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90자)

막걸리 두 병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중고차 매매 단지에서는 새 타이어 고무 냄새와 딜러의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6월 18일 금요일 오후⁠, 우영칠은 은색 중형차 운전석에 마지막으로 앉아 있었다⁠. 부장 승진하던 해에 산 차였다⁠. 열한 해 동안 거래처를 돌며 이십만 킬로미터를 달렸다⁠. 조수석 서랍은 비어 있었다⁠. 심장내과 약봉투는 등산 조끼 안주머니로 옮겼다⁠.

딜러가 창문을 두드렸다⁠. 영칠은 열쇠를 뽑아 건넸다⁠. 열쇠고리에 달린 작은 거북이 인형은 떼지 않았다⁠. 보담이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에서 사 온 것이었다⁠. 딜러가 거북이를 보고 웃었다⁠.

“⁠사장님⁠, 이건 떼 가셔야죠⁠.⁠”

“⁠…그렇지⁠.⁠”

영칠은 거북이를 떼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차 판 돈과 마이너스 통장을 긁은 돈을 합쳐 젊은 부부에게 보냈다⁠. 「⁠이체 완료 · 일억 원⁠」 가처분이 풀리기를 기다리다 잔금 날을 넘겨 소송을 당하느니⁠, 먼저 계약을 깨고 두 배를 무는 편이 덜 시끄러웠다⁠. 서른 해 영업을 한 사람의 계산이었다⁠. 계산은 맞았는데 손이 떨렸다⁠.

젊은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돈 잘 받았습니다⁠. 집 꼭 지키세요⁠.⁠」 영칠은 문자를 세 번 읽었다⁠. 누구에게 지키라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같은 단지 구석에서 연두색 경차 한 대를 샀다⁠. 딜러가 열쇠를 건네며 운전석 문을 열어 주었다⁠. 영칠이 몸을 접어 넣자 무릎이 핸들 밑에 끼었다⁠. 의자를 끝까지 뒤로 밀자 이번에는 뒷좌석에 등이 닿았다⁠.

“⁠사장님⁠, 처음엔 다들 그러세요⁠. 사흘 지나면 몸이 접혀요⁠.⁠”

“⁠내 몸은 서른 해 동안 펴져 있었소⁠.⁠”

동창 단톡방 「⁠광성고 21회⁠」에는 총무가 나간 뒤로 아침 꽃 사진이 반으로 줄었다⁠. 오늘은 하나가 달랐다⁠. 고교 때 반장이던 친구가 영칠에게 따로 글을 보냈다⁠. 「⁠소식 들었다⁠. 약값에 보태라⁠」 십만 원이 들어와 있었다⁠. 밑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총무 놈 잡으면 내가 먼저 때린다⁠」 영칠은 경차 운전석에 무릎을 끼운 채 웃었다⁠. 웃다가 가슴 한가운데가 바늘로 찌르듯 따끔했다⁠. 영칠은 숨을 길게 내쉬고 시동을 걸었다⁠.

*

토요일 아침⁠, 느티울 7호 담장에 장미가 피어 있었다⁠. 붉은 꽃송이 열두 개가 벽돌 두 단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대문을 열기도 전에 냄새가 먼저 넘어왔다⁠. 달고 진한 냄새였다⁠. 영칠은 장미 냄새를 싫어했다⁠. 싫어하는 냄새가 코를 꽉 채웠다⁠.

마당은 비어 있었다⁠. 영란은 공동 텃밭에 감자를 캐러 갔다고 식탁 메모지가 말했다⁠. 「⁠감자 캠⁠. 점심 알아서⁠」 「⁠먹든지⁠」보다 한 글자 길었다⁠.

영칠은 경차를 단지 입구에 세우고 공동 텃밭으로 걸어갔다⁠. 열일곱 번째 고랑에서 영란이 호미로 감자를 캐고 있었다⁠. 6호 할머니와 12호 아주머니가 옆에서 바구니를 들었다⁠. 흙 속에서 감자가 하나씩 굴러 나올 때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영란이 제일 크게 질렀다⁠. 영칠은 텃밭 울타리 밖에서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지 않았다⁠.

