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56자)

동짓날, 계단 위와 아래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11월 7일⁠, 동짓날 새벽⁠, 소림사 산문 계단에 서리가 두껍게 앉았다⁠. 해는 아직 소실산 뒤에 있었고⁠, 계단 돌마다 하얀 서리 위로 발자국 하나가 맨 아래에서 맨 위까지 이어졌다⁠. 은학이 혼자 올라갔다 내려온 자국이었다⁠. 백여덟 칸이었다⁠. 지현이 세다 만 숫자를 은학이 끝까지 세었다⁠.

은학은 계단 맨 아래에서 사백 년 치 두루마리를 풀었다⁠. 스무 걸음치 종이가 서리 낀 계단을 따라 위로 펼쳐졌다⁠. 종이 끝이 마흔다섯 번째 칸쯤에서 멈추었다⁠. 「⁠사백 년 체납 세금 고지서⁠」 글자가 맨 아래 칸에서 하늘을 보았다⁠. 은학은 품에 한 자짜리 고지서를 넣고⁠, 털모자를 벗어 소매에 넣었다⁠. 관모 없는 상투 끝에서 머리카락이 찬 바람에 날렸다⁠.

해가 산등성이를 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공양간 뒷마당에서 죽 줄이 산문 앞까지 돌아 나왔다⁠. 동짓날이라 공양간은 새벽부터 솥 여섯에 불을 넣었는데⁠, 은결이 없는 솥은 사미승 셋과 혜공이 번갈아 저었다⁠. 장 영감이 담 위에 앉았다⁠. 어머니가 장 영감 옆에 앉았다⁠. 담 아래에 거지 스물이 씻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기품을 다시 쌓는 중이라고 방노삼이 말했다⁠.

청허자가 노새를 거꾸로 타고 왔다⁠. 백소운이 화산 제자 넷을 데리고 왔다⁠. 넷 모두 허리에 주판을 찼다⁠. 청허자가 노새에서 내려 은학의 상투를 보았다⁠.

“⁠관모가 없으니 머리가 가벼워 보이는군⁠.⁠”

“⁠가볍습니다⁠. 바람이 다 들어옵니다⁠.⁠”

“⁠도사들은 늘 그렇게 사네⁠. 머리에 바람이 들어야 생각이 도는 법이지⁠.⁠” 청허자가 거북 등딱지를 계단 옆에 내려놓았다⁠. “⁠오늘 아침 괘를 뽑았는데⁠, 산 위에 물이 있고 물 아래 불이 있다고 나왔네⁠. 솥이라는 말이지⁠. 솥이 끓으면 길하고⁠, 엎어지면 흉하고⁠.⁠”

“⁠그건 괘를 안 뽑아도 압니다⁠.⁠”

“⁠그러니 내 괘가 맞는 걸세⁠.⁠” 청허자가 웃었다⁠.

방노삼이 대나무 막대를 짚고 다가와 은학의 소매를 당겼다⁠. 허리 자루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흔들었다⁠. 「⁠해당 없음⁠」이었다⁠.

“⁠오늘은 이걸 고쳐 주실 거요⁠?⁠”

“⁠오늘이 지나면 고쳐 드리겠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나리 목이 없을지도 모르잖소⁠.⁠” 방노삼이 종이를 도로 넣었다⁠. “⁠그러니 오늘 고쳐야지⁠.⁠”

*

해가 산문 지붕에 닿았을 때 말발굽 소리가 산길을 메웠다⁠. 석경룡이 금의위 열과 포졸 서른을 데리고 왔다⁠. 금의위 칼이 아침 해에 번쩍였다⁠. 석경룡 뒤로 금박 가마와 찢어진 휘장의 가마가 따라왔다⁠. 추명도와 갈문형이었다⁠. 맨 뒤에 삿갓을 쓴 지현이 품에 무언가를 안고 걸어왔다⁠.

석경룡이 말에서 내렸다⁠. 계단 맨 아래에서 두루마리를 내려다보고⁠, 은학을 보았다⁠.

“⁠종이를 걷으시오⁠.⁠”

“⁠걷을 수 없습니다⁠. 조사 중입니다⁠.⁠”

“⁠직을 잃은 자의 조사요⁠?⁠”

은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경룡이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산문 아래에 혜공이 나와 섰다⁠. 혜공 뒤로 나한당 무승 마흔넷이 곤봉을 들고 섰다⁠. 원진과 무승 다섯이 떠난 나한진은 줄이 성글었다⁠.

