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61자)

올해 고지서는 한 장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11월 7일 한낮⁠, 혜공이 소림사 산문 계단을 내려왔다⁠. 한 칸씩⁠, 곤봉 마흔네 자루가 놓인 고지서 옆 돌을 골라 디디며 내려왔다⁠. 일흔 노인의 무릎이 칸마다 한 번씩 소리를 냈다⁠. 담 위의 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승들이 계단 위에서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혜공이 산문을 나와 계단 아래까지 내려온 것은 소림에 들어온 뒤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이라고⁠, 은학은 나중에 사미승에게서 들었다⁠.

혜공이 맨 아래 칸에 섰다⁠. 은학과 눈높이가 같았다⁠.

“⁠붓을 주게⁠.⁠”

은학은 붓을 건넸다⁠. 혜공은 한 장짜리 고지서의 세 번째 줄 아래에 수결을 했다⁠. 붓끝이 한 번 떨렸다⁠. 수결은 짧았고⁠, 먹이 진했다⁠.

“⁠받았네⁠.⁠” 혜공이 붓을 돌려주었다⁠. “⁠은은 섣달 그믐까지 만들겠네⁠.⁠”

“⁠무엇으로 만드십니까⁠?⁠”

“⁠솥으로⁠.⁠” 혜공이 담 너머 공양간을 보았다⁠. “⁠추 진사의 수레가 끊겼으니 솥 하나가 식고⁠, 세금을 내려면 하나가 더 식네⁠. 솥 둘을 식혀 그 쌀을 장에 내면 그믐까지 올해 치가 되지⁠. 무승들은 하루 두 끼를 한 끼로 줄이고⁠.⁠”

“⁠솥 넷이 남습니다⁠.⁠”

“⁠넷이 남지⁠.⁠” 혜공이 은학의 관모를 보았다⁠. 지현이 씌워 준 관모가 아직 조금 비뚤었다⁠. 혜공이 손을 뻗어 관모를 바로 잡아 주었다⁠. 소림 사람이 맨손의 관원에게 손을 댄 것이었다⁠. 계단 위에서 무승 하나가 숨을 들이켰다⁠.

“⁠대사님⁠, 계율이⁠…⁠.⁠”

“⁠관모는 머리의 일부라 했지⁠. 머리카락은 깎아도 되고⁠.⁠” 혜공이 손을 거두었다⁠. “⁠자네 아버지가 산문을 올라오던 날도 관모 대신 삿갓이 비뚤었네⁠.⁠”

*

동짓날 저녁⁠, 등봉현 관아 마당에 수레 세 대가 들어왔다⁠. 추명도의 집에서 은 상자가 왔고⁠, 상자마다 갈문형이 직접 뚜껑을 열어 은덩이를 셌다⁠. 은학이 옆에서 주판을 놓았다⁠. 이천일백 냥이었다⁠. 서리 둘이 은덩이를 저울에 달았고⁠, 이번에는 기침을 하지 않았다⁠.

갈문형이 마지막 상자를 닫았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수레꾼들이 횃불을 켰다⁠.

“⁠개봉까지 밤새 간다⁠.⁠” 갈문형이 관복 위에 솜 두루마기를 걸쳤다⁠. 열흘 남짓 전 추명도의 집 뒷골목에서 입었던 두루마기였다⁠. “⁠서리⁠, 호부에 자리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 아직 유효하다⁠. 북경에 가면 사람을 숫자로 보는 일을 하게 될 거다⁠. 너는 숫자를 사람으로 보니⁠, 둘이 섞이면 쓸 만할 거다⁠.⁠”

“⁠등봉에 남겠습니다⁠.⁠”

“⁠향시는⁠?⁠”

“⁠네 번째는 안 봅니다⁠. 열세 해 치 밭 세금을 다 내려면 녹봉 받는 달이 많이 남았습니다⁠. 북경 녹봉은 등봉 녹봉보다 많지만⁠, 북경에서 등봉 세금을 내러 오기는 멉니다⁠.⁠”

갈문형이 짧게 웃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수레꾼에게 손짓을 하고 말에 올랐다가⁠, 말 위에서 소매를 뒤졌다⁠. 은학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은학이 받았다⁠. 헝겊 꾸러미였다⁠. 동짓날 계단에서 은학이 갈문형에게 건넨⁠, 열세 해 치 가운데 첫 달 치였다⁠.

