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400자)

네 시 칠 분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화요일 새벽 세 시⁠, 고해준은 일산의 한 아파트 십구 층 복도에서 상자 넷을 문 앞에 내려놓았다⁠. 센서 등이 해준의 발소리에 맞춰 켜졌다가 상자를 내려놓는 사이 꺼졌다⁠. 해준은 어둠 속에서 팔을 흔들어 등을 다시 켰다⁠. 새벽 배송 기사는 하룻밤에 복도 등에 대고 손을 수십 번 흔들었다⁠.

배송 앱 요청란에는 「⁠문 앞 사진은 예쁘게 찍어 주세요♡⁠」가 떠 있었다⁠. 해준은 상자 넷을 크기 순서대로 줄 세우고 맨 위에 붙은 송장을 반듯하게 폈다⁠. 찍고 보니 상자들이 단체 사진을 찍는 가족 같았다⁠. 이 상자들을 보면 다섯 살짜리는 웃을 것이고⁠, 다섯 살짜리는 지금 아랫집 할머니의 소파 옆 이불에서 자고 있었다⁠. 3월에 욕실에서 넘어져 사흘 입원했던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도 밤을 맡겠다고 했고⁠, 해준은 밤마다 할머니의 지팡이 소리가 잘 들리는지부터 물었다⁠.

해준은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고 대리점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소장님⁠, 오늘 출근해서 말씀드릴 거 있습니다⁠」 보내자마자 아래에 「⁠ㅇㅇ 나도 있음⁠」이 붙었다⁠. 마봉칠이었다⁠. 새벽 세 시에 깨어 있는 마흔여섯 살은 영포티가 아니라 그냥 불면이라고 해준은 생각했다⁠.

여섯 시 이 분⁠, 빌라 주차장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자소송 알림이었다⁠. 「⁠상대방 준비서면 및 증거 제출⁠」 첨부 파일 다섯 개 가운데 하나에 「⁠갑 제4호증 — 2027⁠. 3⁠. 13⁠. 04⁠:07 촬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사진은 해준의 빌라 공동 현관을 길 건너편에서 찍은 것이었다⁠. 가로등 아래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밤색 머리⁠, 동그란 안경⁠, 앞치마 대신 회색 후드티⁠. 기윤의 한 손에는 해준의 집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들려 있었다⁠. 버리고 가겠다고 했던 것을 해준은 그제야 떠올렸다⁠. 사진 아래 다엘 측 변호사가 붙인 설명은 한 줄이었다⁠. 「⁠담임교사가 새벽 네 시경 상대방 주거지에서 나오는 장면⁠」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설명에 없었다⁠.

*

화요일 아홉 시⁠, 남궁기윤은 원장실 문을 닫기도 전에 책상 위의 사진을 보았다⁠. 원장 엄미금은 같은 사진을 넉 장 뽑아 놓았다⁠. 한 장에는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 기윤의 얼굴이 있었다⁠.

“⁠어머님 측 변호사가 내용증명을 보냈어요⁠. 담임 교체 요청⁠. 사진 첨부⁠.⁠”

원장은 소파를 가리키지 않았다⁠. 기윤도 앉지 않았다⁠.

“⁠말해 주세요⁠. 이번에는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지 말고⁠.⁠”

기윤은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3월 12일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아버님이 전화하셨어요⁠. 아랫집 할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지셔서 구급차가 왔고⁠, 아버님은 열두 시에 새벽 배송 상차가 잡혀 있었어요⁠. 두 시간 전에 빠지면 위약금이고 세 번이면 계약이 끊긴대요⁠.⁠”

“⁠번호는 어떻게 아셨대요⁠?⁠”

“⁠2월에 솔찬이가 일곱 시 이십오 분에 열이 났을 때 제가 드렸어요⁠. 어린이집 전화로는 아버님 운전 중에 못 받으셔서요⁠.⁠”

“⁠그래서 가셨어요⁠?⁠”

“⁠아버님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셨어요⁠. 오라고 하신 적은 없어요⁠. 제가 간다고 했어요⁠.⁠”

원장은 볼펜 뚜껑을 닫았다가 열었다⁠. 기윤은 3월 12일 밤을 순서대로 말했다⁠. 열두 시 십 분에 도착했고⁠, 솔찬은 자고 있었고⁠, 기윤은 부엌 바닥에 앉아 있었다⁠. 개켜지지 않은 빨래가 소파에 산처럼 쌓여 있어서 다 개켰다⁠. 택배 조끼를 어떻게 개야 하는지 몰라 세 번 접었다 폈다⁠. 솔찬이 한 번 깨서 물을 마셨고⁠, 기윤을 보고 선생님이 왜 우리 집에 있느냐고 물었다⁠. 꿈속에서 출근했다고 대답하자 솔찬은 다시 잤다⁠. 해준은 네 시에 돌아왔고⁠, 기윤은 네 시 칠 분에 계단을 내려왔다⁠.

