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42자)

현령의 책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객잔 우물가에서 도각은 한참 말이 없었다⁠. 젖은 도포 자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철운이 물동이에서 손을 꺼냈다⁠. 흉터의 열기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

“⁠베실 거요⁠?⁠”

“⁠안 베면 내 목이 떨어지오⁠. 베면 내가 나를 못 보오⁠. 거울을 못 볼 거요⁠. 애체로 보면 더 크게 보이겠지⁠.⁠”

“⁠나리는 어떻게 하고 싶소⁠?⁠”

도각이 고개를 들었다⁠. 서른 해 관원 노릇을 하면서 그런 물음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관원은 해야 하는 것을 물었다⁠. 하고 싶은 것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모르겠소⁠. 정말 모르겠소⁠.⁠”

“⁠그럼 정하지 마시오⁠. 보름까지 엿새 남았소⁠. 콩도 밤새 불려야 갈리오⁠.⁠”

“⁠당신은 정했소⁠?⁠”

“⁠손주를 데리러 가오⁠. 그 밖에는 정한 게 없소⁠.⁠”

도각이 웃었다⁠. 웃다가 위를 움켜쥐었다⁠. 철운이 객잔 부엌에서 순두부 한 사발을 얻어 왔다⁠. 도각은 사발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천천히 비웠다⁠.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성안 두부는 콩이 덜 불었소⁠.⁠”

“⁠그래서 내가 버들나루에서 장사하오⁠.⁠”

*

이튿날 아침⁠, 현곡이 관아 안채에 들어왔다⁠. 금의위 둘과 옥졸 하나가 뒤따랐다⁠. 옥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당 아이 삼촌이라던 옥졸이었다⁠. 도각은 서재에서 공문을 읽다가 일어났다⁠.

“⁠천호⁠, 기별도 없이⁠…⁠…⁠.⁠”

“⁠현령⁠, 어젯밤 옥에서 훈장과 시를 같이 외웠다고 들었다⁠.⁠”

도각의 손에서 애체가 미끄러졌다⁠. 현곡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서재를 한 바퀴 돌며 바닥을 발로 눌러 보았다⁠. 마루 한 귀퉁이에서 널빤지가 조금 들썩였다⁠. 현곡이 쪼그려 앉아 손가락을 널빤지 끝에 걸고 들었다⁠.

널빤지 밑에 기름종이로 싼 책 한 권이 있었다⁠. 현곡이 기름종이를 벗겼다⁠. 표지에 『⁠기저음⁠』 세 글자가 있었다⁠. 첫 장을 넘기자 늙은 손 글씨가 있었다⁠.

「⁠도각에게⁠. 베틀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관원이 되거라⁠.⁠」

현곡이 책을 덮었다⁠.

“⁠현령의 스승이 써 준 것인가⁠?⁠”

“⁠그렇습니다⁠.⁠”

“⁠지금 옥에 계신 그 늙은 선비가⁠?⁠”

“⁠그렇습니다⁠.⁠”

도각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다리가 떨렸지만 서 있었다⁠. 애체를 바닥에서 주워 이마에 올렸다⁠. 손이 떨려서 두 번 만에 올라갔다⁠.

“⁠천호⁠, 저를 잡아가십시오⁠. 이 책은 제가 열여섯 살 때부터 지닌 것입니다⁠. 관에 내지 않았습니다⁠. 율에 따르면 곤장 백 대에 귀양 삼 년입니다⁠.⁠”

“⁠현령을 잡아가면 보름에 칼을 잡을 사람이 없다⁠.⁠”

현곡이 책을 품에 넣었다⁠.

“⁠이 책은 내가 보지 못한 것으로 하겠다⁠. 보름 정오에 현령이 칼을 잡으면 그렇게 된다⁠. 칼을 잡지 않으면 이 책은 북경으로 간다⁠. 현령과 현령의 스승이 같은 수레를 탄다⁠.⁠”

도각은 오래 서 있었다⁠. 서재 창으로 관아 마당이 보였다⁠. 아이들이 할머니 손을 잡고 앉아 있던 섬돌이 보였다⁠. 수결하던 붓이 놓였던 자리가 보였다⁠.

