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428자)

소장

졸혼 선언 아내 옆집에 이사 온 첫사랑 · 석담율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박하사탕 냄새와 복사기 토너 냄새가 났다⁠. 용인 시청 건너편 상가 삼 층⁠, 간판보다 계단이 더 낡은 사무실이었다⁠. 5월 17일 월요일 오전⁠, 손영란은 상담 탁자 앞에 앉아 무릎 위의 보자기를 두 손으로 눌렀다⁠. 보자기 안에는 서른두 해 치 적금 통장이 고무줄에 묶여 있었다⁠.

변호사는 마흔 중반의 여자였다⁠. 단발머리에 안경을 머리띠처럼 올려 쓰고⁠, 말할 때마다 박하사탕을 볼 한쪽으로 굴렸다⁠. 영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동안 볼펜을 한 번도 쥐지 않았다⁠.

“⁠사모님⁠, 졸혼은 법에 없는 말이에요⁠.⁠”

“⁠알아요⁠. 남편도 그 말부터 했어요⁠.⁠”

“⁠그러니까 법으로는 두 분이 아직 그냥 부부예요⁠. 집이 남편분 명의면 남편분이 파셔도 사모님이 막을 길이 없어요⁠. 졸혼할 때 약속을 종이에 써 두셨어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방법이 없어요⁠?⁠”

“⁠하나 있어요⁠.⁠”

변호사는 사탕을 반대편 볼로 옮겼다⁠.

“⁠이혼 소송을 내시면서 재산을 나눠 달라고 같이 청구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집을 못 팔게 묶어 달라고 법원에 신청하는 거죠⁠. 가처분이라고 해요⁠. 결정이 잔금 날 전에 나오면⁠, 사는 분들이 소유권을 못 넘겨받아요⁠.⁠”

변호사가 사탕 통을 영란 앞으로 밀었다⁠. 하얀 박하사탕이 통 바닥에 수북했다⁠.

“⁠드세요⁠. 여기 오시는 분들은 다 입이 말라요⁠. 이혼 이야기는 침이 많이 들어요⁠.⁠”

영란은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박하가 혀를 쏘고 콧속까지 서늘해졌다⁠.

“⁠이혼을 해야 집을 지킨다는 거네요⁠.⁠”

“⁠이혼을 청구해야 지킨다는 거예요⁠. 판결이 어떻게 날지는 그다음이고요⁠.⁠”

영란은 보자기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졸혼은 영란이 혼자 정했다⁠. 식탁에 종이 한 장 올려서⁠. 이혼은 법이 정해 주는 순서대로 가야 했다⁠.

“⁠하나 더 여쭤볼게요⁠.⁠”

변호사가 안경을 코로 내려 썼다⁠. 목소리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혹시 옆집 분이랑 사진 같은 거 있으세요⁠? 우리 법원은 바람피운 사람이 이혼을 청구하면 잘 안 받아 줘요⁠. 남편분이 그걸 들고 나오시면 골치 아파요⁠.⁠”

“⁠단지 단톡방에 있어요⁠. 노래 교실에서 찍힌 거요⁠. 회장님이 커플이라고 써서 올렸어요⁠.⁠”

변호사는 사탕을 깨물었다⁠. 딱 소리가 났다⁠.

“⁠커플이요⁠?⁠”

“⁠동아리 선배예요⁠. 마흔 해 전에⁠.⁠”

“⁠그 말씀을 법정에서도 똑같이 하셔야 돼요⁠. 그리고 앞으로는 담 너머로 뭘 주고받지 마세요⁠. 화분 같은 거요⁠.⁠”

“⁠화분은 벌써 받았어요⁠. 장미예요⁠. 지금 벽돌 두 단 반까지 올라왔어요⁠.⁠”

변호사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보았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이 나왔다⁠. 그러다 영란 무릎 위의 보자기에 눈길이 갔다⁠.