“⁠음식물 쓰레기는 왜 들고 나왔어요⁠?⁠”

“⁠부엌 바닥에 앉아 있으니까 냄새가 나서요⁠.⁠”

원장이 처음으로 웃을 뻔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 그거 다 착한 일이에요⁠. 그리고 다 규정 위반이에요⁠. 교사가 담당 아동 집에 밤에 사적으로 간 거⁠, 보호자랑 사적으로 연락한 거⁠. 둘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가셨으면 더 나빠요⁠.⁠”

원장은 서랍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교직원 업무 분장 변경⁠」 이미 기윤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부터 해바라기반 담임은 이 선생님이 맡아요⁠. 선생님은 영아반 보조⁠. 경위서는 금요일까지⁠. 연장반은 대신할 사람 구할 때까지만 선생님이 맡되⁠, 현관 인계는 다른 선생님이 해요⁠.⁠”

“⁠솔찬이한테는 뭐라고 하죠⁠?⁠”

“⁠선생님이 아기 반에 도와주러 갔다고 해요⁠. 거짓말 아니잖아⁠.⁠”

기윤은 서류에 서명했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원장실 안에서 크게 울렸다⁠.

*

화요일 오후 한 시⁠, 해준은 낮 배송 구역 한가운데에 탑차를 세워 둔 채 볕뜰어린이집 현관 벨을 눌렀다⁠. 열두 시에 알림장 앱에 공지가 올라왔다⁠. 「⁠해바라기반 담임 변경 안내⁠」 이유는 「⁠교직원 업무 조정⁠」 한 줄이었다⁠.

낮잠 시간이라 현관 안은 조용했다⁠. 보조교사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문을 열었고⁠, 해준은 남색 조끼를 입은 채 원장실까지 걸어 들어갔다⁠. 신발을 벗는 것을 잊어서 복도에 운동화 자국이 다섯 개 찍혔다⁠.

“⁠원장님⁠, 제가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잘못 없어요⁠.⁠”

원장 엄미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원장은 해준의 발을 먼저 보았다⁠.

“⁠아버님⁠, 신발⁠.⁠”

해준은 원장실 문턱에서 운동화를 벗어 손에 들었다⁠. 운동화를 든 채 서 있으니 화를 낼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거절했어요⁠. 제가 매달렸어요⁠. 담임 다시 돌려주세요⁠.⁠”

“⁠아버님⁠, 방금 하신 말 그대로 법원 가서 하시면 선생님은 아버님한테 매달림을 당한 교사가 돼요⁠. 그게 나아요⁠?⁠”

해준은 말문이 막혔다⁠. 원장은 창밖을 가리켰다⁠. 현관 위 처마 밑에 작은 둥근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지금 낮잠 시간에 택배 조끼 입고 신발 신은 채 원장실에 들어오신 거⁠, 저기 다 남아요⁠. 단톡방에는 벌써 올라갔을 거고⁠. 아버님이 오실 때마다 선생님이 한 번씩 더 찍혀요⁠.⁠”

“⁠그럼 저는 뭘 해요⁠.⁠”

“⁠일곱 시 십사 분에 오세요⁠. 일곱 시 십삼 분도 말고 십오 분도 말고⁠. 그리고 아무 말 하지 말고 가세요⁠. 그게 지금 아버님이 선생님한테 해 줄 수 있는 제일 큰 거예요⁠.⁠”

원장의 목소리는 끝까지 다정했다⁠. 해준은 다정한 목소리로 내리는 지시가 제일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다엘의 어머니도 그렇게 말했다⁠.

원장실을 나서다가 해준은 복도 끝 영아반 유리창 앞에서 멈췄다⁠. 기윤이 등에 아기 하나를 업고 다른 아기의 기저귀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업힌 아기가 기윤의 밤색 머리카락을 한 줌 쥐고 있었다⁠. 기윤이 유리 너머 해준을 보았다⁠. 기윤은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가세요⁠.

해준은 운동화를 든 채 현관까지 걸었고⁠, 현관에서야 운동화를 신었다⁠.

*

화요일 오후 세 시⁠, 표다엘은 호수대학병원 국제진료센터 상담실에서 몽골 환자 가족에게 입원 서약서를 한 줄씩 설명하고 나와 휴대전화를 켰다⁠. 변호사의 문자가 와 있었다⁠. 「⁠어린이집에도 내용증명 발송 완료했습니다⁠. 담임 교체 오늘 처리됐다고 합니다⁠.⁠」

다엘은 복도 끝 비상계단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어린이집에는 보내지 말자고 했잖아요⁠. 법원에만 내자고⁠.⁠”

“⁠어머님⁠, 담임이 바뀌어야 관찰 기록이 중립이 됩니다⁠. 기록을 쓰는 사람이 아버님 편이면 우리 증거가 다 약해져요⁠.⁠”

“⁠그 사진⁠, 엄마가 3월에 저한테 보낸 거예요⁠. 저 미국에 있을 때⁠. 저는 그걸 보고 비행기 표를 끊었어요⁠. 선생님 자르라고 끊은 게 아니에요⁠.⁠”

“⁠자른 게 아니라 옮긴 겁니다⁠.⁠”

변호사는 말을 고르는 사람이었다⁠. 다엘은 통화를 끊고 계단에 앉았다⁠. 가방 안에 어제 열람한 해바라기반 관찰 기록 사본이 들어 있었다⁠. 손으로 쓴 글씨가 반듯했다⁠. 다엘은 아무 데나 펼쳤다⁠.

