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89자)

오 분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토요일 열한 시⁠, 고해준은 일산 호수공원 앞 아파트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기 목을 보고서야 수건을 두르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평일에 감던 버릇이 주말에도 목에 붙어 있었다⁠. 수건을 빼서 주머니에 쑤셔 넣는 사이 솔찬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전부 누르려고 까치발을 들었다⁠.

“⁠솔찬아⁠, 십칠 층만⁠.⁠”

“⁠다른 층 사람들도 엄마 보고 싶을 수 있잖아⁠.⁠”

문이 열리자 현관에 먼저 나와 있던 사람은 다엘이 아니라 다엘의 어머니였다⁠. 솔찬의 외할머니는 예순넷인데 목소리는 마흔쯤에 멈춰 있었다⁠. 외할머니가 솔찬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허리를 짚고 내려놓았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고 서방은 얼굴이 왜 이렇게 탔어⁠? 배달하면서 선크림은 안 발라⁠?⁠”

“⁠이혼한 사위한테 서방이라고 하시면 안 돼요⁠, 어머니⁠.⁠”

“⁠그럼 뭐라고 불러⁠. 고 기사⁠?⁠”

다엘이 부엌에서 나와 솔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솔찬은 해준의 바지 자락을 쥔 채 다엘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물었다⁠.

“⁠엄마 화면 밖으로 언제 나왔어⁠?⁠”

“⁠두 주 전에⁠. 비행기 타고⁠.⁠”

“⁠비행기가 화면을 뚫었어⁠?⁠”

외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리며 솔찬의 손을 잡았다⁠. 호수공원에 오리 보러 가자는 말에 솔찬이 해준을 올려다봤고⁠,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문이 닫히자 집 안이 조용해졌다⁠.

다엘은 해준을 거실이 아니라 복도 끝 방으로 데려갔다⁠. 벽에 초록 공룡 벽지가 발라져 있었고⁠, 낮은 침대에는 굴러떨어지지 않게 가드가 둘려 있었다⁠. 책장 맨 아래 칸에 솔찬이 화면 너머로 자랑했던 그림책들이 같은 순서로 꽂혀 있었다⁠. 다엘은 일요일 영상 통화마다 책장을 보고 순서를 외웠다⁠.

“⁠여기서 어린이집까지 차로 십오 분이야⁠. 출근길에 내려 주면 돼⁠.⁠”

“⁠행신동에서 일산으로 옮기자는 거야⁠?⁠”

“⁠볕뜰 그대로 다녀도 돼⁠. 내가 데려다주고⁠, 엄마가 데리러 가면 돼⁠. 다섯 시에⁠.⁠”

해준은 다섯 시라는 말에서 걸음을 멈췄다⁠. 다섯 시면 연장반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일곱 시 십사 분의 현관도⁠, 유리문 이마 자국도 없는 하원이었다⁠.

식탁에는 외할머니가 아침부터 끓였다는 갈비찜이 놓여 있었다⁠. 다엘은 해준 앞에 밥공기를 밀고 자기는 물만 마셨다⁠. 결혼했을 때도 다엘은 싸울 날이면 밥을 먹지 않았다⁠.

“⁠먹어⁠. 엄마가 너 먹이려고 한 거야⁠.⁠”

“⁠이거 먹으면 지는 거 아니야⁠?⁠”

“⁠먹고 져⁠.⁠”

해준은 갈비 한 점을 먹었다⁠. 맛있어서 화가 났다⁠. 다엘이 식탁 위에 하얀 봉투 하나를 올렸다⁠. 봉투에 법무법인 이름이 찍혀 있었다⁠.

“⁠변호사가 증거 목록을 정리했어⁠. 네 밤 배달 시간⁠, 아랫집 할머니 나이⁠, 1월 사진⁠.⁠”

“⁠할머니가 일흔하나신데 뭐⁠. 우리 애를 나보다 잘 재우셔⁠.⁠”

“⁠일흔한 살 할머니가 새벽에 쓰러지면 다섯 살짜리가 119 눌러⁠?⁠”

해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엘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고⁠, 틀리지 않은 말은 반박할 자리가 없었다⁠.

