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31자)

남은 60km

국토횡단 패러글라이딩 · 이수

오후 네 시⁠, 평창 위의 하늘은 듬성듬성해졌다⁠. 아까까지 줄지어 서 있던 구름들이 하나씩 빠져나갔다⁠. 빠진 자리에 파란 하늘만 남았다⁠. 남은 구름들은 키가 작아졌고 가장자리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해가 낮아지면서 땅이 덜 데워졌다⁠. 덜 데워진 땅은 덜 밀어 올렸다⁠. 하늘의 엔진이 꺼져 가고 있었다⁠.

우한은 1⁠,700m에서 방림 들판을 건너고 있었다⁠. 바리오가 울다 말다 했다⁠. 원을 그리면 초당 1m⁠. 아까 산 위에서 초당 4m씩 치솟던 기둥들은 이제 없었다⁠.

“⁠우한아⁠.⁠”

기철이 불렀다⁠.

“⁠지금부터 한 시간이다⁠. 다섯 시 넘으면 산 쪽은 다 죽는다⁠. 다섯 시 전에 대관령 위에 있어야 한다⁠.⁠”

“⁠거리요⁠.⁠”

“⁠경포대까지 60km⁠. 대관령까지는 35km⁠.⁠”

35km를 한 시간⁠. 땅 위 속도 시속 35km면 되었다⁠. 아침 같으면 쉬웠다⁠. 지금은 원을 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원을 그리는 동안은 앞으로 가지 않았다⁠. 한 번에 십 분씩 원을 그리면 한 시간에 나아가는 거리가 반으로 줄었다⁠.

우한은 가속 발판을 내려다봤다⁠. 밟으면 빨라졌다⁠. 빨라지면 더 빨리 가라앉았다⁠. 가라앉으면 원을 더 오래 그려야 했다⁠. 석주의 날개는 중급이었다⁠. 요즘 고급 날개는 1m 내려가며 10m 넘게 갔다⁠. 이 날개는 8m를 겨우 갔다⁠. 우한의 고급 에델 날개라면 9m는 갔을 것이다⁠. 창고 선반 위에 자물쇠를 채워 둔 날개였다⁠.

1m에 8m⁠. 1⁠,700m면 13km 남짓⁠. 13km 안에 다음 기둥이 있어야 했다⁠.

우한은 반만 밟았다⁠. 바람이 등을 밀어 주었다⁠. 서풍이 높은 데서 시속 20km로 불었다⁠. 날개의 속도에 바람의 속도가 얹혔다⁠. 바리오 아래 숫자가 시속 48km를 가리켰다⁠. 그거면 되었다⁠.

“⁠우한 씨⁠, 저 양배추 먹어도 돼요⁠?⁠”

보람이었다⁠. 우한은 대답을 고르다 말았다⁠. 범수가 대신 대답했다⁠.

“⁠생으로 먹으면 배 아파요⁠.⁠”

“⁠배고파요⁠. 김밥을 이천에서 다 먹었어요⁠.⁠”

“⁠은솔 씨가 떡 가져왔어요⁠. 뒤에 있어요⁠.⁠”

뒷좌석에서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보람이 「⁠감사합니다⁠!⁠」 하고 크게 말했다⁠. 은솔이 무어라 대답했지만 무전기에 잡히지 않았다⁠. 은솔이 무전기 단추를 누르지 않고 말했기 때문이다⁠. 은솔은 무전기를 무릎에 올려놓고만 있었다⁠.

승합차 조수석에서 진은솔은 무전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창밖 하늘을 보고 있었다⁠. 우한의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높았다⁠. 은솔은 하늘 대신 범수의 휴대전화 거치대에 꽂힌 위치 공유 화면을 봤다⁠. 점 하나가 산과 산 사이를 기어가고 있었다⁠.

원주 터미널에서 차에 오른 뒤로 은솔은 범수와 두 마디를 나눴다⁠. “⁠타세요⁠.⁠” “⁠고마워요⁠.⁠” 두 마디가 다였다⁠. 범수는 운전만 했다⁠. 라디오도 켜지 않았다⁠. 차 안에는 무전기 지직거리는 소리와 타이어가 아스팔트 이음매를 넘는 소리만 났다⁠. 핸들을 쥔 손등에 핏줄이 섰다⁠. 은솔은 범수의 왼손 옆⁠, 운전석 문 주머니에 꽂힌 낡은 무전기를 봤다⁠. 고무 안테나 끝이 하얗게 닳아 있었다⁠. 십 년 전 테이프 속 칙 소리를 낸 무전기였다⁠. 은솔은 무전기를 알아봤다⁠. 석주가 범수에게 생일 선물로 사 준 것이었다⁠.

범수가 은솔에게 새 무전기를 건넨 건 고개에서 보람과 기철을 태운 직후였다⁠. 「⁠단추 누르면 말이 가요⁠. 떼면 들려요⁠.⁠」 범수는 은솔의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은솔은 무전기를 받았다⁠. 손바닥만 한 검은 기계가 생각보다 가벼웠다⁠. 석주가 집에서 장난칠 때 쓰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뒷좌석에서 보람이 떡을 씹으며 기철에게 속삭였다⁠. 「⁠회장님이랑 은솔 언니 원래 아는 사이예요⁠?⁠」 기철이 대답했다⁠. 「⁠밥 먹어라⁠.⁠」

다시 하늘⁠.