“⁠회장님⁠, 오셨소⁠.⁠”

봉옥단이 장화를 신고 다가왔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변호사는 만나 보셨지라⁠? 그 양반 소개해 드린 사람이 나여⁠.⁠”

“⁠압니다⁠. 고맙소⁠.⁠”

“⁠나도 증인 나가기로 했어라⁠. 내가 본 대로 말허면 된다고 허등만⁠. 담 너머로 장미 넘겨준 거⁠, 노래 교실⁠, 텃밭⁠.⁠”

영칠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일곱 번째 고랑에서 영란이 주먹만 한 감자를 들어 올려 6호 할머니에게 보여 주었다⁠. 영란의 웃음소리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회장도 웃음소리를 들었다⁠. 회장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 계약 깨진 거 수수료는 내가 따로 챙겨 드리리다⁠.⁠”

“⁠아따⁠, 그런 말 마시오⁠. 나는 단지 생각해서 허는 것이여⁠.⁠”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 첫 번째 고랑으로 돌아갔다⁠. 영칠은 울타리 밖에서 영란의 감자를 한 번 더 보고 경차로 돌아왔다⁠.

경차 트렁크에는 벽돌이 오십 장밖에 안 들어갔다⁠. 영칠은 건재상과 단지를 세 번 오갔다⁠. 세 번째 왕복 때 건재상 사장이 차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부장님⁠, 차 바꾸셨네요⁠?⁠”

“⁠연비가 좋아서⁠.⁠”

영칠은 벽돌 세 번째 단을 쌓기 시작했다⁠. 장미 줄기가 벽돌 놓을 자리마다 걸리적거렸다⁠. 줄기를 옆으로 밀면 가시가 장갑을 뚫었다⁠. 영칠은 줄기를 밀지 않고 줄기 사이사이로 벽돌을 끼웠다⁠. 벽돌 하나 놓는 데 시간이 세 배 들었다⁠. 정오가 지나 세 번째 단이 반쯤 올라갔을 때 대야의 시멘트가 바닥났다⁠. 사 온 시멘트 포대도 비어 있었다⁠.

영칠은 흙손을 대야에 던졌다⁠. 쨍 소리가 났다⁠. 담 너머 8호 현관문이 열렸다⁠.

도기백이 흙손 하나와 시멘트 반 포대를 들고 나왔다⁠. 기백은 담을 넘겨다보지 않고⁠, 8호 대문으로 나가 7호 대문으로 들어왔다⁠. 기백이 7호 마당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화원 할 때 화단 담을 제가 쌓았습니다⁠. 남은 게 좀 있어서요⁠.⁠”

“⁠…누가 도와 달랬소⁠.⁠”

“⁠형님 시멘트가 달라고 했습니다⁠.⁠”

기백은 대야에 시멘트를 붓고 모래를 섞었다⁠. 물을 조금씩 부었다⁠. 영칠이 메모지에 적어 두고 한 번도 지키지 못한 순서였다⁠. 기백은 바지 주머니에서 실타래를 꺼내 담 양 끝에 못을 박고 실을 팽팽하게 띄웠다⁠.

“⁠줄을 띄우셔야 합니다⁠. 이 실 높이에 벽돌 윗면을 맞추면 출렁거리지 않아요⁠.⁠”

“⁠동영상에서는 그런 말 안 했소⁠.⁠”

“⁠몇 배속으로 보셨어요⁠?⁠”

영칠은 또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담 양 끝에서 하나씩 벽돌을 놓아 가운데로 모였다⁠. 기백은 장미 줄기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벽돌 사이 틈으로 빼 주었다⁠. 영칠은 기백이 하는 것을 곁눈으로 보고 따라 했다⁠. 가시에 덜 찔렸다⁠.

벽돌이 가운데에서 만났다⁠. 세 번째 단이 실 높이에 맞춰 반듯하게 놓였다⁠. 첫 단과 두 번째 단의 물결 위에 처음으로 곧은 줄 하나가 생겼다⁠. 영칠은 허리를 펴고 줄을 보았다⁠. 기백도 보았다⁠. 벽돌을 놓는 동안 장미 냄새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영칠이 흙손을 대야에 걸쳐 놓고 물었다⁠. 묻지 않으려던 말이 나왔다⁠.

