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82자)

찻쟁반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복도의 회색 속에서 카시안은 문틀을 짚고 서 있었다⁠. 대본 밖에서 처음 움직이는 몸이라 그런지 어깨가 굳어 있었다⁠. 걸음을 떼면 다음 대사가 끌어당기는 듯 한 번씩 멈칫했다⁠.

“⁠들어오세요⁠. 문 앞에 서 계시면 시녀들이 깨요⁠.⁠”

“⁠시녀들은 자지 않소⁠. 눈을 반쯤 감고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뿐이오⁠.⁠” 카시안은 방에 들어와 의자에 앉지 않고 창가로 갔다⁠. 창밖의 흰 물감을 한참 보았다⁠. “⁠당신이 온 뒤로 그 말들이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소⁠. 전에는 나도 그 말을 하는 쪽이었던 모양이오⁠.⁠”

나는 침대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가장 쉬운 것부터 했다⁠.

“⁠되감기라는 게 있어요⁠. 삼 분 안에 뭔가 뒤집히지 않으면 처음으로 돌아가요⁠. 사람들은 처음부터 다시 하고⁠, 저는 기억해요⁠. 오늘 계단에서는 두 번 돌았어요⁠.⁠”

“⁠무엇이 감기오⁠?⁠”

“⁠시간이요⁠. 영상이요⁠. 그러니까⁠, 휴대전화로 보면⁠—⁠”

“⁠휴대전화는 무엇이오⁠?⁠”

나는 손바닥만 한 네모를 허공에 그려 보였다⁠. 카시안은 진지하게 따라 그렸다⁠. 황태자의 손가락이 허공에 네모를 그리는 모습은 생각보다 웃겼다⁠.

“⁠이만한 유리판인데요⁠, 거기 이 세상이 나와요⁠.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글을 써요⁠. 「⁠사이다⁠」라든가 「⁠헐⁠」이라든가⁠.⁠”

“⁠아⁠.⁠” 카시안의 금빛 눈이 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럼 당신 머리 위에 떠 있는 테가 그 유리판이오⁠? 모서리가 둥글고⁠, 아래에 분홍 줄이 차오르던⁠.⁠”

나는 무릎을 놓쳤다⁠.

“⁠보여요⁠?⁠”

“⁠회랑에서 처음 보았소⁠. 아프다고 말하던 날⁠. 줄이 다 차오르기 직전에 북이 울렸지⁠.⁠” 카시안이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그날부터 당신만 보면 귀가 째깍거리오⁠.⁠”

초침 소리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반지 낀 손으로 머리 위를 휘저었다⁠. 테두리는 손이 닿지 않았다⁠.

카시안은 방을 나가기 전에 문 앞에서 한 번 더 멈췄다⁠. 이번에는 다음 대사가 끌어당겨서가 아니었다⁠.

“⁠하나만 더 묻겠소⁠. 당신은 왜 시녀들에게 존댓말을 하오⁠? 공녀는 원래 시녀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소⁠.⁠”

“⁠습관이에요⁠. 이 년 동안 모르는 사람한테 하루 종일 존댓말만 했거든요⁠.⁠”

“⁠이 년 동안 무엇을 했소⁠?⁠”

“⁠화난 사람 전화를 받았어요⁠. 한 통에 삼 분씩⁠.⁠”

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외워 두는 얼굴이었다⁠.

*

열 번째 화부터는 계약 신부 수업이었다⁠. 쪽대본은 급수정을 거치면서 원작의 에블린 자리에 나를 밀어 넣었고⁠, 에블린은 원래대로 황후의 말동무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 장면마다 내가 실수하고⁠, 황후가 꾸짖고⁠, 손바닥이 날아오게 되어 있었다⁠. 여주인공을 위해 쓴 수업을 악녀가 받으니 꾸짖음만 두 배로 늘어 있었다⁠.

