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74자)

두 봉투

두 장의 유언장 · 노범우

화환이 스물두 개였고⁠, 리본에 아버지 이름을 틀리게 적은 것이 세 개였다⁠. 「⁠故 금판출 회장님⁠」 「⁠故 김판술 회장님⁠」⁠, 그리고 「⁠故 금판술 사장님 영전에⁠」 아버지는 마흔여덟 해 동안 사장이었고 마지막 열 해만 회장이었으니⁠, 세 번째 리본은 틀렸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나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화환 줄을 눈으로 훑었다⁠. 서른 해를 발굴 현장에서 흙을 긁다 보면 손보다 눈이 먼저 일을 한다⁠. 층이 어긋난 자리⁠, 흙빛이 한 뼘 다른 자리⁠, 누가 한 번 파고 도로 덮은 자리⁠. 화환 리본도 흙처럼 읽혔다⁠.

흰 국화 제단 한가운데에서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금목토건 창립 열다섯 돌에 찍은 쉰 살 무렵 사진이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술잔도 들고 삽도 들던 사람이었다⁠. 영정 앞 향로에서 향 세 대가 가늘게 타들어 갔다⁠.

내 핸드백은 제단 옆 방석 밑에 있었다⁠. 지갑⁠, 휴대전화⁠, 손바닥만 한 흙손⁠, 열 배 확대경⁠, 붓 하나⁠. 대구에서 아침 일곱 시에 전화를 받고 현장에서 곧장 차를 몰아 왔더니 바지 무릎에 황토가 묻어 있었다⁠. 상조 팀장이 상복 치마저고리를 내밀며 바지는 벗으시라고 했고⁠, 나는 화장실에서 검은 치마를 입고 머리를 낮게 쪽 지어 흰 리본 핀을 꽂았다⁠. 거울 속 여자는 쉰일곱 살이었고 눈꼬리가 아버지를 닮아 날카로웠다⁠.

휴대전화가 연달아 떨었다⁠. 가족 단톡방 「⁠금판술 자녀방⁠」이었다⁠.

「⁠재묵⁠: 누나 나 버스 놓침 ㅠ 내일 첫차⁠」 「⁠재묵⁠: (⁠국화 이모티콘⁠)⁠」 「⁠재묵⁠: (⁠국화 이모티콘⁠)⁠」 「⁠미송⁠: 오빠 국화 그만 보내라⁠. 화면이 제단이다⁠」 「⁠재묵⁠: 마음이 그래서 그렇다⁠」

국화가 쉰 송이쯤 올라가 있었다⁠. 둘째 재묵은 서울에서 커피 가게를 두 번 접었고⁠,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손가락이 바빠졌다⁠.

*

밤 아홉 시의 빈소는 식당이 제일 시끄러웠다⁠. 육개장 냄비가 두 번 비었고⁠, 상조 도우미 둘이 편육 접시를 들고 뛰었다⁠. 식당 벽 텔레비전에서 아홉 시 뉴스가 흘러나왔다⁠. 「⁠지방 건설사 연쇄 부실⁠… 시공사 대출 회수 잇따라⁠」 하청 사장들이 앉은 상에서 누가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줄였다⁠.

부의금 함 옆에는 남편 탁범곤이 앉아 있었다⁠. 은행 지점장으로 물러난 지 다섯 해인데⁠, 봉투를 정리하는 손놀림은 아직 창구에 앉은 사람이었다⁠.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봉투 뒷면의 이름을 확인해 금액 순서로 고무줄을 감았다⁠. 셋째 미송이 범곤의 팔을 걷어 올리고 휴대용 혈압계를 감았다⁠.

“⁠형부 백오십이에 구십사⁠. 짠 거 그만 드세요⁠.⁠”

“⁠편육은 짠 게 아니야⁠, 처제⁠. 편육은 슬픈 거지⁠.⁠”

“⁠슬픈 거는 소금 덜 들어간 거고요⁠.⁠”

미송은 대구 종합병원 수간호사다⁠. 빈소에 들어선 뒤 혈압계를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상조 팀장⁠, 장례식장 관리 직원⁠, 문상 온 사촌 둘⁠,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쟀다⁠. 자기 혈압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혈압계를 접었다가 다시 펼쳐 범곤에게 감았다⁠.

