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28자)

스케치북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2월 5일 토요일 오후 두 시 십 분⁠, 초인종이 한 번 울렸다⁠. 문 렌즈 속 복도에 박수진 작가가 서 있었다⁠. 검은 롱패딩에 운동화⁠, 두 팔로 수박 한 통을 안고 있었다⁠. 렌즈가 휘어서 수박이 작가님 얼굴보다 크게 보였다⁠. 나는 체인을 풀었다⁠.

“⁠하우스 수박이래⁠. 한 통에 이만팔천 원⁠. 12월에 수박 파는 데 찾느라 망원시장을 두 바퀴 돌았어⁠. 동쪽 입구 호떡집 사장님이 너 원 밖에서 산다고 소리치더라⁠.⁠”

작가님은 신발을 벗고 들어와 방을 한 바퀴 보았다⁠. 내려진 블라인드⁠, 창가 책상의 라이트 패드⁠, 바닥에 쌓인 복사본 백열두 장⁠, 책상 위 회색 스케치북 세 권⁠. 작가님은 수박을 바닥에 내려놓고 스케치북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대지는 않았다⁠.

“⁠이거구나⁠.⁠”

“⁠네⁠.⁠”

“⁠월요일에 툰다락이 결정한대⁠. 계약 해지할지⁠, 수정하고 다시 열지⁠. 담당이 그러더라⁠. 출근남이 실존 인물을 몰래 그린 거라는 게 확인되면 해지라고⁠. 확인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뉴스 보면 안대⁠.⁠”

작가님은 블라인드를 보았다⁠. 블라인드 날개 사이로 들어온 빛이 작가님 얼굴에 가는 줄무늬를 그었다⁠.

“⁠예원아⁠. 내가 대신 증언할게⁠. 5월 14일에 네가 가로등남 진짜 사람이라고 한 거⁠, 그 새벽에 무서워서 마침표도 못 찍은 거⁠, 내가 그걸 보고 댓글 좋으니 계속 넣으라고 한 거⁠. 법정 가서 다 말할게⁠. 내 얼굴 팔고 내 필명 팔게⁠. 단톡 캡처도 있잖아⁠. 은비가 다 갖고 있대⁠. 그러면 스케치북 안 내도 되잖아⁠.⁠”

“⁠작가님 증언은 제가 무서워했다는 증거예요⁠. 그 남자가 김도훈이었다는 증거는 안 돼요⁠. 경찰이 그랬어요⁠. 날짜별로 묶어 줄 게 있어야 한대요⁠.⁠”

“⁠그럼 날짜 있는 장만 내⁠. 올봄부터⁠. 작년 가을은 빼고⁠.⁠”

“⁠일부만 빼면 증거 가치가 떨어진대요⁠. 같은 공책이면 다 본대요⁠.⁠”

작가님은 일어서지 않고 쪼그린 채로 무릎을 안았다⁠. 마감 날 말끝을 자르던 사람이 문장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그럼 출근남이⁠…⁠…⁠.⁠”

“⁠네⁠. 출근남은 제가 창에서 몰래 그린 실제 사람이에요⁠. 아침마다요⁠. 시각까지 적어서요⁠. 그리고 작가님이 매주 넣자고 하셨어요⁠.⁠”

“⁠알아⁠.⁠”

“⁠그것도 경찰이 다 봐요⁠.⁠”

작가님은 한참 바닥만 보았다⁠. 수박이 굴러가지 않게 발로 받쳐 두고 있었다⁠.

“⁠너 이거 내면 해고야⁠.⁠”

목소리가 작았다⁠. 협박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음 줄을 읽는 목소리였다⁠.

