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70자)

위지

손주 위해 다시 칼을 든 검왕 · 노범우

염방에서 돌아온 밤⁠, 승로는 부엌 문턱에 서서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맷돌 앞에 앉아 있었다⁠. 맷돌은 돌지 않았다⁠.

“⁠제 아버지를 죽이셨어요⁠?⁠”

“⁠그래⁠.⁠”

“⁠겨루자고 한 건 그 사람이었다면서요⁠. 그럼 아버지 잘못은 아니잖아요⁠.⁠”

“⁠겨루자는 글을 받으면 안 가면 된다⁠. 나는 갔다⁠.⁠”

승로가 문설주를 쥐었다⁠. 쪽물 든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왜 저를 키우셨어요⁠?⁠”

철운은 맷돌 손잡이를 보았다⁠. 손바닥 모양으로 패어 있는 나무를 보았다⁠.

“⁠울어서⁠.⁠”

“⁠그게 다예요⁠?⁠”

“⁠포대기 안에서 울었다⁠.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안았다⁠. 안으니까 그쳤다⁠. 내려놓으면 또 울었다⁠. 그래서 계속 안고 왔다⁠. 소주까지⁠.⁠”

승로가 웃었다⁠. 웃음이 우는 소리처럼 났다⁠.

“⁠서른 해를요⁠? 울어서요⁠?⁠”

“⁠서른 해는 금방 갔다⁠. 너는 일곱 살까지 밤에 울었다⁠. 네 어미가 지쳐서 내가 업고 나루를 걸었다⁠. 나루 끝까지 가면 그쳤다⁠.⁠”

“⁠어머니는요⁠? 저를 낳은 어머니는요⁠?⁠”

철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염방에서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승로가 문설주에서 손을 뗐다⁠.

“⁠천호가 그러더라고요⁠.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고⁠.⁠”

“⁠그 밤 일은 다 내 탓이다⁠.⁠”

“⁠그 말 말고요⁠!⁠”

승로가 소리를 질렀다⁠. 안방에서 소석이 잠결에 엄마를 불렀다⁠. 승로는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 오늘 밤 형한테 가요⁠. 형이 오라고 했어요⁠. 형한테 어머니 얘기를 들을 거예요⁠. 아버지가 안 해 주시니까⁠.⁠”

승로가 마당을 나갔다⁠. 철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문 밖에서 금의위의 등불 하나가 승로를 맞았다⁠. 봉쇄된 마을이었지만 천호의 아우에게는 길이 열렸다⁠.

*

역관 별채에 등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현곡은 탁자 위에 술 두 잔을 따라 놓고 기다렸다⁠. 승로가 들어오자 현곡이 일어났다⁠. 형이 아우를 맞는 것이 서른 해 늦었다⁠.

“⁠앉아라⁠.⁠”

승로는 앉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형을 보았다⁠.

“⁠어머니 얘기를 해 주세요⁠.⁠”

현곡이 술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수를 잘 놓으셨다⁠. 겨울이면 사랑채 창가에 앉아 포대기에 수를 놓으셨다⁠. 구름 무늬였다⁠. 은자물쇠의 구름도 어머니가 그려 준 본으로 은장이가 새겼다⁠. 노래를 하실 때는 꼭 끝 소절을 두 번 부르셨다⁠. 너는 그 소절을 들어야 잠이 들었다⁠.⁠”

승로가 문설주에 기댔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너는 어머니를 닮았다⁠. 눈이 그렇다⁠.⁠”

“⁠그 사람이 불을 질렀어요⁠?⁠”

“⁠내가 본 것은 불길 속에서 나오는 그 사람이다⁠. 피 묻은 칼과 너를 안고⁠. 어머니는 나오지 않았다⁠.⁠”

“⁠형은 왜 그 사람을 안 베었어요⁠? 오늘 염방에서요⁠.⁠”

현곡이 손을 펴서 탁자 위에 올렸다⁠. 손바닥에 칼 굳은살이 두껍게 박혀 있었다⁠. 승로도 손을 폈다⁠. 손바닥이 파랬다⁠.

