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72자)

소작료 마당의 거지 소작인들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11월 4일 밤⁠, 등봉현 성 밖 무너진 성황당 뒤뜰에 거지 스물이 둘러앉아 있었다⁠. 가운데 모닥불이 타고⁠, 모닥불 위에 개방이 어디서 얻어 온 솥 하나가 걸쳐 있었다⁠. 솥 안에서 끓는 것은 물이었다⁠. 은학은 낡은 털모자를 쓰고 모닥불 옆에 앉았다⁠. 맞은편에 백소운이 열다섯 줄 주판을 무릎에 올려놓았고⁠, 방노삼은 대나무 막대로 솥 뚜껑을 두드렸다⁠.

“⁠다시 말해 보시오⁠. 우리가 무엇을 하라는 거요⁠?⁠”

“⁠소작인이 되시는 겁니다⁠. 하루만⁠.⁠”

“⁠거지가 소작인이 되면 출세요⁠, 망신이오⁠?⁠” 방노삼이 거지들을 둘러보았다⁠. 거지들이 저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은학은 나뭇가지로 땅에 마당을 그렸다⁠. 동쪽 개울가 돌 표지⁠, 백 걸음 떨어진 타작마당⁠, 마당 앞에서 말을 든 집사⁠.

“⁠동지 전날이 올해 마지막 소작료 날입니다⁠. 추씨 집 소작인들은 이날 남은 좁쌀을 다 냅니다⁠. 진짜 소작인들은 나서지 못합니다⁠. 나서면 내년에 밭이 없어집니다⁠.⁠” 은학이 땅에 그린 집사 자리를 나뭇가지로 짚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줄에 서는 겁니다⁠. 자루를 지고⁠, 집사 앞에 가서⁠, 추씨 말로 좁쌀을 됩니다⁠. 원외랑 나리가 그걸 보시면 됩니다⁠.⁠”

“⁠원외랑이 어디서 보오⁠? 나무 위에서⁠?⁠”

“⁠줄 안에서요⁠.⁠”

모닥불 너머 어둠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갈문형이 걸어 나왔다⁠. 관복 대신 기운 무명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헌 수건을 동였다⁠. 얼굴에 일부러 숯검정을 묻혔는데⁠, 짧은 눈썹이 숯 아래에서도 짧았다⁠. 거지들이 한꺼번에 입을 벌렸다⁠.

“⁠소작인처럼 보이나⁠?⁠” 갈문형이 물었다⁠.

“⁠손이 너무 하얗소⁠.⁠” 방노삼이 말했다⁠.

“⁠손은 소매에 넣으면 된다⁠.⁠”

“⁠걸음이 너무 반듯하오⁠. 소작인은 허리가 좀 굽소⁠.⁠”

갈문형이 허리를 굽혔다⁠. 너무 굽혀서 뒤뚱거렸다⁠. 거지 하나가 웃음을 참다가 콧물을 흘렸다⁠. 백소운이 주판으로 입을 가렸다⁠.

“⁠내 눈으로 보겠다고 했다⁠.⁠” 갈문형이 허리를 굽힌 채 말했다⁠. “⁠원외랑 차림으로 가면 추 진사가 그날 소작료를 안 받는다⁠. 내가 등잔 밑에서 사흘을 생각했다⁠. 다른 길이 없다⁠.⁠”

“⁠거지들이 씻어야 하지 않습니까⁠?⁠” 백소운이 물었다⁠. “⁠소작인은 이렇게까지 냄새가 나지 않아요⁠.⁠”

“⁠거지가 씻으면 거지가 아니오⁠.⁠” 방노삼이 펄쩍 뛰었다⁠. “⁠오십 년 쌓은 개방의 기품이 물에 씻겨 내려가오⁠.⁠”

“⁠하루만 씻으시면 됩니다⁠.⁠” 은학이 말했다⁠. “⁠그다음 날부터 다시 쌓으시면 됩니다⁠.⁠”

방노삼이 한참 솥을 들여다보았다⁠. 솥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방노삼이 그제야 깨달은 얼굴로 은학을 돌아보았다⁠.