“⁠그건 뭐예요⁠?⁠”

영란이 보자기를 풀었다⁠. 고무줄로 묶인 통장 다발이 탁자에 놓였다⁠. 맨 위 통장은 표지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1995년에 만든 적금 통장이었다⁠. 변호사가 통장을 한 권씩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2019년 통장의 한 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사모님⁠, 이거 남편분은 아세요⁠?⁠”

“⁠몰라요⁠.⁠”

“⁠이건 나중에 큰 무기예요⁠. 아직은 넣어 두세요⁠.⁠”

변호사가 통장을 도로 묶어 영란에게 밀어 주었다⁠. 영란은 보자기를 다시 쌌다⁠. 매듭을 짓다가 손이 멈췄다⁠.

“⁠이혼하면 되돌리기 어렵죠⁠?⁠”

“⁠네⁠. 졸혼은 둘이 다시 합치면 그만이지만⁠, 이혼은 혼인 신고를 새로 하셔야 해요⁠.⁠”

영란은 매듭을 꽉 지었다⁠.

“⁠내세요⁠. 오늘⁠.⁠”

*

월요일 밤 열 시⁠, 7호 마당 수돗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 영란은 장미 줄기를 벽돌에 다시 묶고 있었다⁠. 줄기가 벽돌 두 단을 넘어 허공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세 번째 단은 아직 없었다⁠. 줄기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8호 현관 등이 켜지고 기백이 나왔다⁠. 기백은 손에 기타를 들고 있었다⁠. 계단에 앉으려다 영란을 보고 담 앞으로 왔다⁠.

“⁠줄기가 탈 데가 없네요⁠.⁠”

“⁠다음 주에 영칠 씨가 세 번째 단 올리면 탈 데가 생겨요⁠.⁠”

영란은 노끈 끝을 이로 끊었다⁠. 기백은 담 위에 기타를 세워 기댔다⁠. 둘 사이에서 장미 잎 냄새가 났다⁠.

“⁠선배⁠, 나 이혼 소송 내요⁠. 오늘 냈어요⁠.⁠”

기백의 손이 기타 목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일어났다⁠.

“⁠…나 때문은 아니지요⁠?⁠”

“⁠선배 때문이었으면 마흔 해 전에 냈죠⁠.⁠”

기백이 웃으려다 웃지 못했다⁠. 영란은 끊은 노끈을 주머니에 넣었다⁠.

“⁠집 때문이에요⁠. 집을 묶으려면 이혼을 청구해야 된대요⁠. 졸혼은 법에 없어서요⁠.⁠”

“⁠형님은 아세요⁠?⁠”

“⁠다음 주면 법원에서 서류가 가요⁠.⁠”

기백은 한참 말이 없었다⁠. 담 위에 얹은 손이 벽돌 모서리를 쓸었다⁠. 시멘트가 거칠게 일어나 있었다⁠.

“⁠영란 씨⁠, 나 사실 알았어요⁠. 형님 대출 일이요⁠. 어버이날 밤에 담 너머로 형님 통화를 들었어요⁠. 형님이 직접 말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말 안 했어요⁠.⁠”

영란의 손이 멈췄다⁠. 장미 줄기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 흔들렸다⁠.

“⁠열흘이나 알고 있었어요⁠?⁠”

“⁠예⁠.⁠”

“⁠또 혼자 정했네요⁠.⁠”

“⁠이번엔 형님 일이라서요⁠. 형님 입으로 나와야 할 말이었어요⁠.⁠”

“⁠그건 맞아요⁠.⁠”

영란은 노끈을 다시 꺼내 줄기를 묶었다⁠. 손이 조금 거칠었다⁠. 기백은 기타를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내가 대전으로 다시 갈까요⁠. 단톡방 사진도 있고⁠, 내가 여기 있으면 영란 씨 소송에⁠.⁠”

“⁠그것도 혼자 정하려고요⁠?⁠”

“⁠…그러니까 묻는 거예요⁠. 물러날까요⁠?⁠”

영란은 매듭을 짓고 고개를 들었다⁠. 키 큰 기백의 얼굴이 현관 등 빛을 등지고 있었다⁠. 은발 끝만 하얗게 빛났다⁠.