인사 수업은 한 번에 넘겼다⁠. 황후가 「⁠허리는 이만큼⁠」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정확히 구십 도로 허리를 접었다⁠. 매장 관리자 교육에서 배운 각도였다⁠. 손은 배꼽 아래에 겹쳤고⁠, 고개는 허리와 같이 내려갔다⁠. 「⁠각도 미쳤다⁠」 「⁠백화점 오픈 인사 아님⁠?⁠」 하는 글자가 지나갔고 북이 울렸다⁠.

열한 번째 화는 다도 수업이었다⁠. 황후 앞에서 찻잔을 받쳐 올리는 장면이었는데⁠, 찻잔을 건네는 사람이 에블린이었다⁠. 에블린이 내 손에 찻잔을 얹으며 엄지로 잔 밑동을 살짝 눌렀다⁠. 잔에 금이 가 있었다⁠. 들어 올리자 밑동이 쩍 갈라지며 홍차가 황후의 드레스 자락으로 쏟아졌다⁠.

슥⁠.

두 번째 삼 분에 나는 금 간 잔을 피해 옆의 잔을 집었다⁠. 에블린이 옆 잔에도 엄지를 대고 있었다⁠. 슥⁠.

세 번째에는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에블린이 내 팔꿈치를 툭 쳤다⁠. 슥⁠.

네 번째에는 에블린보다 먼저 찻잔 쟁반 앞으로 갔다⁠. 에블린이 쟁반째로 기울였다⁠. 슥⁠.

열 번이 넘어가자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장면이 처음으로 돌아갈 때마다 다실 문이 열리고 시녀장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계단 아래 주방에서부터 쟁반을 받쳐 들고 올라오는 장면이 원작에 짧게 있었다⁠. 되감기가 한 번 일어날 때마다 시녀장은 계단 맨 아래로 돌아가 다시 올라왔다⁠. 손목의 흰 천은 돌아갈 때마다 처음처럼 깨끗했고⁠, 손목은 돌아갈 때마다 조금씩 더 떨렸다⁠. 에블린이 말한 대로였다⁠. 시간은 감겨도 팔은 기억했다⁠.

스무 번째쯤⁠, 시녀장이 문지방에서 비틀거렸다⁠. 서른 번째쯤에는 쟁반 위 찻잔들이 달각달각 부딪쳤다⁠. 나는 찻잔보다 달각거리는 소리를 더 오래 들었다⁠.

마흔 번째쯤이었다⁠. 다실 문이 열렸고⁠, 시녀장이 들어오다가 문지방을 넘는 자리에서 멈췄다⁠. 쟁반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은쟁반이 대리석에 떨어지는 소리가 다실 천장까지 울렸다⁠. 찻잔 여섯 개가 한꺼번에 깨졌다⁠.

대본에 없는 일이었다⁠. 황후도 에블린도 굳었다⁠. 시녀장은 깨진 찻잔들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끝까지 뜨고⁠, 나를 보았다⁠.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감싸 쥔 채였다⁠.

“⁠공녀님⁠.⁠”

목소리가 낮았다⁠. 시녀장의 대사는 원래 「⁠차를 올리겠습니다⁠」 하나뿐이었다⁠.

“⁠이 계단을 오늘 몇 번 오르게 하실 겁니까⁠?⁠”

두둥⁠. 다실이 멈췄다⁠. 굳은 공기 속에서 시녀장만 눈을 깜박였다⁠.

「⁠시녀장 각성함⁠」 「⁠시녀장님 손목 괜찮으세요ㅠㅠ⁠」 「⁠이 드라마 엑스트라도 서사 있음⁠?⁠?⁠」

반전은 시녀장의 것이었다⁠. 깨진 찻잔 위로 붉은 글자가 떠올랐고 화면이 넘어갔다⁠. 나는 한 번도 시녀장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원작에서도⁠, 마흔 번을 도는 동안에도⁠.

*

카메라가 꺼지자 나는 다실 뒤의 좁은 문을 열었다⁠. 시녀들이 다니는 뒷계단이었다⁠. 원작에는 나온 적 없는 곳이라 계단도 벽도 회색이었다⁠.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발밑에 나무 결이 그려지고⁠, 벽에 촛대가 그려지고⁠, 촛대에 그을음이 그려졌다⁠. 계단은 마흔 칸이었다⁠. 시녀장은 쟁반 하나를 들고 이 마흔 칸을 마흔 번 올랐다⁠. 열어 본 곳이 넷이 되었다⁠.

