 거기서 떴다⁠. 160km였다⁠.

우한은 장갑을 벗었다⁠. 2⁠,000m의 공기가 손등을 할퀴었다⁠. 5월이었지만 이 높이의 공기는 영하에 가까웠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한은 손을 비행복 가슴 안으로 넣어 겨드랑이에 끼웠다⁠. 핫팩이 손바닥에 닿았다⁠. 따뜻함이 손가락 끝까지 번지는 데 한참 걸렸다⁠.

석주는 이걸 봤을 것이다⁠. 십 년 전 이 높이에서 이 산들을 봤을 것이다⁠. 석주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우한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석주가 왜 대관령 앞에서 기다리지 않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이런 걸 보고 나면 사람은 기다리기 싫어졌다⁠. 저 끝 능선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걸 알면서 기다리기는 어려웠다⁠.

발밑으로 영동고속도로가 산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기어갔다⁠. 아침에 본 경부고속도로가 곧게 뻗은 실이었다면 이건 산과 산 사이를 꿰맨 바느질 자국이었다⁠. 터널 입구가 산허리에 까만 점으로 박혀 있었다⁠. 차들이 점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가 다음 산 너머에서 다시 나타났다⁠. 골짜기마다 마을이 한 줌씩 들어앉아 있었다⁠. 마을 둘레에 고랭지 밭이 산비탈을 깎아 계단처럼 올라갔다⁠. 밭마다 흙 빛깔이 달랐다⁠. 막 갈아엎은 밭은 붉었고⁠, 비닐을 덮은 밭은 하얗게 반짝였고⁠, 무언가가 막 싹을 틔운 밭은 연둣빛 솜털을 덮어쓰고 있었다⁠.

산 그림자가 골짜기를 반쯤 덮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산들이 제 그림자를 동쪽으로 길게 늘였다⁠. 그림자 쪽 비탈에서는 공기가 솟지 않았다⁠. 해를 받는 서쪽 비탈만 써멀을 내보냈다⁠. 오후가 깊어질수록 하늘의 길이 좁아질 것이다⁠.

우한은 장갑을 다시 꼈다⁠.

“⁠우한 씨⁠! 우한 씨 들려요⁠?⁠”

보람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때렸다⁠. 울음기도 웃음기도 없이 다급했다⁠.

“⁠들린다⁠.⁠”

“⁠차가 퍼졌어요⁠! 고개 올라오다가 연기가 나요⁠! 보닛에서 하얀 연기가요⁠!⁠”

“⁠어느 고개⁠?⁠”

“⁠몰라요⁠! 평창 넘어가는 고개요⁠! 기철 선생님이 냉각수래요⁠!⁠”

기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언제나처럼 느렸다⁠.

“⁠냉각수 호스가 터졌다⁠. 한 시간은 못 간다⁠. 지도상 우한이랑 20km 벌어졌다⁠.⁠”

회수조가 멈췄다⁠. 우한이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 내리면 아무도 받으러 오지 못했다⁠. 경포대 모래밭에 날개를 펼쳐 둔 채로 혼자 앉아 있는 일은 견딜 수 있었다⁠. 대관령 비탈에 떨어졌는데 아무도 찾으러 오지 못하는 일은 견딜 수 없었다⁠.

“⁠기철 선생님⁠. 견인차 부르세요⁠.⁠”

“⁠불렀다⁠. 한 시간 걸린댄다⁠.⁠”

무전기 너머에서 보람이 무언가를 외쳤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보람이 뛰어가는 발소리가 났다⁠. 다시 보람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무전기를 차에 두고 간 모양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잠깐만요⁠! 아저씨이⁠!⁠”

트럭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커다란 차가 길가에 서는 소리였다⁠. 기철이 무전기를 집어 드는 소리가 났다⁠.

“⁠보람이가 트럭을 세웠다⁠.⁠”

“⁠무슨 트럭이요⁠?⁠”

“⁠양배추⁠.⁠”

우한은 2⁠,000m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헬멧 안에서 웃음이 울렸다⁠.

땅 위에서 벌어진 일은 기철이 무전으로 하나씩 전했다⁠. 기철은 기상 예보를 하듯 차분하게 전했다⁠. 트럭은 대관령 고랭지 밭에서 양배추를 싣고 서울 가락시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반대 방향이었다⁠. 보람은 트럭 기사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사정을 설명했다⁠. 기사는 하늘을 한참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한은 너무 높이 있었다⁠.

