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00자)

한 줄로 깐 귤

아내는 일흔, 남편은 서른 · 하윤슬

이겸은 깨어난 날 오후에 숟가락을 세 번 떨어뜨렸다⁠. 손끝이 숟가락 자루를 쥔 줄 알았는데 숟가락은 이미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잠들기 전 마지막 반년 동안 손끝은 돌처럼 굳어 갔다⁠. 기관사 운전대의 단추가 손가락 밑에서 보이기만 하고 느껴지지 않던 날⁠, 이겸은 운전석에서 내렸다⁠. 지금 손끝은 돌이 아니었다⁠. 젖은 솜에 가까웠다⁠. 이불의 결이 먼 데서 오는 소리처럼 희미하게 닿았다⁠.

가슴에 「⁠7⁠」이 찍힌 간호 로봇이 숟가락을 주워 물수건으로 닦았다⁠. 이겸은 로봇을 칠번 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칠번 씨⁠, 휴대폰 좀 주세요⁠.⁠”

“⁠서이겸 님의 개인 단말은 적응기 동안 병원이 보관합니다⁠. 대신 화면을 드리겠습니다⁠.⁠”

벽에서 얇은 화면이 내려왔다⁠. 첫 화면에 큰 글씨가 떴다⁠. 「⁠적응기 콘텐츠 · 1단계 · 운전석 없는 택시를 타 봅시다⁠」⁠. 이겸은 뉴스를 찾아 화면을 이리저리 쓸었다⁠. 손끝이 둔해 화면이 자꾸 엉뚱한 데로 넘어갔다⁠. 「⁠2단계 · 말로 결제해 봅시다⁠」⁠. 「⁠3단계 · 지금 몇 년인지 하루에 세 번 말해 봅시다⁠」⁠.

“⁠이천육십 년⁠.⁠”

칠번 씨가 머리 위 등을 초록으로 켰다⁠. “⁠잘하셨습니다⁠. 오늘 두 번 남았습니다⁠.⁠”

“⁠대박⁠.⁠”

“⁠그 표현은 오늘 열두 번째입니다⁠. 의료진에게 전달할까요⁠?⁠”

“⁠하지 마세요⁠. 2020년에는 다 그렇게 말했어요⁠.⁠”

복도 저편에서 누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가 문틀을 붙잡고 섰다⁠. 숨을 몰아쉬었고⁠, 손에 든 보온병이 흔들렸다⁠. 눈매가 낯익었다⁠. 이겸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입을 열었다⁠.

“⁠엄마⁠?⁠”

여자의 얼굴이 무너졌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입가가 일그러졌다⁠.

“⁠오빠⁠. 나야⁠. 은희⁠.⁠”

이겸은 여자의 얼굴에서 스물네 살 동생을 찾았다⁠. 눈 밑의 점이 그대로 있었다⁠. 점 둘레의 살이 마흔 해만큼 내려앉아 있었다⁠. 은희는 침대 곁에 털썩 앉아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미역국 냄새가 병실을 채웠다⁠.

“⁠엄마가 오빠 깨면 먹이라고 했어⁠. 2047년에⁠. 돌아가시기 전에⁠.⁠”

이겸은 국을 받지 못했다⁠. 손끝이 보온병 뚜껑에 닿았다가 미끄러졌다⁠.

“⁠엄마가⁠…⁠…⁠.⁠”

“⁠병원에 빌었어⁠. 한 번만 깨워 달라고⁠. 엄마 얼굴 한 번만 보게⁠. 위원회가 안 된대⁠. 치료법 없이 깨우면 오빠가 죽는대⁠. 깨우는 날은 병원이 정한대⁠.⁠”

은희는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이겸의 입에 대 주었다⁠. 국은 미지근했고 짰다⁠. 어머니의 간이었다⁠. 이겸은 한 숟갈을 넘기고 문가를 보았다⁠. 아침에 손을 잡아 준 엄 여사가 문 옆에 서 있었다⁠. 연보라 카디건 주머니에 왼손을 넣은 채였다⁠.