“⁠칼로 베면 나는 아버지가 되고 그 사람은 강호가 된다⁠. 나는 법으로 할 거다⁠. 법은 모두가 보는 데서 한다⁠.⁠”

현곡이 술잔 하나를 승로 쪽으로 밀었다⁠. 승로는 잔을 받았다⁠. 마시지 않았다⁠. 잔 속에 등불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른 해 동안 두부집에 술병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승로는 술병이 없던 까닭도 오늘 처음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명절에도 제사에도 술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손이 떨리면 안 된다고 했다⁠. 두부 장수 손이 떨릴 일이 무엇인지 승로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

채향은 안방 문 뒤에서 다 들었다⁠. 승로가 나간 뒤에 부엌으로 나왔다⁠. 머리를 풀어 헤친 채였다⁠.

“⁠아버님⁠.⁠”

“⁠들었냐⁠?⁠”

“⁠다 들었어요⁠. 근데 하나만 여쭤볼게요⁠.⁠”

채향이 시아버지 앞에 앉았다⁠.

“⁠소석이는 누구 손주예요⁠?⁠”

철운이 며느리를 보았다⁠. 채향의 눈이 붉었다⁠.

“⁠제가 엿 주지 말라고 하면 몰래 엿 준 사람이 아버님이잖아요⁠. 서당 데려다준 사람도⁠, 신발 끈 두 번 매 준 사람도⁠, 배에서 꺼내 온 사람도 아버님이잖아요⁠. 그럼 아버님 손주죠⁠?⁠”

“⁠내 손주다⁠.⁠”

“⁠그럼 됐어요⁠.⁠”

채향이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아니⁠, 안 됐어요⁠. 그런데도 아범은 형한테 갔잖아요⁠. 아범 피가 위지면 소석이 피도 위지잖아요⁠. 그 집이 강북에서 이름 있는 집이었다면서요⁠.⁠”

채향이 손바닥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실 자국이 겹쳐 있었다⁠.

*

이튿날 아침 금의위 하나가 두부집에 왔다⁠. 천호가 채향과 소석을 성안 역관으로 청한다고 했다⁠. 봉쇄는 이 집 식구에게만 풀렸다⁠.

채향은 가겠다고 했다⁠. 철운은 말리지 않았다⁠. 소석에게 은자물쇠를 다시 걸어 주었다⁠. 소석이 할아버지 소매를 잡았다⁠.

“⁠할아버지도 가요⁠.⁠”

“⁠할아버지는 콩을 불려야 한다⁠.⁠”

“⁠콩은 키다리 형이 불려요⁠.⁠”

키다리가 맷돌 옆에서 손을 들었다⁠. 철운이 노려보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

역관은 성안 운하 옆의 큰 집이었다⁠. 기와가 두 겹이고 대문 앞에 금의위 넷이 서 있었다⁠. 채향은 소석의 손을 잡고 대문을 지났다⁠. 마당에 모란이 피어 있었다⁠. 직방 감독의 집에도 이런 모란은 없었다⁠.

대청에 승로가 있었다⁠.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짙은 남색 비단 도포였다⁠. 손은 그대로 파랬다⁠. 승로는 채향을 보고 눈을 피했다⁠.

현곡이 대청에서 내려와 소석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금의위 천호가 아이 눈높이로 몸을 낮추는 것을 금의위들이 처음 보는 얼굴로 보았다⁠.

“⁠네 이름이 소석이냐⁠?⁠”

“⁠네⁠. 작은 돌이요⁠. 할아버지가 맷돌 보고 지었어요⁠.⁠”

현곡의 입가가 굳었다가 풀렸다⁠. 현곡은 일어나 채향에게 자리를 권했다⁠. 차가 나왔다⁠. 채향이 한 번도 마셔 보지 못한 차였다⁠. 향이 혀끝에 오래 남았다⁠.