“⁠칼을 잡겠습니다⁠.⁠”

현곡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옥졸이 뒤따라 나가다가 문간에서 도각을 돌아보았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하는 입 모양이었다⁠.

*

이날 밤 도각은 삿갓을 쓰지 않고 객잔에 왔다⁠. 관복을 입은 채였다⁠. 숨기지 않고 걸어온 현령을 객잔 주인이 보고 놀라 국자를 떨어뜨렸다⁠.

“⁠오늘은 왔다고 해도 되오⁠.⁠”

도각이 우물가 철운 곁에 앉았다⁠. 관복 소매에서 볶은 쌀 대신 술병 하나를 꺼냈다⁠. 철운은 손을 저었다⁠. 도각은 혼자 한 모금 마셨다⁠. 마시자마자 위를 움켜쥐었다⁠.

“⁠천호가 내 책을 찾았소⁠. 열여섯 살 때부터 마루 밑에 두었던 책이오⁠.⁠”

“⁠어찌 되었소⁠?⁠”

“⁠보름에 칼을 잡으면 못 본 것으로 하겠다 하오⁠. 칼을 잡겠다고 했소⁠.⁠”

철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각이 술병을 우물가에 내려놓았다⁠.

“⁠잡겠다고 했지 휘두르겠다고는 안 했소⁠. 칼을 잡고⁠, 훈장 앞에 서고⁠, 내려놓겠소⁠. 강남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내 스승이 써 준 말대로⁠, 베틀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관원이 한 번은 되어 보겠소⁠.⁠”

“⁠그러면 나리 목이오⁠.⁠”

“⁠내 목은 짧아서 베기 힘들 거요⁠. 망나니가 고생 좀 하겠지⁠.⁠”

도각이 제 목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철운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도각도 따라 웃다가 위가 아파 허리를 굽혔다⁠. 두 늙은이가 우물가에서 허리를 굽히고 웃었다⁠. 객잔 주인이 국자를 주우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나리⁠, 내가 무얼 하면 되오⁠?⁠”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칼을 들지 마시오⁠. 당신이 칼을 들면 내가 내려놓는 칼이 하찮아지오⁠.⁠”

“⁠손주는 데리러 가야 하오⁠.⁠”

“⁠그건 칼이 아니라 할아버지 일이지⁠.⁠”

도각이 일어나 관복 자락을 털었다⁠. 애체를 고쳐 쓰다가 금 간 알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보름이 지나면 이 애체도 바꿔야겠소⁠. 살아 있으면⁠.⁠”

*

역관 마당에서 소석이 목검을 쥐고 있었다⁠. 아이 키만 한 나무칼이었다⁠. 현곡이 아침마다 반 시진씩 가르쳤다⁠. 오늘이 사흘째였다⁠.

“⁠칼은 손바닥으로 쥐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쥐는 것이다⁠. 다시⁠.⁠”

소석이 목검을 다시 쥐었다⁠. 손바닥에 물집이 둘 잡혀 있었다⁠. 두부 누름판을 누르던 손바닥이었다⁠. 물집이 터지자 소석이 목검을 떨어뜨렸다⁠. 울지는 않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주워라⁠.⁠”

“⁠아저씨⁠, 손바닥이 아파요⁠.⁠”

“⁠위지 집안 아이는 칼부터 배운다⁠. 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나도 그랬다⁠.⁠”

“⁠우리 할아버지는 두부부터 배웠대요⁠.⁠”

현곡의 얼굴이 굳었다⁠. 채향이 대청에서 뛰어 내려왔다⁠. 소석의 손을 펴 보고⁠, 물집 터진 자리를 소매로 감쌌다⁠.