“⁠아니요⁠.⁠”

영란은 대답을 하나만 했다⁠. 기백도 더 묻지 않았다⁠. 기타를 들고 계단으로 돌아가 앉더니⁠, 줄을 하나씩 골랐다⁠. 「⁠사월의 골목⁠」 전주가 아주 작게 담을 넘어왔다⁠. 영란은 수돗가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끝까지 들었다⁠.

*

6월 3일 목요일⁠, 법원에서 가처분 결정이 나왔다⁠. 변호사가 보내 준 사진 속 종이에는 「⁠위 부동산에 대하여 매매⁠, 증여⁠, 그 밖의 일체의 처분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적혀 있었다⁠. 영란은 문장을 소리 내어 두 번 읽었다⁠. 법원의 말은 소리 내어 읽어도 입에 붙지 않았다⁠.

단지 단톡방은 이튿날 아침에 알았다⁠. 「⁠7호 계약 깨진대요⁠」 「⁠법원 서류 왔대요⁠」 「⁠졸혼이 이혼 된대요⁠」 누가 어디서 들었는지 아무도 적지 않았다⁠. 회장은 하루 종일 아무 글도 올리지 않았다⁠. 보담에게서는 문자가 한 줄 왔다⁠. 「⁠엄마⁠, 진짜 했구나⁠」 이모티콘이 없었다⁠. 보담이 이모티콘 없이 보낸 문자는 처음이었다⁠.

금요일 저녁 공동 텃밭에서 영란은 감자 잎을 들춰 보다가 첫 번째 고랑의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회장은 물뿌리개를 든 채 고개를 돌렸다⁠. 계약이 깨지면 회장의 중개 수수료도 같이 깨졌다⁠. 회장은 금요일 저녁 첫 번째 고랑에 물을 두 번 주었다⁠. 영란은 감자 잎 밑에서 콩알만 한 감자 하나를 손끝으로 만져 보았다⁠. 흙이 차고 단단했다⁠.

토요일 아침 아홉 시⁠, 은색 중형차가 대문 앞에 급하게 멈췄다⁠. 우영칠이 종이 한 장을 쥐고 내렸다⁠. 여행 가방은 없었다⁠. 영칠은 대문을 열지 않고 대문 너머로 종이를 흔들었다⁠.

“⁠당신이 집을 묶었어⁠?⁠”

“⁠네⁠.⁠”

“⁠잔금 날 못 넘기면 계약 깨져⁠. 내가 깨는 거야⁠. 그러면 계약금 두 배를 물어줘야 돼⁠. 오천 받았으니까 일억을 돌려줘야 된다고⁠. 일억⁠!⁠”

“⁠알아요⁠.⁠”

“⁠알면서 했어⁠? 내가 이자도 못 내는 거 알면서⁠?⁠”

영칠의 목소리가 단지 길을 따라 울렸다⁠. 6호 할머니네 강아지가 짖기 시작했다⁠. 영란은 대문 안쪽에서 빗장에 손을 얹었다⁠. 열지 않았다⁠.

“⁠알아서 했어요⁠. 당신이 이 집 팔면 이억 갚고⁠, 남은 돈 들고 서울 가서 나랑 살자고 하잖아요⁠. 나는 그 서울로 안 가요⁠.⁠”

“⁠그럼 나는⁠? 나는 어디서 살아⁠?⁠”

“⁠서울 집에서요⁠. 당신 이름으로 된 집이요⁠.⁠”

영칠이 종이를 구겼다⁠. 구긴 종이를 펴고⁠, 다시 구겼다⁠. 종이 귀퉁이가 찢어졌다⁠.

“⁠이혼은 못 해 준다⁠. 절대⁠.⁠”

“⁠그건 법원이 정하겠죠⁠.⁠”

“⁠법원이 내 서른두 해를 알아⁠?⁠”

“⁠내 서른두 해도 몰라요⁠. 그래서 둘 다 가서 말해야죠⁠.⁠”

영칠은 대답 대신 대문 기둥을 손바닥으로 한 번 쳤다⁠. 손바닥이 아팠는지 손을 털었다⁠. 그러고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열린 창으로 라디오가 새어 나왔다⁠. 「⁠요즘은 졸혼 계약서를 쓰는 부부도 늘고 있다는데요⁠.⁠」 영칠이 라디오를 꺼 버렸다⁠.

