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10자)

현묘관의 방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봉쇄는 방이 붙은 날 풀렸다⁠. 현곡은 더 가둘 까닭이 없었다⁠. 천하제일검이 보름에 현묘관 마당으로 오기만 하면 되었다⁠. 마을 사람들도 와서 보아야 했다⁠. 본보기는 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본보기가 되었다⁠.

철운은 이튿날 새벽 두부 여섯 판을 눌렀다⁠. 혼자 눌렀다⁠. 젊은이 셋이 콩을 갈고 장작을 팼지만 누름판에 손바닥을 얹는 것은 철운 혼자였다⁠. 소석이 얹던 자리에 손바닥을 얹자 판이 조금 넓었다⁠.

두부 판을 어깨에 메고 첫 배로 성안에 들어갔다⁠. 역관은 성안 운하 옆에 있었다⁠. 철운은 역관 대문 맞은편 다리 밑에 두부 판을 내려놓고 젖은 베를 걷었다⁠.

“⁠두부요⁠. 버들나루 두부⁠.⁠”

대문을 지키던 금의위 넷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나루에서 바지가 흘러내린 셋 가운데 하나가 대문 앞 넷 속에 있었다⁠. 바지가 흘러내렸던 금의위가 허리띠를 손으로 꽉 쥐었다⁠.

“⁠늙은이⁠, 여기서 장사하면 안 된다⁠.⁠”

“⁠다리 밑은 관아 땅이오⁠, 역관 땅이오⁠?⁠”

금의위가 대답을 못 했다⁠. 지나가던 성안 아낙 둘이 두부를 샀다⁠. 두부검 두부라는 소문을 들은 아낙들이었다⁠. 줄이 생겼다⁠. 금의위 하나가 줄 끝에 슬그머니 붙었다가 동료가 노려보자 물러났다⁠. 해가 처마에 닿기 전에 여섯 판이 다 나갔다⁠. 철운은 두부를 팔면서 역관 이층 창만 보았다⁠.

*

창이 열린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 소석이 창틀에 턱을 괴고 내려다보았다⁠.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짙은 남색 비단이었다⁠. 은자물쇠가 목에서 반짝였다⁠.

소석이 할아버지를 찾았다⁠. 눈이 커졌다⁠.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막았다⁠. 누가 소리 지르지 말라고 한 얼굴이었다⁠.

소석이 창틀 위로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천천히 내리눌렀다⁠. 누름판을 누르는 손이었다⁠. 물이 빠지는 것을 기다리는 손이었다⁠. 그러다 손바닥을 멈췄다⁠. 가만히 있고 싶어진 손바닥이었다⁠.

철운은 다리 밑에서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똑같이 내리눌렀다⁠. 똑같이 멈췄다⁠.

소석이 웃었다⁠. 이가 하나 빠져 있었다⁠. 언제 빠졌는지 할아버지는 몰랐다⁠. 역관에서 빠졌을 것이다⁠. 철운은 손주의 빠진 이가 서당 엿 때문인지 역관 차과자 때문인지 따져 보다가 그만두었다⁠. 창 안에서 누가 소석을 불렀다⁠. 창이 닫혔다⁠.

*

해 질 녘 승로가 대문을 나왔다⁠. 남색 비단 도포에 검은 띠를 맸다⁠. 손은 그대로 파랬다⁠. 승로는 다리 밑까지 걸어와 빈 두부 판을 내려다보았다⁠.

“⁠가세요⁠.⁠”

“⁠두부 다 팔았다⁠. 판 거둬서 간다⁠.⁠”

“⁠내일은 오지 마세요⁠. 소석이가 아버지만 찾아요⁠. 밥을 안 먹어요⁠.⁠”

“⁠역관 밥은 콩이 덜 불었겠지⁠.⁠”

승로가 웃지 않았다⁠. 철운도 웃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 하나만 물을게요⁠. 이번에 대답 안 하시면 다시는 안 물을게요⁠.⁠”

철운은 두부 판을 내려놓았다⁠.