“⁠천호 나리⁠, 여덟 살이에요⁠.⁠”

“⁠나는 여덟 살에 집을 잃었소⁠.⁠”

“⁠그러니까요⁠. 나리가 여덟 살에 잃은 걸 왜 이 애한테 갚으세요⁠?⁠”

현곡이 채향을 보았다⁠. 직방에서 감독에게도 대들지 않던 직녀가 금의위 천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현곡은 대답하지 않고 목검을 주워 시렁에 걸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

역관 담 밖 골목에 낯선 사내들이 오갔다⁠.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다니며 역관 담장 높이를 눈으로 쟀다⁠.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날이 따뜻한데 장갑이었다⁠. 젊은이 셋이 장갑 낀 사내들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다 객잔으로 돌아왔다⁠.

“⁠대협⁠, 흑장입니다⁠. 장갑 벗는 걸 봤습니다⁠. 손바닥이 숯이에요⁠.⁠”

키다리가 손바닥을 펴 보이며 몸서리를 쳤다⁠. 뚱보가 말을 이었다⁠.

“⁠역관 뒷문 쪽 골목에 제일 많습니다⁠. 보름 전에 무슨 일을 꾸미는 게 틀림없습니다⁠.⁠”

“⁠금의위는 모르오⁠?⁠”

서생이 부채를 접었다⁠.

“⁠금의위는 강호 칼잡이들 칼 거두느라 바쁩니다⁠. 장갑 낀 사내들은 칼을 안 찼으니까 아무도 안 봅니다⁠. 칼 없는 자객이 제일 무섭다고 사부님이 그러셨습니다⁠.⁠”

“⁠너도 사부님이 있었소⁠?⁠”

“⁠없습니다⁠. 책에서 읽었습니다⁠.⁠”

철운은 오른손을 펴 보았다⁠. 엄지 아래 흉터가 다시 따뜻해지고 있었다⁠.

*

사흘째 밤 채향은 별채 문 앞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현곡과 승로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틈으로 등불이 새어 나왔다⁠.

“⁠보름이 지나면 소석이는 먼저 북경으로 간다⁠. 내 부하 둘이 데려간다⁠. 국자감에 넣을 채비를 해 두었다⁠.⁠”

“⁠채향이랑 같이 가는 거죠⁠?⁠”

“⁠어미가 따라가면 아이가 크지 않는다⁠. 너와 제수씨는 강북으로 가서 사당과 땅을 정리해라⁠. 한두 해 뒤에 북경에서 만나면 된다⁠.⁠”

승로가 말이 없었다⁠. 현곡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름에 현묘관 마당에서 칼을 바친 강호 칼잡이들은 성 밖 군영으로 보낸다⁠. 군영에서 북쪽 변방으로 간다⁠. 왜구가 아니라 몽골을 막으러⁠. 훈장은 예정대로 벤다⁠. 독고철운은 칼을 바치고 무릎을 꿇으면 북경으로 데려간다⁠. 바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잡는다⁠. 어느 쪽이든 강남의 칼은 그날로 끝난다⁠.⁠”

“⁠형⁠, 훈장은 귀양이라고 했잖아요⁠. 아버지가⁠…⁠… 그 사람이 거래했다고⁠.⁠”

“⁠수레에 오르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이다⁠.⁠”

채향은 문 앞에서 물러났다⁠. 발소리를 죽이고 안채로 돌아왔다⁠. 소석이 잠들어 있었다⁠. 물집 터진 손바닥을 이불 밖에 내놓고 있었다⁠. 채향은 아들의 손바닥에 입김을 불었다⁠. 자면서도 소석이 손가락을 오므렸다⁠.

채향은 아들 곁에 앉아 자기 손바닥을 펴 보았다⁠. 실 자국이 손금처럼 겹친 손바닥이었다⁠. 국자감에 가면 이 아이의 손바닥에는 실 자국이 안 든다⁠. 대신 엄마 손을 모르고 클 것이다⁠. 한두 해로 끝난다는 말을 채향은 믿지 않았다⁠. 금의위의 한두 해는 직방 감독의 사흘과 같았다⁠. 늘 더 늘어났다⁠.

