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97자)

위로금

아내는 일흔, 남편은 서른 · 하윤슬

효란은 위층 서랍에서 누런 봉투 두 개를 꺼내 작업대 위에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2041년 가을에 법률 상담소에서 받아 온 이혼 서류였고⁠, 하나는 2020년 여름에 원장실에서 받은 합의서 사본이었다⁠. 두 봉투 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마흔 해 동안 서랍을 열 때마다 손이 닿은 자리였다⁠.

작업대 맞은편에 순혜의 손자 엄태민이 앉아 있었다⁠. 스물일곱이었고⁠, 변호사가 된 지 두 해째였다⁠. 순혜를 닮아 말이 빨랐고 순혜를 안 닮아 키가 컸다⁠. 태민은 손목 화면을 켜고 무릎 위에 작은 확대 화면을 띄웠다⁠. 시계방 안의 괘종시계들이 일제히 열 시를 쳤다⁠. 태민이 깜짝 놀라 화면을 떨어뜨렸다⁠.

“⁠할머님 의뢰인⁠, 여기 원래 이렇게 시끄러워요⁠?⁠”

“⁠정각마다⁠.⁠”

“⁠상담료에서 빼 드릴게요⁠. 귀가 놀란 값으로⁠.⁠”

“⁠상담료 받을 거니⁠?⁠”

“⁠할머니가 받으래요⁠. 안 받으면 할머님 의뢰인이 미안해서 다신 안 오신다고⁠.⁠”

효란은 웃었다⁠. 순혜가 할 법한 말이었다⁠. 태민은 합의서 사본을 봉투에서 꺼내 확대 화면 밑에 깔았다⁠. 마흔 해 된 종이가 화면 불빛에 누렇게 떴다⁠. 맨 아래에 이름 두 줄이 겹쳐 쓰여 있었다⁠. 손이 떨려서 겹친 서명이었다⁠.

태민은 종이를 끝까지 읽고 나서 손목 화면을 껐다⁠.

“⁠정리해 드릴게요⁠. 할머님 의뢰인은 2020년에 위로금을 받으셨고⁠, 기계 고장이라는 설명에 동의하셨고⁠, 이 일을 밖에 말하지 않기로 하셨어요⁠. 깨시면 위로금을 돌려주셔야 해요⁠. 합의서에 이자가 정해져 있어요⁠. 해마다 붙는 이자라서⁠, 마흔 해면⁠…⁠…⁠.⁠”

태민이 숫자를 말했다⁠. 효란은 숫자를 듣고 작업대 위의 시계 하나를 들었다 놓았다⁠. 숫자는 이 건물 한 채와 거의 같았다⁠.

“⁠이 가게 보증금 낸 돈이 그 돈이야⁠. 위로금⁠.⁠”

태민이 입을 다물었다⁠. 효란은 작업대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마흔 살에 처음 들인 작업대였다⁠. 모서리가 손바닥 모양으로 닳아 반질거렸다⁠.

“⁠다른 길은 없어⁠?⁠”

“⁠있어요⁠. 합의가 처음부터 무효였다고 다툴 수 있어요⁠. 깨어난 지 이틀 만에⁠, 몸도 정신도 성치 않으실 때 받으신 서명이니까요⁠. 그런데 그건 재판이 몇 해 걸려요⁠. 그동안은 합의가 살아 있어요⁠. 그리고요⁠.⁠” 태민은 잠깐 망설였다⁠. “⁠거꾸로 병원한테 받으실 수도 있어요⁠. 손해배상이요⁠. 마흔 해 치⁠. 고장이 아니었다는 게 드러나면 병원이 할머님 의뢰인한테 물어 줄 돈이 위로금보다 훨씬 커요⁠.⁠”

“⁠그럼 병원은 어떻게 되는데⁠.⁠”

“⁠음⁠…⁠…⁠.⁠” 태민은 확대 화면을 접었다⁠. “⁠문 닫겠죠⁠. 지하 3층 분들은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하고요⁠. 옮기다가 몇 분은⁠…⁠…⁠.⁠”

태민은 말을 맺지 않았다⁠. 효란도 묻지 않았다⁠. 마흔 해 전 원장실 문밖에서 스물여섯 살 기술자가 들었을 말을⁠, 효란은 지금 스물일곱 살 변호사에게서 들었다⁠.