“⁠나리⁠, 이건 세금입니다⁠.⁠”

“⁠호부가 받았다⁠. 받았다는 수결은 내가 했다⁠.⁠” 갈문형이 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호부가 등봉현 서리에게 녹봉을 보탰다⁠. 다음 달 이자 갚을 때 쓰도록⁠. 세금과 녹봉이 같은 날 같은 꾸러미에 들어 있으니⁠, 네 주판으로 나눠 보아라⁠.⁠”

말이 돌아섰다⁠. 수레 세 대가 횃불을 앞세우고 관아 대문을 나갔다⁠. 은학은 꾸러미를 손에 쥐고 서 있었다⁠. 지현이 옆에 와서 배를 쥐지 않고 섰다⁠.

“⁠나눠 보게⁠.⁠”

“⁠나눌 수가 없습니다⁠. 같은 은입니다⁠.⁠”

“⁠그러니 북경 사람이지⁠.⁠” 지현이 말했다⁠. “⁠계산이 안 되는 걸 계산하라고 하고 가⁠.⁠”

*

섣달 보름⁠, 은학은 추명도의 집 쪽문을 지나쳐 대문을 두드렸다⁠. 소매 속에 두 달 치 이자가 있었다⁠. 집사가 대문을 열고 은 조각을 이로 깨물었다⁠. 이번에는 한 조각만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추명도가 사랑채 툇마루에 나와 앉아 있었다⁠. 벽의 주판 서른 개 가운데 흑단 주판 하나가 마루에 내려와 있었다⁠. 손자가 옆에서 옻칠 붙은 알을 바늘로 긁어내고 있었다⁠.

“⁠알이 움직이게 하려고⁠.⁠” 추명도가 말했다⁠. “⁠자네가 이 방에서 주판을 놓은 뒤로⁠, 손자 녀석이 주판을 배우겠다고 하네⁠. 향시보다 쉬워 보인다고⁠.⁠”

“⁠주판이 향시보다 쉽지는 않습니다⁠.⁠”

“⁠그 말은 손자한테 하지 말게⁠.⁠” 추명도가 부채를 폈다⁠. 겨울인데도 폈다⁠. “⁠삼천칠백 무는 내 이름으로 관아에 올렸네⁠. 내년부터 여름 세금과 가을 세금을 내지⁠. 고을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 인사를 덜 하더군⁠. 서른 해 동안 받던 인사가 세금 내는 진사한테는 반으로 줄어⁠.⁠”

“⁠내년 소작료 마당 말은 관아 말로 하십시오⁠.⁠”

“⁠그건 내 마음일세⁠.⁠” 추명도가 부채를 접었다⁠. “⁠자네가 또 줄을 서러 오든지⁠.⁠”

은학은 허리를 굽히고 나왔다⁠. 대문을 나서는데 손자가 사랑채에서 소리쳤다⁠. 알 하나가 움직였다고⁠, 처음으로 소리가 났다고 했다⁠. 대문 밖까지 딸깍 소리가 들렸다⁠.

*

가정 32년 섣달 그믐 아침⁠, 등봉현 관아 대문 앞에 눈이 발목까지 쌓였다⁠. 문지기가 비질을 하다가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성안 길 끝에서 흰 수염의 노승 하나가 등에 자루를 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붉은 가사와 노란 가사 위에 눈이 얹혀 있었다⁠. 뒤를 따르는 사미승 둘이 노승의 등에서 자루를 받으려고 손을 뻗을 때마다 노승이 고개를 저었다⁠.

은학이 호방에서 뛰어나왔다⁠. 혜공이 대문 앞에서 자루를 내려놓았다⁠.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삼십 리를 걸어온 숨이었다⁠.

