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578자)

왼손 연습장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풍산 과수원은 사과꽃이 지고 콩알만 한 열매가 맺혀 있었다⁠. 새벽 다섯 시 사십 분⁠, 차에서 내리자 풀잎에 맺힌 이슬이 상복 치마 끝을 금세 적셨다⁠. 과수원 고랑마다 빨간 페인트를 칠한 나무 말뚝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말뚝 머리에 「⁠금목토건 측량⁠」이라고 적힌 노란 비닐 끈이 묶여 바람에 떨었다⁠. 산업단지 경계선이었다⁠. 말뚝의 줄은 사과나무 사이를 지나 슬레이트 지붕 집 마당 귀퉁이를 가로질렀고⁠, 집 뒤 산자락까지 올라갔다⁠. 뒷산에는 금씨 선산이 있었다⁠.

마당에서 누렁이 한 마리가 일어나 짖었다⁠. 세 번 짖고 내 냄새를 맡더니 꼬리를 흔들며 상복 치마에 코를 박았다⁠. 치마에는 빈소의 향 냄새가 배어 있었다⁠. 누렁이는 향 냄새 속에서 누구를 찾는 것처럼 한참 코를 박고 있었고⁠, 치마에 개 침이 묻었다⁠.

현관은 하소옥이 준 열쇠 꾸러미 없이도 열렸다⁠. 시골집이라 잠그지 않았다⁠. 부엌에 들어서자 식탁 위에 숟가락 하나가 엎어져 있었고⁠, 냉장고 문에 약 먹는 시간표가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아침 여덟 시 혈압약⁠, 저녁 일곱 시 혈전약⁠. 물 반 컵⁠.⁠」 하소옥의 글씨였다⁠.

*

작업실은 안방 옆 작은 방이었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벽에 걸린 2027년 달력⁠. 달력 3월 칸 19일에 동그라미가 있었고⁠, 동그라미 안에 떨리는 글씨로 「⁠열 시⁠」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놋쇠 열쇠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줄 공책이 서른 권 넘게 들어 있었다⁠. 표지마다 매직으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24⁠. 3 ~ 2024⁠. 4⁠」에서 시작해 「⁠2027⁠. 3 ~⁠」로 끝났다⁠. 맨 아래 공책부터 꺼냈다⁠. 흙을 팔 때처럼⁠, 가장 오래된 층부터⁠.

2024년 3월의 첫 장은 글씨가 아니었다⁠. 볼펜이 종이를 긁고 지나간 자국이 엉켜 있었다⁠.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다 만 자국⁠, 직선 하나가 세 번 꺾인 자국⁠. 장 아래쪽에 하소옥의 글씨로 「⁠3월 11일 첫날⁠. 아버님 볼펜 쥐심⁠」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아버지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금⁠」 하나를 한 줄 내내 썼다⁠. 다음 날은 「⁠금판⁠」⁠, 그다음 날은 「⁠금판술⁠」 4월이 되자 이름 석 자가 한 줄에 다섯 번씩 들어갔고⁠, 5월에는 주소가 나왔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 214번지⁠」 한 장에 열두 번⁠, 열다섯 번⁠. 글씨는 떨렸는데 날마다 조금씩 덜 떨렸다⁠. 받침이 오른쪽 아래로 미끄러지는 버릇은 끝까지 남았다⁠. 장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잿빛 번짐이 있었다⁠. 하소옥의 유언장과 같은 번짐이었다⁠.

나는 공책을 날짜 순서대로 책상에 펼쳐 놓았다⁠. 서른 권이 넘는 공책이 책상과 바닥을 덮었다⁠. 세 해 동안 아버지가 쌓은 층이었다⁠. 맨 아래는 엉킨 선⁠, 맨 위는 읽히는 글씨⁠.

맨 위 공책의 마지막 장을 폈다⁠.

