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54자)

응급실 기록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상주 휴게실 형광등은 끄는 스위치가 없었다⁠. 장례식장 방들은 밤새 불을 켜 두게 되어 있었다⁠. 새벽 한 시⁠, 나는 휴게실 구석 방석에 앉아 저고리 안에서 두 봉투를 꺼냈다⁠. 미송은 옆 소파에서 혈압계를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고⁠, 태구는 접이식 침대에 양복 윗도리만 벗고 누워 휴대전화 화면을 얼굴에 대고 있었다⁠. 화면 불빛이 태구의 턱 밑을 푸르게 비췄다⁠.

나는 하소옥의 종이부터 폈다⁠. 흰 줄 공책을 자로 대고 뜯었는지 왼쪽 가장자리가 반듯했다⁠. 핸드백에서 열 배 확대경을 꺼내 눈에 댔다⁠. 발굴 현장에서 토기 조각의 손톱자국을 볼 때 쓰는 확대경이었다⁠. 렌즈 너머로 글자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다가왔다⁠.

「⁠풍⁠」의 받침 ㅇ 오른쪽 끝이 잿빛으로 번져 있었다⁠. 「⁠과수원⁠」의 ㄴ 받침도⁠, 「⁠남긴다⁠」의 ㄷ도 획 오른쪽이 한결같이 쓸려 있었다⁠. 가로로 글을 쓰는 왼손잡이는 손날이 방금 쓴 글자 위를 지나간다⁠. 마르기 전의 잉크가 손날에 묻어 오른쪽으로 끌린다⁠. 세 해 전 오른손을 잃은 사람이 왼손으로 쓰면 이렇게 남는다⁠. 번짐은 한 줄도 빠짐없이 같은 방향이었다⁠.

태구의 종이로 바꿔 들었다⁠. 굵은 검은 볼펜이었고⁠, 번진 데가 하나도 없었다⁠. 획의 시작마다 볼펜 끝이 종이를 깊이 눌러 자국이 패어 있었다⁠. 오른손잡이가 힘주어 쓴 글씨였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에는 늘 이렇게 썼다⁠. 확대경을 이름 옆 도장으로 옮기려는데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

“⁠언니⁠, 이거 봐라⁠.⁠”

미송이었다⁠. 언제 깼는지 카디건을 걸치고 A4 용지 두 장을 들고 있었다⁠. 미송은 이 병원 응급실에 간호대 동기가 있다고 했다⁠. 가족이 떼는 의무 기록이라 절차는 금방이었고⁠, 동기가 야간 근무라 새벽에도 됐다고 했다⁠.

「⁠2027⁠. 03⁠. 16⁠. 21⁠:10 응급실 내원⁠. 체온 39⁠.2℃⁠. 기침⁠, 가래⁠, 호흡 곤란⁠. 폐렴 의증⁠. 보호자 하소옥(⁠동거인⁠)⁠.⁠」

“⁠3월 16일 밤 아홉 시 십 분이다⁠. 열이 사십 도 가깝다⁠. 이런 분이 그날 유언장을 쓰셨다고⁠?⁠”

태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소리가 컸다⁠.

“⁠봐라⁠, 누나⁠. 내가 뭐랬노⁠?⁠”

“⁠유언장에는 시간이 없어⁠. 날짜만 있지⁠.⁠”

“⁠밤에 사십 도면 낮에도 앓으셨겠지⁠.⁠”

“⁠그건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걸 왜 그 여자 편에서 모르는데⁠?⁠”

태구가 일어나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미송의 기록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뉴스에 맨날 나오잖아⁠. 병상에 누운 노인 손 잡고 유언장 쓰게 하는 거⁠. 저 여자가 아버지 손 잡고 쓰게 한 거다⁠. 왼손이고 오른손이고⁠, 그 손 위에 누구 손이 있었는지 누가 아노⁠?⁠”

“⁠그럼 감정을 받으면 돼⁠. 필적 감정⁠.⁠”

“⁠감정 결과 나오는 데 몇 달 걸린다⁠. 이사회는 내일 새벽이다⁠.⁠”

태구 말이 맞았다⁠. 법원에 검인을 받고 필적 감정을 맡기면 결과는 여름이나 가을에 나온다⁠. 은행은 여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는 확대경을 손바닥에 쥐었다⁠. 렌즈가 체온에 미지근해졌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단톡방이었다⁠.