“⁠올해 치일세⁠.⁠”

“⁠사람을 보내셨으면 제가 받으러 갔습니다⁠.⁠”

“⁠세금은 내는 사람이 내러 오는 것 아닌가⁠? 자네가 사백 년 치를 메고 우리 계단을 올라왔으니⁠, 나도 올해 치를 메고 자네 계단을 내려와야지⁠.⁠” 혜공이 관아 대문의 낮은 돌계단을 보았다⁠. 세 칸이었다⁠. “⁠자네 계단은 짧군⁠.⁠”

지현이 대청에서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혜공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가 펴지 못했다⁠. 배가 아니라 허리가 아팠다⁠. 은학이 자루를 들어 호방으로 옮겼다⁠. 주판을 놓았다⁠. 솥 둘을 식힌 쌀을 장에 내고 무승들이 한 끼를 굶어 만든 은이었다⁠. 알이 맞았다⁠.

“⁠맞습니다⁠. 올해 치입니다⁠.⁠”

지현이 김 나는 물 한 사발을 들고 들어와 혜공에게 내밀었다⁠. 혜공이 물을 마시는 동안 지현은 은학 곁에 붙어 서서 소곤거렸다⁠.

“⁠소림 방장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일세⁠. 생각보다 작으시네⁠.⁠”

“⁠눈길을 삼십 리 걸어오셨습니다⁠.⁠”

“⁠눈이 와서 줄었나 보군⁠.⁠” 혜공이 사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현이 귀까지 빨개져서 대청으로 도로 달아났다⁠.

“⁠알이 맞으면 됐네⁠.⁠” 혜공이 돌아섰다⁠. 사미승들이 따라 돌아섰다⁠. 혜공은 대문을 나가다가 멈추었다⁠. “⁠노 서리⁠, 내년 고지서도 한 장인가⁠?⁠”

“⁠한 장입니다⁠. 해마다⁠.⁠”

“⁠해마다 한 장이면 사백 년 뒤에는 사백 장이 되겠군⁠.⁠” 혜공이 눈 덮인 길로 나섰다⁠. “⁠자네 후임한테 계단에 깔지 말라고 일러 두게⁠. 우리 계단은 백여덟 칸밖에 없네⁠.⁠”

*

가정 33년 3월⁠, 숭산에 살구꽃이 피었다⁠. 소림사 산문 계단 아래 돌 물확에 꽃잎이 떠 있었다⁠. 은학은 관모를 쓰고 허리에 주판을 차고 계단 맨 아래 칸에 서 있었다⁠. 품에 올해 소림 몫 고지서가 있었다⁠. 한 장이었다⁠.

산길에서 사람들이 올라왔다⁠. 스물한 명이었다⁠. 맨 앞에 은결이 있었다⁠. 얼굴이 검게 그을렸고⁠, 왼쪽 볼에 새 흉터가 하나 생겼다⁠. 등에 지난가을 어머니가 싼 보자기를 메고 있었다⁠. 보자기는 바닷바람에 바래 있었다⁠. 원진이 은결 뒤에 있었다⁠. 부지깽이를 아직 들고 있었고⁠, 왼팔을 무명으로 동여맸다⁠. 스물여섯이 내려갔고 스물하나가 올라왔다⁠. 다섯은 송강 바닷가에 묻고 왔다고⁠, 원진이 먼저 말했다⁠.

은결이 계단 아래에서 형 앞에 섰다⁠.

“⁠형⁠, 또 고지서 들고 왔어⁠?⁠”

“⁠올해 치다⁠. 한 장⁠.⁠”

“⁠한 장⁠.⁠” 은결이 형의 품을 보았다⁠. “⁠솥은 몇 개야⁠?⁠”

“⁠넷이다⁠.⁠”

은결의 얼굴이 굳었다⁠. 형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어깨가 지난가을보다 더 넓었다⁠.

“⁠형 때문에 둘이 식었네⁠.⁠”

“⁠알고 있다⁠.⁠”

“⁠알면서 했어⁠?⁠”

“⁠알면서 했다⁠.⁠”

은결이 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흰 흉터가 여럿 있었다⁠. 바다에서 생긴 것들이었다⁠. 은학은 물러서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 원진이 부지깽이를 짚고 내려다보았고⁠, 무승들이 산문 아래로 몰려나왔다⁠.

