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36자)

혼자 사는 하루

아내는 일흔, 남편은 서른 · 하윤슬

이겸은 평가 날 아침 아홉 시에 병원 정문 밖으로 혼자 걸어 나갔다⁠. 석 달 만에 손목에 돌아온 단말이 따뜻했다⁠. 화면에 오늘 할 일이 떠 있었다⁠. 「⁠점심을 사서 먹는다 · 무인 택시로 하남 시청 앞까지 간다 · 은행에서 계좌를 연다 · 약국에서 약을 받는다 · 저녁 여섯 시까지 병원 평가실로 돌아온다⁠」⁠. 맨 아래에 작은 글씨가 붙어 있었다⁠. 「⁠평가관이 멀리서 지켜봅니다⁠. 도움을 청해도 됩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도 평가합니다⁠」⁠.

이겸은 도움을 청하지 않기로 했다⁠. 평가관이 어디서 보고 있을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길 건너 벤치에서 신문 화면을 거꾸로 들고 있는 남자를 찾았다⁠. 이겸이 손을 흔들자 남자가 화면을 바로 들었다⁠.

정문 앞에서 무인 택시를 불렀다⁠. 단말에 대고 택시라고 말하자 이 분 만에 차가 왔다⁠. 이겸은 문손잡이를 찾아 차 옆면을 더듬었다⁠. 손잡이가 없었다⁠. 차가 먼저 문을 열고 고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이겸은 2020년 버릇대로 대답했다⁠.

“⁠기사님⁠, 하남 시청이요⁠. 빠른 길로요⁠.⁠”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빠른 길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편하게 부르세요⁠.⁠”

“⁠칠번 씨라고 할게요⁠.⁠”

“⁠저는 이백십사번입니다⁠.⁠”

이겸은 택시 안에서 혼자 웃었다⁠. 창밖으로 강변 아파트들이 지나갔다⁠. 아파트 벽마다 커다란 화면이 붙어 있었고⁠, 화면 하나에서 이겸의 얼굴이 지나갔다⁠. 「⁠첫 완치 기상자 석 달째 적응기 평가 … 오늘 퇴원 여부 결정⁠」⁠. 이겸은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눌러썼다⁠.

*

시청 앞 무인 편의점은 문이 없었다⁠. 들어서자마자 천장에서 목소리가 반겼다⁠. 이겸은 김밥 한 줄과 우유 하나를 집었다⁠. 계산대가 없었다⁠. 출구로 걸어가자 천장이 다시 말했다⁠. “⁠김밥 한 줄⁠, 우유 하나⁠. 결제하시겠습니까⁠?⁠”

“⁠카드요⁠.⁠”

“⁠카드가 무엇인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이겸은 지갑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이 없었다⁠. 2020년의 지갑은 마흔 해 전 효란의 손에 들어갔다⁠. 이겸은 단말을 들어 올려 말했다⁠.

“⁠단말로요⁠.⁠”

“⁠목소리를 확인합니다⁠. 서이겸 님⁠, 맞으십니까⁠?⁠”

“⁠네⁠.⁠”

“⁠등록된 목소리와 다릅니다⁠. 등록하신 목소리는 2020년 3월의 목소리입니다⁠.⁠”

“⁠같은 사람이에요⁠. 마흔 해 동안 감기 한 번 안 걸렸어요⁠.⁠”

천장이 잠깐 조용했다⁠. 이겸은 진열대 옆에서 우유를 든 채 서 있었다⁠. 뒤에서 중학생 둘이 이겸을 보고 수군거렸다⁠. 하나가 손목 화면을 들어 사진을 찍으려 했다⁠. 이겸이 돌아보자 학생이 화면을 내렸다⁠. 다른 하나가 물었다⁠.

