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84자)

냉장고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매듭은 두 번 감겨 있었다⁠. 고해준은 매듭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일어서는 데 허리가 한 번 막혔고⁠, 해준은 막힌 자리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끝까지 일어났다⁠.

“⁠잠깐만요⁠.⁠”

해준은 솔찬을 안아 올리고 노란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일곱 사람이 길을 비켰다⁠. 비켜선 사람들 사이를 지나 탑차까지 걸었다⁠. 조수석 부스터 시트에 솔찬을 앉히고 버클을 두 번 확인했다⁠. 솔찬이 물었다⁠. 아빠⁠, 저 사람들 왜 다 휴대폰 봐⁠? 해준은 오늘 휴대폰에 재미있는 게 나왔다고 대답했다⁠.

추아란이 탑차 쪽으로 걸어왔다⁠. 아란은 해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수석 창문 앞에 서서 휴대전화 화면을 솔찬에게 보여 주었다⁠. 화면 속에서 오리 한 마리가 춤을 추었다⁠. 단톡방에 잘못 올라갔던 남편의 이모티콘이었다⁠. 솔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반대표님⁠.⁠”

“⁠가서 대답하세요⁠. 애는 제가 오리로 막고 있을게요⁠.⁠”

해준은 현관 계단 앞으로 돌아왔다⁠. 계단 맨 아래 칸에 섰다⁠. 무릎을 꿇지 않고 선 것은 넉 달 만에 처음이었다⁠. 일곱 사람의 휴대전화 화면이 하나씩 꺼졌다⁠.

“⁠네⁠. 진짜예요⁠.⁠”

해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현관 처마 밑 카메라의 빨간 불이 깜빡였다⁠.

“⁠저는 여자도 좋아했고 남자도 좋아했어요⁠. 솔찬이 엄마랑은 좋아서 결혼했고⁠, 이혼은 돈 때문에 했어요⁠. 서면에 있는 말은 이혼하기 전날 제가 솔찬이 엄마한테 한 말이에요⁠. 솔찬이 엄마는 삼 년 동안 아무한테도 그 말을 안 했어요⁠.⁠”

연장반 문 앞에서 기윤이 움직이지 않았다⁠. 해준은 기윤을 보지 않았다⁠.

“⁠남궁 선생님은 우리 애 담임이었고⁠, 제가 아는 한 한 번도 선을 넘은 적 없어요⁠. 넘은 건 저예요⁠. 제가 밤에 전화했어요⁠.⁠”

질문을 던졌던 아빠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밤톨이엄마가 손에 쥔 아이의 손을 고쳐 잡았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솔찬이한테 묻지 마시고⁠, 선생님한테도 묻지 마세요⁠. 저는 일곱 시 십사 분마다 여기 오니까 언제든 물어보세요⁠.⁠”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해준이 고개를 숙이고 탑차로 걸어갔다⁠. 아란이 조수석 창문 앞에서 비켜섰다⁠. 오리는 아직 춤을 추고 있었다⁠. 해준이 시동을 걸 때 백미러 속에서 연장반 문 앞의 기윤이 안경을 벗어 앞치마 자락으로 닦았다⁠. 닦는 시간이 길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솔찬이 백미러 속 아빠 얼굴을 보고 물었다⁠. 아빠⁠, 휴대폰에 뭐 재밌는 거 나왔어⁠? 해준은 아빠가 나왔다고 대답했다⁠. 솔찬은 휴대폰에 나오면 유명한 사람이라며 부스터 시트 위에서 박수를 쳤다⁠. 해준은 신호등 앞에서 웃었고⁠, 웃다가 핸들에 이마를 잠깐 댔다⁠. 초록불이 켜지고 뒤차가 경적을 울릴 때까지⁠.

*

수요일 밤 열 시⁠, 마봉칠은 해준의 빌라 부엌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냉장고 맨 아래 칸을 비웠다⁠. 솔찬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봉칠은 내일 법원 사람이 온다는 말을 듣고 퇴근길에 세제 세 통과 고무장갑 두 켤레를 사 왔다⁠. 해준이 말리자 봉칠은 고무장갑 낀 손을 들어 보였다⁠. 이미 꼈다는 뜻이었다⁠.

“⁠유통기한 지난 거 버리고⁠, 반찬통은 크기 순서⁠. 법원 사람들은 줄 맞춘 거 좋아해⁠. 내가 이혼할 때 봤어⁠.⁠”

봉칠은 빈 바나나우유 통을 버리려는 해준의 손을 막았다⁠. 씻어서 맨 아래 칸에 세워 두라고 했다⁠. 버리면 애가 우유를 안 먹는 집처럼 보인다고⁠. 해준이 그건 자기가 마신 거라고 하자 봉칠은 더 세워 두라고 했다⁠. 아빠가 우유를 마시는 집도 좋은 집이라고⁠.

봉칠은 종이 한 장에 매직으로 「⁠고솔찬 영양 식단⁠」을 쓰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칸을 그었다⁠. 월요일 미역국⁠, 화요일 계란찜⁠, 수요일 생선⁠. 금요일 칸에서 봉칠의 매직이 멈췄다가 「⁠치킨(⁠단백질⁠)⁠」을 썼다⁠.

