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29자)

반지가 고른 손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여섯 번째 화는 분수대 앞이었다⁠. 쪽대본대로라면 내가 에블린을 밀치고⁠, 에블린이 내 왼뺨을 세게 쳐야 했다⁠. 나는 첫 화의 기억을 믿었다⁠. 분수에 머리를 담갔다가 들어 올렸다⁠. 차가운 물이 새빨간 머리칼을 타고 쏟아져 드러난 어깨를 적셨다⁠.

「⁠또 이거⁠?⁠」 「⁠첫 화 재탕⁠」 「⁠스킵⁠」

장면이 십 초 앞으로 잘렸고⁠, 막대는 무심하게 끝까지 찼다⁠. 슥⁠. 나는 젖지 않은 머리로 분수대 앞에 다시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말랐는데 귓속은 아직 물이 찬 것처럼 먹먹했다⁠.

보는 사람들은 같은 반전을 두 번 쳐 주지 않았다⁠. 첫 화에서 「⁠미쳤냐⁠」라고 써 준 손가락들이 여섯 번째 화에서는 「⁠재탕⁠」이라고 썼다⁠. 반전은 쓰면 닳았다⁠. 매번 새것이어야 했다⁠.

두 번째 삼 분에는 에블린을 지켜보았다⁠. 막대가 절반쯤 찼을 때 에블린이 움직였다⁠. 내가 밀지도 않았는데 뒤로 몸을 젖혀 분수 속으로 넘어가려 했다⁠. 다과회의 홍차와 같은 수였다⁠. 스스로 빠지고 나를 가리키면 반전은 또 에블린 몫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에블린의 손목을 잡았다⁠. 에블린의 몸이 분수 위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멈췄다⁠. 굽 높은 구두 뒤꿈치가 대리석 가장자리에 겨우 걸쳐 있었다⁠. 에블린이 나를 노려보며 손목을 비틀었다⁠.

“⁠놓으세요⁠.⁠”

“⁠제가 놓으면 에블린 씨가 반전이고⁠, 안 놓으면 제가 반전이에요⁠.⁠”

“⁠놓으시라고요⁠.⁠”

“⁠싫어요⁠. 이 드레스 젖으면 또 저 때문이라고 할 거잖아요⁠.⁠”

나는 두 손으로 에블린을 끌어 올렸다⁠. 에블린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바로 세워 놓고⁠, 흐트러진 금발 웨이브를 손가락으로 빗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에블린의 얼굴이 굳었다⁠. 악녀가 여주인공의 머리를 매만져 주는 장면은 백 화짜리 드라마를 통틀어 없었다⁠. 두둥⁠.

「⁠헐⁠」 「⁠악녀가 구해줌⁠?⁠?⁠?⁠」 「⁠이 드라마 여주보다 악녀가 더 주인공 같음⁠」

굳은 분수 물방울 사이로 에블린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지만 이번에도 알아들었다⁠. ‘⁠두고 보세요⁠.⁠’

*

일곱 번째 화에서는 다섯 번을 돌았다⁠. 원작대로 회랑에서 영애들이 공녀를 비웃는 장면이었는데⁠, 비웃음을 받아치는 말은 처음 두 번 「⁠그냥 말싸움⁠」 소리를 들었고⁠, 세 번째에 꺼낸 상담원 말투는 「⁠상담원 드립 그만⁠」이라는 글자에 묻혔다⁠. 다섯 번째에 나는 비웃는 영애 셋에게 차례로 “⁠그 드레스 어디서 맞추셨어요⁠? 저도 하나만요⁠.⁠” 하고 물었다⁠. 영애들이 서로 얼굴을 보다가 앞다투어 재단사 이름을 대기 시작했고⁠, 비웃음은 주문 상담이 되었다⁠. 북이 울렸다⁠.