「⁠4월 2일⁠. 솔찬이가 엄마는 화면 속에서 자고 있으니까 낮에는 깨우면 안 된다고 함⁠. 시차를 솔찬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음⁠. 저녁에 아버님께 말씀드리지 않음⁠.⁠」

다엘은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아버님께 말씀드리지 않음⁠. 담임은 이 말을 해준에게 하지 않았다⁠. 해준이 들으면 다엘을 원망할 말이었다⁠. 비상계단 창밖으로 호수공원 버드나무가 흔들렸다⁠. 다엘은 사본을 덮고⁠, 아이가 엄마를 깨우지 않으려고 낮마다 조용히 놀았을 몇 해를 무릎 위에 올려 둔 채 한참 앉아 있었다⁠.

오후 다섯 시 반⁠, 해준은 대리점 소장실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말했다⁠.

“⁠새벽 배송 빼 주세요⁠. 오늘부터요⁠.⁠”

“⁠고 기사⁠, 새벽 거가 자네 수입 반이야⁠.⁠”

“⁠압니다⁠.⁠”

“⁠그럼 낮 구역도 손봐야 돼⁠. 일곱 시에 애 데리러 간다며⁠. 오후 늦게 몰리는 상가 쪽은 봉칠이 형님한테 넘기고⁠.⁠”

소장이 모니터를 돌려 구역 지도를 보여 주었다⁠. 해준의 구역에서 노란 칸이 세 개 빠져 봉칠의 파란 칸으로 넘어갔다⁠. 해준은 지도에서 다음 달 월세가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문밖에서 듣고 있던 봉칠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해준아⁠, 대신 나 계단 많은 아파트 두 동 줬잖아⁠. 그거 너 가져⁠. 내 무릎이 너 허리보다는 조금 젊어⁠.⁠”

*

일곱 시 십사 분⁠, 해바라기반 새 담임이 문을 열었다⁠. 경력이 이십 년 넘은 선생님이었고⁠, 손이 빨랐다⁠. 노란 가방 끈은 접히지 않았다⁠. 솔찬은 운동화 끈을 풀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왔다⁠.

새 담임이 출석부에 하원 시각을 적으며 말했다⁠.

“⁠아버님⁠, 솔찬이가 오늘 낮잠 시간에 안 자고 천장만 봤어요⁠. 왜 안 자느냐니까 생각할 게 있대요⁠.⁠”

“⁠무슨 생각이요⁠?⁠”

“⁠그건 아빠한테도 비밀이래요⁠. 다섯 살한테도 비밀이 있더라고요⁠.⁠”

“⁠아빠⁠, 남궁 선생님은 아기 반 도와주러 갔대⁠.⁠”

“⁠그렇대⁠?⁠”

“⁠아기들은 브로콜리 안 먹잖아⁠. 거기 가면 숲 얘기 못 하잖아⁠.⁠”

해준은 대답 대신 솔찬을 안아 올렸다⁠. 왼쪽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연장반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고⁠, 창틀 아래로 연두색 앞치마 자락이 지나갔다⁠.

밤 열 시⁠, 솔찬을 재운 뒤 해준은 부엌 바닥에 앉아 갑 제4호증을 손가락 두 개로 벌려 키웠다⁠. 기윤의 얼굴을 키우려던 것이 아니었다⁠. 사진을 찍은 자리가 궁금했다⁠. 화면 귀퉁이에 유리 한 장이 비쳐 있었다⁠. 버스 정류장 가림막이었다⁠. 가림막에 붙은 노란 스티커 글자가 거꾸로 읽혔다⁠. 「⁠행신 늘빛교회 새벽기도 차량 04⁠:30⁠」 유리에 사진 찍는 사람의 소매 끝이 반사되어 있었다⁠. 보라색 누빔 조끼였다⁠.

해준은 토요일 갈비찜 냄새를 떠올렸다⁠. 고 서방⁠, 새벽 기도 차가 너네 빌라 앞에 서⁠.

*

수요일 아침 아홉 시 반⁠, 해준은 솔찬을 등원시키고 곧장 일산으로 차를 몰았다⁠. 십칠 층 현관 벨을 누르자 안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연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성경 가방을 어깨에 메고⁠, 보라색 누빔 조끼를 입고 있었다⁠.

“⁠어머⁠, 고 서방⁠. 다엘이 출근했는데⁠.⁠”

“⁠어머님 뵈러 왔어요⁠.⁠”

해준은 휴대전화 화면을 외할머니 눈앞에 들었다⁠. 유리 귀퉁이의 보라색 소매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3월 13일 새벽 네 시 칠 분에 저희 빌라 앞 정류장에 계셨어요⁠?⁠”

외할머니는 화면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조끼 단추를 하나 채우고 해준을 올려다보았다⁠.

“⁠새벽 기도 차 기다리는데 하나님이 보여 주시더라⁠. 내 손주 사는 집에서 남자가 나오는 거⁠.⁠”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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