“⁠아저씨⁠, 아내가 진짜 일흔이에요⁠?⁠”

“⁠응⁠.⁠”

“⁠대박⁠.⁠”

이겸은 우유를 떨어뜨릴 뻔했다⁠. 2060년에도 대박이라는 말이 살아 있었다⁠. 학생들은 대박을 할아버지들이 쓰는 옛날 말이라며 일부러 쓴다고 했다⁠. 이겸은 학생들에게 김밥을 하나씩 사 주고 싶었는데⁠, 제 김밥 값도 아직 내지 못했다⁠. 천장이 다시 말했다⁠. “⁠목소리를 새로 등록했습니다⁠. 결제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은행은 더 어려웠다⁠. 창구 직원이 없었고⁠, 벽에 손바닥만 한 판 하나가 붙어 있었다⁠. 「⁠계좌를 여시려면 손끝을 대 주세요⁠」⁠. 이겸은 오른손 검지를 판에 댔다⁠. 판이 붉게 깜박였다⁠. 「⁠지문을 읽을 수 없습니다⁠」⁠. 왼손 검지를 댔다⁠. 다시 붉었다⁠. 이겸은 열 손가락을 차례로 다 댔다⁠. 열 번 다 붉었다⁠.

병이 손끝부터 왔다⁠. 지문 자리의 살이 돌처럼 굳었다가 풀리는 중이었다⁠. 결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았다⁠. 은행 기계는 마흔 해 전의 손끝도⁠, 지금의 손끝도 읽지 못했다⁠. 이겸은 판 앞에서 열 손가락을 펴 보았다⁠. 손끝이 하얗고 매끈했다⁠. 효란의 말이 떠올랐다⁠. 손끝은 아직 거짓말을 해요⁠. 이겸은 판 아래 작은 단추를 눌렀다⁠. 「⁠사람과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이겸은 처음으로 도움을 청했다⁠.

화면 속 상담원은 친절했다⁠. 이겸의 사정을 다 듣고 나서 미안하다고 했다⁠. 지문이 없는 분은 얼굴과 목소리와 가족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족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겸은 아내라고 대답했다⁠. 상담원이 화면 너머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뉴스를 본 사람의 머뭇거림이었다⁠.

*

약국은 정류장 옆에 있었다⁠. 이겸은 처방 받은 재활 약을 받아 들고 정류장 의자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열두 시 반이었다⁠. 옆자리에 여든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손목의 작은 바늘 시계를 귀에 대고 흔들고 있었다⁠.

“⁠이게 또 섰네⁠. 영감이 사 준 건데⁠.⁠”

“⁠잠깐 봐도 될까요⁠?⁠”

할머니가 시계를 내밀었다⁠. 이겸은 주머니에서 뒷판 따는 칼을 꺼냈다⁠. 퇴원하면 쓰라고 효란이 지난주에 손잡이에 천을 감아 준 칼이었다⁠. 이겸은 무릎 위에 손수건을 깔고 시계를 엎었다⁠. 홈에 칼끝을 넣었다⁠. 손끝으로 쥐지 않고 검지 둘째 마디로 칼등을 받쳤다⁠. 비틀지 않고 들어 올렸다⁠. 딸깍⁠.

안에서 평형 바퀴가 멈춰 있었다⁠. 이겸은 숨을 참고 들여다보았다⁠. 아주 작은 머리카락 한 올이 바퀴 축에 감겨 있었다⁠. 이겸은 칼끝으로 머리카락을 살살 걷어 냈다⁠. 손끝이 떨렸다⁠. 마디로 떨림을 눌렀다⁠. 머리카락이 빠져나오자 바퀴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숨을 쉬었다⁠.

“⁠어머⁠, 가네⁠.⁠”

이겸은 뒷판을 닫았다⁠. 손바닥 아래 단단히 물리는 소리가 났다⁠. 이겸은 시계를 할머니 손목에 채워 드렸다⁠. 할머니가 장바구니에서 비닐에 싼 떡 한 덩이를 꺼내 이겸 손에 쥐여 주었다⁠.