약했다⁠. 원을 열두 바퀴 그려서 300m를 올랐다⁠. 십 분이 걸렸다⁠. 기둥 꼭대기에서 우한은 시계를 봤다⁠. 네 시 이십 분이었다⁠.

장평을 지나 진부로 넘어가는 산줄기 위에서 바리오가 길게 울었다⁠. 뚜우우우⁠. 가라앉는 공기였다⁠. 산 그림자 쪽이었다⁠. 우한은 날개를 남쪽으로 틀어 해를 받는 비탈로 옮겨 갔다⁠. 비탈 위 나무들이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무 꼭대기들이 일제히 동쪽으로 기울었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기울었다⁠. 바람이 비탈을 타고 오르는 것이 보였다⁠. 우한은 비탈에 바짝 붙어 날았다⁠. 날개 끝과 나무 꼭대기 사이가 열 걸음 남짓이었다⁠. 바리오가 다시 울었다⁠. 삐⁠, 삐⁠.

1⁠,300m⁠.

진부 들판이 발밑으로 펼쳐졌다⁠. 오대산 남쪽 기슭의 넓은 고원 들판이었다⁠. 감자밭과 배추밭이 바둑판처럼 이어져 있었다⁠. 들판 가운데 막 갈아 놓은 밭 하나가 유난히 넓었다⁠. 전봇대도 없고 나무도 없었다⁠. 바람을 안고 내리기 좋은 밭이었다⁠. 회수차가 들어올 농로도 밭 가장자리를 따라 나 있었다⁠.

우한은 밭을 내려다보며 원을 그렸다⁠. 기둥이 거의 없었다⁠. 원 하나에 몇 미터를 얻고 몇 미터를 잃었다⁠. 바리오가 울다 말다 했다⁠.

여기가 마지막이었다⁠. 진부 들판을 지나면 대관령까지 산뿐이었다⁠. 산 위에서 낮아지면 내릴 자리가 없었다⁠. 산비탈 나무 위에 떨어지거나 계곡에 떨어지거나⁠. 석주는 대관령을 넘고 나서 떨어졌다⁠. 대관령 앞에서 떨어지는 사람은 더 많았다⁠.

칙⁠.

“⁠우한아⁠.⁠”

남수였다⁠. 남수가 아침 이후 처음으로 말을 했다⁠. 정확히는 여주에서 「⁠범수야⁠」 한마디를 한 뒤 처음이었다⁠.

“⁠사장님⁠.⁠”

“⁠거기 밭 넓네⁠.⁠”

남수도 위치 공유 화면을 보고 있었다⁠. 모니터에 띄운 위성 지도로 우한이 무엇을 내려다보는지 보고 있었다⁠.

“⁠우한아⁠. 내려도 돼⁠.⁠”

우한은 원을 그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어섬 이륙장⁠, 보험 내 이름으로 들어가 있다⁠. 계약서에 그렇게 썼어⁠. 사고 나면 이륙장 문 닫는다고⁠. 고포리 이장님이랑 그렇게 약속했다⁠. 마을 사람들 무서워해⁠. 포도밭 위로 사람이 날아다니는 거⁠.⁠”

남수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사무실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에 깔렸다⁠. 누군가 「⁠쉿⁠」 했다⁠.

“⁠내가 건 건 그거 하나다⁠. 어섬 문 닫으면 돼⁠. 그거야 닫으면 그만이야⁠. 근데 너는 하나 걸면 그만이 아니잖아⁠.⁠”

“⁠사장님⁠.⁠”

“⁠나 서른여덟에 늦장가 갔다⁠. 그해 석주가 같이 강릉 가자고 했다⁠. 처음으로 서해에서 동해 간다고⁠. 나 그때 결혼식 날짜 잡혀 있었어⁠. 장인어른이 날개 접으라고 했고⁠. 그래서 안 갔다⁠. 석주가 혼자 연습하다가 열 해 뒤에 혼자 갔지⁠. 범수 데리고⁠.⁠”

남수가 말을 끊었다⁠. 다시 이었다⁠.

“⁠나는 접어서 살았다⁠, 우한아⁠. 접어도 산다⁠. 진부 밭에 내려⁠. 범수 차가 받으러 간다⁠. 그 밭 지금 해 들어서 따뜻할 거다⁠.⁠”

우한은 진부 밭을 내려다봤다⁠. 남수 말대로였다⁠. 갈아엎은 흙이 해를 받아 따뜻해 보였다⁠. 저기 내리면 이십 분 안에 범수의 승합차가 농로로 들어올 것이다⁠. 보람이 차에서 뛰어내려 울 것이다⁠. 은솔은 무전기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차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기철은 「⁠잘했다⁠」라고 할 것이다⁠. 범수는 아무 말 없이 날개를 같이 접어 줄 것이다⁠.