「⁠2027년 3월 16일 맑음⁠. 죽 반 그릇⁠. 오늘 쓴다⁠. 소옥이 종이 잡아라⁠.⁠」

날씨 줄 아래에 같은 문장이 세 번 쓰여 있었다⁠. 「⁠나 금판술은 풍산 과수원 집과 과수원 땅 전부를 하소옥에게 남긴다⁠.⁠」 첫 번째는 「⁠과수원⁠」의 ㄴ이 빠져 줄을 긋고 고쳤고⁠, 두 번째는 「⁠하소옥⁠」의 「⁠옥⁠」이 줄 밖으로 삐져나갔다⁠. 세 번째는 하소옥의 유언장과 글자의 키가 거의 같았다⁠. 아버지는 연습장에서 문장을 다듬은 뒤 따로 뜯은 종이에 옮겨 썼다⁠.

확대경을 꺼냈다⁠. 연습장의 「⁠옥⁠」과 저고리에서 꺼낸 유언장의 「⁠옥⁠」을 나란히 놓았다⁠. ㅗ의 짧은 세로획이 둘 다 왼쪽으로 기울었고⁠, ㄱ 받침의 꺾이는 자리가 둘 다 뭉툭했다⁠. 「⁠술⁠」의 ㄹ은 둘 다 두 번째 꺾임에서 펜이 쉬었다 간 점이 찍혀 있었다⁠. 같은 손이었다⁠. 필적 감정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대조 자료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시기에 쓴 글씨가 많을수록 감정이 정확해진다⁠. 아버지는 세 해 치 대조 자료를 서랍에 넣어 두고 갔다⁠.

*

여덟 시에 대문 밖에서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꽃무늬 조끼를 입은 예순 남짓의 여자가 사료 포대를 자전거 뒤에 싣고 들어왔다⁠. 누렁이가 미친 듯이 꼬리를 쳤다⁠.

“⁠누구신교⁠? 아⁠, 큰따님이시구나⁠. 영정 사진하고 눈이 똑같네⁠. 근데 상복에 운동화는 와 신었능교⁠?⁠”

“⁠급하게 와서요⁠.⁠”

“⁠급해도 그렇지⁠. 어르신이 보시면 뭐라 카실 낀데⁠.⁠”

요양보호사 마 씨였다⁠. 어르신이 돌아가신 걸 알면서도 개 밥 주러 왔다고 했다⁠. 개는 죄가 없으니까⁠. 마 씨는 사료를 부어 주고⁠, 내가 작업실 바닥에 펼쳐 놓은 공책을 보더니 손뼉을 쳤다⁠.

“⁠이거 다 꺼냈네⁠. 어르신이 이거 쓸 때 내가 옆에서 커피 타 드렸다 아인교⁠. 하루에 두 장⁠. 안 쓰면 밥을 안 드셨어⁠.⁠”

마 씨는 책상 서랍 안쪽을 더듬어 작은 고무도장 하나를 꺼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숙제 공책에 찍는 도장이었다⁠. 동그라미 안에 웃는 얼굴⁠, 얼굴 밑에 「⁠참 잘했어요⁠」

“⁠이거 내가 사 온 기다⁠. 어르신이 글씨 다 쓰면 내가 이거 찍어 드렸어⁠. 처음엔 성을 내시더니⁠, 한 달 지나니까 안 찍어 주면 공책을 내 앞에 밀어 놓고 기다리시데⁠.⁠”

나는 공책을 다시 넘겨 보았다⁠. 장마다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보라색 웃는 얼굴이 찍혀 있었다⁠. 2024년 봄의 엉킨 선 밑에도⁠, 2027년 3월 16일 장 밑에도⁠. 여든을 넘긴 건설 회사 회장이 요양보호사에게 웃는 얼굴 도장을 받으려고 하루 두 장을 채웠다⁠. 회의실에서 결재 도장을 받으려고 줄을 서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던 일이었다⁠.

“⁠어르신이 이 도장 받으면 꼭 한마디 하셨어⁠. 마 선생⁠, 내 글씨 이제 은행에서도 받아 주겠나⁠?⁠”

“⁠뭐라고 하셨어요⁠?⁠”

“⁠은행은 몰라도 내는 받아 준다 캤지⁠.⁠”

마 씨가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상복 차림으로 웃는 게 어색해서 입을 가렸더니 마 씨가 내 손을 끌어 내렸다⁠. 어르신 빈소에서 자식들이 너무 울면 어르신이 더 피곤해하신다고 했다⁠.