“⁠그 밤에 어머니는 어떻게 됐어요⁠? 저를 낳은 어머니요⁠.⁠”

다리 위로 짐배가 지나갔다⁠. 사공이 노를 저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끝 소절을 두 번 불렀다⁠. 철운이 고개를 들었다⁠. 서른 해 전 불길 속에서 들은 노래와 가락이 비슷했다⁠. 비슷할 뿐이었다⁠. 강남의 사공 노래는 다 끝 소절을 두 번 불렀다⁠.

“⁠아버지⁠.⁠”

철운은 입을 열었다⁠. 엄지 아래 흉터가 갑자기 뜨거웠다⁠. 흉터는 서른 해 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 저녁에 뜨거웠다⁠. 철운은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그 밤 일은⁠…⁠…⁠.⁠”

“⁠다 아버지 탓이라고요⁠. 알아요⁠. 그 말 말고요⁠.⁠”

“⁠그 말밖에 할 수 없다⁠.⁠”

승로가 아버지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았다는 끄덕임이 아니었다⁠. 그만두겠다는 끄덕임이었다⁠.

“⁠그럼 보름에 오지 마세요⁠. 형이 아버지를 무릎 꿇리는 거⁠, 소석이가 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승로가 대문으로 돌아갔다⁠. 대문이 닫혔다⁠. 철운은 빈 두부 판을 들었다⁠. 판이 가벼워서 어깨에 얹는 손이 헛돌았다⁠.

대문 안에서 승로는 문에 등을 기댔다가 미끄러져 앉았다⁠. 이층에서 소석이 할아버지 어디 갔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채향이 달래는 소리가 뒤따랐다⁠. 승로는 파란 손바닥을 비단 도포에 문질렀다⁠. 쪽물은 비단에 묻어나지 않았다⁠. 서른 해 들인 물은 옷에 옮겨 가지도 않았다⁠.

*

성안은 하루가 다르게 붐볐다⁠. 객잔마다 칼 찬 사내들이 들었다⁠. 강북 말씨⁠, 복건 말씨⁠, 산동 말씨가 운하 양쪽에서 섞였다⁠. 찻집 이층마다 천하제일검 이야기였다⁠. 두부를 누른다더라⁠. 국자로 쌍칼을 꺾었다더라⁠. 금의위 천호의 관을 떨어뜨렸다더라⁠. 이야기는 하루에 한 뼘씩 자랐다⁠. 사흘째에는 국자로 배 한 척을 갈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젊은이 셋은 성안 객잔을 돌며 소문을 모아 왔다⁠. 키다리가 두부집 부엌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대협⁠, 관아 앞에 이름을 올리는 줄이 나루까지 이어졌습니다⁠. 다들 왜구를 치러 가는 의병이 되는 줄 압니다⁠. 한 사람 이름 올릴 때마다 서리가 칼을 받아서 창고에 넣습니다⁠. 의병은 관아 칼을 쓴다고요⁠.⁠”

“⁠칼을 내준 사람들은 어디로 가오⁠?⁠”

“⁠성 밖 군영으로 간다고 하는데⁠, 가 본 사람이 없습니다⁠.⁠”

뚱보가 창을 끌어안았다⁠.

“⁠저는 창 안 냅니다⁠. 회계 창법 맏제자가 창을 내면 사부님이 저를 뒤에서 찌르실 겁니다⁠.⁠”

“⁠사부님은 어디 계시오⁠?⁠”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럼 뒤에서 못 찌르시겠군⁠.⁠”

“⁠그래도 꿈에 나오십니다⁠.⁠”

서생이 부채를 펴고 말했다⁠.

“⁠대협⁠, 저희 셋은 보름에 현묘관 마당에 갑니다⁠. 칼 내러 가는 거 아닙니다⁠. 구경하러 가는 겁니다⁠.⁠”

“⁠가지 말고 집에 가시오⁠. 셋 다 집이 있지 않소⁠.⁠”

“⁠두부 열다섯 판 빚이 있습니다⁠. 염방 주인한테 진 거 대협이 저희한테 떠넘기셨잖습니까⁠?⁠”

철운은 대꾸하지 않았다⁠. 셋이 서로 눈짓을 했다⁠. 대꾸가 없는 것이 허락이라는 것을 셋은 이 집에서 열흘 만에 배웠다⁠.

