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21자)

피고인석 두 자리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2월 10일 목요일 오후 한 시 오십오 분⁠, 304호 법정 피고인석에 의자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 법원 직원이 옆 법정에서 끌어온 의자라 등받이 색이 달랐다⁠. 원래 의자는 짙은 갈색⁠, 끌어온 의자는 회색이었다⁠. 지혜가 나를 오른쪽 끝 갈색 의자에 앉혔다⁠. 왼쪽 끝 회색 의자는 비어 있었다⁠. 사이에 지혜 자리와 빈 의자 두 개⁠. 나는 바닥 나무판을 세었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나무판이 스물두 장이었다⁠. 한 장에 십사 센티쯤이니까 삼 미터 남짓이었다⁠.

딱⁠, 따각⁠. 김도훈이 방청석 통로를 지나 왼쪽 끝 회색 의자에 앉았다⁠. 남색 정장⁠, 짧은 검은 머리⁠, 검은 가죽 서류 가방⁠. 가방에서 클리어 파일 다섯 개를 꺼내 책상에 나란히 놓았다⁠. 파일마다 손글씨 견출지가 붙어 있었다⁠. 「⁠공소사실⁠」 「⁠증거 의견⁠」 「⁠정당한 이유⁠」 「⁠질문⁠」 「⁠최후⁠」⁠. 마지막 견출지를 보고 나는 눈을 돌렸다⁠.

방청석 맨 앞줄에 영희 사장님과 은비가 앉았고⁠, 둘째 줄 끝에 박수진 작가가 혼자 앉아 있었다⁠. 작가님은 검은 롱패딩을 무릎에 덮고 휴대전화도 꺼내지 않았다⁠. 셋째 줄에는 처음 보는 정장 차림 남녀 셋이 앉아 있었다⁠. 초록색 사원증 줄을 목에서 빼서 손에 쥐고 있었다⁠. 솔빛물산 사람들이었다⁠.

조민석 판사가 들어왔다⁠. 모두 일어났다가 앉았다⁠. 판사는 기록 두 묶음을 법대 위에 나란히 놓고 안경을 코끝에 걸었다⁠.

“⁠두 사건을 병합했습니다⁠. 오늘 이 법정에서는 피고인 두 사람이 서로의 피해자입니다⁠. 제일 헷갈리는 사람은 속기사일 테니 다들 말씀하실 때 누구 사건에서 하는 말인지 분명히 해 주세요⁠.⁠”

속기사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판사는 웃지 않았다⁠.

“⁠피고인 김도훈⁠. 공소장 부본을 어제 받았지요⁠. 첫 기일까지 닷새 유예 기간이 있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없습니다⁠. 같이 보고 싶습니다⁠.⁠”

“⁠변호인은 선임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법정에서 피고인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건 됩니다⁠. 다만 피고인이 하는 말은 피고인 진술이지 변론이 아니라는 걸 알고 하세요⁠.⁠”

“⁠알고 있습니다⁠.⁠”

*

공소청 검사가 김도훈 사건 공소장을 읽었다⁠. 2026년 4월 9일부터 10월 23일까지 예순한 차례⁠. 피해자 주거지 앞 골목에서 피해자의 창을 지켜보고⁠, 10월 13일 피해자 주거지 공동현관 앞에 빨래방 영수증을 두고⁠, 10월 23일 잠정조치 결정문을 들고 주거지 앞에서 기다렸다⁠. 검사의 목소리가 내 스케치북 날짜를 하나씩 불렀다⁠. 판사가 김도훈을 보았다⁠.

