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26자)

조사실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5월 6일 아침 여덟 시 이십 분⁠, 남궁기윤은 원장실 책상 앞에 흰 봉투를 내려놓았다⁠. 봉투 겉에 볼펜으로 쓴 「⁠사직서⁠」 세 글자가 너무 컸지만 다시 쓰지는 않았다⁠. 원장 엄미금은 봉투를 보지 않고 창밖의 비를 보았다⁠.

“⁠가져오라고 한 건 오늘 저녁이에요⁠. 법원 다녀와서⁠.⁠”

“⁠다녀와서 드리면 원장님이 받기 싫어지실 것 같아서요⁠.⁠”

“⁠지금도 싫어요⁠.⁠”

원장은 봉투를 기윤 쪽으로 도로 밀었다⁠. 봉투가 책상 위를 미끄러져 기윤의 손등에 닿았다⁠.

“⁠시청에 전화해서 민원 누가 넣었는지 물어봤어요⁠. 안 알려 줘요⁠. 알려 주면 안 되는 거래⁠. 나는 이십 년 동안 민원 넣은 사람 얼굴을 한 번도 못 봤어요⁠. 얼굴 없는 사람이 우리 어린이집 제일 큰 학부모예요⁠.⁠”

원장이 책상 서랍에서 접이식 우산 하나를 꺼냈다⁠. 노란 우산이었다⁠. 손잡이에 「⁠볕뜰어린이집 개원 10주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가져가요⁠. 검은 우산 쓰고 법원 가면 다 장례식 가는 사람 같아⁠.⁠”

“⁠저 검은 우산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가져가라고⁠.⁠”

기윤은 노란 우산을 받아 가방 옆에 꽂았다⁠. 봉투는 가방 안에 다시 넣었다⁠. 원장실을 나가는데 원장이 등 뒤에서 말했다⁠.

“⁠선생님⁠, 거기 가서 거짓말하면 나 선생님 다시 안 봐요⁠. 그건 사직서보다 나빠⁠.⁠”

*

5월 6일 아침 아홉 시⁠, 추아란은 등원 현관에서 서류철을 겨드랑이에 끼고 밤톨이엄마를 기다렸다⁠. 비가 막 시작되었다⁠. 서류철 표지에 아란의 글씨가 있었다⁠. 「⁠연장보육 이용 학부모 확인서⁠」 첫 장에는 다섯 줄짜리 문장이 있었다⁠. 남궁기윤 교사가 지난 넉 달간 저녁 일곱 시 반까지 연장반 아동을 안전하게 돌보았고⁠, 고솔찬 아동의 아버지는 같은 기간 하원 시각을 어긴 적이 없음을 확인함⁠.

밤톨이엄마가 우산을 접으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돌아서자 아란이 서류철을 내밀었다⁠.

“⁠서명 하나 부탁드려요⁠.⁠”

“⁠반대표님⁠, 저 운영위원회 서명 받은 사람이에요⁠.⁠”

“⁠알아요⁠. 그래서 제일 먼저 부탁드리는 거예요⁠.⁠”

밤톨이엄마가 서류를 읽었다⁠. 우산 끝에서 물이 떨어져 현관 매트를 적셨다⁠.

“⁠저 그 선생님 싫어서 서명 받은 거 아니에요⁠. 애들이 밤에 다른 집 간다는 게 무서워서 그랬어요⁠.⁠”

“⁠저도 무서웠어요⁠.⁠”

“⁠그리고 저 시의원실에 전화 안 했어요⁠. 그거 다들 저인 줄 알아요⁠.⁠”

아란은 대답을 고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단톡방 스물넷 가운데 시의원실에 전화한 사람이 있었다⁠. 아란은 그게 누군지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 하나가 단톡방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다⁠.

밤톨이엄마가 볼펜을 받았다⁠. 서명하려다 멈추고 물었다⁠.

“⁠이거 회의록처럼 이름은 반대표님 머릿속에만 들어가요⁠?⁠”

“⁠이건 법원에 들어가요⁠.⁠”

밤톨이엄마는 한참 볼펜을 쥐고 있다가 서명했다⁠. 글씨가 작았다⁠.

현관 밖에서 남편이 아기띠를 매고 둘째를 안은 채 뛰어 들어왔다⁠. 남편은 서류철을 낚아채 맨 아래 칸에 큼직하게 서명하고 이름 옆에 괄호를 붙였다⁠. 「⁠(⁠육아휴직 중인 아빠⁠)⁠」

“⁠여보⁠, 그걸 왜 써⁠.⁠”

“⁠직함이야⁠. 나 지금 이거 말고 직함 없어⁠.⁠”

아란은 웃음을 참았다⁠. 서명은 여섯이 되었다⁠. 아란은 서류철을 덮고 휴대전화로 법원 고양지원 가사조사관실 번호를 찾았다⁠. 회사 팀장의 메신저가 울렸다⁠. 「⁠아란 씨 오늘 몇 시 출근⁠?⁠」 아란은 팀장에게 「⁠반차 쓰겠습니다⁠」를 보냈다⁠. 그다음 날 팀장이 말을 안 할 것을 알았다⁠.

