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85자)

갯벌 위의 첫 기둥

국토횡단 패러글라이딩 · 이수

어섬 둔덕 위 150m에서 우한은 같은 자리를 오락가락했다⁠. 바다 바람이 둔덕 비탈에 부딪혀 위로 꺾였고⁠, 날개는 꺾인 바람 위에 얹혀 떠 있었다⁠. 둔덕을 따라 북쪽으로 백 걸음쯤 가다가 돌아서 남쪽으로 백 걸음쯤⁠. 발밑으로 소나무 숲 꼭대기가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산이나 언덕에 부딪혀 오르는 바람을 타는 비행이었다⁠. 사람들은 릿지 비행이라 불렀다⁠. 바람이 부는 동안은 하루 종일도 떠 있을 수 있었다⁠.

어섬에서 우한은 늘 이렇게 날았다⁠. 평일 야간 근무가 없는 날이면 오후 늦게 둔덕에 올라 날개를 폈다⁠. 해가 기울면 바다 바람이 고르게 둔덕을 밀어 올렸다⁠. 우한은 섬을 따라 북쪽 소나무 숲 끝에서 남쪽 활주로 머리까지 오가며 몇 시간이고 떠 있었다⁠. 발밑으로 포도밭 고랑이 한 줄씩 그늘에 잠기고⁠, 갈대밭이 바람결대로 은빛과 초록빛을 번갈아 뒤집었다⁠.

해 질 녘이 가장 좋았다⁠. 해가 대부도 너머로 내려가면 갯벌에 물길이 하나씩 불을 켰다⁠. 썰물이 남긴 물줄기마다 붉은빛이 차올라 갯벌 전체가 핏줄처럼 빛났다⁠. 하늘은 주황에서 분홍으로⁠, 분홍에서 보라로 물들었다⁠. 초경량 비행기들이 마지막으로 활주로에 내려앉고 나면 하늘에는 우한의 흰 날개 하나만 남았다⁠. 바리오도 울지 않았다⁠. 바람 소리와 저 아래 포도밭에서 개 짖는 소리만 났다⁠. 우한은 해 질 녘 한 시간을 어떤 비행보다 아꼈다⁠. 해가 수평선에 닿는 순간 날개 끝의 빨강이 하늘빛과 같은 색이 되었다⁠. 수아는 그런 날 우한이 저녁을 거르고 들어와도 묻지 않았다⁠. 얼굴을 보면 알았다⁠.

오늘은 해 지는 바다를 등지고 가야 했다⁠. 문제는 둔덕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둔덕을 떠나면 꺾여 오르는 바람도 없었다⁠.

이어폰에서 기철이 말했다⁠.

“⁠내륙에 아직 구름 없다⁠. 바다 바람이 2km쯤 들어가 있어⁠. 그 안쪽은 공기가 눌려 있다⁠.⁠”

“⁠압니다⁠.⁠”

“⁠알면 기다려⁠.⁠”

우한은 기다리지 않았다⁠. 바리오 숫자를 봤다⁠. 152⁠. 지금 떠나면 150m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안 1km 남짓을 갈 수 있었다⁠. 1km 안에서 써멀을 못 찾으면 포도밭에 내려야 했다⁠. 오늘 아침에 접은 것을 오늘 아침에 다시 펴야 했다⁠. 범수는 아직 둔덕 아래에 있었다⁠. 승합차가 떠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열 시 오십 분⁠. 동쪽 송산 쪽 하늘에 뭉게구름 하나가 생겼다가 흩어졌다⁠. 생긴 자리 밑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우한은 둔덕 끝에서 몸을 동쪽으로 틀었다⁠. 오른손 조종줄을 당기자 날개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바다가 등 뒤로 돌아갔다⁠. 날개가 둔덕을 떠났다⁠.

바리오가 낮게 울기 시작했다⁠.

뚜우우⁠.

내려가는 소리였다⁠. 바다 바람이 등을 밀어 땅 위의 속도는 빨랐지만 날개는 쉬지 않고 가라앉았다⁠. 140⁠, 130⁠. 포도밭이 빠르게 다가왔다⁠. 고랑 사이로 사람 하나가 고개를 들고 손그늘을 했다⁠. 우한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갈대밭을 건너자 비닐하우스 단지가 나왔다⁠. 흰 지붕이 수십 동⁠, 나란히 엎드려 해를 받고 있었다⁠. 하우스 지붕은 아침 햇빛을 받으면 밭보다 빨리 데워졌다⁠. 데워진 비닐 위 공기도 따라 데워졌다⁠. 우한은 단지 한가운데를 향해 날개 끝을 돌렸다⁠.

