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157자) · 도겸 · 동짓날
쌀독
내가 벤 놈의 고통이 전부 나한테 온다 · 한도윤
마비산은 새벽에 먹는다. 기름종이를 펴서 누런 가루를 혀 밑에 털어 넣고 찬물 한 모금으로 녹이면, 한 식경쯤 지나 혀끝부터 감각이 사라진다. 그다음에 입술, 목, 가슴으로 내려가며 온몸이 솜이불을 한 겹 덮은 것처럼 먹먹해지고, 서른두 군데 아픈 자리가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처럼 작아진다. 도겸은 두 해 동안 그렇게 새벽을 열었다.
동짓날 새벽, 산문 아래 고개 주막 뒷방에서 도겸은 약을 먹기 전에 자리에 누운 채로 몸을 셌다. 약 기운이 빠진 이 한때에만 셀 수 있다. 오른 무릎, 왼 옆구리, 목 뒤, 등 아래, 손등, 발바닥. 셋까지 세면 숨이 가빠지고 열을 넘기면 이가 딱딱 부딪친다. 서른하나까지 세고 멈췄다. 한 번 더 셌다. 서른하나였다.
왼 어깨가 없었다. 팔월에 사시 나루에서 여만복을 벤 자리였다. 사흘 뒤에 분명히 들어와 앉았는데, 그다음 새벽부터 없었다. 도겸은 석 달 동안 그걸 모른 척했다.
두 해 전 문파를 나올 때 도겸의 몸에는 스물두 군데가 아팠다. 사시 나루에서 삯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세량 낼 은을 통보전장에서 꾸었고, 그 빚이 한 해 만에 세 배가 되어 있었다. 추심꾼이 어머니를 베러 오기 전날 도겸이 먼저 전장을 찾아갔다. 마종곤은 차를 따르면서 어머니 빚을 지워 주겠다고 했고, 대신 도겸의 칼을 샀다. 그날 밤 처음 받은 마비산을 혀 밑에 넣고 도겸은 두 해 만에 처음으로 푹 잤다. 스물둘이 서른둘이 되는 데 두 해가 걸리지 않았다.
*
해가 오르자 주막 앞마당에 서리가 녹아 김이 올랐다. 도겸은 문간 평상에 앉아 탁주를 시켰고, 흑사채에서 딸려 보낸 졸개 둘은 마구간 옆에서 주사위를 굴렸다. 오늘은 노가촌 윗마을 여섯 집이 스무 냥을 갚기로 한 날이다. 아침나절에 셋째 집 노인이 은 열다섯 냥을 들고 내려왔고, 다섯 냥이 모자란다고 했다. 모자라면 노인을 베라는 것이 마종곤의 말이었다.
도겸이 탁주 사발을 비울 때 고갯길에서 하윤이 내려왔다. 등에 소금 자루를 멨다. 장우가 소금 심부름을 보낸 모양이다.
“여덟째.”
“사형.”
하윤이 평상 앞에 섰다. 하윤의 눈이 도겸 옆에 앉은 노인에게, 노인 앞에 놓인 은 자루에게 차례로 갔다.
“다섯 냥이 모자랍니다.”
도겸이 먼저 말했다. 하윤의 얼굴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고 싶었다.
“어르신을 베시려는 겁니까?”
“그게 내 일이다.”
“그 사흘 일은 누가 합니까? 이 어르신은 이제 밭을 가십니다. 우물이 났으니까요.”
“그래서 네가 또 할 거냐? 여만복 배도 네가 저었지.”
하윤이 입을 다물었다. 도겸은 탁주 사발을 평상에 탁 내려놓았다.
“남의 것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네가 저은 노 때문에 내 어깨가 비었다. 비니까 뭔지 아냐? 서른둘을 참던 몸이 서른하나를 참으려니 셈이 안 맞는다. 하나가 비면 나머지가 그 자리로 몰려온다.”
거짓말이었다. 어깨가 비고 나서 도겸은 석 달 동안 새벽마다 그 빈 자리를 손으로 짚어 봤다.
도겸이 일어섰다.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비켜라. 노인은 사흘만 앓으면 된다.”
“안 비킵니다.”
*
도겸이 칼을 뽑았다. 마비산을 먹은 몸은 겁이 없다. 제 몸 어디가 약한지 모르니 약한 데를 감추지도 않는다. 평사가 하윤의 왼 어깨로 들어왔다. 하윤은 반 보 물러났고, 물러난 자리에 주막 탁자가 있었다. 도겸의 칼이 두 번째로 역린을 그리며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순간, 하윤이 오른 발등을 탁자 모서리 밑에 걸어 차 올렸다.
