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10자)

건조기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2월 17일 목요일 오후 한 시 오십 분⁠, 304호 법정 앞 복도 긴 의자에 증인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영희 사장님은 앞치마를 접어서 무릎에 올려놓았다⁠. 법원에 앞치마를 두르고 오려다가 은비가 말렸다고 했다⁠. 박수진 작가는 검은 롱패딩 지퍼를 턱까지 올렸다⁠. 맨 끝에 회색 조끼를 입은 뽀송 빨래방 정만수 사장님이 투명한 비닐봉지 하나를 무릎에 안고 있었다⁠. 봉지 안에 하얀 천이 접혀 있었다⁠.

“⁠사장님⁠, 그거 뭐예요⁠?⁠”

“⁠수건⁠. 보면 알아요⁠.⁠”

보안 검색대 직원이 수건을 펴 보고 냄새를 맡고 돌려주었다고 했다⁠. 섬유 유연제 냄새만 났다고 했다⁠. 복도 반대편 끝 의자에 김도훈이 앉아 있었다⁠. 김도훈은 정만수 사장님의 비닐봉지를 보고 클리어 파일 다섯 개를 다시 정리했다⁠. 순서가 바뀌지 않았는데 두 번 정리했다⁠.

*

첫 증인은 최영희였다⁠. 사장님은 증인 선서를 읽다가 「⁠숨김과 보탬이 없이⁠」에서 멈추고 판사를 보았다⁠.

“⁠판사님⁠, 나는 원래 숨기는 게 없어요⁠.⁠”

“⁠네⁠. 선서는 끝까지 읽으세요⁠.⁠”

사장님은 끝까지 읽었다⁠. 목소리가 법정 끝까지 갔다⁠. 속기사가 볼륨을 줄이는 손짓을 했다가 그만두었다⁠. 지혜가 먼저 물었다⁠.

“⁠증인은 2026년 봄부터 여름 사이 밤에 원룸 건물 앞 가로등 밑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적 있습니까⁠?⁠”

“⁠있지⁠. 열 번은 넘어⁠. 열한 시 반에 장사 접고 골목 끝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검은 패딩에 모자⁠. 위를 보더라⁠. 3층⁠.⁠”

“⁠기억나는 날이 있습니까⁠?⁠”

“⁠5월에 비 오던 밤⁠. 우산도 없이 서 있길래 총각 추운데 들어가라 했어⁠. 그랬더니 빨래 기다린다고⁠. 근데 손에 빨래 가방이 없었어⁠. 빈손이었어⁠. 비닐봉지 하나 없었어⁠.⁠”

“⁠그날 증인이 본 남자가 오늘 이 법정에 있습니까⁠?⁠”

사장님은 피고인석 왼쪽 끝을 똑바로 가리켰다⁠. 손가락이 흔들리지 않았다⁠.

“⁠저 양반⁠. 김 대리⁠. 우리 가게 단골이야⁠. 꿀 호떡 두 개⁠.⁠”

검사가 물었다⁠. 지혜가 다시 물었다⁠. 다음은 김도훈의 반대신문이었다⁠. 김도훈은 일어나서 「⁠질문⁠」 파일을 폈다⁠.

“⁠증인은 비 오던 밤에 본 남자의 얼굴을 봤습니까⁠?⁠”

“⁠모자 써서 반만 봤지⁠.⁠”

“⁠반만 본 얼굴로 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얼굴은 반만 봤어도 걸음은 다 봤어⁠. 나 사십 년을 시장에서 걸음 보고 장사했어⁠. 단골은 멀리서 걸음으로 알아⁠. 저 양반은 오른발을 이렇게 벌리고 걸어⁠.⁠”

사장님이 증인석에서 일어나 오른발을 바깥으로 벌려 보였다⁠. 판사가 손바닥을 들었다⁠.

“⁠증인⁠, 앉아서 말로 하세요⁠.⁠”

“⁠말로 하면 몰라⁠. 이렇게 걸어야 알지⁠.⁠”

“⁠기록에는 말로 남습니다⁠. 앉으세요⁠.⁠”

사장님은 앉았다⁠. 앉아서 김도훈을 보았다⁠.

“⁠총각⁠, 그날 우산 없었지⁠? 내가 비닐우산 줄까 했잖아⁠. 총각이 괜찮다 했잖아⁠.⁠”

“⁠증인⁠, 피고인에게 직접 묻지 마세요⁠.⁠”

“⁠물어본 게 아니야⁠. 말한 거야⁠.⁠”

김도훈은 「⁠질문⁠」 파일의 종이를 넘기지 않았다⁠. 다음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상입니다⁠.⁠”

판사가 사장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피고인 윤예원이 낮에 김도훈을 따라가는 것도 보았느냐고⁠. 사장님은 망설이지 않았다⁠.