120m⁠.

“⁠우한 씨⁠, 고도 얼마예요⁠?⁠”

보람이었다⁠.

“⁠120⁠.⁠”

“⁠백이십이요⁠? 그거 아파트 몇 층이에요⁠?⁠”

“⁠사십 층⁠.⁠”

“⁠사십 층이면 높은 거 아니에요⁠?⁠”

“⁠보람아⁠.⁠”

기철이 말했다⁠. 보람이 조용해졌다⁠.

110m⁠. 하우스 지붕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우한은 땅을 보지 않고 날개를 봤다⁠. 날개는 떨어지기 전에 먼저 말해 주었다⁠. 써멀 가장자리에 닿으면 날개 한쪽이 위로 들썩였다⁠. 들썩이는 쪽이 기둥이 있는 쪽이었다⁠.

오른쪽 날개 끝이 툭 들렸다⁠. 하네스가 아주 조금 왼쪽으로 기울었다⁠. 엉덩이 밑으로 무언가가 밀어 올렸다⁠. 엘리베이터가 출발할 때 무릎이 살짝 굽는 느낌이었다⁠.

삐⁠.

한 번⁠. 바리오가 망설이듯 울었다⁠.

우한은 오른쪽으로 날개를 꺾었다⁠. 오른손 줄을 깊게 당기고 몸무게를 오른쪽 엉덩이에 실었다⁠. 날개가 기울며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의 반쯤을 돌았을 때 바리오가 다시 울었다⁠.

삐⁠, 삐⁠.

원을 한 바퀴 다 돌자 소리가 그쳤다⁠. 우한은 원을 조금 좁혔다⁠. 기둥은 생각보다 가늘었다⁠. 비닐하우스 한 동에서 떨어져 나온 공기 거품이었다⁠. 원을 넓게 그리면 날개 한쪽이 기둥 밖으로 빠졌다⁠. 좁게 그리면 날개가 기울어 속도를 잃었다⁠. 우한은 원 하나를 그릴 때마다 원의 중심을 반 뼘씩 옮겼다⁠. 소리가 큰 쪽으로⁠, 엉덩이가 더 세게 밀리는 쪽으로⁠.

삐⁠, 삐⁠, 삐⁠.

바리오 액정의 숫자가 움직였다⁠. 115⁠, 121⁠, 130⁠.

“⁠올라가요⁠? 올라가요⁠?⁠”

“⁠올라간다⁠.⁠”

기철이 대답했다⁠. 기철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우한의 위치가 점 하나로 떠 있었다⁠. 우한의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위치를 보내고 있었다⁠. 점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을 것이다⁠.

150⁠, 180⁠. 갈라진 소리가 한 음씩 높아졌다⁠. 석주의 바리오는 오르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소리가 높아지고 빨라졌다⁠. 초당 1m를 오르면 「⁠삐⁠, 삐⁠」⁠. 초당 3m를 넘으면 「⁠삐삐삐삐⁠」 쉬지 않고 울었다⁠. 지금은 「⁠삐⁠, 삐⁠」였다⁠. 느렸다⁠.

우한은 원을 돌며 땅을 내려다봤다⁠. 비닐하우스 단지가 작아졌다⁠. 어섬 둔덕이 서쪽으로 물러났다⁠. 둔덕 아래 공터에 은색 승합차가 아직 있었다⁠. 승합차 옆에 사람 하나가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250⁠, 300⁠.

오르는 동안 몸이 기억을 데려왔다⁠. 원을 그릴 때는 할 일이 없었다⁠. 날개와 소리만 붙들고 있으면 되었다⁠. 그럴 때 머리는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꺼냈다⁠.

이틀 전 목요일 밤 열 시였다⁠. 우한은 진은솔의 아파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범수가 창고에 자물쇠를 채운 다음 날이었다⁠. 은솔은 문을 열고 우한을 한참 봤다⁠. 마흔넷⁠, 동네 학원에서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손에 빨간 펜이 들려 있었다⁠.

“⁠날개 이야기면 안 들어요⁠.⁠”

“⁠날개 이야기입니다⁠.⁠”

은솔이 문을 닫으려 했다⁠. 우한이 문틈에 손을 넣지는 않았다⁠. 대신 말했다⁠.