“⁠네가 떠날 때는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때 너 허리 멀쩡했어⁠. 지금은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식탁을 짚어⁠.⁠”

“⁠미국 병원에서 사람 허리만 봤냐⁠.⁠”

“⁠시애틀 요양병원에서 밤 근무 이 년 했어⁠. 밤에 혼자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내가 너보다 잘 알아⁠.⁠”

다엘이 처음으로 말을 길게 했다⁠. 해준은 말끝을 잡지 못했다⁠.

“⁠밤 배달 그만둘게⁠. 그럼 네가 내밀 게 하나 줄겠지⁠.⁠”

“⁠그만두면 월세는⁠?⁠”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선생님 건은⁠?⁠”

해준이 다엘을 보았다⁠. 다엘은 물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선생님은 건드리지 마⁠. 규정 지킨 사람이야⁠.⁠”

“⁠규정 지킨 사람이 새벽 네 시에 네 집 앞에 있었어⁠?⁠”

현관 도어락이 울리고 솔찬이 오리 깃털 하나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해준과 다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외할머니가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둘이 싸웠지⁠? 공기가 갈비찜보다 짜⁠.⁠”

외할머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솔찬의 손을 씻기러 욕실로 가면서 한마디를 더 보탰다⁠.

“⁠고 서방⁠, 나 아직 행신동 교회 다닌다⁠. 새벽 기도 차가 너네 빌라 앞에 서⁠. 그러니까 밤에 애 혼자 두지 마⁠. 내가 다 보여⁠.⁠”

*

일요일 밤 열 시⁠, 추아란은 거실 소파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회사 메신저와 반 단톡방과 안방에서 오는 남편의 메시지를 번갈아 받았다⁠. 남편은 3월부터 육아휴직 중이었고⁠, 휴직한 뒤로 말이 세 배쯤 늘었다⁠. 안방 문까지는 열 걸음이었는데 남편은 문을 열지 않고 글자를 보냈다⁠. 「⁠둘째 잠들었음👍⁠」 「⁠첫째가 엄마 오면 깨워 달래⁠」 「⁠근데 이유식 큐브 몇 개 남았는지 알아⁠?⁠」

아란은 남편 창에 「⁠냉동실 왼쪽 서랍⁠. 그리고 할 말 있으면 거실로 와⁠」를 보내고 단톡방을 열었다⁠. 안 읽은 메시지가 일흔둘이었다⁠.

「⁠금요일 저녁 현관에서 큰 소리 났다는데 혹시 아시는 분⁠?🙏⁠」 「⁠저도 들었어요⁠」 「⁠무서웠대요 우리 애가⁠」 「⁠솔찬이 엄마래요⁠. 미국에서 왔대요⁠」 「⁠근데 담임쌤이랑 솔찬이 아빠 원래 맨날 현관에서 웃고 계시지 않았어요⁠?ㅎㅎ⁠」

ㅎㅎ 두 글자에서 아란의 손가락이 멈췄다⁠. 반대표를 맡은 지 한 달⁠, 단톡방에서는 ㅎㅎ 다음에 늘 사진이 올라왔다⁠. 6월이면 남편이 복직했고⁠, 그러면 아란의 아들도 연장반에서 일곱 시 넘어까지 남아야 했다⁠. 일곱 시 넘어까지 아이를 봐 주는 교사는 볕뜰에 남궁기윤 하나뿐이었다⁠.

아란은 문장을 세 번 고쳐 쓰고 보냈다⁠. 「⁠확인 안 된 이야기는 자제 부탁드려요😊⁠」 말풍선 옆 숫자가 스물셋에서 하나씩 줄었다⁠. 안방 문이 열리고 남편이 고개만 내밀었다⁠.

“⁠여보⁠, 반대표 공지에 웃는 얼굴 붙이면 더 무서워⁠.⁠”

“⁠그러니까 붙였지⁠.⁠”

월요일 여덟 시 사십 분⁠, 남궁기윤은 원장실 소파 끝에 앉아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원장 엄미금은 책상 위에 출력한 종이 넉 장을 나란히 펼쳤다⁠. 맨 위 종이에 「⁠민원 접수⁠」라는 글자와 표다엘의 이름이 있었다⁠.