“⁠3월 16일 아침에도 오셨어요⁠?⁠”

“⁠왔지⁠. 화요일이니까⁠.⁠”

마 씨는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돋보기를 머리에서 끌어 내려 쓰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밀었다⁠. 방문 요양 기관에서 쓰는 기록 앱이었다⁠. 보호사가 매번 들어가고 나올 때 시각을 찍고⁠, 한 일을 적어 기관에 보내게 되어 있었다⁠.

「⁠2027⁠.03⁠.16(⁠화⁠) 09⁠:02 입실 / 12⁠:01 퇴실⁠. 혈압 128/80⁠. 체온 36⁠.8⁠. 식사 죽 반 공기⁠. 어르신 식탁에서 글씨 쓰심(⁠약 사십 분⁠)⁠. 보호자 종이 잡아 드림⁠.⁠」

“⁠체온 삼십육 도 팔 분⁠.⁠”

“⁠아침엔 멀쩡하셨어⁠. 오후에 내가 가고 나서 열이 났다 카데⁠. 밤에 구급차 불렀다는 거는 다음 날 들었고⁠.⁠”

“⁠글씨 쓰실 때⁠, 소옥 씨가 아버지 손을 잡았어요⁠?⁠”

마 씨가 돋보기 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가 그카던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어르신 손을 누가 잡아요⁠. 잡으면 성을 내셨지⁠. 쓰러지시고 첫해에 내가 숟가락 쥐여 드릴라고 손등 잡았다가 혼났다 아인교⁠. 내 손으로 한다꼬⁠. 소옥 씨는 종이 이 귀퉁이만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있었어⁠. 왼손으로 쓰시면 종이가 자꾸 돌아가니까⁠.⁠”

마 씨는 식탁 귀퉁이를 검지로 눌러 보였다⁠. 하소옥이 새벽에 한 말과 같았다⁠. 나는 마 씨에게 기록 화면을 사진으로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마 씨는 찍으라고⁠, 법원에서 부르면 가서 똑같이 말해 주겠다고 했다⁠.

“⁠근데 큰따님⁠, 19일에는 어르신이 양복 꺼내 놓으라 카셨는데⁠. 시내 간다꼬⁠. 그날은 열 때문에 입원하셔서 못 가셨지⁠.⁠”

“⁠시내 어디요⁠?⁠”

“⁠그거는 모르지⁠. 소옥 씨한테 물어보소⁠.⁠”

*

마 씨가 개 물그릇을 씻는 동안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아 범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다섯 번 가고 나서야 받았다⁠. 뒤에서 육개장 국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태구가 찾아⁠.⁠”

“⁠여보⁠, 아버지 도장 지금 어디 있어요⁠?⁠”

“⁠무슨 도장⁠?⁠”

“⁠아버지 쓰러지시고 당신이 새로 파 왔다는 도장이요⁠.⁠”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국자 소리만 났다⁠.

“⁠은행 일 볼 때 쓰라고 장인어른이 맡기신 거지⁠. 집 서랍에 잘 있어⁠. 왜⁠?⁠”

“⁠3월에 아버지가 도장 찾으셨대요⁠. 당신이 안 와서 엄지를 찍으셨대요⁠.⁠”

“⁠그 여자 말이지⁠? 선희야⁠, 그 여자 말을 다 믿으면 안 돼⁠. 지금 빈소에 사람 많으니까 끊자⁠. 일찍 와⁠.⁠”

전화가 끊겼다⁠. 화면에 단톡방 알림이 떠 있었다⁠.

「⁠재묵⁠: 휴게소 호두과자 살까⁠? 문상객용⁠」 「⁠미송⁠: 오빠 그냥 사람만 와라⁠」 「⁠재묵⁠: 사람은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라고 엄마가 그랬다⁠」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미송도 태구도 더는 답하지 않았다⁠. 열세 해 전 엄마가 아버지와 갈라선 뒤로 단톡방에서 엄마를 부르는 사람은 재묵뿐이었다⁠.

*

아홉 시 반⁠, 과수원 입구에 승합차 한 대와 검은 세단이 들어왔다⁠. 승합차에서 측량 기사 둘이 삼각대를 들고 내렸고⁠, 세단에서 태구가 내렸다⁠. 밤을 새운 얼굴에 넥타이만 새로 매고 있었다⁠.