“⁠소림사는 들어라⁠.⁠” 석경룡이 목청을 높였다⁠. “⁠사흘 말미를 주었고⁠, 쉰 가운데 스물여섯만 내려왔다⁠. 남은 자들이 오늘도 곤봉을 들고 있다⁠.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구가 나라를 흔드는 이때⁠, 산속에서 무기를 든 무리는 반역이다⁠. 내려와 곤봉을 바치고 오라를 받아라⁠. 반역한 절의 땅은 나라가 거둔다⁠.⁠”

담 위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금의위 열이 칼을 뽑았다⁠. 무승 마흔넷이 곤봉을 고쳐 쥐었다⁠. 원진이 없는 나한진 맨 앞에 서른 갓 넘은 무승 하나가 섰는데⁠, 곤봉 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추명도가 가마에서 내려 부채를 폈다⁠. 바람이 일정했다⁠. 추명도는 석경룡 뒤에 섰다⁠. 갈문형은 가마 옆에 서서 계단도 석경룡도 보지 않고 은학을 보았다⁠.

은학은 두루마리 위로 한 칸 올라섰다⁠.

“⁠조사 절차 열⁠, 압류 물건의 인도입니다⁠.⁠”

석경룡이 눈썹을 올렸다⁠. 은학은 계단 위의 혜공을 올려다보았다⁠.

“⁠대사님⁠, 소림사의 올해 세금은 동짓날인 오늘까지 내야 합니다⁠. 은으로 내실 수 없다면 담보를 맡기셔야 합니다⁠. 관아는 소림사가 가진 물건 가운데 곤봉 마흔네 자루를 담보로 압류하겠습니다⁠. 세금을 내시면 돌려드립니다⁠.⁠”

혜공이 은학을 내려다보았다⁠. 무승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석경룡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곤봉을 내려놓으면 내일 아침 뒷마당은 누가 지키나⁠?⁠” 혜공이 물었다⁠.

“⁠관아가 지킵니다⁠. 압류 물건이 있는 절은 관아가 보전합니다⁠. 곤봉이 관아 것이 되는 동안⁠, 곤봉이 지키던 솥도 관아가 봅니다⁠.⁠” 은학이 말했다⁠. “⁠곤봉을 들고 있으면 산이 반역이 되고⁠, 내려놓으면 압류 물건이 됩니다⁠. 반역한 산은 금의위가 거두고⁠, 압류 물건은 호부가 지킵니다⁠.⁠”

“⁠호부는 압류 물건을 지킨다⁠.⁠” 가마 옆에서 갈문형이 말했다⁠. 목소리가 계단 위까지 갔다⁠. “⁠금의위가 호부 압류물에 손대면⁠, 나는 북경에 글을 올린다⁠.⁠”

석경룡이 갈문형을 돌아보았다⁠. 갈문형은 석경룡을 보지 않았다⁠.

혜공이 염주를 한 알 굴렸다⁠. 다음 알에서 손이 멈추었다⁠. 혜공은 계단 위 무승들을 돌아보았다⁠.

“⁠내려놓아라⁠.⁠”

무승들이 망설였다⁠. 혜공이 다시 말했다⁠.

“⁠막을 뿐 치지 않는다고 했지⁠. 오늘은 막지도 않는다⁠. 내려놓아라⁠.⁠”

맨 앞의 무승이 계단을 내려왔다⁠. 두루마리 맨 위 칸에 와서 곤봉을 종이 위에 가로로 내려놓았다⁠. 곤봉이 종이에 닿는 소리가 작았다⁠. 다음 무승이 한 칸 아래에 곤봉을 놓았다⁠. 마흔넷이 차례로 내려와 한 칸에 한 자루씩 곤봉을 놓았다⁠. 사백 년 치 고지서 위로 곤봉 마흔네 자루가 사다리 칸처럼 가로놓였다⁠. 마지막 곤봉은 은학의 발 바로 위 칸에 놓였다⁠. 곤봉을 놓고 돌아선 무승들이 맨손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담 위가 조용했다⁠. 어머니가 장 영감의 소매를 쥐었다⁠.