“⁠제가 해고하는 게 아니고 작업실이 없어지는 거야⁠, 하실 거죠⁠?⁠”

“⁠응⁠. 그 말 하려고 했어⁠.⁠”

“⁠그럼 해고해 주세요⁠. 작업실 없어지는 거 제가 하는 거예요⁠. 작가님 탓 아니에요⁠. 제가 낼 거니까요⁠.⁠”

작가님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오늘부로⁠. 너 3⁠.3 프리랜서라서 퇴직금도 없어⁠. 미안해⁠. 이번 달 치는 날짜 계산해서 보낼게⁠.⁠”

“⁠네⁠.⁠”

“⁠수박은 두고 갈게⁠.⁠”

작가님은 일어나서 현관으로 갔다⁠. 운동화를 신다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필명이 수박씨인데 수박 들고 해고하러 왔네⁠. 은비가 알면 단톡에 올리겠다⁠.⁠”

현관문이 닫혔다⁠. 나는 렌즈로 복도를 보았다⁠. 작가님은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에 복도 끝 창문 앞에서 한 번 멈췄다⁠. 창밖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로등이 보이는 창이었다⁠. 작가님은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았다⁠. 그냥 보기만 하다가 계단으로 내려갔다⁠.

나는 수박을 부엌 바닥에 두고 칼을 찾았다⁠. 반으로 가르자 속이 연한 분홍이었다⁠. 겨울 수박은 달지 않았다⁠. 그래도 반 통을 다 먹었다⁠. 씨를 접시에 뱉으면서 셌다⁠. 마흔한 개에서 멈췄다⁠.

*

12월 7일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사 분⁠, 마포경찰서 민원실 번호표 기계 앞을 지나쳐 2층 여성청소년수사팀으로 올라갔다⁠. 황재욱 경위가 계단 앞까지 나와 있었다⁠. 지혜가 뒤에 따라왔다⁠. 내 백팩이 무거워서 어깨끈이 후드를 파고들었다⁠.

조사실 의자는 그대로 다리 하나가 짧았다⁠. 앉자마자 딸깍 소리가 났다⁠. 황 경위가 책상에 임의제출 동의서와 큰 종이봉투를 놓았다⁠. 봉투 앞면에 「⁠증거물⁠」이라는 빨간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10월 8일 민원실의 투명한 지퍼 봉투보다 세 배는 컸다⁠.

나는 백팩에서 회색 스케치북 세 권을 꺼내 책상에 쌓았다⁠. 표지 모서리의 연필 글씨가 위에서부터 보였다⁠. 「⁠2025⁠. 9 ~ 2026⁠. 1⁠」 「⁠2026⁠. 2 ~ 5⁠」 「⁠2026⁠. 6 ~ 9⁠」⁠.

“⁠전부 내시는 거 맞아요⁠? 작년 가을 것까지⁠?⁠”

“⁠네⁠. 일부만 빼면 증거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그렇게 말했죠⁠.⁠”

황 경위가 첫 권을 들어 장을 넘겼다⁠. 10월 14일⁠, 10월 21일⁠, 10월 28일⁠. 「⁠08⁠:13 오늘 일 분 늦음⁠」에서 황 경위의 손가락이 멈췄다가 다시 넘어갔다⁠. 11월 20일 장에서 황 경위는 장을 넘기지 않고 오래 보았다⁠. 「⁠역까지 따라와 봄⁠」⁠. 황 경위는 볼펜으로 자기 수첩에 날짜를 적었다⁠.

“⁠이건 윤예원 씨 사건에도 들어가요⁠. 검사한테도 가요⁠. 알고 내시는 거죠⁠?⁠”

“⁠네⁠.⁠”

“⁠변호인도 동의하시고요⁠?⁠”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고인이 정했어요⁠. 변호인은 말렸고요⁠. 조서에 그렇게 적어 주세요⁠.⁠”

황 경위는 피식 웃지도 않고 정말로 적었다⁠. 동의서 제출 범위 칸에 「⁠회색 스케치북 3권 전부(⁠2025⁠. 9⁠.⁠~2026⁠. 9⁠.⁠)⁠」라고 썼고⁠, 나는 서명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법적으로는 거절하실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황 경위가 스케치북 세 권을 증거물 봉투에 넣고 입구를 접어 테이프로 봉했다⁠. 테이프 위에 내가 한 번⁠, 황 경위가 한 번 서명했다⁠. 봉투가 책상 위에서 두툼했다⁠.