계단 맨 아래⁠, 주방 옆 작은 방에서 시녀장이 대야에 손목을 담그고 있었다⁠. 찬물에 담근 손목이 빨갰다⁠. 방에는 쟁반을 세워 두는 선반과 등받이 없는 의자 하나뿐이었다⁠. 시녀장은 나를 보고 일어나려 했다⁠.

“⁠앉아 계세요⁠.⁠”

“⁠공녀님께서 이런 데 오시면 안 됩니다⁠.⁠”

“⁠이미 왔어요⁠. 손목 보여 주세요⁠.⁠”

시녀장은 망설이다가 대야에서 손을 꺼냈다⁠. 손목 안쪽에 쟁반 가장자리가 눌린 자국이 줄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대야 옆에 쪼그려 앉았다⁠. 콜센터 휴게실에서 손목 보호대를 서로 빌려주던 동기들이 생각났다⁠.

“⁠죄송해요⁠. 제가 한 번에 못 넘겨서⁠.⁠”

“⁠공녀님께서 맞으시면 한 번에 넘어갑니다⁠.⁠” 시녀장의 말에는 원망도 비꼼도 없었다⁠. 날씨를 말하는 목소리였다⁠. “⁠이 황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압니다⁠. 공녀님이 맞으시면 장면이 넘어가고⁠, 장면이 넘어가면 저희는 쟁반을 내려놓습니다⁠. 원래 그랬습니다⁠.⁠”

“⁠원래 맞는 사람은 아파도 되고요⁠?⁠”

“⁠원래 쟁반 드는 사람은 팔이 아파도 됩니다⁠.⁠” 시녀장은 손목을 다시 찬물에 넣었다⁠. “⁠저는 공녀님 편도 에블린 아가씨 편도 아닙니다⁠. 쟁반을 덜 들고 싶을 뿐입니다⁠.⁠”

할 말이 없었다⁠. 시녀장이 옳았다⁠. 내가 맞기 싫어서 버틴 삼 분마다 누군가는 계단 마흔 칸을 다시 올랐다⁠. 나는 대야 옆에 놓인 마른 수건을 집어 시녀장의 손목을 감쌌다⁠.

“⁠그럼 이렇게 해요⁠. 앞으로는 한 번에 넘길게요⁠. 제가 맞지도 않고⁠, 시녀장님이 계단을 다시 오르지도 않게요⁠.⁠”

“⁠그게 됩니까⁠?⁠”

“⁠해 봐야죠⁠. 저 원래 삼 분 안에 끝내는 일 했어요⁠.⁠”

시녀장이 처음으로 웃었다⁠. 입꼬리만 조금 움직이는 웃음이었다⁠.

“⁠공녀님은 그 말씀을 하실 때 손을 비비십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나는 비비던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

뒷계단을 올라오는 길에 에블린을 만났다⁠. 계단 맨 위 칸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 자락이 회색 계단에 펼쳐져 있었는데⁠, 에블린이 앉은 칸만 나무 결이 촘촘했다⁠. 손에 쪽대본이 들려 있었다⁠.

“⁠시녀장까지 깨우셨네요⁠.⁠”

“⁠제가 깨운 게 아니라 마흔 번 오르다 보니까 깬 거예요⁠.⁠”

“⁠그러니까 공녀님이 깨운 거죠⁠.⁠” 에블린이 종이를 내밀었다⁠. 여백의 빨간 펜이 지난번보다 커져 있었다⁠.

