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311자)
쪽대본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황후의 정원에는 장미가 철도 모르고 피어 있었다. 바깥은 겨울이라는데 화면에 나오는 정원은 늘 오월이었다. 황후는 식탁 상석에 앉아 금테 찻잔을 입에 대지도 않고 들고만 있었다. 원작 내내 황후가 차를 마시는 장면은 한 번도 없었다. 차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쏟아지려고 거기 있었다. 하얀 식탁보 위에 찻잔이 여섯 개 놓였고, 귀족 영애들이 찻잔 손잡이를 새끼손가락까지 세워 들고 있었다. 머리 위 테두리의 분홍 막대는 막 차오르기 시작했다. 왼쪽 귀에서 초침이 째깍거렸다.
두 번째 화였다. 원작에서 공녀는 이 다과회에서 에블린의 찻잔을 엎는다. 홍차가 하얀 드레스에 번지고, 에블린이 공녀의 뺨을 치고, 황후가 「황궁의 품위를 지키거라」라고 말한다. 맞는 사람은 이번에도 나였다.
계획이 있었다. 찻잔을 엎는 대신 내 잔을 에블린에게 공손히 건넬 생각이었다. 악녀가 차를 따라 주는 장면이면 보는 사람들이 「헐」 정도는 써 줄 것이었다. 나는 찻주전자 손잡이를 잡았다.
에블린이 먼저 움직였다. 맞은편에서 자기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내 눈을 보면서 제 드레스 앞자락에 홍차를 쏟았다. 하얀 비단에 갈색 얼룩이 번져 나갔다. 에블린은 찻잔을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에 금방 물이 고였다.
“공녀님, 어떻게……!”
영애들이 일제히 나를 보았다. 내 손에는 찻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 차를 부은 손이었다. 두둥. 정원이 멈췄다. 황후의 손바닥이 내 얼굴 앞 한 뼘에서 굳어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여주 연기 미쳤다」 「악녀 이번엔 진짜 억울해 보임ㅋㅋ」
반전은 에블린 몫으로 넘어갔다. 화면이 넘어가면서 나는 깨달았다. 다음 화는 황후의 손바닥이 내려오는 데서 시작한다.
*
세 번째 화가 열리자마자 손바닥이 날아왔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짝. 소리는 내 머리 위에서 났다. 일어나 보니 공작이 왼뺨을 감싸 쥐고 서 있었다. 딸의 무례를 사과하러 황후 뒤로 다가오던 참이었다. 회색 수염이 떨렸다. 황후는 제 손바닥과 공작의 뺨을 번갈아 보았다.
「아빠가 맞음ㅋㅋㅋㅋㅋ」 「사이다 배달 사고」 「공작 표정 저장함」
황후가 사과하는 동안 공작은 나를 노려보았다. 대본에 없는 눈빛이었다. 원작의 공작은 화가 나면 바로 손을 들었다. 여기서는 황후 앞이라 손을 못 들었고, 대신 수염 끝을 꼬았다. 나는 공작의 손을 오래 보았다. 들리지 못한 손이 어디로 갈지 짐작이 갔다.
네 번째 화에서는 세상이 갑자기 빨라졌다. 영애들의 입이 참새처럼 움직였고, 부채가 파닥거렸고, 분수 물줄기가 성급하게 솟았다 떨어졌다. 「1.5배속 국룰」이라는 글자가 지나갔다. 보는 사람들이 배속을 올리면 이 세계도 배속이 올라갔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막차에서 단련된 귀라 1.5배속 대사는 오히려 편했다. 콜센터에서는 고객이 2배속으로 화를 냈다.
빨라지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건너뛰기였다. 영애 둘이 날씨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에 「노잼 스킵」이라는 글자가 몇 개 떠올랐고, 다음 순간 장면이 십 초 앞으로 뚝 잘려 있었다. 막대가 한 번에 한 마디씩 뛰었다. 지루하면 보는 사람들이 앞으로 넘겼고, 넘긴 만큼 내 삼 분이 줄었다. 정원에서 나는 지루할 권리를 잃었다.
빨라진 세상에서 공작이 분수대 옆으로 나를 끌고 갔다. 손목을 쥔 손아귀가 뼈를 눌렀다. 원작의 네 번째 화는 공작이 황후 앞에서 망신당한 분풀이로 딸의 뺨을 치는 장면이었다. 1.5배속이라 공작의 입이 더 빨리 움직였다.