빈소 입구 이젤 위에는 회사가 가져다 놓은 액자가 하나 있었다⁠. 2023년 9월 2일 창립 마흔네 돌 기념식에서 아버지가 읽은 기념사 원고였다⁠. 줄 쳐진 종이 석 장에 굵은 볼펜 글씨가 빽빽했고⁠, 세 번째 장 끝 줄에 「⁠회사는 태구가 끌고 간다⁠」가 있었다⁠. 문상객들은 액자 앞에서 한 번씩 멈췄다⁠. 하청 사장 몇은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빈소 맨 뒤⁠, 신발장 옆 플라스틱 의자에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회색 카디건에 검은 바지⁠, 상복이 아닌 평상복이었다⁠. 하소옥이었다⁠. 아버지와 아홉 해를 함께 살았고⁠, 2024년 1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로는 풍산 과수원 집에서 세 해 동안 아버지를 혼자 받아 냈다⁠. 아침에 상조 팀장이 상복을 몇 벌 맞추느냐고 물었을 때⁠, 막내 태구가 “⁠가족만요⁠”라고 답했다⁠. 하소옥은 아무 말 없이 의자를 신발장 옆으로 끌어다 놓았다⁠. 무릎 위에 흰 봉투 하나를 두 손으로 덮고 있었다⁠.

나는 하소옥에게 물 한 컵을 가져다주었다⁠. 하소옥은 컵을 받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큰따님⁠.⁠”

“⁠선희라고 부르세요⁠. 아홉 해를 같이 사셨잖아요⁠.⁠”

“⁠아홉 해를 살아도 이름은 안 불러지데요⁠.⁠”

하소옥은 컵을 입에 대지 않고 봉투 위에 올려놓았다⁠. 컵 밑바닥의 물기가 봉투에 동그랗게 번졌다⁠.

*

밤 열한 시⁠, 문상객이 빠지고 남은 사람은 거의 금목토건 사람들이었다⁠. 직원 열 명 남짓과 하청 사장들⁠, 그리고 은행과 시청에서 보낸 화환을 대신 지키는 듯 구석에 앉은 몇 사람⁠. 태구가 제단 앞으로 나왔다⁠. 마흔아홉⁠, 십 년째 아버지 대신 회사를 꾸려 온 막내였다⁠. 검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다들 계실 때 말씀드리는 게 맞다 싶어서요⁠. 내일 이사회도 있고⁠, 회사 걱정하시는 분들 많으니까⁠.⁠”

“⁠태구야⁠, 여기 빈소다⁠.⁠”

“⁠누나⁠, 빈소니까 하는 거다⁠. 아버지 앞에서⁠.⁠”

태구는 봉투에서 접힌 편지지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연한 미색 한지 편지지였다⁠. 태구가 읽었다⁠.

「⁠유언장⁠. 나 금판술은 금목토건 주식회사와 회사가 쓰는 모든 땅을 막내 금태구에게 물려준다⁠. 회사는 태구가 끌고 간다⁠. 2023년 9월 2일⁠.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 과수원 집⁠. 금판술⁠.⁠」

이름 옆에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글씨는 굵고 반듯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 결재 서류 끝에 휘갈기던 글씨였다⁠.

하청 사장들 상에서 누가 낮게 “⁠됐다⁠” 했다가 옆 사람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직원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뒤 신발장 옆에서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하소옥이 일어나 있었다⁠. 컵을 의자에 내려놓고⁠, 물기 번진 봉투를 두 손으로 들고 제단 앞까지 걸어왔다⁠. 걸음이 느렸는데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저도 아버님께 받은 게 있습니다⁠.⁠”

하소옥이 꺼낸 것은 흰 줄 공책을 반듯하게 뜯은 종이였다⁠.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획마다 떨렸고⁠, 받침이 자꾸 오른쪽 아래로 미끄러졌다⁠. 하소옥은 소리 내 읽지 못하고 종이를 내 앞에 내밀었다⁠. 내가 읽었다⁠.