방노삼이 담 밑에서 일어섰다⁠. 대나무 막대로 땅을 세 번 쳤다⁠. 거지 스물이 일어서서 공양간 담을 따라 늘어섰다⁠.

“⁠곤봉이 압류되었으니 솥은 누가 지키오⁠?⁠” 방노삼이 계단 위의 혜공에게 소리쳤다⁠. “⁠개방이 지키겠소⁠. 곤봉 없이 지키는 건 거지가 전문이오⁠. 우리는 평생 맨손으로 솥 옆에 서 있었소⁠.⁠” 방노삼이 은학을 돌아보았다⁠. “⁠이거면 해당 있음이오⁠?⁠”

“⁠요역입니다⁠.⁠” 은학이 말했다⁠. “⁠해당 있음입니다⁠.⁠”

방노삼이 허리 자루에서 「⁠해당 없음⁠」 종이를 꺼내 두 손으로 찢었다⁠. 찢은 종이를 하늘에 뿌렸다⁠. 종잇조각이 서리 낀 계단 위로 흩어졌다⁠. 거지들이 환호했고⁠, 금의위 말 하나가 놀라 뒷걸음질했다⁠.

“⁠이제 산에 무기 든 무리가 없습니다⁠, 천호 나리⁠.⁠” 은학이 말했다⁠.

석경룡은 계단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맨손의 무승 마흔넷⁠, 염주를 쥔 일흔 노인⁠, 곤봉 마흔네 자루가 놓인 종이⁠. 칼을 든 손이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았다⁠.

“⁠모자란 스물넷은⁠?⁠”

“⁠차출은 호방이 합니다⁠.⁠” 은학이 말했다⁠. “⁠저는 오늘 관모가 없습니다⁠.⁠”

지현이 삿갓을 벗었다⁠. 품에 안고 온 것을 꺼냈다⁠. 은학의 관모였다⁠. 지현은 포졸들 사이를 지나 은학 앞으로 와서⁠, 두 손으로 관모를 은학의 상투 위에 얹었다⁠. 손이 떨려서 관모가 비뚤어졌다⁠. 지현이 다시 바로 씌웠다⁠.

“⁠포정사사 공문은 나한테 왔으니⁠, 돌려주는 것도 내가 하네⁠.⁠” 지현이 말했다⁠. 얼굴이 하얬는데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 배가 다 나았네⁠. 나도 놀랐어⁠.⁠”

은학은 관모 끈을 맸다⁠. 석경룡을 보았다⁠.

“⁠등봉현 호방은 올해 소림에서 스물여섯을 차출했습니다⁠. 문서는 천호 나리 품에 있습니다⁠. 더 차출할 사람은 등봉현 호적에 없습니다⁠.⁠”

석경룡이 품을 만졌다⁠. 차출 문서가 거기 있었다⁠. 형이 동생의 이름을 쓴 문서였다⁠. 석경룡은 문서를 꺼내지 않았다⁠. 칼을 칼집에 넣었다⁠. 금의위 열이 따라 칼을 넣었다⁠.

“⁠봄에 다시 보겠소⁠.⁠” 석경룡이 말에 올랐다⁠. 추명도가 부채를 접고 석경룡을 불렀다⁠. 석경룡은 돌아보지 않았다⁠. 금의위 말발굽 소리가 산길 아래로 멀어졌다⁠.

*

추명도는 계단 아래에 혼자 남았다⁠. 포졸 서른이 지현 뒤로 섰다⁠. 갈문형이 가마 옆에서 걸어 나왔다⁠.

은학은 품에서 한 자짜리 고지서를 꺼내 펼쳤다⁠. 계단 아래⁠, 곤봉 마흔네 자루가 놓인 두루마리 끝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첫 줄⁠. 등봉현 서쪽 개울가 밭 열두 무⁠. 가정 19년 겨울 소림사에 시주⁠. 체납 열세 해⁠. 받을 사람 노은학⁠.⁠”

은학은 소매에서 헝겊 꾸러미를 꺼냈다⁠. 이번 달 이자로 추명도 집에 갈 은이었다⁠. 꾸러미를 갈문형에게 내밀었다⁠.