“감히 황후 폐하 앞에서 이 아비를, 공작가의 체면을, 네가 무슨 낯으로—”
공작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나는 공작보다 더 빨리 말했다. 콜센터에서 고객이 2배속으로 화를 낼 때 쓰는 속도였다.
“네 고객님 말씀 정리해 드리면 첫째 황후 폐하 앞에서 체면이 상하셨고 둘째 따님 태도가 마음에 안 드시고 셋째 지금 손을 드신 상태시죠 맞으실까요? 해당 건은 제가 내부적으로 검토해서 다음 화까지 꼭 회신드리겠습니다. 다른 문의 없으시면 이만 통화 종료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손목을 빼냈다. 공작의 손은 어깨높이에서 갈 곳을 잃고 멈춰 있었다. 회색 수염 사이로 입이 몇 번 열렸다 닫혔다. 두둥.
「악녀 랩함ㅋㅋㅋㅋㅋ」 「공작 뇌정지」 「상담원 출신 악녀 설정 추가됐냐고」
빨라진 분수 물줄기가 허공에서 굳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내가 방금 말한 ‘첫째 둘째 셋째’를 속으로 되짚었다. 실제 상담이었으면 품질 평가에서 깎였을 말투였다. 여기서는 북이 울렸다.
*
다섯 번째 화는 회랑이었다. 원작에서는 카시안이 지나가다 공녀를 꾸짖는 장면이다. 「에블린에게 사과하시오」라는 대사 끝에 공녀가 에블린을 밀치고, 다른 날과 같이 손바닥이 따라온다.
카시안이 회랑 기둥 사이로 걸어왔다. 짧은 은발 아래 금빛 눈이 나를 보았다. 대사가 나와야 할 자리에서 카시안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막대가 한 마디 더 찼다.
“공녀는 요즘 왜 피하오?”
또 대본에 없는 말이었다. 영애들 머리 위로 「??」가 떠올랐다.
“예전에는 피하지 않았잖소. 와인을 맞을 때도, 공작의 손이 올라올 때도. 그런데 요즘은 잔을 엎고, 주저앉고, 차를 따르려 하오.”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그만두었다. 고를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고, 상담원 이 년 차의 감으로는 이럴 때 짧은 말이 먹혔다.
“아파서요.”
카시안의 금빛 눈이 한 번 깜박였다. 정원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멎었다. 두둥 소리가 들렸고, 회랑이 굳었다.
「아 갑자기 마음 아프네」 「악녀가 아프다는 말 처음 함」 「이 드라마 왜 이렇게 됐냐 근데 좋음」
나는 굳은 회랑에서 혼자 숨을 몰아쉬었다. 와인도 찻주전자도 무릎도 안 썼는데 넘어갔다. 맞기 싫은 이유를 말로 했을 뿐이었다.
굳은 회랑에서 움직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카시안의 눈동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눈을 뜬 채 유리구슬처럼 멈춰 있는데, 카시안의 금빛 눈만 아주 조금, 내 얼굴에서 내 머리 위 테두리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내가 숨을 들이켜자 눈동자는 제자리로 돌아가 멈췄다. 잘못 본 것으로 치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
밤이 되자 황궁은 대기실로 돌아갔다. 복도의 근위병들은 창을 든 채 눈을 반쯤 감고 다음 대사를 중얼거렸고, 시녀들은 쟁반을 든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맨발로 복도를 걸었다. 에블린의 방이 어디인지는 알았다. 원작에서 에블린이 베개를 끌어안고 우는 장면이 열 번은 넘었다.
에블린의 방은 이미 다 그려져 있었다. 주인공의 방이라 화면에 자주 나왔고, 커튼 주름까지 촘촘했다. 그래도 화면이 비춘 적 없는 침대 옆 협탁은 회색이었다. 내가 들여다보자 협탁 위가 천천히 그려졌다. 은 접시 하나에 양파 반 개가 얇게 썰려 놓여 있었다. 손거울이 양파 옆에 엎어져 있었다. 울어야 하는 날 눈물이 안 나오면 쓰는 물건 같았다. 주인공의 방에서 내가 연 곳은 협탁 하나뿐이었지만,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열어 본 곳이 둘이 되었다. 침대 위에서 에블린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게 났다. 대기 중인 엑스트라들과 달리 진짜로 자는 얼굴이었다.
자정쯤 베개 밑에서 소리가 났다. 지이잉. 사무실 프린터가 종이를 밀어낼 때 나는 소리와 똑같았다. 베개 가장자리로 종이 한 장이 혀처럼 밀려 나왔다. 이어서 한 장, 또 한 장. 토너 냄새가 났다. 화면 속 세상에서 처음 맡는 냄새다운 냄새였다.