「⁠나 금판술은 풍산 과수원 집과 과수원 땅 전부를 하소옥에게 남긴다⁠. 2027년 3월 16일⁠.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 214번지⁠. 금판술⁠.⁠」

이름 옆에는 도장 대신 붉은 엄지 자국이 있었다⁠. 지문의 결이 소용돌이로 또렷했다⁠.

“⁠이게 뭡니까⁠?⁠”

태구가 종이를 낚아채려 했고⁠, 나는 종이를 쥔 손을 뒤로 뺐다⁠.

“⁠아버지 오른손 못 쓰셨어요⁠. 이게 무슨 아버지 글씨입니까⁠? 누가 썼는지 다 압니다⁠.⁠”

“⁠왼손으로 쓰셨어요⁠. 세 해를 연습하셨어요⁠.⁠”

“⁠그럼 도장은요⁠? 아버지 도장 어디 있습니까⁠?⁠”

“⁠도장은⁠… 집에 없었어요⁠.⁠”

“⁠도장도 없는 유언장이 어디 있어요⁠!⁠”

미송이 혈압계를 든 채 끼어들었다⁠. 미송의 목소리가 빈소 천장에 부딪혔다⁠. 식당에 남은 사람들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

“⁠엄지 찍어도 된다⁠.⁠”

식당 맨 끝 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권 법무사였다⁠. 아버지 회사 등기를 삼십 년 맡아 온 일흔다섯 살 법무사로⁠, 소주 두 병째를 비우던 참이었다⁠. 권 법무사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나 제단 쪽으로 걸어왔다⁠. 발이 조금 꼬였는데 말은 또렷했다⁠.

“⁠자필 유언장은 다섯 가지다⁠. 첫째⁠, 내용 전부를 본인이 손으로 쓴다⁠. 남이 쓰거나 타자로 치면 안 된다⁠. 둘째⁠, 연·월·일⁠. 날짜가 빠지거나 일까지 안 쓰면 무효다⁠. 셋째⁠, 주소⁠. 넷째⁠, 이름⁠. 다섯째⁠, 도장⁠. 도장 대신 엄지 찍은 것도 된다 카는 대법원 판결이 있다⁠.⁠”

“⁠그럼 둘 다 된다는 겁니까⁠?⁠”

태구가 물었다⁠. 권 법무사는 두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겉으로는 둘 다 갖췄다⁠. 그런데 둘이 부딪치는 데가 있네⁠. 태구 거는 ‘⁠회사가 쓰는 모든 땅⁠’이고⁠, 소옥 씨 거는 ‘⁠과수원 땅 전부⁠’다⁠. 풍산 과수원은 회사가 산업단지 한다고 대출에 묶어 놓은 땅 아이가⁠? 앞뒤로 부딪치면 날짜 늦은 유언이 이긴다⁠. 2027년이 2023년보다 늦지⁠.⁠”

태구의 턱이 굳었다⁠. 2027년이 진짜면 풍산 땅은 하소옥의 것이 되고⁠, 풍산 땅이 빠지면 회사 대출이 무너진다⁠. 하청 사장들 상이 조용해졌다⁠.

“⁠하나 더 있다⁠.⁠”

권 법무사가 손가락으로 두 봉투를 가리켰다⁠.

“⁠둘 다 벌써 뜯었네⁠. 유언장은 가진 사람이 돌아가신 뒤에 법원에 내서 검인을 받아야 된다⁠. 봉해진 거는 법원에서 상속인들 불러 놓고 뜯는다⁠. 뜯었다고 무효가 되는 건 아니다만⁠, 이래 빈소에서 돌려 읽고 누가 하나 들고 가 버리면 나중에 무슨 소리를 해도 못 믿는다⁠.⁠”

나는 두 종이를 접어 각자의 봉투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상복 저고리 고름을 풀고 안섶에 두 봉투를 겹쳐 넣었다⁠.