*

5월 6일 오후 두 시⁠, 남궁기윤은 법원 고양지원 가사조사실의 낮은 탁자 앞에 앉았다⁠. 탁자 위에 크레파스 통과 털이 군데군데 빠진 거북이 인형이 놓여 있었다⁠. 아이 면담을 하는 방이라 의자도 낮았다⁠. 기윤은 이번 달 들어 어른 의자에 앉은 날이 손에 꼽혔다⁠.

석애리가 수첩을 펴다가 거북이 인형을 보았다⁠.

“⁠치워 드릴까요⁠? 선생님은 거북이 필요 없으시죠⁠?⁠”

“⁠잠깐만 두셔도 될까요⁠?⁠”

석애리가 처음으로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석애리는 거북이를 기윤 쪽으로 반 뼘 밀었다⁠. 거북이의 등딱지는 아이들 손때가 묻어 반들거렸다⁠.

질문은 진술서 순서대로 왔다⁠. 하원 시각⁠, 낮잠⁠, 중이염 예약⁠, 아이가 그리는 집⁠. 기윤은 진술서에 쓴 대로 대답했고⁠, 진술서에 쓰지 않은 것은 묻기 전에 말하지 않았다⁠. 석애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펜만 움직였다⁠.

“⁠선생님⁠, 아이를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통로로 쓴 적은 없습니까⁠?⁠”

기윤은 질문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고 나서 등이 굳었다⁠.

“⁠없습니다⁠.⁠”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증명 못 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넉 달 동안 현관 밖에서 아버님을 따로 만난 적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공원에서 진술서 드린 날 빼고요⁠. 그날은 원장님이 정자에서 스트레칭을 하셨어요⁠.⁠”

“⁠3월 12일은요⁠?⁠”

“⁠그날은 아버님이 안 계셨어요⁠. 집에는 아이만 있었습니다⁠. 저는 부엌 바닥에 있었고요⁠.⁠”

석애리는 부엌 바닥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그러고는 수첩을 한 장 넘겼다⁠.

“⁠아버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기윤은 가방 안의 흰 봉투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아침에 원장실 책상 앞에서 접어 넣은 봉투였다⁠.

“⁠제가 아버님을 좋아합니다⁠. 아버님은 대답하신 적 없습니다⁠. 제가 물은 적도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선생님 마음을 아십니까⁠?⁠”

“⁠진술서를 읽으셨으니 아십니다⁠.⁠”

“⁠읽고 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제 운동화 끈이 풀린 걸 보셨어요⁠.⁠”

석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

“⁠선생님⁠, 지금 이 말씀이 어린이집에서 곤란해지는 말이라는 거 아시죠⁠?⁠”

“⁠사직서 가지고 왔습니다⁠. 원장님이 오늘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석애리는 기윤의 가방을 보았다가⁠, 탁자 위의 거북이 인형을 보았다⁠. 거북이는 목이 반쯤 등딱지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이들은 여기서 거북이를 꼭 안아요⁠. 어른들은 처음입니다⁠, 만지지도 않고 옆에 두라고 하신 분은⁠.⁠”

*

오후 세 시 십 분⁠, 표다엘은 법원 처마 밑에서 우산을 털다가 계단을 내려오는 남궁기윤을 보았다⁠. 다엘의 면담은 세 시 반이었다⁠. 기윤은 노란 우산을 들고 있었고⁠, 우산 끝에서 빗물이 길게 떨어졌다⁠. 손잡이에 어린이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다엘은 처마 밖으로 나가려는 기윤의 길을 막지 않고⁠, 막지 않은 채로 불렀다⁠.

“⁠선생님⁠.⁠”

기윤이 멈췄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둘 사이에 발을 쳤다⁠.

“⁠그 말 하셨어요⁠?⁠”

“⁠네⁠.⁠”

“⁠사직하실 거예요⁠?⁠”

“⁠원장님이 오늘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가져왔습니다⁠.⁠”

다엘은 기윤의 가방을 보았다⁠. 다엘은 일을 그만둬 본 사람이었다⁠. 서울의 대학병원을 그만둘 때 사직서를 사흘 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다⁠.

“⁠제가 서면에서 그 문단 철회했어요⁠. 그 사람 얘기는요⁠. 선생님 진술서 줄은 못 지워요⁠. 선생님 거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계속 갈 거예요⁠. 양육자 변경⁠. 선생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허리 때문에요⁠. 조사관님이 그 사람 집 식탁에서 진통제 통 봤대요⁠. 시술 안 받았대요⁠. 두 주 못 움직인다고⁠.⁠”

기윤은 우산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아버님 허리는 저도 걱정입니다⁠. 오른손으로 안으셔야 하는데 자꾸 왼손으로 안으세요⁠.⁠”

“⁠그럼 우리 같은 편이네요⁠.⁠”

“⁠아니요⁠. 같은 걸 걱정하는 거지⁠, 같은 편은 아니에요⁠.⁠”

다엘은 짧게 웃었다⁠. 해준과 살 때 다엘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해준은 같은 걸 걱정하면 같은 편이 되는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그 사람이 대답 안 해도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요⁠.⁠”

기윤이 우산을 펼쳤다⁠. 처마 밖으로 한 발 나갔다가 돌아보았다⁠.