“⁠피고인 김도훈⁠, 공소사실에 대해 의견 말씀하세요⁠.⁠”

김도훈이 일어났다⁠. 첫 번째 클리어 파일을 펴지 않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먼저 제가 겪은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25년 가을⁠, 저는 아침마다 3층 창에서 사람 하나가 저를 보는 것을 알았습니다⁠. 11월 20일에는 그 사람이 역까지 따라와 제 발을 그렸습니다⁠. 1월에 저는 웹툰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3월에 모르는 사람 셋이 골목에서 제 출근길을 기다렸다가 찍고 지하철까지 따라왔습니다⁠. 저는 상수역에서 내렸습니다⁠. 열차가 떠날 때까지 승강장에 서 있었습니다⁠. 회사 게시판에 제 얼굴이 실물 박제라는 제목으로 올라왔습니다⁠.⁠”

방청석 셋째 줄의 솔빛물산 사람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김도훈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4월 9일 밤⁠, 저는 웹툰 아침 컷을 휴대전화에 띄우고 골목에 갔습니다⁠. 감나무 담장⁠, 전봇대⁠, 빨래방 간판⁠. 컷이 내려다보는 높이가 3층이었습니다⁠. 길 건너 원룸 건물에서 3층 창은 셋이었고⁠, 컷의 각도에 맞는 창은 하나였습니다⁠. 저를 그리는 사람이 그 창 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요⁠?⁠”

“⁠4월 20일에 확인했습니다⁠. 이름과 작업실을 알았습니다⁠. 소장 초안을 썼습니다⁠. 그다음에도 빨래방에 갔습니다⁠. 건조기가 도는 동안 밖에서 창을 보았습니다⁠. 그림이 계속 그려지는지 보았습니다⁠. 제 초상이 허락 없이 쓰이고 있다는 증거를 모았습니다⁠. 공소사실에 적힌 날짜에 제가 그 골목에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다만 저는 소송을 준비하면서 증거를 모았습니다⁠. 그건 정당한 이유입니다⁠. 윤예원 씨가 저를 따라온 이유와 같습니다⁠.⁠”

법정이 조용했다⁠. 지혜가 볼펜 끝으로 메모지를 두 번 두드렸다⁠. 나는 김도훈의 옆얼굴을 보았다⁠. 피고인석 끝과 끝⁠, 삼 미터⁠. 김도훈의 말은 내 말이었다⁠. 증거를 모으려고⁠. 경찰이 증거가 없다고 해서⁠. 내가 조사실에서 한 말이 김도훈의 입에서 반듯하게 다듬어져 돌아왔다⁠.

판사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피고인 김도훈⁠. 두 피고인이 모두 증거를 모으려고 서로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럼 이 법정에는 증거를 모은 사람만 둘 있고 따라간 사람은 없는 겁니까⁠?⁠”

“⁠그건 재판장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압니다⁠. 물어본 겁니다⁠.⁠”

*

검사가 증거를 화면에 띄웠다⁠. 실물화상기 위에 회색 스케치북 둘째 권이 펼쳐졌다⁠. 법정 벽 대형 화면에 4월 9일 장이 떴다⁠. 가로등⁠, 검은 패딩⁠, 모자⁠, 고개를 젖힌 남자⁠, 운동화⁠. 연필로 까맣게 칠한 모자 그늘⁠. 「⁠4/9 01⁠:10 가로등 밑 남자⁠. 40분⁠. 운동화⁠. 오른발 바깥으로⁠」⁠. 내 글씨가 화면에서 사람 키만 하게 커졌다⁠.

방청석에서 영희 사장님이 작게 「⁠아이고⁠」 했다⁠. 검사가 장을 넘겼다⁠. 4월 16일⁠. 4월 20일⁠. 「⁠오늘도 위⁠. 오른발 바깥으로⁠」⁠. 5월 14일⁠. 「⁠01⁠:10⁠~01⁠:50 비⁠. 우산 없음⁠」⁠. 검사는 날짜마다 빨래방 결제 시각을 함께 읽었다⁠. 4월 20일 23시 08분 결제⁠, 건조 40분⁠. 5월 14일 01시 06분 결제⁠, 건조 40분⁠.