“⁠누나가 여기 왜 있노⁠?⁠”

“⁠니는 왜 왔는데⁠?⁠”

“⁠회사 일⁠. 이사회 전에 경계 확인한다⁠.⁠”

“⁠발인도 안 했다⁠.⁠”

“⁠은행은 발인 안 기다린다⁠.⁠”

태구가 측량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기사들이 마당 귀퉁이의 말뚝으로 걸어갔다⁠. 마 씨가 누렁이의 목줄을 잡고 대문 옆으로 비켜났다⁠. 나는 태구에게 다가가 저고리 안에서 태구의 봉투를 꺼냈다⁠. 종이를 펴서 주소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 과수원 집⁠.⁠」

“⁠2023년 9월에 아버지는 옥동 아파트에 사셨다⁠.⁠”

태구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주소는 그 사람이 쓸 때 사는 데를 쓰는 거야⁠. 아버지는 2024년 1월에 쓰러지시고 3월에 여기로 옮기셨어⁠. 연습장 봐라⁠. 풍산 주소는 2024년 5월에 처음 나온다⁠. 2023년 9월에 아버지가 왜 풍산을 주소로 쓰셨겠노⁠?⁠”

“⁠과수원은 2023년에도 아버지 땅이었다⁠. 아버지는 맨날 과수원 가서 사셨다⁠. 주말마다⁠.⁠”

“⁠주말마다 가는 집을 주소로 쓰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는 쓸 수도 있지⁠.⁠”

태구 말에도 틀린 데는 없었다⁠. 주소 한 줄로 무효가 되느냐는 법원이 따질 일이었다⁠. 다만 결재 서류 끝에 언제나 「⁠옥동 금목맨션 3동⁠」을 적던 아버지가 단 한 번⁠, 2023년 9월에만 풍산을 썼다는 이야기였다⁠. 흙으로 치면 층 하나가 위아래로 뒤집힌 자리였다⁠.

“⁠이거 누가 처음 봤어⁠?⁠”

“⁠뭐를⁠?⁠”

“⁠니 유언장⁠. 아버지 돌아가시고 니가 처음 꺼낸 거 맞나⁠?⁠”

태구가 측량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기사 하나가 말뚝 옆에 삼각대를 세우며 무전기를 켰다⁠.

“⁠은행 지점장도 봤다⁠. 사월에 형부가 은행에 냈으니까⁠.⁠”

나는 숨을 한 번 쉬었다⁠. 사월이면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였다⁠. 4월 내내 아버지는 폐렴으로 낙강병원 7층에 누워 있었다⁠.

“⁠살아 계신 분 유언장을 은행에 냈다고⁠?⁠”

“⁠대출 심사에 필요했다⁠. 풍산 담보 잡으려면 땅 주인이 회사 편이라는 걸 보여 줘야 했고⁠. 형부가 아버지한테 허락 받고 냈다⁠.⁠”

“⁠아버지가 허락을 하셨다고⁠? 오른손도 못 쓰시는데 2023년에 쓴 유언장을 은행에 내라고⁠?⁠”

태구의 얼굴에서 표정이 빠져나갔다⁠. 십 년 동안 공사 현장에서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짓던 얼굴이었다⁠. 숫자를 세는 얼굴⁠.

“⁠누나⁠.⁠”

“⁠말해⁠.⁠”

“⁠형부한테 빚부터 물어봐라⁠.⁠”

“⁠무슨 빚⁠?⁠”

“⁠사억이다⁠. 형부가 은행 나와서 상가 분양에 넣었다가 날린 돈⁠. 누나만 모르더라⁠.⁠”

측량 기사가 무전기에 대고 “⁠경계점 확인⁠”이라고 말했다⁠. 빨간 말뚝 하나가 내 운동화 앞 한 뼘 거리에 박혀 있었다⁠. 나는 연습장 맨 위 공책을 가슴에 안고 말뚝을 넘어 차로 걸어갔다⁠. 누렁이가 따라오다가 마 씨에게 목줄이 당겨져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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