*

에버슬립 로비 화면에 낮 뉴스가 돌았다⁠. 「⁠장기 수면 혼인 정리 법안 발의 … 스무 해 넘게 잠든 배우자와의 혼인⁠, 기상 뒤 여섯 달 안에 두 사람이 다시 확인하지 않으면 끝나는 것으로⁠」⁠. 화면 밑에 의원의 얼굴이 작게 떴다⁠. 소파의 보호자들이 화면을 보다가 효란을 보았다⁠. 효란은 연보라 카디건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진상훈이 효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겸에게 들은 대로 눈썹이 하얗고 길었고⁠, 손에 대패 하나를 들고 있었다⁠. 상훈은 효란을 마흔 해 만에 처음 보는 사람처럼 오래 보았다⁠.

“⁠탁효란이지⁠? 그 밤에 맨발로 뛰던 아가씨⁠.⁠”

“⁠아저씨도 그 밤에⁠…⁠…⁠.⁠”

“⁠나도 깼어⁠. 넷 가운데 하나야⁠. 둘은 죽었고⁠, 하나는 미국 갔다는데 소식 몰라⁠. 남은 게 너랑 나야⁠.⁠”

상훈은 효란을 로비 구석 소파로 데려갔다⁠. 앉자마자 대패를 무릎 위에 올리고 날을 손끝으로 쓸었다⁠. 날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효란은 움찔했다⁠.

“⁠집사람 날짜가 밀렸어⁠. 사월 십칠 일이 칠월 초하루로⁠. 반지 사진 나오고 위원회가 다시 모였대⁠.⁠”

“⁠죄송해요⁠.⁠”

“⁠죄송하라고 하는 말 아니야⁠.⁠” 상훈의 손이 대패 날 위에서 멈췄다⁠. “⁠부탁하러 왔어⁠. 칠월 초하루까지만 입 다물어 줘⁠. 집사람 깨는 거 보고 나면⁠, 그다음엔 네가 뭘 말해도 나 안 말려⁠.⁠”

“⁠아저씨도 위로금 받으셨어요⁠?⁠”

상훈은 대답하지 않고 대패를 들어 보였다⁠. 손잡이에 작은 글씨로 공방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걸로 공방 차렸어⁠. 마흔 해 동안 그 돈으로 밥 먹었어⁠. 너도 그 돈으로 시계방 냈지⁠? 우리 둘 다 같은 돈을 먹었어⁠. 너 혼자 깨끗해지려고 하지 마⁠.⁠”

효란은 상훈의 손을 보았다⁠. 마디마다 흉터가 있었다⁠. 목수의 손이었고⁠, 마흔 해 동안 캡슐 유리를 쓸어 온 손이었다⁠. 효란은 대답 대신 제 왼손을 상훈의 손등 위에 얹었다⁠. 상훈이 움찔했다가 손을 빼지 않았다⁠.

“⁠칠월 초하루요⁠?⁠”

“⁠칠월 초하루⁠.⁠”

“⁠달력에 동그라미 크게 치셨다면서요⁠. 이겸이가 그러던데요⁠.⁠”

상훈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으니 앞니가 하나 없었다⁠.

“⁠손주 놈이 생일이냐고 물었어⁠. 그래서 그렇다고 했어⁠. 할머니 생일이라고⁠.⁠”

*

이겸은 병원 뒤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재활사가 하루 삼십 분씩 햇볕을 쬐라고 했다⁠. 지팡이를 벤치 등받이에 걸쳐 두고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 강을 보고 있었다⁠. 효란이 옆에 앉자 이겸이 손끝으로 효란의 카디건 소매를 집었다⁠. 집는 힘이 지난달보다 셌다⁠.

“⁠상훈 아저씨 만났어⁠?⁠”

“⁠칠월 초하루까지만 입 다물어 달래⁠.⁠”

“⁠나한테도 그랬어⁠.⁠”

효란은 태민에게 들은 숫자를 말했다⁠. 이겸은 숫자를 듣고 강물을 오래 보았다⁠.

“⁠가게 팔지 마⁠.⁠”

“⁠당신 주사는⁠?⁠”

이겸이 대답을 늦췄다⁠. 효란은 대답이 늦는 까닭을 알았다⁠. 은희가 어제 전화로 다 말했다⁠. 원장실⁠, 홍보 계약⁠, 두 해⁠, 무료⁠, 거절⁠.