“⁠이 물이 그 물이오⁠?⁠”

“⁠그 물입니다⁠.⁠”

*

11월 5일 밤⁠, 성안 셋방에서 어머니가 은학의 상투를 풀었다⁠. 관모를 잃은 지 이틀째였다⁠. 은학은 털모자를 벗고 등잔 앞에 앉았고⁠, 어머니는 참빗으로 은학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은학이 여덟 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관모 없어도 머리는 빗어야지⁠. 내일 남의 집 마당에 간다며⁠.⁠”

“⁠소작인 차림으로 갑니다⁠. 머리가 단정하면 의심받습니다⁠.⁠”

“⁠그럼 빗고 나서 헝클어라⁠. 빗은 머리를 헝클어야 헝클어진 머리가 덜 수상하다⁠.⁠” 어머니가 참빗 살에 낀 머리카락을 뽑아 등잔불에 비추어 보았다⁠. “⁠흰 게 하나 있네⁠. 스물아홉에⁠.⁠”

“⁠사백 년 치를 계산하다 보니 하나 생겼습니다⁠.⁠”

“⁠올해 치로 줄었다며⁠. 그럼 도로 검어지겠네⁠.⁠”

어머니가 다시 빗질을 했다⁠. 빗이 정수리에서 목덜미까지 내려갈 때마다 등잔불이 흔들렸다⁠.

“⁠오늘 장에서 들었다⁠. 송강 바닷가에서 소림 승병이 왜구 배를 쫓아냈다더라⁠. 쇠막대 든 중들이 배에 뛰어올랐대⁠.⁠” 어머니의 빗이 잠깐 멈추었다⁠. “⁠다친 사람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없다는 말도 없었고⁠.⁠”

은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결이 떠난 지 닷새였다⁠. 송강까지는 걸어서 한 달 길이었다⁠. 장터 소문은 봄에 내려간 승병들 이야기였다⁠. 어머니도 알았다⁠. 알면서 빗질을 했다⁠.

“⁠다 됐다⁠.⁠” 어머니가 상투를 다시 틀어 올리고 동곳을 꽂았다⁠. 은학의 머리를 두 손으로 한 번 감쌌다가 놓았다⁠. “⁠이제 헝클어라⁠.⁠”

은학은 손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어머니가 보고 웃었다⁠. 열세 해 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

11월 6일 아침⁠, 동쪽 개울가 타작마당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그루터기 끝마다 얼음 알갱이가 맺혀 해가 비치자 반짝였다⁠. 마당 앞에 추씨 집사가 나무 말을 들고 섰고⁠, 머슴 넷이 곁에서 자루를 받아 곳간 수레에 실었다⁠. 집사 앞으로 소작인 줄이 길게 이어졌다⁠.

줄 중간에 거지 스물이 섞여 있었다⁠. 다들 씻은 얼굴이 낯설어 서로 몰래 쳐다보았다⁠. 씻었더니 다들 나이가 열 살씩 젊어 보였다⁠. 자루 속에는 모래를 반쯤 채우고 위에 좁쌀을 덮었다⁠. 소림 공양간에서 사미승 셋이 몰래 내려 준 좁쌀이었다⁠. 혜공이 알았는지는 은학도 몰랐다⁠.

은학은 줄 뒤에서 세 번째에 섰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등에 자루를 졌다⁠. 앞에 백소운이 소작인의 아낙 차림으로 서 있었는데⁠, 치마 속에 칼과 주판을 함께 감추어 걸을 때마다 딸깍거렸다⁠. 맨 뒤에 갈문형이 있었다⁠. 좁쌀 자루를 지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일부러 굽힌 것이 아니었다⁠.

“⁠무겁군⁠.⁠” 갈문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한 자루입니다⁠, 나리⁠.⁠”

“⁠나리라고 부르지 마라⁠. 나는 갈 서방이다⁠.⁠”

“⁠갈 서방⁠, 한 자루입니다⁠.⁠”

“⁠북경에서 한 자루는 숫자였다⁠.⁠” 갈문형이 자루를 고쳐 졌다⁠. “⁠여기서는 무게로군⁠.⁠”

줄이 한 사람씩 줄었다⁠. 집사는 소작인이 자루를 쏟을 때마다 나무 말로 떠서 깎았다⁠. 말 위로 솟은 좁쌀을 막대로 밀어내는데⁠, 깎는 막대가 말 가장자리보다 낮게 지나갔다⁠. 깎고 남은 좁쌀이 말 위에 봉긋했다⁠. 집사 옆 머슴이 봉긋한 좁쌀을 그대로 자루에 부었다⁠.