「⁠재묵⁠: 첫차 다섯 시 사십 분 잡음⁠」 「⁠재묵⁠: 누나 드립백 몇 개 가져갈까⁠? 문상객 백 명이면 백 개⁠?⁠」 「⁠미송⁠: 오빠 빈소에서 장사하면 아버지가 일어나신다⁠」 「⁠재묵⁠: 일어나시면 좋지⁠」

미송이 휴대전화를 보다가 혀를 찼고⁠, 태구는 웃음을 참느라 코로 숨을 내쉬었다⁠. 새벽 두 시에 세 남매가 한 번에 웃을 뻔한 것은 재묵 덕이었다⁠. 재묵은 늘 그런 식으로 집안의 공기를 한 칸씩 비틀었다⁠.

*

새벽 세 시⁠, 빈소에는 나 혼자였다⁠. 향은 꺼지지 않게 지켜야 한다고 상조 팀장이 일러 주고 갔다⁠. 팀장은 가기 전에 수의 등급표를 내밀었다⁠. 삼베 수의가 셋⁠, 비단 수의가 둘이었다⁠. 맨 위 칸 가격 옆에 「⁠회장님 격에 맞게⁠」라고 볼펜으로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평생 작업복 바지를 세 벌로 돌려 입은 사람이었다⁠. 나는 맨 아래 칸에 동그라미를 쳤다⁠. 팀장은 동그라미를 한참 보다가⁠, 큰따님이 아버님을 잘 아신다며 등급표를 거두어 갔다⁠.

새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았다⁠. 연기가 곧게 올라가다가 에어컨 바람에 꺾였다⁠. 영정 속 아버지의 오른손이 술잔을 쥐고 있었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옥동 공사장에 간 적이 있다⁠. 아파트 터를 파던 날이었다⁠. 굴착기가 흙을 퍼내자 깎인 벽에 흙빛이 띠처럼 겹겹이 드러났다⁠. 맨 위는 검은 흙⁠, 검은 흙 밑은 누런 흙⁠, 맨 아래는 붉은 자갈층이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벽 앞에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띠를 하나씩 짚었다⁠.

“⁠선희야⁠, 흙은 거짓말을 안 한다⁠. 맨 밑에 깔린 게 제일 오래된 거다⁠. 사람이 덮을 뿐이지⁠.⁠”

“⁠덮으면 어떻게 알아요⁠?⁠”

“⁠덮은 자리는 흙이 섞여⁠. 위아래가 엉키지⁠. 눈 밝은 사람은 그걸 본다⁠.⁠”

내가 고고학과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다⁠. 합격 소식을 듣고 식탁에 쪽지를 남겼다⁠. 「⁠우리 맏이⁠, 흙 밑에 있는 거 다 봐라⁠. 아버지⁠.⁠」 굵고 반듯한 오른손 글씨였다⁠. 쪽지는 지금도 대구 집 책상 유리 밑에 있다⁠. 회사는 내게 물려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합격 쪽지로 말했다⁠. 아들 둘이 있었고⁠, 맏딸은 흙을 파러 간다고 했으니까⁠.

빈소 입구 화환 줄 끝에 시청 화환이 놓여 있었다⁠. 「⁠안동시청 도시계획과장 엄학선⁠」 리본 글씨만 크고 꽃은 듬성했다⁠. 첫날 밤까지 엄학선은 오지 않았다⁠. 산업단지 지정을 앞두고 건설 회사 빈소에 얼굴을 비치는 일을 저울질하고 있을 터였다⁠.