황 경위가 서랍에서 양갱 상자를 꺼냈다⁠. 낱개 하나를 까서 내 앞에 놓았다⁠. 10월 13일과 같은 팥 양갱이었다⁠.

“⁠드세요⁠. 오늘은 드셔도 돼요⁠.⁠”

나는 양갱을 먹었다⁠. 달았다⁠. 10월에 못 먹은 양갱 맛이 어땠을지 처음 알았다⁠. 지혜가 하나 더 집어 가방에 넣었다⁠. 황 경위는 못 본 척했다⁠.

오후 한 시⁠, 골목으로 돌아와서 나는 처음으로 뽀송 빨래방 유리문을 밀었다⁠. 여덟 달 동안 길 건너에서 보기만 한 가게였다⁠. 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세탁기 여섯 대⁠, 건조기 네 대⁠, 벽에 붙은 동전 교환기⁠, 플라스틱 의자 둘⁠. 섬유 유연제 냄새가 진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가 건조기 문을 열고 보풀 필터를 빼서 쓰레기통에 털고 있었다⁠. 회색 조끼 가슴에 「⁠뽀송⁠」이라는 자수가 있었다⁠.

“⁠사장님이세요⁠?⁠”

“⁠네⁠. 무인인데 하루 두 번 와요⁠. 동전 빼고 필터 털고⁠. 빨래하시게요⁠?⁠”

“⁠아니요⁠. 길 건너 302호 살아요⁠.⁠”

사장님이 필터를 든 채 나를 다시 보았다⁠.

“⁠아⁠, 경찰이 말한 그 집⁠. 지난주에 경찰이 와서 카드 단말기 기록 뽑아 갔어요⁠. 3번 건조기만요⁠. 그 정장 양반이 3번만 썼거든⁠. 근데 아가씨⁠, 그 일 때문에 손님들이 밤에 안 와요⁠. 소문이 나서⁠. 매출이 반 토막이야⁠.⁠”

“⁠죄송해요⁠.⁠”

“⁠아가씨가 왜⁠. 그리고 저 가로등 우리 가게 거 아니에요⁠. 구청 거예요⁠. 사람들이 자꾸 우리 가로등이라고 해⁠.⁠”

나는 3번 건조기 앞으로 갔다⁠. 동그란 문 유리에 내 얼굴이 둥글게 비쳤다⁠. 고개를 들자 빨래방 유리문 너머로 길 건너 우리 건물 3층 창이 보였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302호 창이 정면이었다⁠. 1번 건조기 앞에서도⁠, 2번 앞에서도⁠, 4번 앞에서도 내 창은 비스듬했다⁠. 3번 앞에서만 정면이었다⁠. 김도훈은 건조기가 도는 사십 분 동안 사람은 고개를 든다고 했다⁠. 3번 건조기 앞에서 고개를 들면 내 창 말고는 볼 것이 없었다⁠.

*

12월 8일 화요일 오전 열 시⁠, 툰다락 공지가 올라왔다⁠. 「⁠「⁠골목 끝 집⁠」 연재를 종료합니다⁠. 지금까지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공지 밑에는 사유가 없었다⁠. 댓글은 한 시간 만에 만 개를 넘었다⁠. 은비가 단톡방에 캡처를 올리다가 멈췄다⁠.

「⁠은비⁠: 언니 끝났어요⁠」

「⁠은비⁠: 진짜 끝났어요ㅠㅠㅠ⁠」

일 분 뒤 단톡방 맨 아래에 회색 글씨 한 줄이 떴다⁠. 「⁠수박씨님이 예원님을 내보냈습니다⁠.⁠」 단톡방 화면이 닫히고 대화 목록에서 「⁠수박밭⁠」이 사라졌다⁠. 오 분 뒤 은비가 개인 톡을 보냈다⁠. 「⁠언니 저 작가님한테 따졌어요⁠. 작가님이 언니 단톡에 있으면 언니가 계속 볼까 봐 그런 거래요⁠. 끝난 거 보는 거⁠」⁠. 나는 「⁠알아⁠」라고 답하고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같은 날 오후 다섯 시⁠, 지혜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였다⁠. 공소청 검사가 낸 서면이었다⁠. 공소사실 맨 앞에 한 줄이 새로 붙어 있었다⁠.