*

오후 세 시⁠,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젊은 부부와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노란 유치원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에 「⁠느티울 해바라기 유치원⁠」이라는 이름표가 바느질로 붙어 있었다⁠. 아직 다니지도 않는 유치원이었다⁠.

“⁠사모님⁠, 잠깐만 말씀 좀⁠.⁠”

젊은 아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편은 아내 뒤에서 신발 앞코를 보았다⁠.

“⁠저희 서울 전세 빼기로 집주인한테 말해 놨어요⁠. 다음 달 말에 비워 드려야 돼요⁠. 애 유치원도 여기로 옮겨 놨고요⁠. 계약금 두 배 돌려받는 건 알아요⁠. 돈은 돌려받아도 갈 데가 없어요⁠. 이 동네 집은 이 가격에 다시 안 나와요⁠.⁠”

영란은 현관 문턱에 서서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보았다⁠. 이름표 바늘땀이 삐뚤빼뚤했다⁠. 엄마가 밤에 손으로 단 것이었다⁠.

“⁠저희는 무슨 죄예요⁠?⁠”

“⁠죄 없어요⁠.⁠”

영란은 대답했다⁠. 목소리가 깍듯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아무 죄 없어요⁠. 미안해요⁠.⁠”

“⁠그럼 풀어 주세요⁠. 법원에 말씀해 주시면⁠.⁠”

“⁠안 풀어요⁠.⁠”

젊은 아내의 눈이 붉어졌다⁠. 남편이 아내의 어깨를 잡았다⁠. 아이가 엄마 바지를 잡아당기며 영란을 올려다보았다⁠.

“⁠할머니⁠, 고라니는 이제 우리 집에 안 와⁠?⁠”

영란은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고라니는 아무 집에나 와⁠. 너희 집 어디로 가든⁠, 산 가까우면 와⁠.⁠”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아이가 대문을 나서며 담 밑의 장미를 돌아보았다⁠. 영란은 현관문을 닫고⁠, 문에 등을 기댄 채 한참 서 있었다⁠. 신발장 위에 영칠이 놓아둔 돋보기가 그대로 있었다⁠.

*

6월 둘째 주 목요일⁠, 변호사에게서 문자가 왔다⁠. 「⁠남편분 답변서 왔어요⁠. 보내 드릴게요⁠. 마음 단단히 드시고 읽으세요⁠.⁠」 사진 석 장이 따라왔다⁠. 영란은 마당 의자에 앉아 앞치마 주머니의 돋보기를 꺼냈다⁠.

「⁠피고는 원고와의 이혼을 원하지 아니한다⁠.⁠」

첫 줄은 영칠의 말투가 아니었다⁠. 영칠의 변호사가 쓴 문장이었다⁠. 둘째 장에서 영란의 손가락이 멈췄다⁠.

「⁠원고는 피고와 별거하던 중 이웃에 거주하는 도기백과 부정한 관계를 맺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단지 주민 단체 대화방에 게시된 사진을 제출한다⁠.⁠」

셋째 장에 노래 교실 사진이 붙어 있었다⁠. 맨 앞줄 기백의 옆얼굴과 맨 뒷줄 영란의 크게 벌린 입⁠. 사진 밑에 회장의 글씨가 그대로 찍혀 있었다⁠. 「⁠옛날 동아리 커플이시래요^^⁠」

담 너머에서 물조리개 물소리가 들렸다⁠. 기백이 저녁 물을 주고 있었다⁠. 영란은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났다⁠. 담 앞까지 가서 화면을 담 위에 올려놓았다⁠. 기백이 물조리개를 내려놓고 몸을 숙였다⁠. 화면 속 자기 이름 석 자를 오래 보았다⁠.

장미 줄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허공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기백이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영란 씨⁠, 내 이름이 법원에 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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