백소운이 은학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관아 말로 치면 한 말에 두 되가 더 들어가요⁠. 깎는 막대도 휘었어요⁠. 일부러⁠.⁠”

“⁠보셨습니까⁠?⁠”

“⁠제가 아니라 갈 서방이 보셔야죠⁠.⁠”

은학이 뒤를 돌아보았다⁠. 갈문형이 목을 빼고 집사의 말을 보고 있었다⁠. 숯검정 묻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갈문형 차례가 왔다⁠. 갈문형은 집사 앞에 자루를 쏟았다⁠. 좁쌀 위에 덮였던 모래가 같이 쏟아질까 봐 은학의 숨이 멎었는데⁠, 갈문형은 좁쌀만 쏟고 자루 주둥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 집사가 높은 말로 좁쌀을 떠서 휜 막대로 깎았다⁠.

“⁠모자라네⁠.⁠” 집사가 말했다⁠. “⁠두 되 더 가져와⁠.⁠”

“⁠어느 땅 소작료인데 두 되를 더 받으시오⁠?⁠” 갈문형이 물었다⁠. 허리를 펴고 있었다⁠.

“⁠어느 땅이긴⁠. 저 돌 옆 땅이지⁠.⁠”

“⁠저 돌에는 소림 땅이라고 새겨 있던데⁠.⁠”

“⁠돌이 무슨 소작료를 받나⁠?⁠” 집사가 웃었다⁠. “⁠추 나리 댁 땅이야⁠. 서른 해째⁠. 두 되 더 가져와⁠.⁠”

갈문형이 수건을 벗었다⁠. 숯검정이 소매에 묻었다⁠. 집사가 갈문형의 얼굴을 보다가 말을 떨어뜨렸다⁠. 말이 서리 낀 땅에 부딪혀 좁쌀이 흩어졌다⁠.

“⁠원⁠… 원외랑 나리⁠?⁠”

*

마당이 술렁였다⁠. 진짜 소작인들이 자루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고⁠, 거지들은 자루를 내려놓고 앞으로 나왔다⁠. 머슴들이 집사를 둘러쌌다⁠. 길 끝에서 금박 가마가 내려앉았다⁠. 추명도가 마지막 소작료 날을 보러 나온 길이었다⁠.

추명도는 가마에서 내리며 부채를 펴다가⁠, 마당 한가운데 선 갈문형을 보고 부채를 접었다⁠. 갈문형 옆에 털모자를 벗은 은학이 서 있었다⁠.

“⁠노 서리⁠.⁠” 추명도가 웃었다⁠. “⁠아⁠, 이제 서리가 아니지⁠. 관모 없는 사람이 남의 소작료 마당에서 무엇을 하나⁠?⁠”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자루 하나 지고⁠.⁠” 은학이 자루를 땅에 내려놓았다⁠. “⁠나리 댁 집사가 방금 원외랑 나리께 말했습니다⁠. 저 돌 옆 땅은 추씨 댁 땅이고⁠, 서른 해째 소작료를 받는다고⁠.⁠”

“⁠집사가 무엇을 잘못 말했겠지⁠.⁠”

“⁠사람 말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이 나무 말은 안 바뀝니다⁠.⁠” 은학이 땅에 떨어진 나무 말을 주워 들었다⁠. “⁠관아 말보다 한 손가락 높습니다⁠. 깎는 막대는 휘었고요⁠. 서른 해 동안 이 말로 받으셨습니다⁠.⁠”

추명도가 갈문형을 보았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원외랑⁠, 우리 약속은⁠?⁠”

“⁠약속은 은이었소⁠.⁠” 갈문형이 숯검정 묻은 소매를 털었다⁠. “⁠진사의 땅이 아니고⁠. 궤기한 땅은 관아가 몰수할 수 있소⁠. 몰수하면 내가 거둘 은이 더 줄어드니⁠, 진사가 서른 해 치 세금을 내는 편이 나도 낫고 진사도 낫소⁠. 동지 수레가 떠나기 전에⁠.⁠”