허공의 숫자가 「⁠조회수 82만⁠」이 되었다⁠. 첫 화에서 「⁠사이다⁠」만 쓰던 사람들이 「⁠악녀 서사 맛집⁠」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밤마다 에블린의 베개 밑에서 나오는 빨간 펜 글씨는 짧아졌다⁠. 에블린이 복도에서 나를 붙잡고 쪽대본을 펼쳐 보였다⁠. 여백에 「⁠공녀 제발⁠」 넉 자가 세 번 겹쳐 쓰여 있었다⁠.

“⁠작가님이 우세요⁠.⁠”

“⁠글씨가 우는 거죠⁠. 작가님은 모르죠⁠.⁠”

“⁠글씨가 울면 작가님도 울어요⁠. 저는 알아요⁠. 맨날 우는 사람이라서⁠.⁠”

*

여덟 번째 화는 밤의 분수였다⁠. 원작에서 가장 조회수가 높은 화 가운데 하나였다⁠. 달빛이 물 위에 은박처럼 깔렸고⁠, 분수 가장자리에 카시안과 에블린이 마주 서 있었다⁠. 카시안의 흰 제복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했고⁠, 금 견장에서 술이 흔들렸다⁠. 손바닥 위에 작은 상자가 열려 있었다⁠. 반지는 금빛이었다⁠. 일 년짜리 계약 결혼을 맺는 황실 반지였다⁠.

첫 삼 분에 나는 분수대에 가지 않았다⁠. 반지를 쳐 내지 않으면 뺨도 없었다⁠. 정원 끝 장미 덤불 뒤에 서서 막대가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카시안이 반지를 내밀었고 에블린이 눈물을 머금고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달빛⁠, 눈물⁠, 금반지⁠. 반전만 없었다⁠. 원작에서 이 장면을 뒤집는 것은 뛰어드는 악녀였다⁠. 막대가 찼다⁠. 슥⁠.

두 번째 삼 분이 시작되자 에블린이 고개를 돌려 장미 덤불을 똑바로 보았다⁠. 카시안이 상자를 여는 사이에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네⁠?⁠”

‘⁠공녀님 없으면 안 넘어가요⁠. 들어와서 치세요⁠.⁠’

웃음을 참느라 덤불 가시에 손등이 긁혔다⁠. 나를 죽이려는 여주인공이 나 없이는 청혼도 못 받았다⁠. 나는 걸어 나가 박수를 쳤다⁠.

“⁠축하드려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 「⁠그래서 뭐⁠」 「⁠노잼⁠」 슥⁠.

세 번째 삼 분에는 원작대로 달려 들어갔다⁠. 드레스 자락을 걷어쥐고⁠, 분수대 앞까지 뛰어가⁠, 카시안의 손바닥을 손등으로 쳐 냈다⁠. 손등에 반지 상자의 모서리가 닿았다⁠. 금반지가 상자에서 튀어 올랐다⁠.

반지는 달빛 속에서 천천히 돌았다⁠. 금빛이 한 바퀴 돌 때마다 반짝였다⁠. 에블린이 오른손을 들었다⁠. 대본대로 내 뺨을 칠 손이었다⁠. 카시안이 반지를 보았다⁠. 나는 반지만 보았다⁠. 촛대 받침의 은고리를 침대 밑까지 쫓아가 주웠던 밤이 손가락에 남아 있었다⁠.

손을 내밀었다⁠. 반지가 손바닥이 아니라 펼친 약지 끝에 떨어졌다⁠. 떨어진 반지가 내 손가락을 타고 스르륵 미끄러져 마디 아래까지 내려갔다⁠. 금이 살갗에 닿는 순간 따뜻해졌다⁠. 체온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에블린의 손바닥이 내 얼굴 앞에서 멈췄다⁠. 에블린은 치지 않았다⁠. 내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카시안도 보고 있었다⁠.