“⁠얼마예요⁠?⁠”

“⁠떡이 값이에요⁠.⁠”

이겸은 떡을 받아 들고 웃었다⁠. 길 건너 벤치에서 평가관이 화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이겸은 처음으로 평가관이 무엇을 적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

저녁 여섯 시⁠, 평가실 탁자에 평가관과 동규와 은희가 앉아 있었다⁠. 이겸은 맞은편에 앉았다⁠. 떡 덩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평가관은 사십 대 정신과 의사였고⁠, 아침에 신문 화면을 거꾸로 들었던 남자였다⁠. 평가관이 화면을 넘겼다⁠.

“⁠택시⁠, 편의점⁠, 약국은 통과입니다⁠. 은행은 실패입니다⁠. 계좌를 못 여셨어요⁠.⁠”

“⁠지문이 없어서요⁠.⁠”

“⁠압니다⁠. 그건 서이겸 님 잘못이 아닙니다⁠.⁠” 평가관은 떡 덩이를 흘끗 보았다⁠. “⁠정류장 일은 평가 항목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적었습니다⁠.⁠”

동규가 입을 열었다⁠.

“⁠은행을 못 하시면 혼자 사실 수 없습니다⁠. 치료비 청구서가 오늘 나갔습니다⁠. 계좌가 없으면 갚으실 길도 없습니다⁠. 후견을 석 달만 더 두시지요⁠. 병원과 동생분이 함께 맡으면 계좌도⁠, 치료비도⁠, 거처도 정리됩니다⁠.⁠”

동규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평가관이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은희가 손을 들었다⁠. 교실에서 학생이 손을 드는 것처럼 반듯하게 들었다⁠.

“⁠저는 후견 신청을 거두겠습니다⁠.⁠”

동규가 은희를 보았다⁠. 은희는 동규를 보지 않고 평가관에게 말했다⁠.

“⁠2020년 8월에 저는 오빠의 보호자를 병원으로 바꾸는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원장님 부탁이었습니다⁠. 그때는 원장님이 아니라 막내 기술자셨고요⁠. 언니는 서명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그 서류 때문에 언니는 마흔 해 동안 보호자가 아니라 돈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희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제가 공동 후견인 신청을 하면서 병원 기록을 열어 봤습니다⁠. 보존료 납부 기록이요⁠. 언니가 한 달도 안 빠지고 냈습니다⁠. 마흔 해 동안⁠, 사백팔십 번이요⁠. 오빠 계좌가 없으면 언니 계좌가 있습니다⁠. 언니는 사백팔십 번 동안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보다 오빠를 더 잘 맡을 자신이 없습니다⁠.⁠”

평가실이 조용해졌다⁠. 동규는 은희를 오래 보았다⁠. 화를 내지 않았다⁠. 마흔 해 전 병원 앞 편의점에서 고개를 숙였던 스물여섯 살의 얼굴이 동규의 얼굴 어딘가에서 한 번 지나갔다⁠.

“⁠서은희 님⁠. 그때 고맙다는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지금도 하지 마세요⁠.⁠”

평가관이 화면에 적었다⁠. 「⁠자기 결정 능력 있음 · 퇴원 가능 · 생활 지원 필요(⁠배우자⁠)⁠」⁠. 평가관은 화면을 이겸에게 돌려 보여 주었다⁠. 이겸은 화면을 보지 않고 은희를 보았다⁠. 은희는 오빠를 보지 않고 탁자 위 떡 덩이를 보았다⁠.

“⁠오빠⁠, 그 떡 나 줘⁠. 배고파⁠.⁠”

이겸이 떡을 반으로 갈라 은희에게 건넸다⁠. 은희가 떡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이겸의 손목 단말이 떨렸다⁠. 화면에 청구서 한 장이 떴다⁠. 「⁠에버슬립 · 근섬유 석회증 치료 두 번째 주사 · 서이겸⁠」⁠. 맨 아래에 숫자가 길게 붙어 있었다⁠. 이겸은 손끝으로 화면을 짚으며 동그라미를 하나씩 셌다⁠. 손끝이 둔해서 세다가 두 번 놓쳤다⁠. 은희가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떡에 목이 메어 가슴을 두드렸다⁠.