“⁠봤어요⁠. 여러 번⁠. 내가 시장 끝까지 들리게 소리쳤어⁠. 또 저 양반 따라가냐고⁠. 나는 둘 다 봤어요⁠. 밤에는 저 양반이 위를 보고⁠, 낮에는 우리 예원이가 저 양반 등을 보고⁠. 판사님⁠, 둘이 서로 보는 동안 둘 다 밥을 굶었어요⁠. 내가 호떡을 줬어요⁠.⁠”

*

둘째 증인은 박수진이었다⁠. 작가님은 롱패딩을 벗어 방청석 의자에 걸어 두고 증인석에 앉았다⁠. 지혜가 5월 14일 단톡방 캡처를 화면에 띄웠다⁠. 「⁠작가님 가로등남 있잖아요 그거 진짜 사람이에요⁠」 「⁠댓글 좋음 계속 넣어⁠」⁠. 작가님은 화면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보낸 거 맞습니다⁠. 새벽 한 시 사십일 분이었습니다⁠. 예원이가 무섭다고 했는데 저는 댓글을 봤습니다⁠.⁠”

검사가 출근남에 대해 물었다⁠. 작가님은 고개를 들었다⁠.

“⁠출근남을 매주 넣자고 한 사람은 저입니다⁠. 예원이가 아침에 지나가는 사람 걸음이 좋다고 했을 때 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독자가 골목 위치를 물었을 때 망원동 느낌이라고 답한 것도 저입니다⁠. 성지순례 글을 보고도 막지 않았습니다⁠.⁠”

작가님은 피고인석 왼쪽 끝으로 몸을 돌렸다⁠.

“⁠김도훈 씨⁠. 죄송합니다⁠. 그림을 그린 건 예원이지만 그림을 매주 올린 건 저입니다⁠.⁠”

지혜가 하나를 더 물었다⁠.

“⁠증인은 12월 5일에 피고인 윤예원을 해고했습니까⁠?⁠”

“⁠네⁠. 예원이가 스케치북을 경찰에 낸다고 해서요⁠. 내면 작업실이 없어진다고⁠, 그러니까 해고라고 했습니다⁠. 수박 한 통 들고 가서 그랬습니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은비가 코를 훌쩍였다⁠. 영희 사장님이 은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시장 이름이 박힌 손수건이었다⁠.

“⁠지금도 그 판단이 맞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작업실은 어차피 없어졌습니다⁠. 연재는 12월 8일에 끝났습니다⁠. 예원이를 해고해서 지킨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잘못 해고했습니다⁠.⁠”

작가님은 대답을 마치고 피고인석 오른쪽 끝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작가님 눈가가 빨갰다⁠. 마감 날 새벽 다섯 시의 눈이었다⁠.

김도훈은 반대신문하지 않겠다고 했다⁠. 처음이었다⁠. 김도훈의 볼펜이 「⁠질문⁠」 파일 위에서 한 번 굴렀다가 멈췄다⁠.

*

셋째 증인 정만수 사장님은 증인석에 앉자마자 비닐봉지를 증인석 책상에 올려놓았다⁠. 판사가 안경을 코끝에서 올렸다⁠.

“⁠증인⁠, 그건 증거로 신청된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도 가져왔어요⁠. 주인이 저기 있잖아요⁠.⁠”

판사는 대답하지 않고 기록을 넘겼다⁠. 지혜가 사실조회 회신서를 화면에 띄웠다⁠. 카드 단말기 회사가 법원에 보낸 회신이었다⁠. 뽀송 빨래방⁠, 김도훈 명의 카드⁠, 2026년 4월 9일부터 10월 23일까지⁠. 표가 석 장이었다⁠. 기기 번호 칸이 한 줄도 빠짐없이 같았다⁠. 「⁠건조기 3⁠」⁠.

“⁠증인⁠, 이 표를 보면 피고인 김도훈의 결제는 모두 일흔두 번입니다⁠. 4월 9일부터 9월 29일까지 일흔 번⁠, 10월 13일과 10월 23일에 한 번씩⁠. 전부 3번 건조기⁠, 40분⁠, 4⁠,000원⁠. 세탁기 결제는 한 번도 없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저도 회신 보고 알았어요⁠. 근데 회신 안 봐도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새벽 두 시에 필터 털러 가거든요⁠. 건조기 필터에 보풀이 모이니까⁠. 근데 3번에는 보풀이 없었어요⁠. 빨래를 안 말렸으니까⁠. 3번 문을 열면 흰 수건 한 장이 들어 있었어요⁠. 한 장이요⁠. 늘 한 장⁠. 처음엔 손님이 두고 간 줄 알고 분실물 바구니에 넣었어요⁠. 다음 날 보면 바구니에 없어요⁠. 그리고 다음에 또 3번에 들어 있어요⁠. 4월부터 9월까지 그랬어요⁠.⁠”

정만수 사장님이 비닐봉지를 열어 수건을 꺼냈다⁠. 하얀 면 수건이었다⁠. 한쪽 귀퉁이에 파란 실로 「⁠○○헬스⁠」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망원역 앞 헬스장 이름이었다⁠. 내가 7월부터 김도훈을 따라간 헬스장이었다⁠.