그리고 검사는 첫 권을 올렸다⁠. 2025년 10월 14일 08시 12분⁠. 남색 정장의 오른발⁠. 화면 속 내 글씨가 「⁠오늘 일 분 늦음⁠」이라고 말했다⁠. 11월 20일 장이 떴다⁠. 「⁠역까지 따라와 봄⁠. 오른쪽 굽 소리 두 번⁠. 딱⁠, 따각⁠」⁠. 방청석 둘째 줄에서 박수진 작가가 롱패딩을 끌어당겨 얼굴 아래까지 덮었다⁠.

판사가 나를 보았다⁠.

“⁠피고인 윤예원에 대한 변론을 잠시 분리합니다⁠. 피고인 윤예원을 김도훈 사건의 증인으로 신문하겠습니다⁠. 증인은 자기에게 불리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증인으로 서는 동안 한 말은 증인의 사건에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나는 피고인석에서 일어나 진술석으로 갔다⁠. 열 걸음이었다⁠. 김도훈 앞을 지나가지 않으려고 피고인석 뒤로 돌아서 갔다⁠. 진술석 의자는 다리가 멀쩡했다⁠. 딸깍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선서문을 읽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숨김과 보탬이 없이⁠. 열두 살 때 국어 시간에 배운 말 같았다⁠.

*

검사가 먼저 물었다⁠. 4월 9일⁠, 4월 20일⁠, 5월 14일⁠, 6월 18일 112⁠. 나는 날짜마다 밤에 블라인드 날개 사이로 본 것을 말했다⁠. 검사가 신문을 마치자 판사가 김도훈을 보았다⁠.

“⁠피고인 김도훈⁠, 반대신문하세요⁠.⁠”

김도훈이 일어났다⁠. 네 번째 클리어 파일⁠, 「⁠질문⁠」을 폈다⁠. 피고인석 왼쪽 끝에서 진술석까지 김도훈의 목소리가 직선으로 왔다⁠. 나는 김도훈의 얼굴을 보았다⁠. 여덟 달 동안 블라인드 틈으로⁠, 석 달 동안 등 뒤에서⁠, 두 달 동안 조사실과 법정에서 옆으로만 본 얼굴이 정면에 있었다⁠.

“⁠증인은 2025년 9월부터 11월까지 아침마다 창에서 저를 그렸습니까⁠?⁠”

“⁠네⁠.⁠”

“⁠증인은 그 그림을 웹툰에 마흔한 번 넣었습니까⁠?⁠”

“⁠네⁠.⁠”

“⁠증인은 4월부터 9월까지 가로등 밑 남자를 그리면서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모자 그늘이었어요⁠.⁠”

“⁠그럼 그 남자가 저라는 건 어떻게 압니까⁠?⁠”

“⁠발이요⁠. 오른발이 바깥으로 십오 도 벌어져 있었어요⁠.⁠”

김도훈이 클리어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11월 9일 여의도 광장⁠, 내가 한 말을 받아 적은 메모였다⁠. 「⁠나는 그 역에서 사람 발을 수백 개 그렸어요⁠」⁠.

“⁠증인은 11월 9일에 망원역에서 사람 발을 수백 개 그렸다고 말했습니다⁠. 오른발이 바깥으로 벌어진 남자는 망원동에 수백 명입니다⁠. 얼굴 없는 그림 속 발 하나로 그 남자가 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방청석이 조용했다⁠. 지혜가 일어나려다 말았다⁠. 반대신문에 이의를 걸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진술석 책상 모서리를 손날로 눌렀다⁠. 연필 자국이 책상 니스 위에 회색으로 묻었다⁠.