“⁠은희야⁠, 이거 동그라미가 몇 개야⁠?⁠”

“⁠세지 마⁠. 세면 더 늘어⁠.⁠”

동규가 평가실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서류판을 가슴에 대고 있었다⁠.

“⁠나눠서 갚으셔도 됩니다⁠. 이자는 받지 않겠습니다⁠. 세 번째 주사는 십이월입니다⁠. 그때까지 손끝을 아끼십시오⁠.⁠”

“⁠원장님이 제 손끝 걱정을 하세요⁠?⁠”

“⁠사십 년 전부터 했습니다⁠.⁠”

동규가 문을 닫고 나갔다⁠. 이겸은 청구서 화면을 끄지 않고 한참 내려다보았다⁠. 동그라미들이 화면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

효란의 집은 시계방 위층이었다⁠. 가파른 계단이 열네 칸이었다⁠. 이겸은 지팡이를 효란에게 맡기고 난간을 잡고 올라갔다⁠. 일곱 번째 칸에서 쉬었고⁠, 효란이 뒤에서 이겸의 허리를 받쳤다⁠. 일흔 살의 손바닥이 서른 살의 허리를 밀어 올렸다⁠. 계단 아래에서 동수가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가 혀를 찼다⁠.

“⁠거봐⁠. 업고 올라가야 된다니까⁠.⁠”

“⁠아저씨 허리 안 좋다면서요⁠.⁠”

“⁠그러니까 저 할망구가 업겠냐고⁠.⁠”

효란이 계단 위에서 동수에게 신발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동수가 부스로 도망갔다⁠.

방은 둘이었다⁠. 작은 방에 효란이 새로 사 온 이불이 깔려 있었다⁠. 이겸은 이불을 보고 효란을 보았다⁠. 효란은 이겸의 눈을 피해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 식탁 하나가 있었고 의자가 둘이었다⁠. 의자 하나는 등받이 칠이 다 벗겨졌고⁠, 하나는 새것이었다⁠.

“⁠의자 새로 샀어⁠?⁠”

“⁠어제⁠. 하나는 마흔 해 동안 짐 올려놨어⁠.⁠”

이겸은 새 의자에 앉지 않고 칠 벗겨진 의자에 앉았다⁠. 효란이 뭐라 하려다 말았다⁠. 효란은 저녁으로 콩나물국을 끓였다⁠. 이겸은 국을 두 그릇 먹었다⁠. 효란은 한 그릇을 다 못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겸은 효란의 숟가락을 보았다⁠. 효란은 일어나 싱크대로 갔다⁠.

“⁠약 먹을 시간이다⁠. 당신도 재활 약⁠.⁠”

효란이 찬장을 열었다⁠. 찬장 안에 요일마다 칸이 나뉜 플라스틱 약 상자가 있었다⁠. 칸마다 알약이 서너 개씩 들어 있었다⁠. 효란이 이겸의 재활 약 봉투를 찬장에 넣으며 약 상자를 한쪽으로 밀었다⁠. 약 상자 뒤에서 하얀 약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이겸이 허리를 굽혀 주웠다⁠.

봉투 겉에 처방 글씨가 박혀 있었다⁠. 「⁠탁효란 · 일흔 · 심부전 · 하루 두 번 · 거르지 마십시오⁠」⁠.

이겸은 봉투를 든 채 일어서지 못했다⁠. 효란이 싱크대 앞에서 돌아섰다⁠. 수돗물이 계속 흘렀다⁠. 효란은 이겸 손의 봉투를 보았고⁠, 수도를 잠그지 않았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