탁자가 옆으로 서며 두 사람 사이를 막았다. 도겸의 칼이 상판에 한 치 깊이로 박혔다. 탁자 위에 있던 탁주 사발과 절인 무 접시가 공중으로 날았고, 무 한 조각이 도겸의 이마에 붙었다.
칼을 뽑는 데 한 호흡이 걸렸다. 그 한 호흡 동안 하윤은 칼을 뽑지 않고 탁자 뒤에 서 있기만 했다. 도겸이 칼을 빼내 다시 겨눴을 때 하윤과 도겸 사이에는 여전히 세운 탁자가 있었다. 도겸은 탁자를 돌아가려다 발을 멈췄다. 탁자를 돌아가는 동안 하윤이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윤은 아무것도 안 할 사람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도겸은 발을 멈췄다.
주막 주인이 부엌에서 국자를 들고 뛰쳐나왔다.
“상! 내 상! 그거 스무 해 쓴 상이오!”
하윤이 품을 뒤져 동전 여섯 닢을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상 값입니다.”
“이걸로 상을 어떻게 사오!”
“그럼 고쳐 드리겠습니다. 대패질을 조금 압니다.”
주인이 국자를 내리고 동전을 받았다. 받고 나서 하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도겸에게 턱짓을 했다.
“저 친구는 칼 들고 싸우다 대패질 얘기를 하는 사람이오?”
도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마에 붙은 무 조각이 그제야 떨어졌다.
*
졸개 둘이 주사위를 쥔 채 멀뚱히 보고 있었다. 도겸은 칼을 칼집에 넣었다. 노인 앞의 은 자루를 집어 들고 무게를 가늠했다.
“열다섯 냥이지?”
“그렇소.”
“다섯 냥은 내 은에서 뗀다. 이번만이다.”
노인이 도겸을 올려다봤다. 졸개 하나가 입을 열려다가 도겸의 눈을 보고 도로 다물었다. 노인이 평상에서 일어나 도겸에게 허리를 숙였는데, 도겸은 그 절을 받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하윤이 도겸 곁에 섰다. 도겸은 은 자루를 품에 넣으며 낮게 말했다.
“여덟째, 스승님 쌀독 말이다.”
“예.”
“내가 채웠다. 두 해 동안 달마다. 벤 은으로.”
하윤의 얼굴이 굳었다. 도겸은 그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너는 무슨 쌀을 먹었냐? 네가 우물 파고 배 젓는 동안 네 사발에 담긴 조밥이 어디서 왔냐?”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윤이 도겸의 소매를 잡았다.
“사형, 마비산을 끊으시면 안 됩니까?”
“끊으면 서른하나가 한꺼번에 온다. 아홉째하고 열한째가 그래서 못 걷는다. 사시 뒷골목 헛간에 누워 있다. 한 번 가 봐라. 끊으라는 말이 쉽게 나오나?”
도겸이 소매를 뺐다. 빼는 손끝이 조금 떨렸는데, 약 기운이 슬슬 올라올 때라 그런지 아닌지 도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도겸은 등을 돌려 고갯길을 내려갔고, 졸개 둘이 주사위를 주워 담으며 따라갔다.
*
하윤이 산문에 올라가자 장우가 부엌에서 쌀독 뚜껑을 열어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쌀은 독 바닥에서 한 뼘 위까지밖에 없었다.
“이번 달은 안 왔다.”
“사형이 안 보냈습니까?”
“일곱째인 거 알았냐?”
“오늘 알았습니다.”
장우가 뚜껑을 닫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한 해 전에 알았다. 스승님은 처음부터 아셨다. 아는 사람이 셋이나 되는데 다들 모르는 척 먹었다. 나는 모르는 척 먹는 걸로 셋째다.”
하윤은 서쪽 방으로 갔다. 스승은 창가에서 오른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동지 볕이 창호지를 통과해 방바닥에 누렇게 누웠고, 화로에서 숯이 가늘게 탔다.
“알고 받으셨습니까?”
“알고 받았다.”
“어째서입니까?”
“안 받으면 도겸은 그 은을 마비산에 쓴다. 받으면 반이라도 쌀이 된다.”
“쌀이 되면 사형이 덜 벱니까?”