*

나흘째 아침⁠, 철운은 현묘관 앞 마당을 지나갔다⁠. 마당 한가운데서 목수들이 나무를 켜고 있었다⁠. 높이 한 길 반쯤 되는 단이 반쯤 올라가 있었다⁠. 단 앞에는 장작이 쌓였다⁠. 장작 옆에 거적을 덮은 나무판 더미가 있었다⁠. 거적 귀퉁이가 들려 있어서 판에 새긴 글자가 거꾸로 보였다⁠. 책을 찍는 판목이었다⁠. 『⁠기저음⁠』이었다⁠.

현묘관 담벼락에는 비단 징발 방과 보름의 방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방 앞에서 직녀 몇이 손바닥을 맞대고 서 있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손바닥에 난 실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철운은 대문에서 단까지 걸었다⁠. 걸음을 셌다⁠. 마흔두 걸음이었다⁠. 단에서 판목 더미까지⁠, 판목 더미에서 현묘관 처마 밑 그늘까지도 걸음으로 쟀다⁠. 철운은 단 모서리에 손바닥을 댔다⁠. 갓 켠 나무라 송진이 손바닥에 끈끈하게 묻었다⁠.

“⁠영감⁠, 거기 손대지 마시오⁠.⁠”

목수가 소리쳤다⁠. 철운은 손을 뗐다⁠.

“⁠단이 기울었소⁠. 동쪽 다리가 반 치 짧소⁠.⁠”

목수가 수평 잡는 물그릇을 대 보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철운은 손바닥의 송진을 앞치마에 닦으며 마당을 나왔다⁠. 두부 누름판도 한쪽이 반 치 기울면 두부가 한쪽만 단단해졌다⁠. 서른 해를 누름판 수평만 보고 산 손바닥이었다⁠.

*

나흘째 오후⁠, 철운은 성안 찻집 이층에 앉아 있었다⁠. 외눈 노인이 앉던 창가였다⁠. 외눈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찻집 주인이 노인은 사흘 전에 고향으로 갔다고 했다⁠. 보름 구경은 젊은 사람들이나 하라고 했다고⁠.

맞은편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늙은 사내 하나가 앉았다⁠. 철운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다⁠. 오른 소매가 비어서 허리띠에 끼워져 있었다⁠. 왼손바닥이 숯처럼 검었다⁠. 사내가 왼손으로 찻주전자를 들어 자기 잔에 따랐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서른 해 만이군⁠, 천하제일검⁠.⁠”

“⁠흑장⁠.⁠”

“⁠이제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아⁠. 다들 외팔이라고 부르지⁠. 네 덕분에⁠.⁠”

외팔 노인이 차를 마셨다⁠. 빈 소매가 의자 등받이에 늘어졌다⁠.

“⁠자객을 보냈더군⁠.⁠”

“⁠핏줄을 데려오라고 했지⁠. 핏줄이 역관에 들어앉아 버렸어⁠. 금의위 천호 조카가 됐다며⁠? 재미있게 됐어⁠.⁠”

외팔 노인이 웃었다⁠. 누런 이가 드러났다⁠.

“⁠천하제일검⁠, 네가 서른 해 동안 두부를 눌러 키운 게 누구 핏줄인지 나는 알아⁠. 그 밤 거기 있었으니까⁠. 위지 집 대숲에서 네가 내 팔을 벨 때⁠, 네 품에 뭐가 있었는지 봤으니까⁠.⁠”

철운의 찻잔이 멈췄다⁠.

“⁠내 팔을 원하오⁠? 가져가시오⁠. 왼팔이든 오른팔이든⁠.⁠”

“⁠늙은 팔은 안 받아⁠. 쓸모가 없어⁠.⁠”

“⁠그럼 목을⁠.⁠”

“⁠목도 안 받아⁠. 네 목을 받으면 네가 편해지지⁠.⁠”

외팔 노인이 검은 손바닥을 탁자 위에 폈다⁠. 손금이 숯 사이로 하얗게 갈라져 있었다⁠.