“⁠왜 거절했어⁠.⁠”

“⁠은희가 말했구나⁠.⁠”

“⁠두 해만 웃으면 됐잖아⁠. 당신 웃는 거 잘하잖아⁠. 주사 두 번이 집 두 채야⁠. 당신 손끝 다시 굳으면 어쩌려고⁠.⁠”

“⁠효란아⁠.⁠”

“⁠나는 마흔 해를 혼자 했어⁠. 당신은 두 해도 못 해⁠?⁠”

말이 나가고 나서 효란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빨리 나간 말이었다⁠. 이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소매를 집은 손끝을 놓지 않고⁠, 효란 대신 강물에 대고 말했다⁠.

“⁠그 계약서에 2020년 기상 사고라고 적혀 있었어⁠. 사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내가 거기 이름 넣으면⁠, 당신 마흔 해가 또 사고가 돼⁠. 원장 서랍 속에서 두 해 동안 사고로 있다가⁠, 계약 끝나면 영영 사고야⁠.⁠”

“⁠내 마흔 해는 내가 정해⁠. 당신이 지켜 주는 거 아니야⁠.⁠”

“⁠알아⁠.⁠” 이겸은 그제야 효란을 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정해⁠. 나는 내 이름만 정했어⁠. 당신 가게는 당신 거고⁠, 내 주사는 내 거야⁠. 서로 대신 갚지 말자⁠.⁠”

효란은 이겸의 얼굴을 보았다⁠. 서른 살 얼굴이었다⁠. 마흔 해 전 아침 캡슐 앞에서⁠, 무서우니까 손 좀 잡아 달라고 하던 얼굴과 같았다⁠. 같은 얼굴이 지금은 무섭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신⁠, 언제 이렇게 고집이 세졌어⁠?⁠”

“⁠어제⁠. 원장실에서⁠.⁠”

효란은 웃음이 나왔고⁠, 웃음 끝이 떨렸다⁠. 이겸이 소매를 놓고 효란의 손을 잡았다⁠. 강바람이 두 사람의 손등을 지나갔다⁠. 효란의 손은 따뜻했고 이겸의 손은 아직 조금 서늘했다⁠. 효란은 이겸의 손을 무릎 위로 끌어와 카디건 자락으로 덮었다⁠.

*

밤 아홉 시⁠, 효란이 셔터를 반쯤 내렸을 때 맞은편 부스의 불이 켜졌다⁠. 동수가 부스 창을 열고 손짓했다⁠. 효란은 셔터를 내리다 말고 골목을 건넜다⁠. 부스 안은 구두약 냄새가 진했고⁠, 동수는 작은 철제 상자를 무릎에 안고 있었다⁠.

“⁠이거 받아⁠.⁠”

상자 안에 통장과 도장과 오래된 금목걸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효란은 상자 뚜껑을 도로 덮었다⁠.

“⁠태민이한테 들었어요⁠?⁠”

“⁠순혜한테 들었지⁠. 순혜는 동네에 다 말했고⁠.⁠” 동수는 상자를 효란의 무릎 위로 밀었다⁠. “⁠모자라면 내 차도 팔게⁠.⁠”

“⁠아저씨 차는 안 팔려요⁠. 이십 년 동안 차고에 있었잖아요⁠.⁠”

“⁠차고에 있었으니까 새 차야⁠.⁠”

효란은 웃음이 터졌다⁠. 동수는 웃지 않았다⁠. 동수는 상자 위에 손을 얹은 채 효란을 보았다⁠. 쉰 해 남의 신발 굽만 보던 눈이 오늘은 효란의 얼굴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효란아⁠. 나랑 살자⁠. 이번이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효란은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 애는 서른이야⁠. 너 일흔이고 나 일흔넷이야⁠. 우리는 같은 해에 늙어⁠. 같은 해에 무릎 아프고⁠, 같은 해에 귀 먹고⁠, 비슷한 해에 죽어⁠. 그 애는 네가 죽고 나서 마흔 해를 더 살아⁠. 네가 마흔 해 혼자 산 거⁠, 그 애한테 똑같이 시키려고⁠?⁠”

효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동수의 말에서 틀린 데를 찾았다⁠. 하나도 없었다⁠. 효란은 무릎 위의 상자를 두 손으로 들어 동수의 무릎 위에 돌려놓았다⁠.