“⁠제수씨⁠.⁠”

채향은 제수씨가 자기를 부르는 말인 줄 한참 뒤에 알았다⁠.

“⁠위지 집안은 강북 회수 가의 집안이었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불탄 뒤에 땅은 친척들 손에 넘어갔지만⁠, 아직 조상 사당이 남아 있소⁠. 아우가 위지의 이름을 다시 쓰면 땅을 되찾을 수 있소⁠. 나는 금의위 천호요⁠. 아우를 금의위 문서 일에 앉힐 수 있소⁠. 염방에서 쪽물을 젓지 않아도 되오⁠.⁠”

현곡이 소석을 보았다⁠.

“⁠그리고 이 아이는 북경으로 데려가 공부를 시키겠소⁠. 북경 국자감에는 관원 집안 아이가 들어가는 길이 있소⁠. 『⁠기저음⁠』을 옮겨 쓴 습자지는 내가 태우겠소⁠. 금서를 쓴 아이가 아니라 위지 집안의 손자로 북경에 가는 거요⁠.⁠”

채향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 찻잔 받침이 달그락거렸다⁠. 국자감이라는 말을 채향은 서당 훈장에게 딱 한 번 들었다⁠. 나라에서 제일 높은 학교라고 했다⁠. 거기 들어가면 베틀 앞에 앉을 일도⁠, 쪽물 독 앞에 설 일도 없다고 했다⁠.

채향은 소석의 손바닥을 보았다⁠. 사흘 동안 두부를 눌러 손바닥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이 손바닥에 실 자국도 쪽물도 들지 않는 날이 오는가⁠.

“⁠아이 할아버지는요⁠?⁠”

현곡의 얼굴이 닫혔다⁠.

“⁠그 사람은 아이 할아버지가 아니오⁠.⁠”

소석이 차과자를 입에 문 채 현곡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할아버지 두부 드셨어요⁠?⁠”

“⁠먹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안 착해졌구나⁠.⁠”

금의위 하나가 문가에서 기침을 했다⁠. 현곡이 돌아보자 금의위가 천장을 보았다⁠. 채향은 아들 입을 막으려다 그만두었다⁠. 현곡은 아이를 오래 내려다보다가⁠, 처음으로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은 금방 걷혔다⁠.

“⁠두부는 다음에 먹겠다⁠.⁠”

“⁠할아버지가 누른 거 말고 제가 누른 거 드세요⁠. 제 거는 모서리가 반듯해요⁠.⁠”

*

해 질 녘 채향은 두부집으로 돌아왔다⁠. 소석은 역관에 두고 왔다⁠. 아빠 곁에서 하룻밤 자 보라고 했다⁠. 채향은 혼자 보따리를 싸러 왔다⁠.

철운은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젊은이 셋은 부엌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채향이 시아버지 앞에 멈췄다⁠.

“⁠아버님⁠, 여쭤볼게요⁠. 화내지 마시고 들으세요⁠.⁠”

“⁠말해라⁠.⁠”

“⁠아버님은 소석이한테 두부 말고 뭘 줄 수 있어요⁠?⁠”

철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화가 나면 존댓말이 더 깍듯해지는 며느리였다⁠.

“⁠천호는 국자감을 주겠대요⁠. 땅을 주겠대요⁠. 이름을 주겠대요⁠. 소석이 손바닥에 실 자국도 쪽물도 안 들게 해 주겠대요⁠. 아버님은요⁠? 아버님은 칼 묻어 놓고 서른 해 동안 거짓말만 주셨잖아요⁠. 아범한테도⁠, 저한테도⁠.⁠”

“⁠두부밖에 없다⁠.⁠”

“⁠그러니까요⁠.⁠”

채향이 울었다⁠.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울면서 보따리를 쌌다⁠. 소석의 옷과 습자 책과 엿 단지까지 쌌다⁠. 엿 단지를 들고 잠깐 망설이다가 보따리에 넣었다⁠.