“⁠형님⁠, 치킨이 왜 단백질이에요⁠.⁠”

“⁠닭이잖아⁠. 닭은 단백질이야⁠. 튀긴 건 내 사정이고⁠.⁠”

열한 시가 가까워지자 소파 위 빨래 산이 남았다⁠. 봉칠은 빨래를 개다가 시계를 보고⁠, 빨래 산을 한 아름 안아 오븐에 넣었다⁠. 해준이 입을 벌리자 봉칠이 고개를 저었다⁠. 법원 사람이 오븐까지는 안 연다고⁠.

고무장갑을 벗으면서 봉칠이 물었다⁠. 목소리를 낮춘 것은 솔찬의 방문을 한 번 보고 나서였다⁠.

“⁠해준아⁠, 너 진짜 그 선생님 좋아하냐⁠?⁠”

“⁠형님⁠, 치킨 얘기 하다가 왜⁠.⁠”

“⁠나 이혼한 거 알지⁠? 우리 전처가 나한테 처음으로 영포티라고 했어⁠. 젊은 척 그만하고 집에 좀 있으라고⁠. 그땐 그게 욕인 줄 몰랐어⁠. 집에 좀 있으라는 말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인 줄도 몰랐고⁠.⁠”

봉칠은 고무장갑을 싱크대에 걸쳐 놓고 현관으로 갔다⁠. 운동화를 신으며 한마디를 더 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꼭 딴 말 뒤에 숨어⁠. 너는 바나나우유 뒤에 숨었잖아⁠. 열여섯 통⁠.⁠”

*

목요일 오후 두 시⁠, 법원 고양지원 가사조사관 석애리는 해준의 빌라 현관에 들어서자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집에 오면 냉장고부터 봅니다⁠. 아이 먹는 게 거기 다 있어서요⁠.⁠”

해준은 대답할 틈이 없었다⁠. 석애리는 냉장고 문에 붙은 식단표를 오래 보았다⁠. 금요일 칸의 「⁠치킨(⁠단백질⁠)⁠」에서 눈이 한 번 멈췄다⁠. 그러고는 냉장고 맨 아래 칸을 가리켰다⁠. 빈 바나나우유 통이 열여섯 개 씻겨서 줄지어 있었다⁠.

“⁠아이가 바나나우유를 좋아하나요⁠?⁠”

“⁠제가 마셨어요⁠. 하루에 두 개씩⁠.⁠”

“⁠두 개씩요⁠.⁠”

석애리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해준은 거기에 뭐가 적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석애리는 마흔 넘어 보였고⁠, 머리를 낮게 묶었고⁠,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묻자 모든 질문이 같은 무게로 들렸다⁠.

석애리가 부엌을 둘러보다가 오븐 앞에서 멈췄다⁠. 오븐 손잡이에 수건이 끼어 있었다⁠. 석애리가 오븐 문을 열었다⁠. 개지 않은 빨래 한 무더기가 오븐 안에 쑤셔 넣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동료가⁠…⁠”

“⁠괜찮습니다⁠. 오븐에 빨래 넣는 집 처음 아닙니다⁠. 세탁기에 넣는 집이 더 많습니다⁠.⁠”

석애리는 오븐을 닫고 솔찬의 방으로 갔다⁠. 이층 침대가 아니라 낮은 매트리스였고⁠, 머리맡에 초록 공룡이 일곱 마리 있었다⁠. 석애리는 매트리스에 손바닥을 대 보고⁠, 창문 잠금장치를 돌려 보고⁠, 방문 안쪽 손잡이 높이를 쟀다⁠. 그러다 식탁 위의 파스 상자와 진통제 통을 보았다⁠.

“⁠아버님⁠, 허리는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작년 겨울부터요⁠.⁠”

“⁠사진은 찍어 보셨어요⁠?⁠”

“⁠3월에 찍었어요⁠. 디스크래요⁠. 시술하라는데 시술하면 두 주 못 움직인대서 안 했어요⁠.⁠”

“⁠두 주 못 움직이면 아이는 누가 데리러 갑니까⁠?⁠”

해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석애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수첩을 넘겼다⁠.

“⁠하나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대방 서면에 아버님의 성적 지향 이야기가 들어 있는 거 압니다⁠. 그건 제가 조사하는 항목이 아닙니다⁠. 판사님께도 그렇게 씁니다⁠. 제가 보는 건 밤 열한 시에 누가 이 방에 있느냐⁠, 그리고 아버님 허리가 내년에도 이 아이를 들 수 있느냐입니다⁠.⁠”

해준은 숨을 내쉬었다⁠. 내쉬고 보니 사흘 동안 숨 한 번을 들고 다녔다⁠.

“⁠그러면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남궁기윤 선생님과는 어떤 사이입니까⁠?⁠”

해준은 식탁 위의 파스 상자를 보았다⁠. 상자 귀퉁이가 찢어져 있었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 담임 선생님이었어요⁠.⁠”

석애리는 대답을 수첩에 그대로 적었다⁠. 펜 소리가 짧았다⁠.