“⁠수백 명 중에 우리 집 창을 보는 사람은 한 명이었어요⁠.⁠”

“⁠증인의 창을 본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근거는요⁠?⁠”

“⁠결제 기록이요⁠. 그림 날짜랑 시각이 다 맞잖아요⁠.⁠”

“⁠빨래방 결제는 제가 빨래방 안에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가로등 밑에서 위를 보던 남자가 저라는 기록은 아닙니다⁠. 빨래방 안에서 건조기를 기다리던 다른 손님이 밖에 나와 서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새벽 한 시에요⁠?⁠”

“⁠빨래방은 스물네 시간 엽니다⁠.⁠”

“⁠빨래는 밤에 마른다고 하셨죠⁠.⁠”

김도훈이 처음으로 다음 질문을 바로 하지 않았다⁠. 「⁠질문⁠」 파일의 종이를 한 장 넘겼다가 도로 넘겼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증인은 제가 무서웠습니까⁠?⁠”

“⁠네⁠.⁠”

“⁠저도 무서웠습니다⁠. 증인보다 다섯 달 먼저⁠. 이상입니다⁠.⁠”

김도훈은 앉았다⁠. 판사가 메모를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피고인 김도훈⁠. 마지막 말은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신문은 질문으로만 하세요⁠. 다음부터는 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판사가 나를 보았다⁠.

“⁠증인에게 하나만 묻겠습니다⁠. 4월 9일 가로등 밑 남자가 작년 가을 아침마다 그린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언제 알았습니까⁠?⁠”

“⁠11월 27일 새벽이요⁠. 첫 공판 다음 날이요⁠. 아침 그림이랑 밤 그림을 라이트 패드에 겹쳐 봤어요⁠.⁠”

“⁠그 전에는 몰랐습니까⁠?⁠”

“⁠몰랐어요⁠. 밤에는 운동화였어요⁠. 소리가 안 났어요⁠. 아침에는 구두였고요⁠. 저는 사람을 발소리로 알아보는데⁠, 밤에는 소리가 없었어요⁠.⁠”

판사는 대답을 받아 적었다⁠. 피고인석 왼쪽 끝에서 김도훈이 자기 오른발을 내려다보았다⁠. 법정 안에서도 김도훈은 구두였다⁠.

*

나는 진술석에서 내려와 피고인석 뒤로 돌아 오른쪽 끝 갈색 의자로 갔다⁠. 판사가 내 변론을 다시 병합했다⁠. 지혜가 일어났다⁠. 재킷 소매를 손목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재판장님⁠, 피고인 윤예원 사건에서 증인을 신청합니다⁠. 피고인이 왜 피해자를 따라갔는지⁠, 따라가기 전 여섯 달 동안 무엇을 겪었는지를 증명하려는 겁니다⁠. 망원시장 영희네 호떡 최영희⁠, 웹툰 작가 박수진⁠, 그리고 뽀송 빨래방 주인 정만수⁠. 그리고 사실조회를 함께 신청합니다⁠. 뽀송 빨래방 카드 단말기 기록 가운데 김도훈 피고인 카드로 결제된 내역 전부를 기기별로 받고 싶습니다⁠. 건조기 결제만이 아니라⁠, 같은 날 세탁기 결제가 있었는지까지요⁠.⁠”

김도훈의 볼펜이 멈췄다⁠. 판사가 김도훈을 보았다⁠.

“⁠피고인 김도훈⁠, 의견 있습니까⁠?⁠”

김도훈은 일어나지 않고 대답했다⁠. 클리어 파일을 덮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없습니다⁠.⁠”

“⁠채택합니다⁠. 다음 기일 12월 17일 오후 두 시⁠. 증인 세 사람 부르겠습니다⁠.⁠”

법정 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피고인석 왼쪽 끝을 한 번 보았다⁠. 김도훈은 아직 앉아 있었다⁠. 다섯 번째 클리어 파일⁠, 「⁠최후⁠」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견출지를 엄지로 문지르고 있었다⁠.

1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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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세시2026.11.02· 12화

    오른발 벌어진 남자는 망원동에 수백 명이라는 도훈 말이 맞는 말이라 더 무서웠어요. 예원이 그린 그림이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 서강림작가2026.11.02

      그 물음을 지혜 변호사가 빨래방 결제 기록으로 받아요. 그림 한 장보다 세탁기에 찍힌 시간이 더 정직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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