*

하소옥은 복도 끝 자판기 옆 의자에서 졸고 있었다⁠. 가족 휴게실에 들어오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깨를 건드리자 하소옥은 놀라 일어나며 무릎에 얹었던 손가방을 떨어뜨렸다⁠. 가방에서 손수건과 사탕 두 개⁠, 그리고 플라스틱 약통이 굴러 나왔다⁠. 약통 뚜껑에 매직으로 「⁠아버님 아침⁠」 「⁠아버님 저녁⁠」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에 들어가 계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휴게실에 들어선 하소옥은 미송과 태구를 보고 문 옆에 붙어 있었다⁠. 나는 의자를 하나 내밀었다⁠. 하소옥은 앉지 않았다⁠.

“⁠3월 16일 아침 이야기를 해 주세요⁠. 처음부터⁠.⁠”

“⁠일곱 시에 일어나셨어요⁠. 죽을 반 그릇 드셨어요⁠. 열 시쯤 마 씨가 와서 혈압 재고⁠, 아버님이 공책을 달라 하셨어요⁠. 부엌 식탁에서 쓰셨어요⁠.⁠”

“⁠마 씨가 누구예요⁠?⁠”

“⁠요양보호사요⁠. 아침마다 세 시간 오세요⁠.⁠”

“⁠종이는 누가 잡았어요⁠?⁠”

“⁠제가요⁠.⁠”

미송이 혈압계를 내려놓았다⁠.

“⁠봐라⁠.⁠”

“⁠종이 귀퉁이만 눌렀어요⁠. 왼손으로 쓰시면 종이가 자꾸 돌아가요⁠. 손을 잡은 게 아니에요⁠.⁠”

나는 하소옥의 손을 보았다⁠. 손등이 거칠고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 국숫집을 이십 년 했다는 손이었다⁠. 사탕을 주워 가방에 넣을 때도⁠, 약통을 집을 때도 하소옥은 오른손을 먼저 뻗었다⁠. 오른손잡이였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의 손을 잡고 글씨를 이끌면 손이 겹쳐 손날 자리가 달라진다⁠. 번짐이 그렇게 고르게 한 방향으로 남지 않는다⁠. 나는 손 이야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확대경으로 본 것은 아직 내 짐작이었다⁠.

“⁠열은 언제 올랐어요⁠?⁠”

“⁠오후 세 시쯤부터요⁠. 저녁에 기침을 하시더니 아홉 시에 숨을 못 쉬셨어요⁠. 제가 구급차 불렀어요⁠.⁠”

“⁠구급차 부르기 전에 유언장은 어디 두셨어요⁠?⁠”

“⁠아버님이 장롱 이불 밑에 넣으라 하셨어요⁠. 애들 오면 보지 말라고⁠.⁠”

태구가 코웃음을 쳤다⁠.

“⁠애들이 보면 안 되는 유언장이라⁠. 좋네⁠.⁠”

“⁠태구 씨 보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소옥의 목소리는 낮았는데 휴게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태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

“⁠도장은요⁠?⁠”

내가 물었다⁠. 엄지를 찍은 붉은 자국이 저고리 안에서 종이째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집에 아버님 도장이 없었어요⁠.⁠”

“⁠왜요⁠?⁠”

“⁠사위분이 가지고 계셨어요⁠. 은행 일 보신다고⁠, 아버님 쓰러지시고 나서 새로 파 오셨어요⁠. 필요할 때 가져오신다 하셨는데⁠, 그날은 안 계셨어요⁠.⁠”

사위는 범곤 하나였다⁠. 미송의 남편은 세 해 전에 미송과 헤어졌다⁠. 나는 휴게실 문 너머로 식당을 보았다⁠. 범곤은 식당 구석 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돋보기를 쓴 채였다⁠.