스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떨리는 오른손 위에 왼손을 얹어 눌렀다.
“그 쌀을 저도 먹었습니다. 사형이 벤 은으로 산 쌀을요. 그러면 저도 벤 겁니까?”
“그렇다.”
스승이 하윤을 똑바로 봤다.
“그래서 우리는 센다. 먹은 것도 세고 벤 것도 센다. 안 세면 그냥 먹은 게 된다. 세면 빚이 된다. 빚이 돼야 갚을 수 있다.”
“그럼 사형 빚을 저도 갚아도 됩니까?”
스승이 입을 다물었다. 화로의 숯 하나가 무너지며 불티가 튀었다.
“노가촌 우물 얘기는 들었다. 우물 하나에 넷이 풀렸다고.”
“제 것은 셋입니다. 갈칠 것은 전장에서 따로 풀렸습니다.”
“같은 우물이다. 넷이다. 우연이 넷이면 우연이 아니다.”
스승이 책상 서랍을 열어 두꺼운 책을 꺼냈다. 표지가 닳아 가죽 끈으로 묶어 두었고, 끈 매듭이 손때로 검었다.
“내 장부다. 사십 해에 백이십일 줄이다. 백열여덟에 금이 그어져 있다.”
하윤은 장부를 받아 펼쳤다. 줄마다 날짜와 곳과 사람이 적혀 있었다. 이름이 있는 줄보다 「주막 사내」 「말몰이」 「왼팔 큰 자」처럼 자리로만 적힌 줄이 많았다. 앞쪽 장의 먹은 바래서 갈색이 되었고, 뒤로 갈수록 검었다. 줄마다 그어진 금은 굵기가 제각각이었는데, 어떤 금은 붓을 눌러 그어 종이가 패었고 어떤 금은 머리카락처럼 가늘었다. 금이 안 그어진 셋은 한 장에 모여 있었다.
「윤가 사내 · 상담 · 가정 칠년 정월」 「마 · 형주 · 가정 칠년 정월」 「선」
“첫 줄은 내 오른 무릎이다. 둘째 줄은 오른 손목이다. 그건 못 갚는다. 묻지 마라.”
“셋째는요?”
“그것도 묻지 마라.”
“윤가 사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승이 창을 봤다.
“내가 죽였다.”
하윤은 장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승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였다. 그게 더 무거웠다.
“상담으로 가거라. 윤가 사내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 살아 있는지 모른다.”
“제 빚이 아닙니다. 남의 빚에 손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명하는 거다. 명이면 네 빚이 된다.”
*
이튿날 새벽 장우가 쌀독 바닥을 긁어 주먹밥 여섯 개를 뭉쳤다. 소금을 넉넉히 치고 대나무 잎에 싸서 하윤의 보퉁이에 넣었다.
“이게 마지막 일곱째 쌀이다. 무슨 쌀인지 알고 먹어라.”
“사형은 무엇을 드십니까?”
“나는 참는다. 셋째로 잘 참는 사람이니까.”
소달이 산문까지 따라 내려오며 물었다.
“사형, 상을 차서 세웠다면서요? 저도 가르쳐 주십시오.”
“상 값이 여섯 닢이다.”
“그럼 안 배우겠습니다.”
소달이 손가락을 꼽아 셈을 하더니, 여섯 닢이면 엿이 열두 가락이라고 억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윤은 고갯길을 내려가다가 주막 앞에서 발을 멈췄다. 어제 칼이 박혔던 탁자가 마당 구석에 엎어져 있었다. 하윤은 보퉁이를 내려놓고 주인에게 대패를 빌렸다. 상판의 칼자국을 반 치 깎아 내고 다리 하나를 새로 맞추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대패를 밀 때마다 소나무 결에서 송진 냄새가 올라왔고, 깎여 나온 대팻밥이 둥글게 말려 발등에 떨어졌다. 하윤은 어제 발등으로 이 상을 차 올린 동작을 대패질하는 사이사이 몸으로 되짚었다. 모서리 밑에 발등을 걸고, 무릎을 펴면서 차 올리고, 상이 서는 순간 한 걸음 뒤로 빠진다. 칼이 상판에 박히면 상대는 한 호흡을 잃고, 그 한 호흡이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다. 하윤은 그 동작에 상을 가로로 세우는 수, 횡안(橫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 베는 수의 둘째였다.
주인이 고친 상을 쓰다듬어 보고 스무 해 쓴 상보다 낫다고 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늦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