기록은 아니었다⁠. 비행 거리는 뜬 자리에서 내린 자리까지 곧게 잰 거리로 쳤다⁠. 오늘 구불구불 날아온 길은 200km가 넘었지만⁠, 어섬에서 진부까지 곧게 재면 160km 남짓이었다⁠. 185km에 모자랐다⁠. 숫자는 이번에도 우한의 편이 아니었다⁠. 대관령을 넘어 바다에 닿아야 숫자가 바뀌었다⁠.

경포대도 아니었다⁠. 대관령은 아니었다⁠. 은솔에게 줄 대답은 아니었다⁠.

바리오가 울었다⁠. 삐⁠. 원 하나에 2m⁠. 우한은 원을 그렸다⁠. 1⁠,310⁠, 1⁠,312⁠. 진부 밭이 원을 따라 돌았다⁠.

“⁠우한아⁠.⁠”

기철이었다⁠.

“⁠단톡방에 수아 씨가 썼다⁠.⁠”

우한은 원을 그리던 손을 꽉 쥐었다⁠. 장갑 속에서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을 것이다⁠.

“⁠읽을까⁠.⁠”

“⁠읽어 주세요⁠.⁠”

기철이 헛기침을 했다⁠. 이천 하늘에서 하윤의 문자를 읽을 때와 같은 헛기침이었다⁠.

“⁠사진이 하나 있다⁠. 공책 사진이다⁠. 하윤이 숙제 공책⁠. 「⁠아빠가 가장 높이 간 곳⁠」⁠. 밑에 「⁠문경 (⁠아파트 600개⁠)⁠」 적혀 있고⁠. 그 밑에 「⁠다음에는 강릉 (⁠아마도⁠)⁠」 적혀 있었는데⁠.⁠”

기철이 잠깐 쉬었다⁠.

“⁠「⁠아마도⁠」에 줄이 그어져 있다⁠. 지우개로 안 지우고 연필로 줄을 그었다⁠. 그 옆에 하윤이 글씨로 새로 썼다⁠. 「⁠2⁠,000m⁠」⁠. 그리고 수아 씨 글이다⁠. 읽는다⁠.⁠”

“⁠예⁠.⁠”

“⁠「⁠하윤이가 위치 공유 보고 고쳐 썼어⁠. 아빠 지금 2⁠,000m 넘었대⁠. 아파트 600개보다 높다고 좋아해⁠. 7km는 나중에 따질게⁠. 지금은 앞만 봐⁠.⁠」⁠”

기철이 덧붙였다⁠.

“⁠마침표다⁠. 물음표 없다⁠.⁠”

우한은 헬멧 안에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감고 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었다⁠. 아주 짧게 감았다⁠.

진부 밭 위 원 하나⁠. 바리오가 조금 세게 울었다⁠. 삐⁠, 삐⁠, 삐⁠. 오대산 쪽에서 내려온 바람이 들판 위에 고여 있던 따뜻한 공기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 기둥들 가운데 하나였다⁠. 굵지 않았다⁠. 그래도 기둥이었다⁠.

1⁠,400⁠, 1⁠,500⁠.

우한은 송신 단추를 눌렀다⁠.

“⁠사장님⁠.⁠”

“⁠어⁠.⁠”

“⁠어섬 문 닫지 마세요⁠. 저 해 질 때 거기서 또 떠야 됩니다⁠. 하윤이 데리고 가서 보여 줄 게 있어요⁠. 해 지는 갯벌요⁠.⁠”

남수가 대답하지 않았다⁠. 사무실 직원 누군가 박수를 쳤다⁠. 한 사람이 치자 둘이 쳤고⁠, 남수가 「⁠야⁠, 조용히 해⁠」 하고 말했다⁠.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알았다⁠. 안 닫는다⁠. 넘어가⁠.⁠”

1⁠,600m⁠. 기둥 꼭대기였다⁠. 우한은 진부 밭을 마지막으로 내려다봤다⁠. 따뜻해 보이는 흙⁠. 평평하고 넓은 밭⁠. 우한은 날개를 동쪽으로 돌렸다⁠.

동쪽 하늘이 열렸다⁠. 대관령이었다⁠. 능선을 따라 흰 풍력발전기들이 줄지어 서서 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제는 성냥개비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기둥처럼 컸다⁠. 능선 위로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나무들이 모두 동쪽으로 누워 있었다⁠.

능선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능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우한은 알았다⁠. 지도에서도 봤고 석주의 빨간 선에서도 봤다⁠.

“⁠기철 선생님⁠.⁠”

“⁠말해⁠.⁠”

“⁠능선 위 나무들 다 동쪽으로 누웠습니다⁠.⁠”

기철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전기 너머 승합차 안이 조용해졌다⁠. 보람도 떡을 씹지 않았다⁠. 범수의 손이 핸들 위에서 멈췄을 것이다⁠.

은솔의 무릎 위 무전기에서 우한의 목소리가 났을 것이다⁠. 십 년 전 석주가 같은 자리에서 한 말과 거의 같은 말이었다⁠.

오후 다섯 시 오 분이었다⁠. 바리오 액정의 숫자는 1⁠,580이었다⁠. 대관령 능선까지 1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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