“⁠어머님⁠, 솔찬이 오늘 낮잠 안 자고 비 오는 소리 세고 있대요⁠. 영아반 선생님이 전해 줬어요⁠. 몇까지 셌는지는 비밀이래요⁠.⁠”

다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윤의 노란 우산이 법원 주차장 쪽으로 멀어졌다⁠. 빗속에서 노란색이 오래 보였다⁠.

*

오후 네 시 사십 분⁠, 고해준은 대리점 상차장에서 생수 묶음을 들어 올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리터짜리 여섯 병 묶음이었다⁠. 들어 올리는 순간 왼쪽 허리 안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정말로 났는지는 몰랐지만 해준에게는 들렸다⁠. 다리에 힘이 빠졌고⁠, 해준은 생수 묶음을 끌어안은 채 옆으로 쓰러졌다⁠.

마봉칠이 레일 너머에서 뛰어왔다⁠. 크롭 바람막이 아래로 배꼽이 보였다⁠.

“⁠해준아⁠! 움직이지 마⁠. 119 부를게⁠.⁠”

“⁠부르지 마요⁠. 구급차 타면 오늘 못 나와요⁠.⁠”

“⁠지금 너 나오는 게 문제냐⁠? 일어나 봐⁠.⁠”

해준은 일어나 보려고 했다⁠. 팔꿈치까지는 올라갔다⁠. 허리 아래가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봉칠이 상자 하나를 펼쳐 해준의 머리 밑에 깔았다⁠. 골판지 냄새가 났다⁠. 해준은 골판지 위에 누운 채 상차장 천장의 형광등을 세었다⁠. 일곱 개였다⁠.

봉칠이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고⁠, 해준의 남은 송장을 자기 휴대전화로 옮겼다⁠. 오늘 남은 배송이 마흔둘이었다⁠. 봉칠은 숫자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영포티가 오늘 마흔둘 뛴다⁠. 이건 챌린지로 찍어야 돼⁠.⁠”

해준은 웃다가 허리가 울려 웃음을 반으로 잘랐다⁠. 봉칠은 해준이 반으로 자른 웃음을 보고 휘파람을 그쳤다⁠.

“⁠형님⁠, 지금 몇 시예요⁠.⁠”

“⁠네 시 사십오 분⁠.⁠”

솔찬은 일곱 시 십사 분에 유리문에 이마를 댈 것이었다⁠. 해준은 하원 동의서에 올라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고해준⁠. 아랫집 할머니⁠, 지팡이를 짚고는 어린이집까지 이십 분이 걸리고 아이를 안지 못했다⁠. 표다엘⁠. 하원 동의서에 이름이 셋 있었다⁠. 해준은 세 번째 이름을 머릿속에서 두 번 지웠다가 다시 떠올렸다⁠.

봉칠이 쪼그려 앉았다⁠.

“⁠내가 갈까⁠? 나 운전 잘해⁠.⁠”

“⁠형님은 동의서에 없어요⁠. 선생님이 안 줘요⁠.⁠”

“⁠그 선생님은⁠? 그 선생님은 애를 잘 알잖아⁠.⁠”

“⁠그 사람은 지금 법원에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전화하면 이번엔 진짜 끝나요⁠. 그 사람이⁠.⁠”

봉칠이 입을 다물었다⁠. 해준은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다엘의 이름을 띄우고도 엄지가 한참 머뭇거렸다⁠. 삼 년 동안 해준은 다엘에게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없었다⁠. 일요일 영상 통화는 늘 다엘이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다엘이 받았다⁠. 뒤에서 빗소리와 법원 안내 방송이 들렸다⁠.

“⁠해준아⁠? 나 지금 면담 끝나고⁠…⁠”

“⁠다엘아⁠.⁠”

해준은 골판지 위에서 천장의 형광등 일곱 개를 보며 말했다⁠. 숨을 쉴 때마다 허리가 울려 말이 끊겼다⁠.

“⁠오늘 솔찬이 좀 데리러 가 줘⁠. 일곱 시 십사 분에⁠. 늦지 말고⁠. 일곱 시 십사 분에 유리문에 이마 대고 있어⁠.⁠”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빗소리만 들렸다⁠.

“⁠너 어디야⁠.⁠”

“⁠상차장 바닥⁠. 허리가 나갔어⁠. 그리고 다엘아⁠, 걔 운동화 끈 풀어서 발 내밀면 묶어 줘야 돼⁠.⁠”

다엘이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다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짧게 끊기지 않았다⁠.

“⁠두 번 감는 거지⁠?⁠”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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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서담2026.11.01· 9화

    사직서 글씨가 너무 컸지만 다시 쓰지 않았다는 문장에서 기윤 선생님 마음이 다 보여요.

    • 탁은담작가2026.11.01

      다시 쓰면 마음이 바뀔까 봐서요. 원장님은 그걸 알아서 봉투를 안 봅니다.

조사실 ·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