“⁠아저씨⁠. 나 2041년에 거절할 때 반지가 안 빠진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반은 거짓말이었어요⁠. 그해 겨울에 손가락이 덜 부어서 반지가 마디까지 올라왔어요⁠. 식용유도 없이요⁠. 한 번만 더 돌리면 넘어갈 것 같았어요⁠. 거기서 손을 멈췄어요⁠. 작업대 앞에 앉아서 반지를 마디에 걸쳐 놓은 채로 하룻밤 있었어요⁠. 아침에 도로 내렸어요⁠. 안 빠진 게 아니라 안 뺀 거예요⁠.⁠”

동수는 오래 말이 없었다⁠. 부스 천장의 전구가 가늘게 떨렸다⁠. 동수는 상자를 무릎 위에서 내려놓고⁠, 효란의 단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굽 닳았다⁠. 벗어⁠. 갈아 줄게⁠.⁠”

효란은 단화를 벗어 동수에게 건넸다⁠. 맨발이 부스 바닥의 찬 기운에 닿았다⁠. 동수는 대답 없이 낡은 굽을 뜯었다⁠. 뜯는 손이 서툴게 한 번 미끄러졌다⁠. 쉰 해 동안 한 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손이었다⁠. 망치 소리가 골목에 작게 울렸다⁠.

*

새 굽을 단 단화를 신고 시계방으로 돌아오니⁠, 반쯤 내린 셔터 밑으로 남자 구두 한 켤레가 보였다⁠. 효란은 셔터를 끝까지 올렸다⁠. 동규가 가게 안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현주가 퇴근하면서 문을 잠그지 않았다⁠. 현주는 일주일에 두 번은 문 잠그는 것을 잊었고⁠, 효란은 그때마다 월급에서 빼겠다고 했다가 한 번도 빼지 않았다⁠. 동규의 손에 누런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효란의 봉투와 색이 같았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시계는 하나도 안 가져가셨죠⁠?⁠”

“⁠늦은 시계가 하나도 없어서 가져갈 게 없었습니다⁠.⁠”

동규는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작업대 위⁠, 효란의 사본 옆에 놓았다⁠. 같은 합의서였다⁠. 원본에는 겹친 서명 위에 붉은 인주가 번져 있었다⁠.

“⁠태민 변호사님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순혜가 동네에 다 말했대요⁠.⁠”

“⁠병원까지 왔습니다⁠.⁠” 동규는 원본을 손끝으로 효란 앞으로 밀었다⁠. “⁠여사님⁠. 이걸 깨시면 진실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도 압니다⁠. 그런데 가족회 사람들 귀에는 다르게 들립니다⁠. 마흔 해 동안 돈 받고 입 다물던 사람이⁠, 남편이 깨어나니까 말을 바꿨다고⁠. 저를 거짓말한 원장이라고 부르겠지요⁠. 여사님도 같이 부를 겁니다⁠.⁠”

효란은 원본을 내려다보았다⁠. 겹친 이름 두 줄 위에 번진 붉은 인주가 마흔 해 만에 다시 손끝에 닿을 듯했다⁠.

“⁠깨시면 여사님도 마흔 해 거짓말한 사람이 됩니다⁠.⁠”

동규는 끝까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효란은 작업대 한가운데 유리 덮개 안의 아홉 시 사십일 분을 보았다⁠. 덮개에 효란의 얼굴과 동규의 얼굴이 함께 비쳤다⁠. 효란은 원본 위에 제 왼손을 펴서 얹었다⁠.

“⁠원장님⁠. 저 마흔 해 동안 거짓말한 사람 맞아요⁠.⁠”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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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리온2026.11.01· 9화

    마흔 해 거짓말한 사람 맞다고 손 얹는 효란 할머니 멋져요. 동규 원장도 나쁜 사람만은 아닌 것 같아서 더 어려워요.

    • 하윤슬작가2026.11.01

      동규도 마흔 해 동안 같은 서류를 품고 살았어요. 두 사람이 같은 유리 덮개에 비치는 장면을 일부러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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