“⁠은희야⁠. 효란이는⁠?⁠”

은희의 숟가락이 멈췄다⁠. 은희는 이겸을 보지 않고 문가의 엄 여사를 보았다⁠. 엄 여사가 아주 조금 고개를 저었다⁠. 은희가 숟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언니는⁠…⁠… 떠났어⁠. 오래전에⁠.⁠”

*

적응기 사흘째⁠, 이겸은 재활실 평행봉 사이에 섰다⁠. 두 팔로 봉을 짚고 한 발을 내밀 때마다 허벅지가 제 것 같지 않게 떨렸다⁠. 재활사는 스물다섯 살쯤 된 남자였고⁠, 이겸의 걸음을 화면으로 재면서 쉬지 않고 말을 걸었다⁠.

“⁠2020년 사람들은 계단을 진짜 발로 걸어서 올라갔다면서요⁠?⁠”

“⁠엘리베이터도 있었어요⁠.⁠”

“⁠엘리베이터가 말을 안 했다면서요⁠? 층을 손가락으로 눌렀다고⁠.⁠”

“⁠그럼 지금은 뭐라고 해요⁠?⁠”

“⁠몇 층 가세요⁠, 하고 먼저 물어요⁠. 대답 안 하면 노래 틀어 줘요⁠.⁠”

이겸은 웃다가 봉을 놓칠 뻔했다⁠. 재활사가 등을 받쳐 주었다⁠. 평행봉 끝까지 가는 데 사 분이 걸렸다⁠. 2020년의 이겸은 같은 거리를 이 초에 갔다⁠.

재활실 유리벽 너머 복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둘이었다가 금세 열이 넘었다⁠. 다들 이겸보다 나이가 많았고⁠, 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대개 꽃이었고⁠, 사진을 든 사람도 있었다⁠. 맨 앞에 선 쉰 남짓한 여자가 유리벽에 손바닥을 붙였다⁠. 재활사가 문을 조금 열자 여자가 문틈으로 말했다⁠.

“⁠우리 아들도 깨어날 수 있죠⁠? 열아홉 해 잤어요⁠. 이제 마흔하나예요⁠. 아니⁠, 몸은 스물둘이에요⁠.⁠”

이겸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여자 뒤에서 남자 하나가 사진을 들어 보였다⁠. 사진 속에서 단발머리 아가씨가 웃고 있었다⁠. 수면자 가족회 사람들이라고 재활사가 귓속말로 알려 주었다⁠. 첫 완치 기상자를 보려고 날마다 이 복도에 온다고 했다⁠.

“⁠다 깨어나실 거예요⁠.⁠”

이겸이 말하자 여자가 유리벽에 이마를 댔다⁠. 복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내쉬었다⁠. 이겸은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사람이 약속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평행봉을 쥔 손에 땀이 찼다⁠. 복도 끝에서 엄 여사가 사람들 뒤에 서서 이겸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엄 여사가 먼저 돌아섰다⁠.

*

엄 여사는 날마다 오후 세 시에 왔다⁠. 옆 병실 남편 면회를 마치고 들르는 길이라고 했다⁠. 이겸은 옆 병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사흘째 되는 날 알았다⁠. 칠번 씨가 복도 끝까지 이겸의 휠체어를 밀어 주었을 때⁠, 옆 병실 문패에 이름이 없었다⁠. 이겸은 묻지 않았다⁠.

적응기 닷새째에는 눈이 맞았다⁠. 창밖의 한강이 한 겹으로 보였고⁠, 강 건너 아파트들은 이겸이 아는 어떤 아파트보다 높았다⁠. 하늘에 작은 비행기 같은 것이 줄지어 떠다녔다⁠. 택배 드론이라고 칠번 씨가 알려 주었다⁠. 이겸은 한 시간 동안 드론만 셌다⁠.