“⁠열세 해 치 가운데 첫 달 치입니다⁠. 나머지는 녹봉 받는 달마다 내겠습니다⁠.⁠”

갈문형이 꾸러미를 받았다⁠. 무게를 손바닥에 달아 보았다⁠. 몇 푼 안 되는 무게였다⁠. 갈문형은 꾸러미를 소매에 넣었다⁠.

“⁠그 은은 원래 내 집에 올 이자 아닌가⁠?⁠” 추명도가 말했다⁠.

“⁠이번 달은 세금이 먼저입니다⁠. 이자는 다음 달에 두 달 치를 갚겠습니다⁠.⁠” 은학이 고지서를 다시 들었다⁠. “⁠두 번째 줄⁠. 추씨 댁이 소림 이름에 맡긴 밭 열여섯⁠, 삼천칠백 무⁠. 서른 해 치 여름 세금과 가을 세금⁠. 은 이천 냥 남짓⁠. 받을 사람 추명도⁠.⁠”

담 위의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장 영감이 담 끝에서 몸을 내밀었다⁠.

“⁠어제 소작료 마당에서 원외랑 나리가 보셨습니다⁠. 내시든지⁠, 궤기한 땅을 관아에 내놓으시든지 고르시면 됩니다⁠.⁠”

추명도가 갈문형을 보았다⁠. 갈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사⁠, 동지 수레는 오늘 저녁 개봉으로 떠나오⁠. 은이 실리면 궤기는 묻지 않겠소⁠. 실리지 않으면 땅을 묻겠소⁠.⁠”

추명도가 부채를 폈다가 접었다⁠. 계단 위의 혜공을 올려다보았다⁠. 혜공이 추명도를 내려다보았다⁠. 서른 해 전 처음 산문을 올라와 땅을 맡기겠다고 한 사람과 받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세금이 땅을 사는 것보다 싸다고 했지⁠.⁠” 추명도가 은학에게 말했다⁠. “⁠계산은 맞았네⁠. 오늘 저녁까지 관아로 보내지⁠.⁠” 추명도는 가마로 돌아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소림 공양간 수레는 오늘로 끊네⁠. 내 땅에서 세금이 나가는데 쌀까지 나갈 수는 없지⁠.⁠”

담 위가 술렁였다⁠. 누가 욕을 했고⁠, 누가 울었다⁠. 추명도의 가마가 산길을 내려갔다⁠. 장 영감이 담에서 내려와 은학 앞에 섰다⁠.

“⁠나리⁠, 수레가 끊기면 솥이 하나 식소⁠. 내 누렁이 몫은 돌아오오⁠?⁠”

“⁠올해 추씨 댁 세금이 들어오면⁠, 내년 봄 영감님 갑에 빈 몫이 없습니다⁠. 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년에 또 끌려가지는 않습니다⁠.⁠”

장 영감이 은학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 사발을 쥔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거면 됐소⁠. 죽은 한 그릇 줄여 먹으면 되고⁠.⁠”

은학은 고지서를 들었다⁠. 마지막 줄이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줄⁠. 소림사⁠. 당나라 황제가 내린 땅 사십 경은 칙령대로 세금 바깥⁠. 남은 땅의 올해 치⁠. 받을 사람 혜공⁠.⁠”

계단 위에서 혜공이 은학을 내려다보았다⁠. 공양간 뒷마당에서 솥 여섯의 김이 담을 넘어왔다⁠. 추명도의 수레가 끊긴 내일 아침에는 솥 여섯 가운데 하나가 식을 것이었다⁠. 은학도 알았고 혜공도 알았다⁠.

혜공이 염주를 목에 걸었다⁠. 두 손을 비웠다⁠. 산문 아래에서 한 걸음 나와⁠, 계단을 한 칸 내려왔다⁠.

14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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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산없음2026.11.06· 14화

    반역이라는 말에 곤봉을 세금 담보로 압류하겠다고 나서는 은학 미쳤어요. 무승 마흔넷이 곤봉을 하나씩 내려놓는 장면 소름. 마지막에 혜공 스님이 계단을 한 칸 내려오는 데서 숨을 참았습니다.

    • 여무겸작가2026.11.06

      솥 여섯 가운데 하나가 식을 걸 둘 다 알면서 고른 길이었어요. 계단 아래에서 두 사람이 무엇을 주고받는지는 마지막 화에 있습니다.

동짓날, 계단 위와 아래 · 소림사 세무 조사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