“⁠어머님이 아침 여덟 시에 오셨어요⁠. 출근 전에⁠. 정장 입고⁠.⁠”

“⁠금요일 하원 건이면⁠, 동의서대로 했습니다⁠.⁠”

“⁠그건 잘하셨어요⁠. 그 부분은 나도 어머님께 그렇게 말씀드렸어⁠.⁠”

원장은 두 번째 종이를 기윤 쪽으로 밀었다⁠. 「⁠담임교사와 부의 사적 친분으로 인한 아동 관찰 기록의 공정성 우려⁠」 법률 서류에서 그대로 옮겨 적은 문장이었다⁠.

“⁠어머님이 해바라기반 관찰 기록을 열람 신청하셨어요⁠. 친권자라 보여 드려야 해요⁠. 그리고 하원 동의서에 본인 이름 올려 달래요⁠.⁠”

“⁠아버님께 여쭤봐야 하지 않나요⁠?⁠”

“⁠법원 결정 전까지는 두 분 다 보호자예요⁠. 한 분이 원하시면 올려 드려야 해요⁠.⁠”

기윤은 동의서 칸에 새로 들어갈 이름을 떠올렸다⁠. 일곱 시 십사 분의 현관에 앞으로 두 사람이 올 수 있었다⁠.

원장이 세 번째 종이를 짚었다⁠. 해바라기반 단톡방 공지를 누군가 캡처해 출력한 것이었다⁠. 「⁠금요일 저녁 현관에서 큰 소리 났다는데 혹시 아시는 분⁠?🙏⁠」 아래로 「⁠저도 들었어요⁠」 「⁠무서웠대요 우리 애가⁠」 「⁠누가 소리 질렀어요⁠?⁠」가 이어졌고⁠, 맨 끝에 반대표 추아란의 글이 붙어 있었다⁠. 「⁠확인 안 된 이야기는 자제 부탁드려요😊⁠」

“⁠이모티콘이 웃고 있는데 하나도 안 웃겨요⁠.⁠”

“⁠그러니까요⁠. 원장님도 단톡방 안 하시는데 이걸 어떻게 받으셨어요⁠?⁠”

“⁠단톡방에 안 들어가도 단톡방은 나한테 와요⁠. 이십 년째 그래⁠.⁠”

원장은 마지막 종이를 뒤집지 않은 채 손바닥으로 덮었다⁠.

“⁠선생님⁠, 이제부터 연장반 하원 인계는 두 교사가 같이 해요⁠. 보조 선생님 한 분 더 붙일게⁠. 현관에서는 오 분⁠. 아이 하루 얘기만⁠. 개인 번호로 연락 금지⁠.⁠”

“⁠오 분이면 운동화 끈 묶다가 땡이에요⁠.⁠”

“⁠그럼 끈은 아버님이 집에 가서 묶으라고 해요⁠.⁠”

“⁠원장님⁠, 솔찬이는 현관에서 매듭을 지어야 집에 가요⁠.⁠”

원장이 안경을 벗었다⁠. 원장은 화를 낼 때 안경부터 벗었다⁠.

“⁠선생님⁠, 나 6월에 위탁 재심사예요⁠. 시청 심사위원들이 민원 건수부터 봐요⁠. 우리 선생님 열한 명 월급이 그 숫자에 걸려 있어요⁠. 남자 선생님 뽑을 때도 나 민원 각오하고 뽑았어⁠. 선생님 지키려고 오 분이라는 거예요⁠.⁠”

기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원장은 손바닥으로 덮고 있던 종이를 끝내 뒤집지 않고 서랍에 넣었다⁠. 서랍이 닫히기 전에 기윤은 종이 귀퉁이의 날짜를 보았다⁠. 3월 13일⁠.

“⁠아버님 댁에 가신 적 있어요⁠?⁠”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 말은 법원에서도 안 통하고 시청에서도 안 통해요⁠. 나한테만 통해⁠. 오늘까지만⁠.⁠”

*

월요일 오후 다섯 시⁠, 바름택배 고양 서부 대리점 상차장에서 마봉칠이 크롭 바람막이 지퍼를 배꼽 위에서 멈추고 해준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영포티가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아저씨래⁠. 나 애쓰는 거 맞잖아⁠. 그럼 칭찬이지⁠?⁠”

“⁠형님 배꼽이 애쓰고 있어요⁠.⁠”

“⁠배꼽도 젊어야지⁠.⁠”

해준은 웃지 않고 상자를 쌓았다⁠. 봉칠이 해준 손에서 상자 하나를 빼앗아 대신 들었다⁠.