엄 여사는 귤 봉지를 들고 왔다⁠. 침대 곁 의자에 앉아 귤 하나를 집었다⁠. 엄지손톱으로 꼭지 옆을 살짝 누르고⁠, 껍질을 한 줄로 길게 돌려 깠다⁠. 껍질은 끊기지 않고 나선을 그리며 무릎 위로 내려왔다⁠. 이겸은 껍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2016년 가을⁠, 첫 데이트를 한 한강 공원 벤치였다⁠. 효란이 귤을 한 줄로 깠다⁠. 끊기면 소원이 무효라고 했다⁠. 무슨 소원이냐고 물었더니 끊기지 않으면 알려 준다고 했다⁠. 껍질은 끝까지 이어졌고 효란은 끝내 소원을 말하지 않았다⁠. 이후로 이겸은 효란이 귤 껍질을 끊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귤이 왜 이렇게 달아요⁠? 2060년에는 귤도 설탕으로 만들어요⁠?⁠”

“⁠제주 귤이에요⁠. 옛날 그대로⁠.⁠”

엄 여사가 귤 알을 반으로 갈라 내밀었다⁠. 이번에는 왼손이었다⁠. 껍질을 까느라 주머니에서 나온 손이었다⁠. 약지에 금반지가 있었다⁠. 마디가 굵어서 반지가 손가락 안쪽으로 조금 파고들어 있었다⁠. 이겸은 귤 대신 손을 보았다⁠. 이겸의 왼손 약지에도 같은 반지가 있었다⁠. 둘 다 2017년 봄에 종로 금은방에서 맞췄다⁠. 금은방 사장이 안쪽에 날짜를 새겨 주며 반지를 두 번 맞추는 사람은 없다고 농담했다⁠.

이겸은 귤을 받았다⁠. 둔한 손끝에 귤 껍질 안쪽의 하얀 실이 닿았다⁠. 희미하게⁠, 분명히 닿았다⁠.

엄 여사는 이겸이 손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왼손을 천천히 카디건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넣는 손이 떨렸다⁠. 떨림은 주머니 속에서도 멈추지 않아 카디건 자락이 가늘게 흔들렸다⁠.

이겸은 귤 한 알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효란아⁠, 하고 부르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엄 여사는 일어나 나갈 것이다⁠. 내일 세 시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마흔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겸은 몰랐다⁠. 아는 것은 하나였다⁠. 이 사람은 지금 숨고 싶어 했다⁠.

“⁠엄 여사님은 귤을 참 잘 까시네요⁠.⁠”

“⁠오래 까서 그래요⁠.⁠”

“⁠제 아내도 이렇게 깠어요⁠. 한 줄로요⁠.⁠”

엄 여사는 대답 대신 다음 귤을 집었다⁠. 이번 껍질은 중간에서 끊겼다⁠. 엄 여사가 끊긴 껍질을 손바닥에 쥐고 작게 혀를 찼다⁠.

*

원장 마동규는 저녁 회진 시간에 혼자 왔다⁠. 의사들을 복도에 두고 들어와 침대 발치에 섰다⁠. 이겸이 아는 2020년의 병원 원장들보다 목소리가 조용했다⁠.

“⁠몸은 어떠십니까⁠?⁠”

“⁠원장님⁠. 제 아내 어디 있어요⁠?⁠”

동규는 서류판을 내려놓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대답을 미리 준비해 온 사람의 앉음새였다⁠.

“⁠탁효란 님은 2020년 여름에 동반 수면 계약을 끝내셨습니다⁠. 이후 연락처는 저희 기록에 없습니다⁠.⁠”

“⁠효란이가 깼다고요⁠? 저보다 먼저⁠?⁠”

“⁠네⁠.⁠”

“⁠그럼 지금⁠…⁠…⁠.⁠”

이겸은 더하기를 할 줄 알았다⁠. 서른에 깼으니 지금은 일흔이었다⁠. 머리가 숫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효란이가 저를 두고 갔다고요⁠?⁠”

“⁠계약이 끝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디 사는지라도 알려 주세요⁠. 제가 찾아갈게요⁠.⁠”

“⁠적응기 석 달 동안 바깥소식은 병원이 정합니다⁠. 서이겸 님은 지금 몸무게가 마흔여덟입니다⁠. 혼자 화장실도 못 가십니다⁠. 아내분을 찾는 일은 퇴원하고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이겸은 이불을 걷고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렸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감각이 늦게 왔다⁠. 일어서려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 동규가 의자에서 일어나 이겸의 겨드랑이를 받쳤다⁠. 예순여섯의 팔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동규는 이겸을 침대에 도로 앉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늦지 않습니다⁠. 사십 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석 달은 짧습니다⁠.⁠”

“⁠저는 기다린 적 없어요⁠. 잤어요⁠.⁠”

동규가 잠깐 말을 멈췄다⁠.