추명도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붉어졌다⁠. 부채를 쥔 손등에 핏줄이 섰다⁠. 마당 둘레의 소작인들이 추명도를 보았다⁠. 서른 해 동안 땅을 보지 않고 땅의 주인을 보던 눈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났다⁠. 개울가 길로 말 세 필이 달려왔다⁠. 석경룡이 맨 앞이었다⁠. 말에서 뛰어내리자 금의위 둘이 은학의 양팔을 잡았다⁠. 은학의 발이 땅에서 반쯤 떴다⁠.

“⁠직을 잃은 서리가 관원 행세를 하고⁠, 향신의 마당에서 소란을 피웠다⁠.⁠” 석경룡이 낮게 말했다⁠. “⁠데려가겠소⁠.⁠”

“⁠천호⁠.⁠” 갈문형이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은 내가 불렀소⁠. 호부 일이오⁠.⁠”

“⁠원외랑은 북경에 가서 나를 고발하시오⁠. 나는 여기서 할 일을 하겠소⁠.⁠”

석경룡이 추명도를 돌아보았다⁠. 추명도가 부채를 다시 폈다⁠. 바람이 다시 일정해졌다⁠.

방노삼이 대나무 막대로 땅을 쳤다⁠. 거지 스물이 은학을 잡은 금의위 둘을 둥글게 에워쌌다⁠. 씻은 얼굴로⁠, 맨손으로⁠, 아무 말 없이⁠. 백소운이 치마 속에서 칼을 반쯤 뽑았다가 은학과 눈이 마주치자 도로 넣었다⁠. 대신 주판을 꺼내 들었다⁠. 개울가 길로 진짜 소작인 몇이 다시 걸어 들어왔다⁠. 맨 앞에 젊은 소작인이 있었다⁠. 나무 말을 거지에게 쥐여 주고 사라졌던 사람이었다⁠. 소작인은 아무 말 없이 은학 옆에 와서 섰다⁠.

석경룡이 둘러선 얼굴들을 보았다⁠. 거지와 소작인과 화산파 대제자와 숯검정 묻은 호부 원외랑⁠. 칼을 뽑으면 마당이 피로 물들 것이었다⁠. 동지 수레를 기다리는 호부 원외랑의 피도 섞일 것이었다⁠.

“⁠놓아라⁠.⁠” 석경룡이 금의위에게 말했다⁠. 은학의 발이 땅에 닿았다⁠.

석경룡이 말에 올랐다⁠. 말 위에서 마당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내일은 동짓날이오⁠. 아침에 소림 산문에 가겠소⁠. 모자란 스물넷을 데려가고⁠, 남은 무승이 곤봉을 들고 있으면 반역으로 잡겠소⁠. 반역한 절의 땅은 나라가 거두오⁠. 칙령도 세금도 필요 없지⁠.⁠” 석경룡이 추명도를 보았다⁠. “⁠거둔 땅은 호부가 팔면 되오⁠. 사는 사람은 여기 있고⁠.⁠”

말이 돌아섰다⁠. 금의위 셋이 개울가 길을 달려 사라졌다⁠. 서리 낀 마당에 말발굽 자국이 깊게 남았다⁠.

추명도가 가마에 올랐다⁠. 휘장을 내리기 전에 은학을 보았다⁠.

“⁠젊은이⁠, 내일 계단에서 보세⁠. 주판은 두고 오게⁠. 내일은 주판으로 하는 날이 아닐세⁠.⁠”

가마가 떠났다⁠. 집사와 머슴들이 수레를 끌고 따라갔다⁠. 마당에 좁쌀이 흩어져 있었다⁠. 거지 하나가 쭈그려 앉아 좁쌀을 한 알씩 주웠다⁠. 은학은 나무 말을 들고 서 있었다⁠. 갈문형이 숯검정 묻은 얼굴로 은학 옆에 섰다⁠.

“⁠내일 계단에서 진사가 세금을 낼 거라고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갈문형이 자루를 다시 졌다⁠. 빈 자루였다⁠. “⁠그런데 한 자루는 무겁더군⁠. 그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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