채향은 보따리에서 엿 단지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한 조각을 꺼냈다⁠. 자는 아들 입에 넣어 줄까 하다가 자기 입에 넣었다⁠. 달았다⁠. 시아버지가 서른 해 동안 몰래 주던 맛이었다⁠.

*

이튿날 승로가 채향을 찾아왔다⁠. 역관 뒤뜰 우물가였다⁠. 승로는 비단 도포 소매를 걷고 있었다⁠. 버릇이었다⁠. 쪽물 독 앞에서 걷던 소매를 비단옷에서도 걷었다⁠.

“⁠어젯밤 들었지⁠?⁠”

“⁠들었어⁠.⁠”

“⁠형 말이 다 틀린 건 아니야⁠. 소석이가 국자감에 가면⁠…⁠…⁠.⁠”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어⁠?⁠”

승로가 채향을 보았다⁠. 아내에게서 그런 물음을 받은 것이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현령에게 같은 말을 물었다는 것을 승로는 몰랐다⁠.

“⁠모르겠어⁠. 형은 형인데⁠,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닌데⁠, 소석이는 내 아들인데⁠, 하나도 모르겠어⁠.⁠”

“⁠나는 알아⁠.⁠”

채향이 소매를 걷었다⁠. 승로처럼⁠.

“⁠나는 소석이 엄마야⁠. 그거 하나는 알아⁠.⁠”

*

곽 노파가 역관 대문 앞에 장아찌 단지를 내려놓은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대문 금의위에게 장아찌를 한 젓가락씩 먹이며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버들나루 장아찌 장수야⁠. 저 안에 우리 마을 소석이 있지⁠? 소석이 엄마한테 이거 전해 줘⁠. 버들나루 짠지는 버들나루 사람이 먹어야 돼⁠. 성안 짠지는 싱거워⁠.⁠”

“⁠노파⁠, 들어가면 안 되오⁠.⁠”

“⁠안 들어가⁠. 나 무릎이 아파서 문턱도 못 넘어⁠. 여기서 불러 줘⁠.⁠”

채향이 대문까지 나왔다⁠. 곽 노파가 단지를 건네며 채향의 손을 쥐었다⁠. 오래 쥐었다⁠. 금의위가 고개를 돌린 사이 채향이 노파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접은 종이였다⁠.

*

해 질 녘 곽 노파가 객잔 마당으로 들어왔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철운은 우물가에서 칼을 닦고 있었다⁠. 쪽빛 천은 풀지 않고 칼날만 닦았다⁠.

“⁠영감⁠, 큰일 났어⁠. 아니⁠, 큰일은 아니고⁠. 아니⁠, 큰일이야⁠.⁠”

“⁠노파⁠, 숨부터 쉬시오⁠.⁠”

“⁠숨 쉴 새가 어딨어⁠. 채향이가 이걸 줬어⁠. 나는 글을 몰라서 못 읽었는데⁠, 오는 길에 사공한테 물어봤더니 사공도 글을 몰라⁠. 사공 마누라한테 물어봤더니 사공 마누라가 읽어 줬는데⁠, 읽고 나서 나한테 짠지 한 단지 값을 내라더라⁠. 비밀 값이래⁠.⁠”

“⁠냈소⁠?⁠”

“⁠냈지⁠. 영감 앞으로 달아 놨어⁠.⁠”

철운이 종이를 받아 팔을 쭉 뻗었다⁠. 며느리 글씨였다⁠. 잔소리 목록을 쓰던 붓글씨가 오늘은 흔들려 있었다⁠.

「⁠하나⁠, 보름 전날 밤 삼경⁠, 역관 뒷문⁠. 둘⁠, 제가 엽니다⁠. 셋⁠, 오세요⁠.⁠」

엿 금지는 없었다⁠. 철운은 종이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열흘 동안 모인 잔소리 종이들이 손끝에 닿았다⁠. 철운은 칼을 칼집에 넣었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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