“⁠엿은 왜 넣냐⁠?⁠”

“⁠북경엔 엿이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철운은 부엌에 들어가 두부 두 모를 젖은 베에 싸서 나왔다⁠. 보따리 위에 얹었다⁠.

“⁠소석이가 누른 거다⁠. 모서리가 반듯하다⁠. 역관 사람들한테 자랑하라고 해라⁠.⁠”

채향이 두부를 내려다보았다⁠. 보따리를 들고 대문을 나갔다⁠. 대문 앞에서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못 갈 사람의 걸음이었다⁠.

*

이튿날 아침 현묘관 담벼락과 버들나루 나루 계단에 같은 방이 붙었다⁠. 곽 노파가 방을 떼어 들고 두부집으로 달려왔다⁠. 노파는 글을 몰랐다⁠. 서생이 받아 읽었다⁠.

「⁠사월 보름 정오⁠, 현묘관 앞 마당에서 요서 『⁠기저음⁠』의 판목과 책을 모두 불태운다⁠. 요서를 가르친 훈장 육계담을 강남 사람들 앞에서 베어 본보기로 삼는다⁠. 강남의 무예 있는 자는 칼을 바치고 이름을 올린다⁠. 천하제일검 독고철운은 스스로 와서 칼을 바치고 무릎을 꿇으라⁠. 오지 않으면 버들나루를 요서 무리의 소굴로 다스린다⁠.⁠」

방 끝에 한 줄이 더 있었다⁠. 「⁠본보기의 집행은 소주 현령 사마도각이 맡는다⁠.⁠」

서생이 다 읽고 나서 부채를 접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곽 노파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훈장을 벤다고⁠? 귀양 보낸다며⁠. 거래했다며⁠.⁠”

“⁠수레가 안 왔으니 거래도 없어진 거요⁠.⁠”

철운이 말했다⁠. 수레를 안 탄 것은 철운이었다⁠. 철운이 거래를 깨지 않았다면 현곡이 깼을 것이다⁠. 누가 먼저 깼든 훈장의 목은 보름 정오에 마당에 놓였다⁠.

우물가 할멈들이 두부집 담 밑에 모여들었다⁠.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할멈 하나가 서당 대문에 엇갈려 붙은 봉인 종이가 바람에 반쯤 떨어졌다고 했다⁠. 다른 할멈이 봉인 종이를 누가 다시 붙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곽 노파가 장아찌 단지를 담 위에 올려놓았다⁠.

“⁠영감⁠, 이거 먹고 기운 내⁠. 열흘 동안 짠 거 먹고 버텨⁠.⁠”

“⁠노파⁠, 열흘 동안 장아찌만 먹으면 내가 먼저 죽소⁠.⁠”

“⁠그럼 두부랑 같이 먹어⁠. 두부랑 장아찌는 원래 짝이야⁠. 영감이랑 나처럼⁠.⁠”

“⁠노파와 내가 언제 짝이었소⁠?⁠”

“⁠서른 해 동안 영감 두부에 내 장아찌 올려 먹은 집이 몇 집인데⁠.⁠”

할멈들이 그제야 조금 웃었다⁠. 철운도 웃었다⁠. 웃고 나니 두부집이 너무 조용했다⁠. 손주가 콩을 눌러 보던 소리⁠, 며느리가 잔소리하던 소리⁠, 아들이 새벽에 문고리를 잡던 소리가 모두 빠져 있었다⁠.

키다리가 맷돌 옆에서 일어났다⁠.

“⁠대협⁠, 보름까지 열흘입니다⁠. 칼을 바치러 가십니까⁠?⁠”

철운은 맷돌 위짝에 오른손바닥을 얹었다⁠. 한 바퀴 돌렸다⁠. 손주가 아침마다 콩을 눌러 보던 독이 비어 있었다⁠.

“⁠칼을 바치러 가지 않소⁠.⁠”

철운이 손을 떼고 앞치마를 풀었다⁠.

“⁠손주를 데리러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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