“⁠그래서 엄지를 찍으셨어요⁠?⁠”

“⁠아버님이 인주를 달라 하셨어요⁠. 왼손 엄지를 꾹 누르시고⁠, 이러면 된다고 권 법무사가 그러더라 하셨어요⁠.⁠”

권 법무사 이름이 나오자 태구가 벌떡 일어났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휴게실을 나갔다⁠. 오 분 뒤 장례식장 관리 직원 둘이 태구와 함께 돌아왔다⁠. 남색 조끼를 입은 젊은 남자들이었다⁠. 한 사람이 난처한 얼굴로 하소옥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주님께서 빈소에는 가족분들만 계셨으면 하셔서요⁠. 식당은 이용하셔도 됩니다⁠.⁠”

“⁠태구야⁠.⁠”

“⁠누나⁠, 재묵이 형 오기 전까지는 내가 상주다⁠. 저 사람이 밤새 저 봉투 들고 빈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문상 오는 사람들이 뭐라 하겠노⁠?⁠”

“⁠아홉 해를 같이 사신 분이다⁠.⁠”

“⁠아홉 해 같이 살고 땅 다 가져가시겠단다⁠.⁠”

“⁠아버지가 주신다잖아⁠.⁠”

“⁠그 아버지 손 위에 누구 손이 있었냐고⁠?⁠”

태구가 언성을 높였고⁠, 미송은 혈압계를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하소옥과 관리 직원 사이로 들어갔다⁠. 하소옥이 내 소매를 가볍게 당겼다⁠.

“⁠괜찮아요⁠. 나가 있을게요⁠.⁠”

“⁠나가실 일이 아니에요⁠.⁠”

“⁠큰따님⁠, 여기서 제가 버티면 다들 아버님 앞에서 소리 지르세요⁠. 아버님 시끄러운 거 싫어하셨어요⁠.⁠”

*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새벽 다섯 시⁠, 복도 창밖이 회색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하소옥은 손가방을 열어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현관 열쇠⁠, 창고 열쇠⁠, 그리고 끈에 묶인 작은 놋쇠 열쇠 하나⁠. 하소옥은 놋쇠 열쇠만 끈째 떼어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아버님 작업실 책상 서랍 열쇠예요⁠. 공책이 있어요⁠. 매일 쓰신 거⁠.⁠”

“⁠왜 저한테 주세요⁠?⁠”

“⁠태구 씨가 가면 공책을 태우실 거예요⁠. 아니면 버리시든가요⁠.⁠”

“⁠제가 가도 소옥 씨 편을 들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알아요⁠.⁠”

하소옥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는 동안 하소옥은 내 상복 저고리 깃을 바로잡아 주었다⁠. 아버지 저고리 깃을 세 해 동안 아침마다 바로잡던 손이었다⁠.

“⁠큰따님은 땅 파는 분이시라면서요⁠. 아버님이 그러셨어요⁠. 우리 맏이는 흙 밑에 있는 거 다 본다고⁠.⁠”

문이 닫혔다⁠. 손바닥 위의 놋쇠 열쇠가 차가웠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범곤이었다⁠.

「⁠범곤⁠: 어디야⁠? 은행 본점에서 새벽부터 문자 와⁠. 이사회 자료 준비하래⁠」

이사회 자료라는 말이 눈에 박혔다⁠. 은행 본점이 새벽부터 사외이사에게 문자를 보낼 만큼 풍산 담보가 급하다는 소리였다⁠. 범곤은 은행을 나온 뒤에도 은행의 시계로 살았다⁠.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풍산 가요⁠」라고 쓰면 범곤은 오 분 안에 태구에게 말할 사람이었다⁠.

「⁠선희⁠: 바람 쐬고 올게요⁠. 향 꺼지지 않게 봐 줘요⁠」

나는 차 열쇠를 꺼냈다⁠. 풍산까지는 삼십 분이었다⁠. 상복 치마 자락을 걷어 쥐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에는 밤새 이슬이 내려 차 유리가 뿌옜고⁠, 나는 와이퍼를 두 번 돌린 뒤 시동을 걸었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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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진명2026.11.01· 2화

    끄는 스위치가 없는 상주 휴게실 형광등, 장례식장 밤을 겪어 본 사람이라 첫 줄에서 멈췄어요.

    • 노범우작가2026.11.01

      장례식장 불은 밤새 켜 두게 되어 있어요. 그 불 아래에서 봉투 두 개를 꺼내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응급실 기록 · 두 장의 유언장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