“⁠맞습니다⁠. 기다린 사람은 따로 있었지요⁠.⁠”

“⁠누구요⁠?⁠”

“⁠옆 병실의 엄 여사님 같은 분들이요⁠. 지하 3층에 아직 이천구백아흔아홉 분이 주무십니다⁠. 그분들 가족이 날마다 이 건물에 옵니다⁠. 엄 여사님은 그분들을 대신해 봉사하시는 보호자입니다⁠. 잘 대해 드리십시오⁠.⁠”

동규는 서류판을 들고 나갔다⁠. 복도의 의사들이 원장을 따라 멀어졌다⁠. 이겸은 동규가 남긴 말을 한 번 더 따라 했다⁠. 기다린 사람은 따로 있었지요⁠. 원장은 거짓말을 하면서 참말을 한 줄 섞었다⁠.

*

문이 다시 열린 것은 여덟 시였다⁠. 엄 여사가 귤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낮에 두고 간 것이라고 했다⁠. 봉지 안에 귤이 두 개 남아 있었다⁠. 엄 여사는 봉지를 협탁에 놓고 이겸의 이불깃을 끌어 올렸다⁠. 오래 한 손짓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겨울이면 효란은 자다가 일어나 이겸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고⁠, 아침이면 제가 언제 그랬느냐고 시치미를 뗐다⁠. 이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원장님이 뭐래요⁠?⁠”

“⁠아내가 저를 두고 갔대요⁠.⁠”

엄 여사의 손이 이불깃 위에서 멈췄다⁠.

“⁠그럴 리 없는데⁠.⁠”

이겸은 모르는 척 엄 여사를 올려다보았다⁠.

“⁠엄 여사님은 제 아내를 아세요⁠?⁠”

“⁠…⁠… 아니요⁠. 그냥⁠, 그럴 리 없을 것 같아서요⁠. 남편 두고 가는 여자가 흔하진 않으니까⁠.⁠”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겸은 협탁의 귤 하나를 집어 엄 여사에게 내밀었다⁠. 엄 여사가 받아 들고 엄지손톱으로 꼭지 옆을 눌렀다⁠.

“⁠엄 여사님⁠. 내일도 오세요⁠. 제 아내 찾는 거 좀 도와주세요⁠. 저는 여기서 못 나가니까⁠.⁠”

엄 여사는 귤을 내려다보았다⁠. 껍질이 한 줄로 길게 돌아 나왔다⁠. 끊기지 않았다⁠.

“⁠그래요⁠. 내일 세 시에⁠.⁠”

엄 여사는 깐 귤을 협탁에 두고 일어났다⁠. 문을 나서기 전 왼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복도 끝까지 갔다⁠. 발소리가 멈춘 자리는 옆 병실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이겸은 협탁의 귤 껍질을 집어 손바닥에 올렸다⁠. 끊기지 않은 나선이 손바닥 위에서 천천히 풀렸다⁠. 둔한 손끝으로 껍질 끝을 쥐고⁠, 이겸은 껍질이 끝날 때까지 한 바퀴씩 따라갔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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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풍국2026.11.01· 2화

    귤 껍질이 한 줄로 끊기지 않고 돌아 나오는 장면에서 소름 돋았어요. 이겸이 벌써 눈치챈 거죠?

    • 하윤슬작가2026.11.01

      이겸의 손끝은 아직 둔하지만, 마흔 해 전 매일 보던 손은 몸이 먼저 기억합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춘 발소리도 들었어요.

한 줄로 깐 귤 · 아내는 일흔, 남편은 서른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