「⁠공녀 대사 누가 바꿈⁠?⁠? 촬영본이 매일 바뀜⁠. 엑스트라까지 대사 바뀜⁠. 편성 담당이 이유 물어봄⁠. 나도 모름 — 작가⁠」

“⁠작가님이 편성팀에 불려 가셨대요⁠.⁠” 에블린이 말했다⁠. “⁠공녀님이 한 번 비틀 때마다 작가님이 한 번 불려 가요⁠. 시녀장이 한 번 깨면 시녀장도 아파요⁠. 깨어난 사람은 아파요⁠. 쟁반이 무겁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원래는 몰랐어요⁠. 공녀님이 오기 전까지는 다들 아프지 않았어요⁠.⁠”

“⁠모르는 거랑 안 아픈 거는 다르잖아요⁠.⁠”

“⁠여기서는 같아요⁠.⁠” 에블린은 일어나 드레스를 털었다⁠. “⁠공녀님은 사람들을 하나씩 깨우고 계세요⁠. 다 깨우고 나서 서른 번째 화에서 혼자 죽으면⁠, 깨어난 사람들은 어떡해요⁠? 다음 화부터 쟁반이 무거운 채로 살아요⁠.⁠”

에블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복도로 사라졌다⁠. 계단 맨 위 칸의 나무 결이 에블린이 떠나자 조금 흐려졌다⁠. 나는 계단 꼭대기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머물수록 에블린의 말이 옳게 들렸다⁠.

*

열두 번째 화부터 열네 번째 화까지 나는 한 번도 돌지 않았다⁠. 장면이 열리면 쪽대본을 떠올리고⁠, 원작의 반전이 어디서 올지 짚고⁠, 막대가 반쯤 찼을 때 반전 자리를 먼저 뒤집었다⁠. 상담 매뉴얼을 외우듯 원작을 외웠다⁠. 원작이 내 뺨을 치려고 손을 드는 자리마다 손바닥보다 먼저 말을 넣었다⁠.

열두 번째 화에서는 영애들이 내 드레스에 포도주를 쏟으려는 순간 내가 먼저 「⁠어머⁠, 그 드레스에 묻을까 봐요⁠」 하며 잔을 받아 들었다⁠. 열세 번째 화에서는 에블린이 내 서랍에 숨겨 둔 황후의 브로치가 발견되기 전에⁠, 내가 먼저 브로치를 꺼내 황후에게 돌려드리며 “⁠서랍이 헐거워서 아무거나 들어와요⁠” 하고 말했다⁠. 에블린의 얼굴이 하얘졌다⁠. 사람들이 「⁠원테이크 악녀⁠」라고 쓰기 시작했다⁠.

열네 번째 화는 다시 다실이었다⁠. 원작에서는 황후가 계약 신부의 무례를 꾸짖으며 손바닥을 드는 장면이었다⁠. 시녀장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손목에 내가 감아 준 수건 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한 번에 올라온 걸음이었다⁠.

나는 황후 앞에 놓인 금테 찻잔을 보았다⁠. 원작 내내 황후는 차를 한 번도 마시지 않았다⁠. 손에 들고만 있다가 꾸짖을 때 내려놓았다⁠. 나는 손바닥이 올라오기 전에 무릎을 꿇고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폐하⁠, 이 차는 식었어요⁠. 폐하는 한 번도 안 드셨잖아요⁠. 새로 올릴게요⁠. 이번엔 꼭 드세요⁠.⁠”

황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황후가 찻잔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다 내 손에서 새 잔을 받아 들고⁠, 입술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 다실의 누구도 숨을 쉬지 않았다⁠. 두둥⁠.

「⁠황후 차 마심⁠」 「⁠드라마 통틀어 처음 아님⁠?⁠」 「⁠왜 눈물 나지⁠」

황후는 굳은 채로 찻잔을 입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 시녀장이 굳은 쟁반 뒤에서 나를 보았다⁠. 다음 화로 넘어가는 까만 틈에서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본 밖의 목소리였다⁠.

“⁠공녀님⁠. 다음 화에 공작 각하께서 공녀님을 공작저로 부르십니다⁠.⁠”

“⁠알아요⁠. 쪽대본에서 봤어요⁠.⁠”

“⁠각하 앞에서는 피하지 마십시오⁠.⁠” 시녀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공녀님이 피하시면⁠, 각하는 다른 사람을 때리십니다⁠.⁠”

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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