“⁠형님 날개 빌려주세요⁠. 토요일에 갑니다⁠. 어섬에서 경포대까지⁠.⁠”

문이 반쯤 닫힌 채 멈췄다⁠. 은솔이 문틈으로 우한을 봤다⁠. 눈 밑이 거뭇했다⁠. 학원 기말 대비 기간이었다⁠.

“⁠그 사람도 그 말 했어요⁠. 어섬은 아니었지만⁠. 시흥 바닷가 들판에서 경포대까지⁠.⁠”

“⁠압니다⁠.⁠”

“⁠알면서⁠.⁠”

“⁠알면서 갑니다⁠.⁠”

은솔이 문을 열었다⁠. 거실 탁자에 채점하던 시험지가 쌓여 있었다⁠. 은솔은 시험지를 한쪽으로 밀고 노트북을 켰다⁠. 바탕화면에 폴더 하나가 있었다⁠. 이름이 「⁠석주⁠」였다⁠.

“⁠이거 봤어요⁠?⁠”

화면에 지도가 떴다⁠. 서해안에서 동쪽으로 가는 빨간 선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석주가 마지막 비행 날 따로 차고 있던 GPS에 남은 항적이었다⁠. 선은 곧게 가다가 군데군데 동그란 매듭을 지었다⁠. 써멀을 돌며 오른 자리였다⁠. 매듭이 이어지고 이어지다가 원주를 지나고 평창을 지나 대관령 위에 닿았다⁠. 대관령을 넘은 선은 동쪽으로 4km를 더 가다가 뚝 끊겼다⁠.

“⁠여기서 끝났어요⁠.⁠”

은솔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톱 끝이 빨간 선 끝에 닿았다⁠.

“⁠경찰은 돌풍이라고 했어요⁠. 동호회는 난기류라고 했고⁠. 범수 씨는 운이 없었다고 했어요⁠. 다 다른 말인데 다 같은 말이에요⁠. 모른다는 말⁠.⁠”

“⁠바람이 산을 넘으면 반대쪽에서 내리꽂힙니다⁠. 내리꽂히면서 말려요⁠. 빨래 짜듯이⁠.⁠”

“⁠그런 거 말고요⁠.⁠”

은솔이 노트북을 덮었다⁠.

“⁠그 사람은 대관령 앞에서 높이가 1⁠,400m였어요⁠. 이 선에 다 나와요⁠. 넘으려면 더 올랐어야 했대요⁠. 그날 써멀이 대관령 앞에서 2⁠,000m까지 있었대요⁠. 기철 씨가 그랬어요⁠. 기다렸으면 올라갔대요⁠. 근데 왜 안 기다렸어요⁠?⁠”

우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석주는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써멀이 약하면 한 시간이고 원을 돌았다⁠. 「⁠하늘은 자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하늘에서는 누구보다 참을성이 많았다⁠. 그런 사람이 대관령 앞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나도 몰라요⁠. 십 년째⁠.⁠”

은솔이 일어나 현관 옆 창고 문을 열었다⁠. 아파트 다용도실 안쪽의 작은 창고였다⁠. 문이 끼익 소리를 냈다⁠. 창고 안에 종이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맨 아래에 붉은 천 가방이 눌려 있었다⁠. 은솔은 상자를 하나씩 들어 바닥에 내렸다⁠. 우한이 거들려 하자 은솔이 손을 저었다⁠.

“⁠내가 해요⁠. 십 년 만에 여는 거니까⁠.⁠”

가방이 나왔다⁠. 지퍼 손잡이에 하얀 매직 글씨가 그대로였다⁠. 「⁠오석주⁠」⁠. 은솔이 가방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회색 바리오와 GPS 하나⁠, 그리고 은솔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은 물건 몇 가지가 들어 있었다⁠. 은솔은 바리오만 꺼내 우한 손에 쥐여 주고 상자를 닫았다⁠.

“⁠이건 가져가요⁠. 날개는 내일 줄게요⁠. 오늘 밤엔 내가 한 번 더 볼래요⁠.⁠”

“⁠형수님⁠.⁠”

“⁠조건이 있어요⁠.⁠”

은솔이 우한의 눈을 똑바로 봤다⁠. 시험지에 동그라미를 칠 때처럼 정확한 눈이었다⁠.