나는 반지를 빼려고 했다⁠. 반지는 꿈쩍하지 않았다⁠. 손가락의 일부가 된 것처럼 돌지도 않았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황실의 반지는 낀 손을 놓지 않소⁠.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

두둥⁠. 북소리가 지금까지 들은 것 가운데 가장 컸다⁠. 허공에 붉은 글자가 두 줄로 떴다⁠.

「⁠충격 반전 — 계약 반지가 악녀의 손에⁠」 「⁠다음 화에 계속⁠」

하얀 글자가 달빛을 가릴 만큼 쏟아졌다⁠. 「⁠미쳤다미쳤다미쳤다⁠」 「⁠여주 바뀜⁠?⁠?⁠」 「⁠작가님 이거 수습 가능⁠?⁠」 「⁠이 장면 클립 따 간다⁠」 숫자가 굴러가듯 올라갔다⁠. 「⁠조회수 104만⁠」

굳은 분수 앞에서 카시안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북이 울린 뒤라 대사가 나올 리 없는 자리였다⁠.

“⁠왜 쳐 내고 나서 받았소⁠?⁠”

“⁠떨어지면 아깝잖아요⁠. 비싸 보여서⁠.⁠”

카시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

밤에 에블린이 나를 황궁 주방으로 끌고 갔다⁠. 원작에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곳이라 처음에는 화덕도 찬장도 전부 회색이었다⁠. 에블린이 내 손목을 쥐고 서 있는 동안 찬장에 그릇이 그려지고⁠, 화덕에 그을음이 그려지고⁠, 선반 위에 버터 단지가 그려졌다⁠. 열어 본 곳이 셋이 되었다⁠. 에블린은 그려지자마자 버터 단지를 집었다⁠.

“⁠손 주세요⁠.⁠”

버터는 차가웠다⁠. 에블린이 내 약지에 버터를 두껍게 바르고 반지를 비틀었다⁠. 반지는 돌지 않았다⁠. 비누를 묻혔다⁠. 물에 담갔다⁠. 소금을 뿌렸다⁠. 소금은 왜 뿌리는지 둘 다 몰랐다⁠. 손가락만 점점 요리 재료가 되어 갔다⁠.

“⁠에블린 씨⁠, 저 지금 구워지기 직전이에요⁠.⁠”

“⁠가만히 계세요⁠.⁠”

에블린이 반지를 붙잡고 온몸으로 당겼다⁠. 나는 식탁 다리를 붙잡고 버텼다⁠. 버터 바른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에블린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반지는 그대로였다⁠. 에블린은 밀가루 포대 앞에 주저앉은 채 숨을 골랐다⁠. 금발 웨이브에 밀가루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이 반지가 있어야 제가 황궁에 들어가요⁠.⁠” 에블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계약 신부로 들어가서 일 년 동안 전하 곁에 있다가⁠, 서른 번째 화에서 공녀님이 사라지고⁠, 그다음에 계약이 진짜가 돼요⁠. 백 번째 화에서 황후가 되고요⁠. 첫 계단이 이 반지예요⁠. 계단을 공녀님이 끼고 계시다고요⁠.⁠”

“⁠빼 드리고 싶은데 안 빠져요⁠. 이건 진짜로요⁠.⁠”

“⁠알아요⁠.⁠” 에블린은 밀가루 묻은 손으로 소매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방금 베개 밑에서 나온 쪽대본이었다⁠. 맨 위에 검은 글씨로 「⁠급수정⁠」이라고 찍혀 있었다⁠.

「⁠아홉 번째 화⁠. 공녀⁠, 계약 신부로 황궁에 들어간다⁠. 서른 번째 화 죄목 추가 — 황태자의 반지를 훔친 죄⁠.⁠」

여백에는 빨간 펜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반지 회수는 서른 번째 화에서⁠. 손가락은 붙여 둘 것⁠. 편성팀은 지금 그림 좋다고 함⁠. 그래도 서른 번째 화는 그대로 — 작가⁠」

“⁠손가락은 붙여 둘 것⁠.⁠”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다정하시네요⁠, 작가님⁠.⁠”

에블린은 웃지 않았다⁠. 대신 버터 묻은 내 손을 한 번 더 붙잡았다⁠.