“⁠검인 받을 때까지 두 장 다 내가 맡을게요⁠. 발인 끝나면 내가 법원에 냅니다⁠.⁠”

“⁠누나가 왜⁠?⁠”

“⁠맏이니까⁠. 그리고 니 것이 진짜면 내 저고리 안에 있어도 진짜다⁠.⁠”

태구가 나를 보았다⁠. 아버지를 닮은 눈이었다⁠. 십 년 동안 공사 현장의 먼지를 맞으며 좁아진 눈이었다⁠.

“⁠이사회 13일 새벽 여섯 시다⁠. 여기 2층 접객실⁠. 은행 지점장도 오고⁠, 그 자리에서 풍산 담보 넘어가야 하청 돈 나간다⁠. 누나가 그때까지 쥐고 있겠다는 거⁠, 그거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지⁠?⁠”

“⁠안다⁠.⁠”

“⁠모를걸⁠.⁠”

태구는 하청 사장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상주 휴게실로 들어갔다⁠. 하소옥은 빈 봉투를 쥐었던 손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신발장 옆 의자로 돌아갔다⁠.

*

자정이 넘어 주차장에 나갔다⁠. 5월 밤바람에 병원 본관에서 소독약 냄새가 실려 왔다⁠. 범곤이 차 문에 기대어 서 있다가 나를 보고 담배를 끄는 시늉을 했다⁠. 십 년 전에 끊은 담배였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희야⁠.⁠”

범곤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은행 창구 목소리와 달랐다⁠. 서른두 해를 같이 산 사람에게만 쓰는 반말이었다⁠.

“⁠태구가 칠 퍼센트 준대⁠. 회사 지분⁠.⁠”

“⁠언제부터 그런 얘기가 오갔어요⁠?⁠”

“⁠얼마 안 됐어⁠. 장인어른 편찮으실 때부터 내가 은행 일 봐 드렸잖아⁠. 태구가 고맙다고⁠. 이사회에서 태구 대표로 올리고 풍산 담보만 넘어가면⁠, 칠 퍼센트가 우리 노후야⁠.⁠”

“⁠우리 노후⁠.⁠”

“⁠그래⁠. 당신 정년 삼 년 남았고⁠, 나는 연금이 반 토막이고⁠.⁠”

범곤이 차 열쇠를 손바닥에서 굴렸다⁠. 열쇠고리에 달린 새솔은행 로고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은행을 나온 지 다섯 해인데 열쇠고리는 바꾸지 않았다⁠.

“⁠저 여자 거⁠, 그거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왼손 글씨에 엄지⁠. 태구 편에만 서 줘⁠. 이사회에서 큰누나가 한마디 하면 형제들 다 따라와⁠.⁠”

나는 범곤의 손을 보았다⁠. 열쇠를 굴리는 손가락이 한 번씩 멈췄다가 다시 굴렸다⁠. 범곤은 거짓말을 할 때 손을 쉬게 두지 못한다⁠. 서른두 해 동안 세 번 보았다⁠. 처음은 결혼 전 연애하던 여자 이야기⁠, 두 번째는 시어머니 병원비⁠, 세 번째가 지금이었다⁠.

“⁠당신⁠, 태구 유언장 오늘 처음 봤어요⁠?⁠”

열쇠가 손바닥 위에서 멈췄다⁠.

“⁠처음이지⁠. 왜⁠?⁠”

“⁠그냥 물었어요⁠.⁠”

나는 저고리 위로 두 봉투를 눌러 보았다⁠. 종이 두 장의 두께가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장은 굵고 반듯한 글씨⁠, 한 장은 떨리는 글씨였다⁠. 땅을 파면 맨 위에는 늘 최근의 흙이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오래된 흙이 나온다⁠. 위아래가 뒤집혀 있으면 누군가 손을 댔다⁠.

“⁠발인 전까지 내가 직접 캐 볼게요⁠. 아버지 마지막 석 달⁠.⁠”

“⁠선희야⁠, 이건 발굴이 아니야⁠.⁠”

“⁠흙이 종이로 바뀐 것뿐이에요⁠.⁠”

나는 범곤을 주차장에 두고 하얗게 불 켜진 장례식장 2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창 안에서 하소옥이 신발장 옆 의자에 혼자 앉아⁠, 내가 건네준 물컵을 그제야 입에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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