「⁠피고인은 2025⁠. 11⁠. 20⁠. 08⁠:12경 서울 마포구 망원동 소재 피해자의 주거지 부근 골목에서부터 망원역 승강장까지 피해자를 따라가고⁠, 그 무렵 피고인의 주거지 창문에서 피해자의 출근길을 반복하여 지켜보며⁠」

「⁠창문에서 본 게 스토킹인지는 다툴 거야⁠. 네 집 창문이잖아⁠. 지켜보는 게 범죄가 되려면 피해자 집이나 직장 같은 데 부근이어야 해⁠. 근데 11월 20일 역까지 간 건 다툴 게 없어⁠. 네 글씨잖아⁠.⁠」

지혜 문자는 마침표까지 꼬박꼬박 찍혀 있었다⁠. 나는 「⁠응⁠」이라고 답했다⁠. 마침표를 찍었다⁠.

*

12월 9일 수요일 오후 네 시 이십 분⁠, 지혜가 전화했다⁠. 목소리가 빨랐다⁠.

“⁠김도훈 대리 기소됐어⁠. 오늘 오전⁠. 경찰이 어제 송치했고 공소청이 오늘 바로 공소 제기했어⁠. 스토킹처벌법 위반⁠. 2026년 4월 9일부터 10월 23일까지⁠. 빨래방 결제 날짜랑 네 스케치북 날짜가 맞는 날만 추렸대⁠. 예순한 번⁠. 10월 13일 영수증이랑 10월 23일 출동도 들어갔어⁠.⁠”

“⁠예순한 번⁠.⁠”

“⁠그리고 판사가 두 사건을 병합했어⁠. 조민석 판사⁠. 서로 피해자고 피고인이고⁠, 같은 일을 양쪽에서 본 사건이라서 한 법정에서 같이 보겠대⁠. 기일은 원래 네 기일 그대로⁠. 12월 10일 내일 오후 두 시⁠, 304호⁠.⁠”

“⁠내일⁠? 그 사람은 오늘 공소장 받았잖아⁠.⁠”

“⁠원래는 공소장 받고 닷새는 기다려 줘야 해⁠. 근데 피고인이 이의 없다고 하면 당길 수 있어⁠. 김도훈 대리가 이의 없다고 했대⁠. 같이 보고 싶다고⁠. 변호인도 안 붙인대⁠. 사선도 국선도⁠. 혼자 나온대⁠.⁠”

나는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 날개 하나를 눌렀다⁠. 오후 네 시 이십삼 분⁠, 가로등은 꺼져 있었고 빨래방 3번 건조기는 멈춰 있었다⁠. 골목 바닥에 감나무 잎이 몇 장 굴러다녔다⁠.

“⁠지혜야⁠. 내일 피고인석은 어떻게 앉아⁠?⁠”

“⁠피고인석이 두 자리 필요해⁠. 법원이 의자 하나를 더 갖다 놓는대⁠. 너는 오른쪽 끝⁠, 김도훈 대리는 왼쪽 끝⁠. 사이에 나랑 빈 의자 두 개⁠.⁠”

“⁠사이가 몇 미터야⁠?⁠”

지혜는 잠깐 말이 없었다⁠.

“⁠삼 미터쯤⁠. 법원이 부른 거니까 결정문 위반은 아니야⁠.⁠”

“⁠삼 미터⁠.⁠”

“⁠응⁠. 그리고 예원아⁠. 내일은 일어나지 마⁠. 이번에 일어나면 퇴정이야⁠.⁠”

전화를 끊고 나는 줄자를 꺼냈다⁠. 이사 올 때 산 오 미터짜리 줄자였다⁠. 방바닥에 삼 미터를 끌어 보았다⁠. 현관에서 창가 책상까지가 삼 미터 십 센티였다⁠. 내 방 끝에서 끝까지보다 조금 짧은 거리에 내일 김도훈이 앉는다⁠. 줄자가 철컥 소리를 내며 감겼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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