“⁠선생⁠, 당신 내 마누라 좋아하오⁠?⁠”

“⁠예⁠.⁠”

기백은 망설이지 않았다⁠. 영칠의 손이 흙손 손잡이를 쥐었다⁠.

“⁠…손은 잡았소⁠?⁠”

“⁠한 번 잡았습니다⁠. 텃밭에서 영란 씨가 고랑 둑에서 미끄러질 때요⁠. 형님이 거름 방석 하신 다음 주에요⁠.⁠”

영칠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거름 방석이라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게 다요⁠?⁠”

“⁠그게 다입니다⁠.⁠”

영칠은 담 위의 실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실이 팽팽하게 떨었다⁠.

“⁠증인 서 주시오⁠. 내 변호사가 선생을 부를 거요⁠.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사실대로 하겠습니다⁠.⁠”

기백은 흙손에 묻은 시멘트를 벽돌 모서리에 긁어냈다⁠.

“⁠형님 변호사님이 원하시는 사실은 아닐 겁니다⁠.⁠”

“⁠그건 내가 듣고 정하겠소⁠.⁠”

*

오후 네 시⁠, 8호 현관 계단에 막걸리 두 병이 놓였다⁠. 기백이 냉장고에서 꺼내 왔다⁠. 영칠은 계단 맨 아랫단에 앉았고 기백은 두 번째 단에 앉았다⁠. 앉은키가 비슷해졌다⁠. 플라스틱 잔 두 개에 막걸리가 찰랑거렸다⁠. 쌀 냄새와 시큼한 냄새가 장미 냄새 위로 올라왔다⁠.

“⁠서른두 해 동안 집사람이 와이셔츠를 다렸소⁠.⁠”

영칠이 먼저 말했다⁠. 막걸리 한 잔이 들어간 뒤였다⁠.

“⁠나는 그게 그냥 되는 줄 알았소⁠. 아침에 일어나면 의자에 셔츠가 걸려 있고⁠. 지난달에 내가 처음 다려 봤는데 소매를 태웠어⁠. 서른두 해 동안 집사람은 한 번도 안 태웠소⁠.⁠”

“⁠순향이는 셔츠를 안 다렸습니다⁠. 다리미가 무섭다고요⁠. 제가 다렸어요⁠. 대신 순향이가 화원 돈 계산을 다 했지요⁠. 저는 숫자를 못 봐서요⁠.⁠”

영칠은 기백의 손을 보았다⁠. 플라스틱 잔을 쥔 손등에서 동백 냄새가 났다⁠. 막걸리 냄새를 뚫고 올라오는 무겁고 쓴 냄새였다⁠.

“⁠선생은 아직 마누라 냄새가 나네⁠.⁠”

“⁠핸드크림이요⁠. 반 통 남았던 게 이제 손톱만큼 남았습니다⁠.⁠”

“⁠다 쓰면⁠?⁠”

“⁠다 쓰면 다 쓴 거지요⁠.⁠”

기백의 휴대전화가 계단 위에서 떨었다⁠. 화면에 동영상 채널 알림이 떠 있었다⁠. 「⁠황혼 재혼⁠, 자식 반대를 넘는 세 가지 방법⁠」 영칠이 목을 빼고 들여다보았다⁠. 기백이 얼른 화면을 엎었다⁠.

“⁠선생 알고리즘도 바람났네⁠.⁠”

“⁠이사 오고 나서 이상한 게 자꾸 떠요⁠. 형님은 안 그러세요⁠?⁠”

영칠은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자기 휴대전화를 꺼냈다⁠. 돋보기를 쓰고 동영상 채널을 열었다⁠. 맨 위에 「⁠졸혼한 아내가 돌아왔어요⁠」가 떠 있었고⁠, 바로 밑에 「⁠벽돌 쌓기 중급편⁠」이 있었다⁠. 두 남자는 서로의 화면을 보고 동시에 웃었다⁠.