“⁠9월 말부터는 안 찾아갔어요⁠. 그래서 우리 가게 분실물 바구니에 석 달 가까이 있었어요⁠. 판사님⁠, 수건 한 장을 사십 분씩 일흔 번 말리면 이렇게 돼요⁠.⁠”

수건은 얇았다⁠. 화면에 비친 수건 가장자리가 해져서 실밥이 풀려 있었다⁠. 사천 원씩 일흔두 번⁠. 이십팔만 팔천 원어치 열에 바싹 마른 천이었다⁠.

“⁠10월 13일 밤에는 어땠습니까⁠?⁠”

“⁠경찰이 11월에 와서 영상 가져갔어요⁠. 저장이 한 달이라 10월 것만 남아 있었어요⁠. 10월에는 수건 대신 흰 셔츠 한 장이었어요⁠. 열한 시 사 분에 저 양반이 들어와서 3번에 셔츠 넣고 카드 긋고⁠, 영수증 뽑고⁠, 일 분 있다가 나갔어요⁠. 영수증 들고 길 건너로⁠. 카메라가 길 건너까지는 안 비춰요⁠. 그다음은 몰라요⁠.⁠”

판사가 김도훈을 보았다⁠.

“⁠피고인 김도훈⁠, 반대신문하겠습니까⁠?⁠”

김도훈이 일어났다⁠. 「⁠질문⁠」 파일을 폈다가⁠, 덮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증인은 제가 건조기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 봤습니까⁠?⁠”

“⁠밖에 나가 있었잖아요⁠. 사십 분 동안⁠. 건조기 앞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수건만 돌았어요⁠.⁠”

김도훈은 앉았다⁠.

*

증인 셋이 다 나간 뒤 지혜가 일어났다⁠. 손에 A4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김도훈이 민사 소송에 낸 갑 제9호증⁠, 4월 20일 메모의 사본이었다⁠. 검사가 같은 사본을 김도훈 사건 증거로 이미 낸 뒤였다⁠.

“⁠재판장님⁠, 피고인 윤예원 사건에서 김도훈 피고인을 증인으로 신문하고 싶습니다⁠. 피고인 윤예원이 따라가기 전에 김도훈 피고인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가 정당한 이유를 판단하는 데 필요합니다⁠.⁠”

“⁠김도훈 피고인에 대한 변론을 분리합니다⁠. 증인으로 신문하겠습니다⁠. 증인은 자기에게 불리한 질문에 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김도훈이 진술석으로 나왔다⁠. 딱⁠, 따각⁠. 지난주에 내가 선 자리였다⁠. 지혜는 메모 사본을 실물화상기에 올렸다⁠. 오른쪽으로 살짝 기운 글씨가 화면을 채웠다⁠.

“⁠증인은 4월 20일에 피고인 윤예원의 이름과 작업실과 302호를 알았습니까⁠?⁠”

“⁠네⁠.⁠”

“⁠손해배상 소장 초안을 썼습니까⁠?⁠”

“⁠네⁠.⁠”

“⁠제출을 보류한 사유로 「⁠확인 더 필요⁠」라고 썼습니까⁠?⁠”

“⁠네⁠.⁠”

“⁠무엇을 더 확인해야 했습니까⁠?⁠”

김도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법정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렸다⁠. 지혜는 기다렸다⁠. 지혜가 어려운 말 앞에서 종이를 집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이름도 알았고 작업실도 알았고 소장도 썼습니다⁠. 그다음 다섯 달 동안 예순여섯 번⁠, 증인은 빨래도 하지 않을 건조기에 헬스장 수건 한 장을 넣고⁠, 사십 분 동안 밖에서 피고인 윤예원의 창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확인하고 있었습니까⁠?⁠”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증인은 피고인 윤예원이 증인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았습니까⁠? 4월부터 블라인드가 낮에도 내려간 걸 봤습니까⁠?⁠”

김도훈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김도훈이 말을 하다 멈춘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조사실에서도⁠, 민원실에서도⁠, 가로등 밑에서도⁠, 법정에서도 김도훈은 문장을 끝까지 맺었다⁠. 진술석 책상 위에 올린 김도훈의 오른손이 클리어 파일 모서리를 잡았다가 놓았다⁠. 오 초⁠. 십 초⁠. 판사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증인⁠, 답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김도훈이 판사를 보았다⁠.

“⁠재판장님⁠. 증인으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제 사건에서 피고인신문을 받겠습니다⁠. 거기서 전부 답하겠습니다⁠. 다음 기일 말고⁠, 지금 받겠습니다⁠.⁠”

판사가 시계를 보았다⁠. 오후 네 시 이십 분이었다⁠. 판사는 한참 김도훈을 보다가 속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론을 다시 병합합니다⁠. 휴정 십 분⁠. 그다음 피고인 김도훈에 대한 피고인신문을 하겠습니다⁠.⁠”

김도훈은 진술석에서 내려가 왼쪽 끝 회색 의자로 돌아갔다⁠. 앉기 전에 피고인석 오른쪽 끝을 한 번 보았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삼 미터⁠. 김도훈은 다섯 번째 클리어 파일 「⁠최후⁠」를 열지 않고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빈손으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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