*

같은 날 오전에 석애리는 일산의 다엘의 아파트를 먼저 다녀갔다⁠. 석애리는 거기서도 냉장고부터 열었다⁠. 반찬통마다 매직으로 날짜가 쓰여 있었고⁠, 석애리는 날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외할머니에게 물었다⁠. 날짜를 쓰시는 집이네요⁠. 외할머니는 칭찬으로 듣고 활짝 웃었다⁠. 다엘은 석애리의 말이 칭찬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날짜를 쓰는 사람은 다른 것에도 날짜를 썼다⁠.

저녁 아홉 시⁠, 솔찬이 해준의 집에 있는 평일 밤⁠, 표다엘은 식탁 앞에 서서 어머니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

“⁠왜⁠?⁠”

“⁠단톡방 나가⁠.⁠”

외할머니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대고 두 손으로 덮었다⁠. 덮은 손등에 핏줄이 섰다⁠.

“⁠나는 솔찬이 지키려고 들어간 거야⁠.⁠”

“⁠엄마가 지킨 건 엄마 마음이야⁠. 솔찬이는 그날 현관 앞에서 어른들이 왜 다 휴대폰을 보는지 물었대⁠. 반대표 엄마가 오리 이모티콘으로 애 눈을 막았대⁠. 남의 집 엄마가 우리 애 눈을 막아 줬어⁠, 엄마⁠.⁠”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어⁠? 서류에 있는 거 올렸어⁠.⁠”

“⁠거짓말 안 했어⁠. 그래서 더 나빠⁠.⁠”

외할머니가 휴대전화를 쥔 채 의자에 앉았다⁠. 다엘은 손바닥을 거두지 않았다⁠.

“⁠엄마가 나가든지⁠, 내가 이 집에서 나가든지⁠.⁠”

“⁠이 집 네 집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나가면 엄마 혼자 이 집에 살아⁠. 솔찬이 방도 혼자 봐⁠.⁠”

외할머니는 오래 휴대전화 화면을 보다가 단톡방을 열었다⁠. 큰 글씨 메뉴를 찾느라 손가락이 두 번 헛돌았다⁠. 다엘이 대신 눌러 주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나가기⁠」를 눌렀다⁠. 화면에 회색 줄이 떴다⁠. 「⁠솔찬이외할머니님이 나갔습니다⁠.⁠」

외할머니가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말했다⁠.

“⁠그 남자 진짜 좋아하는 거야⁠? 그 선생 말고⁠, 고 서방이⁠.⁠”

“⁠몰라⁠. 그 사람은 늘 모른다고 해⁠.⁠”

다엘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날짜가 쓰인 반찬통들이 줄지어 있었다⁠. 오늘 날짜가 쓰인 통은 없었다⁠.

*

금요일 일곱 시 사십 분⁠, 연장반 아이들이 다 돌아간 뒤 원장 엄미금이 연장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원장 무릎도 턱밑까지 올라왔다⁠. 원장은 무릎을 세운 채 서류 두 장을 남궁기윤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법원 고양지원에서 온 면담 요청이었다⁠. 「⁠전 담임교사 남궁기윤 — 5월 6일 오후 두 시⁠, 가사조사실⁠」 다른 하나는 시청 보육 담당 부서의 전화 메모를 원장이 손으로 옮긴 것이었다⁠. 「⁠시의원실 민원 접수 — 남자 교사⁠, 학부모 사생활 관련 / 위탁 재심사 6월 10일 / 심사위원 의견 참고⁠」

“⁠시의원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누가 넣었는지는 몰라요⁠. 단톡방에 스물넷이 있었으니까 스물넷 중 하나겠죠⁠.⁠”

“⁠면담은 갑니다⁠.⁠”

“⁠가는 건 내가 못 막아요⁠. 법원이 부른 거니까⁠.⁠”

원장은 작은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실패하고 다시 앉았다⁠.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한 것이 원장을 화나게 했다⁠.

“⁠선생님⁠, 거기 가서 진술서 그 줄 그대로 말할 거예요⁠?⁠”

“⁠묻는 대로 대답할 겁니다⁠.⁠”

“⁠그럼 그날 사직서 가지고 오세요⁠.⁠”

기윤은 원장을 보았다⁠. 원장은 안경을 벗지 않았다⁠. 안경을 벗지 않고 말하는 원장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6월 10일 심사에서 우리가 떨어지면 시가 위탁을 딴 데로 넘겨요⁠. 그럼 우리 선생님 열한 명이 다 새로 면접을 봐야 해요⁠. 영아반 선생님은 쉰여섯이에요⁠. 다시 면접 보면 안 붙어요⁠. 나 그 선생님 얼굴 보고 이 말 하는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가면 더 나쁘다고 했잖아요⁠.⁠”

“⁠네⁠. 그래도 갑니다⁠.⁠”

원장은 서류 두 장을 기윤의 손에 쥐여 주고⁠, 작은 의자 등받이를 짚고 두 번 만에 일어섰다⁠. 연장반 불을 끄고 나가다가 문턱에서 뒤돌아보았다⁠.

“⁠선생님⁠, 그날 우산 가져가요⁠. 5월 6일 비 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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