“⁠서른 번째 화에서 돌려받을 거예요⁠. 공녀님이 끼고 처형대에 올라가시면 저는 그 앞에서 기다릴 거예요⁠.⁠”

*

아홉 번째 화에서 나는 황궁 정문을 걸어 들어갔다⁠. 원작에서는 에블린이 걸었던 길이었다⁠. 양옆에 늘어선 귀족들이 마지못해 허리를 숙였고⁠, 공작이 누구보다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든 공작이 나를 보고 웃었다⁠. 딸이 황태자의 반지를 낀 것이 공작가에 무엇이 되는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원작 내내 나를 때리던 손이 이번에는 나를 향해 박수를 쳤다⁠. 나는 박수 소리가 뺨 맞는 소리보다 소름 끼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계단 아래에서는 시녀장이 계약 신부를 맞으러 나와 있었다⁠. 황후궁의 시녀들을 거느리는 여자였다⁠. 원작에서는 화면 구석에서 찻쟁반을 들고 지나가는 뒷모습으로만 나왔다⁠. 가까이서 보니 쟁반을 받치는 오른 손목에 흰 천이 감겨 있었다⁠. 천 위로 손목이 부어 있었다⁠. 시녀장은 내 반지를 보고⁠, 내 얼굴을 보고⁠, 아무 말 없이 허리를 숙였다⁠. 숙인 고개 너머로 시녀장이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한 번 주무르는 것이 보였다⁠. 몇 번이나 같은 쟁반을 들었는지 셀 수 없는 손목이었다⁠.

반전은 쉽게 오지 않았다⁠. 두 번 돌았다⁠. 세 번째 삼 분에 카시안이 대본에 없는 일을 했다⁠. 계단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카시안이 내 왼손을 잡았다⁠. 버터 냄새가 아직 남은 손이었다⁠. 카시안은 냄새를 맡고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손을 놓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귀족들 사이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두둥⁠.

「⁠손 잡았어ㅠㅠㅠ⁠」 「⁠버터 냄새 나는 거 표정에서 보임ㅋㅋ⁠」

*

밤의 황궁 동쪽 별채는 대부분 회색이었다⁠. 계약 신부의 방은 원작에서 에블린이 쓰던 방이라 다 그려져 있었지만⁠, 창밖 회랑은 흰 물감이었고 복도 끝은 연필 선으로 끝나 있었다⁠. 시녀들은 쟁반을 든 채 눈을 반쯤 감고 다음 대사를 중얼거렸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반지를 돌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손가락이 아직 버터 냄새를 풍겼다⁠. 머리 위 테두리의 분홍 막대는 비어 있었다⁠. 초침도 조용했다⁠.

자정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카메라가 꺼진 세상에서는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려면 손이 움직여야 하고⁠, 다음 대사가 아닌 일을 하려면 대본 밖에 있어야 했다⁠. 에블린은 노크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을 열었다⁠. 복도의 회색 속에 흰 제복이 서 있었다⁠. 짧은 은발 위로 연필 선 같은 복도 끝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카시안은 눈을 반쯤 감고 있지 않았다⁠. 금빛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보았다⁠. 대기실의 배우 얼굴이 아니었다⁠.

“⁠공녀⁠.⁠” 카시안이 천천히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처음 써 보는 사람처럼⁠. “⁠오늘 계단 앞에서⁠, 삼 분이 두 번 지나가지 않았소⁠?⁠”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다시읽기2026.10.31· 3화

    반지가 손가락에서 안 빠져서 악녀가 계약 신부가 되다니요. 카시안이 문 두드리는 데서 소리 질렀어요.

    • 윤솔채작가2026.10.31

      카메라가 꺼진 자리에서 처음 움직인 사람이 카시안이에요. 원작에 없던 장면이 그때부터 늘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