“⁠기사분이 그러신다⁠. 저 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 믿냐고⁠.⁠”

“⁠위치 공유 보여 드리세요⁠.⁠”

“⁠보람이가 보여 드렸다⁠. 기사분이 그러신다⁠. 점이 사람이냐고⁠.⁠”

보람이 휴대전화를 기사 얼굴에 들이밀고 무어라 길게 말하는 소리가 무전기로 새어 들어왔다⁠. 「⁠망한 회사⁠」⁠, 「⁠골동품⁠」⁠, 「⁠국내 기록⁠」⁠, 「⁠제가 에델 살 거예요⁠」 같은 낱말들이 섞여 있었다⁠. 마지막에 기사가 크게 웃는 소리가 났다⁠.

“⁠기사분이 양배추 한 망 주신단다⁠. 태워 주지는 못하신단다⁠. 반대 방향이라⁠.⁠”

“⁠양배추는 받으세요⁠.⁠”

“⁠받았다⁠.⁠”

칙⁠.

다른 송신 단추 소리였다⁠. 범수였다⁠.

“⁠김기철 선생님⁠. 위치 봤습니다⁠. 이십 분이면 갑니다⁠.⁠”

범수의 목소리 뒤로 엔진 소리가 높았다⁠. 승합차가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범수는 여주 둔치를 떠난 뒤로 줄곧 우한의 동쪽 아래를 달리고 있었다⁠.

“⁠범수야⁠, 너 지금 혼자냐⁠.⁠”

기철이 물었다⁠. 범수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원주 터미널에서 한 사람 태웠습니다⁠.⁠”

“⁠누구⁠.⁠”

“⁠은솔 씨요⁠.⁠”

우한은 원을 그리다 멈출 뻔했다⁠. 은솔에게는 무전기가 없었다⁠. 은솔은 어섬에 오지 않았다⁠. 은솔이 원주 터미널에 있었다⁠.

“⁠은솔 씨가 열두 시에 저한테 전화했습니다⁠. 안산에서 원주 가는 버스 탔다고⁠. 대관령 가는 길을 모른다고⁠. 데리러 와 달라고⁠.⁠”

범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십 년 만에 처음 온 전화였습니다⁠.⁠”

채널이 조용해졌다⁠. 우한은 구름 바닥 아래에서 수평으로 미끄러지며 은솔의 말을 들었다⁠. 십 년 동안 은솔은 범수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범수도 은솔에게 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범수는 은솔에게 고개를 숙였고⁠, 은솔은 범수를 보지 않았다⁠. 남수가 그렇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이십 분 뒤 기철이 전했다⁠.

“⁠범수 차 왔다⁠. 보람이랑 나 탄다⁠. 양배추도 탄다⁠.⁠”

“⁠경차는요⁠?⁠”

“⁠견인차 기다리라고 쪽지 붙여 놓고 간다⁠. 보람이가 쓴다⁠.⁠”

무전기 너머에서 보람이 큰 소리로 읽으며 썼다⁠. 「⁠죄송합니다⁠. 강릉 가야 해서요⁠. 차는 내일 찾으러 올게요⁠. 양배추 아저씨 감사합니다⁠.⁠」

“⁠양배추 아저씨는 왜 써⁠.⁠”

“⁠고마우니까요⁠!⁠”

승합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엔진 소리가 커졌다⁠. 기철이 조용히 말했다⁠.

“⁠우한아⁠. 이제 다 한 차다⁠.⁠”

범수⁠, 은솔⁠, 기철⁠, 보람⁠. 양배추 한 망까지⁠. 우한은 범수의 차를 내려다볼 수 없었다⁠. 2⁠,000m 아래 어느 고갯길을 은색 점 하나가 기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칙⁠.

누군가 송신 단추를 눌렀다⁠.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가 지나갔다⁠. 범수의 숨소리가 아니었다⁠. 더 가볍고 더 짧았다⁠. 단추를 누른 손이 단추 누르는 법을 처음 배우는 손 같았다⁠.

칙⁠.

단추가 떨어졌다⁠. 기철이 낮게 말했다⁠.

“⁠범수가 은솔 씨한테 무전기 줬다⁠. 은솔 씨가 들고 있다⁠.⁠”

은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관령 능선의 풍력발전기들이 성냥개비만 하게 돌고 있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7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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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화만더2026.11.02· 7화

    회수차 퍼지고 보람이 트럭 기사님께 망한 회사, 골동품, 국내 기록까지 다 설명했는데 결국 양배추 한 망만 받는 데서 소리 내서 웃었어요. 메모에 양배추 아저씨 감사합니다는 왜 쓰는 거예요?

    • 이수작가2026.11.02

      보람은 고마운 사람 이름을 꼭 적어 둬요. 이름을 몰라서 양배추 아저씨가 됐고요. 양배추 한 망은 강릉까지 차에 같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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