“⁠너 오늘 왼쪽으로만 들더라⁠.⁠”

“⁠소장님한테 밤 배달 빼 달라고 할 거예요⁠.⁠”

“⁠미쳤냐⁠? 새벽 거가 낮 거 두 배야⁠.⁠”

“⁠애 엄마가 돌아왔어요⁠.⁠”

해준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떨었다⁠. 「⁠[법원 고양지원] 심판청구서 부본이 송달되었습니다⁠. 전자소송 누리집에서 확인하십시오⁠.⁠」 봉칠이 어깨너머로 화면을 읽었다⁠.

“⁠법원이 문자도 보내⁠? 요즘 법원 느좋이네⁠.⁠”

“⁠형님⁠, 느좋은 이럴 때 쓰는 말 아니에요⁠.⁠”

봉칠은 상자를 든 채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한마디만 했다⁠.

“⁠그럼 낮에 내 구역 아파트 두 동 가져가⁠. 나 계단 많은 데가 무릎에 안 맞아⁠.⁠”

*

일곱 시 십사 분⁠, 기윤은 현관 유리문 앞에 보조교사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보조교사는 손에 출석부를 들고 있었다⁠. 출석부를 든 사람이 옆에 있으면 무슨 말이든 기록이 될 것처럼 들렸다⁠.

솔찬은 유리문에 이마를 댔다⁠. 계단 아래에서 해준이 손을 흔들었고⁠, 유리에 작은 손바닥 둘이 붙었다⁠. 거기까지는 금요일과 같았다⁠.

기윤이 문을 열었다⁠. 노란 가방 끈은 접지 않은 채 늘어져 있었다⁠.

“⁠아버님⁠, 솔찬이 오늘 점심 잘 먹었습니다⁠. 낮잠 한 시간 잤고⁠, 오후에 바깥 놀이 했습니다⁠.⁠”

해준은 무릎을 꿇다가 멈칫했다⁠. 기윤의 목소리가 원장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오늘의 한 줄은요⁠?⁠”

“⁠알림장에 올렸습니다⁠.⁠”

해준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볕뜰어린이집 알림장 앱에 넉 달 만에 처음으로 해바라기반 담임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솔찬이는 오늘 점심을 골고루 잘 먹었습니다⁠.⁠」 브로콜리 이야기도⁠, 숲 이야기도 없었다⁠.

솔찬이 운동화 끈을 풀어 해준 앞에 발을 내밀었다⁠. 보조교사가 손목시계를 한 번 보았다⁠. 해준은 매듭을 두 번 감다가 한 번만 감고 끝냈다⁠. 솔찬이 발을 빼며 항의했다⁠.

“⁠아빠⁠, 두 번⁠.⁠”

“⁠집에 가서 두 번 하자⁠.⁠”

기윤이 가방을 내밀었다⁠. 끈이 길게 늘어져 해준의 손에 먼저 닿았고⁠, 기윤의 손은 끈 위쪽 끝에 머물렀다⁠. 두 손 사이에 끈 한 뼘이 비어 있었다⁠.

“⁠아버님⁠, 앞으로 현관 인계는 오 분 안에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님도 하원 보호자로 등록되셨습니다⁠.⁠”

해준이 끈을 당겼다⁠. 기윤이 끈을 놓았다⁠. 해준은 기윤을 보았고⁠, 기윤은 보조교사가 든 출석부를 보았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해준이 솔찬을 안아 올리며 허리를 왼손으로 짚었다⁠. 기윤은 짚는 손을 보았다⁠. 보조교사가 출석부에 하원 시각을 써 넣었다⁠. 일곱 시 십구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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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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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하솔2026.11.01· 2화

    목에 수건 두르고 나온 걸 엘리베이터 거울 보고 알아차리는 아빠, 육아하는 사람이라 너무 공감돼요.

    • 탁은담작가2026.11.01

      해준 씨는 평일 아침의 몸으로 주말을 살아요. 솔찬이가 버튼을 다 누르기 전에 수건부터 숨깁니다.

오 분 ·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