“⁠왜 떨어졌는지 알아 와요⁠. 그 사람이 왜 안 기다렸는지⁠. 대관령까지 가면 알 거 아니에요⁠. 가서 보고 와서 말해 줘요⁠.⁠”

“⁠못 가면요⁠.⁠”

“⁠그럼 날개 도로 갖다 놔요⁠.⁠”

우한은 바리오 하나를 쥐고 계단을 내려왔다⁠. 손바닥만 한 기계가 날개 가방보다 무거웠다⁠.

다음 날 금요일 저녁⁠, 은솔은 날개 가방을 메고 남수의 물류센터까지 직접 찾아왔다⁠. 날개 하나에 7kg 남짓⁠, 하네스까지 합치면 20kg이 넘는 가방이었다⁠. 우한은 금요일 야간 근무를 빼 두고 집에 있었다⁠. 남수가 가방을 받아 사무실 구석에 내려놓고 전화를 걸어왔다⁠.

“⁠은솔 씨가 한 번 더 보래⁠. 날개를⁠. 꼼꼼히⁠.⁠”

우한은 금요일 밤 물류센터로 가서 창고 바닥에 날개를 다 펴고 줄 수백 가닥을 하나씩 훑었다⁠. 끊어진 줄은 없었다⁠. 천에 구멍도 없었다⁠. 날개 앞쪽 공기 입구 하나에 마른 풀씨 몇 알이 끼어 있었다⁠. 십 년 전 대관령 동쪽 비탈에서 묻어 왔을 풀씨였다⁠. 우한은 풀씨를 털지 않았다⁠.

400m⁠.

바리오가 멈췄다⁠. 기둥 꼭대기였다⁠. 거품은 더 올라가지 못하고 흩어졌다⁠. 우한은 머리 위를 봤다⁠. 손바닥만 한 구름 한 조각이 막 생기고 있었다⁠. 우한이 돌던 기둥이 만든 구름이었다⁠. 데워진 공기는 오르다가 식었다⁠. 식은 공기 속 물기가 엉겨 구름이 되었다⁠. 구름은 써멀의 꼭대기에 꽂힌 깃발이었다⁠.

동쪽으로 깃발이 하나 더 보였다⁠. 화성 시내 쪽⁠, 공장 지붕들 위였다⁠. 시내 너머에 또 하나⁠. 깃발들이 동쪽으로 듬성듬성 이어지고 있었다⁠. 바다 바람이 밀려나고 내륙 하늘이 깨어나는 중이었다⁠.

“⁠기철 선생님⁠.⁠”

“⁠말해⁠.⁠”

“⁠구름 생깁니다⁠. 동쪽으로⁠.⁠”

“⁠그래⁠. 이제부터다⁠.⁠”

무전기 너머에서 경차 시동이 걸렸다⁠. 보람이 말했다⁠.

“⁠우리 출발해요⁠? 어디로 가요⁠?⁠”

“⁠동쪽⁠.⁠”

“⁠동쪽 어디요⁠?⁠”

“⁠강릉⁠.⁠”

보람이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보람의 소리 뒤로 승합차 엔진 소리가 겹쳤다⁠. 은색 승합차가 둔덕 아래 공터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활공장 쪽이 아니었다⁠. 큰길로⁠, 동쪽으로⁠.

우한은 날개를 동쪽으로 돌렸다⁠. 바리오가 다시 낮게 울기 시작했다⁠. 다음 깃발까지 4km⁠. 400m로 4km를 가려면 미끄럼틀을 끝까지 타야 했다⁠. 우한은 발판에 두 발을 단단히 얹고 몸을 뒤로 젖혔다⁠. 등 뒤의 바다 냄새가 조금씩 옅어졌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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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산책2026.11.02· 2화

    썰물 물길마다 불이 켜져서 갯벌이 핏줄처럼 빛난다는 대목에서 한참 멈췄어요. 초경량 비행기들 다 내려앉고 하늘에 흰 날개 하나만 남는 거, 어섬 가 본 사람은 다 알아요. 그런데 오늘은 그 바다를 등지고 가야 한다니요?

    • 이수작가2026.11.02

      우한도 해 질 녘 한 시간이 제일 아까웠어요. 등지고 떠나야 동쪽 바다에서 다시 해를 볼 수 있으니까요. 경포대에 닿는 시각까지 같이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