기백은 잔을 비웠다⁠. 영칠도 비웠다⁠. 두 번째 병을 따는 소리가 마당에 퐁 하고 울렸다⁠.

대문이 열렸다⁠. 영란이 감자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7호 담장의 세 번째 단을 보고⁠, 8호 계단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를 보았다⁠. 영칠의 얼굴이 막걸리에 벌겠고 기백의 귀가 빨갰다⁠.

“⁠내 담에 남의 벽돌 쌓지 마요⁠.⁠”

“⁠내 벽돌이야⁠. 줄은 저 양반이 띄웠고⁠.⁠”

“⁠장미는요⁠?⁠”

“⁠장미는 장미 거라며⁠.⁠”

영란은 담 앞으로 갔다⁠. 세 번째 단 벽돌 사이로 장미 줄기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빠져나와 있었다⁠. 가지마다 노끈 대신 부드러운 고무 끈으로 묶여 있었다⁠. 화원 하던 사람의 매듭이었다⁠. 영란은 매듭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고 나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감자 바구니를 수돗가에 내려놓았다⁠.

“⁠술 마셨으면 운전하지 마요⁠.⁠”

“⁠경차는 운전이 아니야⁠.⁠”

“⁠버스 타요⁠. 감자 몇 알 싸 줄게요⁠.⁠”

*

밤 아홉 시⁠, 광역버스는 고속도로를 지나며 흔들렸다⁠. 영칠은 무릎 위에 감자 다섯 알이 든 비닐봉지를 얹고 창에 머리를 기댔다⁠. 감자에서 흙냄새가 났다⁠. 가슴 한가운데가 다시 조였다⁠. 영칠은 조끼 안주머니에서 갈색 약병을 꺼내 한 알을 혀 밑에 넣었다⁠. 약이 혀 밑에서 녹는 동안 버스 창밖으로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열한 시⁠, 상계동 702호 부엌은 깜깜했다⁠. 영칠은 불을 켜고 냄비에 물을 받았다⁠. 감자를 삶을까 하다가 라면 봉지를 뜯었다⁠. 냉장실 맨 위 칸 라면이 하나 남아 있었다⁠. 보담이 치운 뒤로 라면은 다시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다⁠.

물이 끓기 시작할 때 가슴이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숨이 반만 들어왔다⁠. 영칠은 싱크대 모서리를 잡았다⁠. 손이 미끄러졌다⁠. 무릎이 먼저 바닥에 닿았고⁠, 이어서 어깨가⁠, 마지막으로 뺨이 차가운 부엌 타일에 닿았다⁠.

냄비에서 물이 넘쳤다⁠. 가스 불꽃 위로 물이 떨어져 치익 소리가 났다⁠. 스프 냄새가 탄내로 바뀌었다⁠.

영칠은 조끼 주머니를 더듬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 글씨가 번져 보였다⁠. 돋보기는 이마에 없었다⁠. 버스에서 졸다가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거실 탁자의 돋보기는 다섯 걸음 밖에 있었다⁠. 다섯 걸음이 고속도로만큼 멀었다⁠.

영칠은 휴대전화를 입 가까이 댔다⁠. 보담이 설치해 주고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기능이었다⁠.

“⁠…일일구⁠. 일일구 전화 걸어⁠.⁠”

「⁠119에 전화를 겁니다⁠.⁠」

화면에 큰 글씨가 떴다⁠. 돋보기 없이도 읽히는 글씨였다⁠. 신호음이 울렸다⁠. 영칠은 바닥에 뺨을 댄 채 냉장고 문을 올려다보았다⁠. 눈높이에 노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물 조금씩⁠」 밑줄 두 개가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냄비의 물은 한꺼번에 넘치고 있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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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경2026.11.01· 9화

    열한 해 탄 차를 파는 날 약봉투를 등산 조끼로 옮기는 장면이 좋아요.

    • 석담율작가2026.11.01

      차는 팔아도 약은 챙겨야 하니까요. 그 조끼 주머니가 다음 장면에서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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