손을 뻗어 맨 위 장을 집었다. 따뜻했다. 방송 일 하는 사람들이 쪽대본이라고 부르는 종이였다. 촬영 직전에 몇 장씩 쪼개서 날아오는 대본. 맨 위에 「여섯 번째 화」라고 찍혀 있었다.
「분수대 앞. 공녀, 에블린을 밀친다. 에블린, 공녀의 뺨을 친다. 왼뺨. 세게.」
여백에 빨간 펜 글씨가 흘려 쓰여 있었다.
「요즘 공녀 왜 이럼?? 다시 맞게 할 것. 왼뺨 꼭 — 작가」
작가도 몰랐다.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웃는 사이에 종이 반대편 끝이 당겨졌다.
에블린이 일어나 앉아 있었다. 종이 끝을 엄지와 검지로 꼭 쥐고, 잠이 덜 깬 얼굴로 나를 보았다. 금발 웨이브가 베개 자국대로 한쪽만 눌려 있었다.
“그거 제 거예요.”
“여기 왼뺨 꼭이라고 쓰여 있어요. 왼뺨이 누구 건데요.”
“작가님 글씨예요.” 에블린이 종이를 당겼다. 나도 당겼다. “작가님이 정한 대로 가야 해요. 공녀님이 한 번 비틀 때마다 작가님이 이렇게 빨간 펜을 써요. 다음 장은 더 세게 와요.”
“작가님도 왜 이러냐고 묻잖아요. 작가님도 모르는 걸 왜 에블린 씨가 지켜요?”
에블린의 눈이 내 머리 위로 한 번 올라갔다. 휴대전화 테두리를 보는 눈이었다. 분홍 막대는 밤이라 텅 비어 있었다. 에블린은 대답 대신 손에 힘을 주었다. 나도 힘을 주었다. 종이가 가운데서부터 소리 없이 갈라졌다. 반쪽씩 나눠 쥔 채 우리는 잠깐 서로를 보았다. 침대 위의 에블린은 하얀 잠옷 차림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등이 곧았다.
“공녀님이 반전을 못 만들면 공녀님 혼자 도는 게 아니에요.” 에블린이 반쪽을 접어 베개 밑에 다시 넣었다. “정원에 있던 사람들도, 쟁반 든 시녀들도, 같이 처음으로 돌아가요. 공녀님은 기억하고 사람들은 기억 못 하니까 모르실 뿐이에요. 몸은 기억해요. 쟁반 든 팔은요.”
나는 첫 화 연회장의 노란 드레스 영애를 떠올렸다. 네 번 같은 높이로 부채를 들던 손목이 생각났다.
“그럼 에블린 씨도 같이 도는 거잖아요. 다과회에서 홍차를 몇 번이나 쏟을 생각이었어요?”
“백 번이라도요.” 에블린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저는 백 번째 화까지 가야 하니까요. 거기까지만 가면 다시는 안 울어도 돼요. 대본에 저는 늘 ‘에블린, 운다’예요. ‘눈물을 참는다’, ‘울음을 삼킨다’. 웃는다는 말은 마지막 장에 한 번 있어요.”
에블린이 돌아누웠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찢어진 반쪽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근위병이 창을 든 채 졸린 목소리로 “누구냐” 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물음이었다.
내 방에 돌아와 촛불 밑에서 반쪽을 폈다. 여섯 번째 화 뒤에 일곱 번째 화가 짧게 붙어 있었고, 맨 아래에 여덟 번째 화의 첫 줄이 찢어진 자리에 걸쳐 있었다.
「여덟 번째 화. 밤의 분수 앞. 카시안, 에블린에게 계약 반지를 내민다. 공녀가 뛰어들어 반지를 쳐 낸다. 에블린, 공녀의 뺨을—」
뒤는 에블린의 반쪽에 있었다. 나는 촛대 받침에 끼워져 있던 은고리를 빼서 허공에 던졌다가 받아 보았다. 처음 두 번은 놓쳤다. 고리가 카펫 위를 굴러 침대 밑으로 들어갔고, 나는 드레스를 걷고 엎드려 팔을 집어넣었다. 원작 공녀는 침대 밑을 기어 다닌 적이 없었다. 세 번째에 고리가 손바닥에 탁 떨어졌다. 나는 종이를 다시 읽었다. 반지를 쳐 내라고 쓰여 있었다. 쳐 낸 반지를 내가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