“⁠바다에서 왜구 배를 쫓다가 생각했어⁠.⁠” 은결이 말했다⁠. “⁠형이 계단 아래서 종이 들고 서 있던 거⁠. 그때는 형이 미웠어⁠. 배 위에서 칼 든 사람이 달려오는데⁠, 그 생각밖에 안 났어⁠. 왜 그 생각이 났는지 지금도 몰라⁠.⁠”

“⁠나도 모른다⁠.⁠”

은결이 주먹을 풀었다⁠. 손바닥으로 형의 관모를 툭 쳤다⁠. 관모가 비뚤어졌다⁠.

“⁠관모는 머리의 일부랬지⁠.⁠” 은결이 말했다⁠. “⁠방장 스님이 편지에 썼더라⁠.⁠”

“⁠관모는 머리의 일부다⁠.⁠”

은결이 형의 관모를 바로 씌웠다⁠. 손을 거두며 말했다⁠.

“⁠내년엔 다섯으로 늘려⁠.⁠”

“⁠추씨 댁 수레 없이⁠?⁠”

“⁠형이 계산해⁠. 형 주판이잖아⁠.⁠” 은결이 계단 위 공양간 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저을게⁠. 넷이든 다섯이든⁠.⁠”

혜공이 산문 아래에서 내려와 스물한 명의 얼굴을 하나씩 보았다⁠. 돌아오지 못한 다섯의 이름을 물었고⁠, 원진이 하나씩 댔다⁠. 혜공은 이름 다섯을 입속으로 따라 외웠다⁠. 지난봄에 내려가 돌아오지 못한 서른의 이름 뒤에 다섯이 더 붙었다⁠. 혜공의 염주가 다섯 번 굴렀다⁠. 원진이 계단을 내려와 나한당에 맡겨 둔 곤봉을 찾았다⁠. 소림이 세금을 냈으니 담보로 잡혔던 곤봉은 섣달에 돌아와 있었다⁠. 원진은 곤봉을 해에 비추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흠집이 없었다⁠. 원진이 은학에게 합장했다⁠.

“⁠값이 안 떨어졌소⁠.⁠”

*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공양간 뒷마당에서 죽 줄이 움직였다⁠. 솥 넷이 아궁이에 앉아 있었고⁠, 김이 담을 넘었다⁠. 줄은 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난가을에는 산길 모퉁이를 돌아서까지 이어지던 줄이⁠, 올봄에는 뒷마당 안에서 끝났다⁠. 줄에 선 사람들 가운데 장 영감은 없었다⁠. 올봄 장 영감의 갑에는 빈 몫이 없었고⁠, 장 영감은 송아지 한 마리를 들였다고 했다⁠. 줄 끝에서 거지 몇이 볕을 쬐며 방노삼이 지은 ‘⁠해당 있음⁠’ 노래를 불렀다⁠. 개방은 겨우내 공양간 솥을 지켰다⁠.

은결이 줄 맨 끝에 섰다⁠. 은학이 은결 뒤에 섰다⁠. 형제 앞으로 사람이 열 남짓이었다⁠.

“⁠형⁠, 관원이 죽 줄에 서도 돼⁠?⁠”

“⁠점심때다⁠. 관원도 배는 고프다⁠.⁠”

“⁠관아 밥 있잖아⁠.⁠”

“⁠관아 밥은 맛이 없다⁠.⁠”

줄이 줄었다⁠. 형제 차례가 왔다⁠. 네 번째 솥 앞에서 어머니가 주걱을 들고 있었다⁠. 공양간 앞치마를 둘렀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은결이 보자기에서 이 빠진 사발을 꺼내 내밀었다⁠. 어머니가 주걱을 솥 바닥까지 넣어 긁었다⁠. 걸쭉한 죽이 사발에 담겼다⁠. 은학이 소매에서 관아 사발을 꺼내 내밀었다⁠. 어머니가 다시 솥 바닥을 긁었다⁠.

형제는 사발을 들고 공양간 담 밑에 나란히 앉았다⁠. 담 너머로 살구꽃 잎이 날아와 은학의 사발에 떨어졌다⁠. 은결이 제 사발 바닥을 숟가락으로 긁어 형의 사발에 한 숟가락 옮겼다⁠. 좁쌀이 두껍게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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