“⁠나는 서른 해 동안 한 팔로 밥을 먹었어⁠. 젓가락을 왼손으로 쥐는 데 삼 년이 걸렸지⁠. 너는 그 삼 년 동안 두부를 눌렀고⁠. 나는 네가 제일 아끼는 걸 받을 거야⁠. 보름에⁠, 현묘관 마당에서⁠, 모두가 보는 데서⁠.⁠”

“⁠아이는 건드리지 마시오⁠.⁠”

“⁠아이를 건드리면 네가 칼을 들겠지⁠. 칼을 들면 천호가 너를 요서 무리 두목으로 묶겠지⁠. 나는 손 하나 안 대고 구경만 하면 돼⁠.⁠”

외팔 노인이 일어났다⁠. 찻값을 탁자에 놓았다⁠. 놓으면서 철운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흉터⁠, 아직 있군⁠. 천호한테는 말 안 했지⁠? 말하면 재미없어지니까 하지 마⁠.⁠”

외팔 노인이 계단을 내려갔다⁠. 걸음이 느렸다⁠. 무릎이 철운보다 나빴다⁠. 철운은 찻잔을 끝내 들지 못했다⁠.

*

같은 날 밤⁠, 도각은 관아 옥 앞에 서 있었다⁠. 손에 현곡이 보낸 공문이 있었다⁠. 공문은 짧았다⁠.

「⁠보름 정오 본보기의 집행은 소주 현령이 친히 칼을 잡는다⁠. 강남 사람들이 강남 관원의 손으로 벌을 보아야 한다⁠.⁠」

도각은 애체를 눈에 대고 같은 줄을 여러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위가 꼬였다⁠. 볶은 쌀을 씹었다⁠. 쌀이 목에 걸려 기침을 했다⁠.

옥 안에서 육계담이 짚더미에 앉아 있었다⁠. 곤장 자국이 아물어 가고 있었다⁠. 육계담이 옥살 너머로 도각을 보았다⁠.

“⁠나리⁠, 안색이 나쁘십니다⁠.⁠”

“⁠훈장⁠, 『⁠기저음⁠』 세 번째 수 끝 줄이 무엇이었소⁠?⁠”

육계담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외웠다⁠. 도각이 따라 외웠다⁠. 둘이 끝 줄을 같이 끝냈다⁠. 옥졸이 놀라서 열쇠를 떨어뜨렸다⁠.

“⁠나리도 외우십니까⁠?⁠”

“⁠열여섯 살 때부터⁠.⁠”

도각은 공문을 접어 소매에 넣었다⁠. 육계담에게는 보여 주지 않았다⁠. 대신 옥살 사이로 볶은 쌀 한 줌을 넣어 주었다⁠.

“⁠씹으시오⁠. 위에 좋소⁠.⁠”

“⁠제 위는 멀쩡합니다⁠.⁠”

“⁠그래도 씹으시오⁠. 보름까지는 무엇이든 씹으면서 기다리는 거요⁠.⁠”

*

삼경이 넘어 도각은 다시 삿갓을 썼다⁠. 성안 버들나루 사람들이 묵는 작은 객잔으로 갔다⁠. 철운은 객잔 마당 우물가에 앉아 오른손을 물동이에 담그고 있었다⁠. 흉터가 아직 뜨거웠다⁠.

도각이 삿갓을 벗었다⁠. 애체 금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오늘 밤에도 나는 여기 오지 않았소⁠.⁠”

“⁠나리는 요즘 안 다니시는 데가 많소⁠.⁠”

도각은 웃지 않았다⁠. 소매에서 공문을 꺼내 철운에게 내밀었다⁠. 철운은 팔을 뻗어 읽으려다 그만두었다⁠. 도각의 얼굴을 보면 다 읽혔다⁠.

“⁠천호가 나더러 훈장의 목을 베라 하오⁠.⁠”

도각이 우물가에 주저앉았다⁠. 관복 대신 입은 낡은 도포 자락이 물에 젖었다⁠.

“⁠내 손으로⁠.⁠”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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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현오2026.11.01· 9화

    철운 할아버지가 결전 앞두고 두부를 혼자 누르는 장면에서 울컥했어요.

    • 노범우작가2026.11.01

      누름판은 아무한테도 안 맡기는 사람이에요. 그 손으로 보름 뒤에 칼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