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131자) · 하윤 · 구월 ~ 시월

찬 데를 짚는다

내가 벤 놈의 고통이 전부 나한테 온다 · 한도윤

노가촌은 형문산 동쪽 기슭에 두 층으로 앉은 마을이다. 아랫마을 서른 집은 개울가 평지에 모여 있고 한복판에 돌우물이 있었다. 윗마을 여섯 집은 거기서 한 마장을 더 올라간 비탈에 흩어져 있었는데, 집마다 흙벽이 누렇게 바랬고 처마 밑에 물지게가 하나씩 기대 서 있었다. 구월 초하루 아침, 하윤이 비탈을 올라가는 동안 물지게를 진 사내 넷이 차례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왔다. 지게 멜빵이 닿는 어깨마다 적삼이 헤져 살이 비쳤고, 그 살에 굳은 못이 콩알만 하게 박여 있었다.

하윤이 흑사채 대신 왔다고 말하자, 첫 집 아낙은 마당에서 모이를 쪼던 닭을 치마폭에 싸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둘째 집 아이는 돼지우리 문을 닫았다. 셋째 집 노인은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하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한 마디만 했다.

“은은 없소. 닭도 없소. 방금 들어간 건 닭이 아니오.”

“은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뭐 하러 왔소?”

“은이 생기게 하러 왔습니다.”

노인이 지팡이를 고쳐 짚고 나서 제 귀를 후볐다. 잘못 들었다는 뜻인지, 더 들어 보겠다는 뜻인지 하윤은 알 수 없었다.

*

목수 노춘은 윗마을 맨 위 집에 살았다. 쉰이고, 마당에 대팻밥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하윤이 물이 어디서 날 것 같으냐고 묻자, 노춘은 대패를 멈추고 산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버지가 우물을 파려고 하셨소. 밤나무 아래라고.”

“어느 밤나무요?”

“셋 중에 안쪽이라고 하셨는데,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안쪽이 달라지오. 아버지가 그걸 안 가르쳐 주고 돌아가셨소.”

이튿날 하윤은 밤나무 셋을 찾아 올라갔다. 첫째 밤나무 아래 땅은 볕을 받아 미지근했고, 둘째 아래는 뿌리가 얽혀 손바닥이 들어가지 않았다. 셋째 밤나무 아래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흙에 댔을 때, 한 호흡이 지나자 손바닥 가운데로 서늘한 기운이 스며 올라왔다. 이끼 냄새가 났고, 흙이 손금 사이에 축축하게 끼었다. 하윤이 아는 것은 베는 법뿐이다. 칼을 대기 전에 결을 읽고, 결이 누운 쪽으로 베면 들어간다. 흙에도 결이 있다면 물은 찬 데로 눕는다.

“셋째 밤나무 아래입니다.”

노춘이 하윤을 봤다.

“근거가 뭐요?”

“제일 찹니다.”

노춘이 한참 웃다가 멈췄다.

“아버지도 그러셨소. 손바닥으로 짚어 보고 찬 데라고.”

*

처음 사흘은 하윤 혼자 팠다. 흑사채 대신 온 사람을 누가 도와주겠는가. 삽으로 떠서 광주리에 담고, 광주리를 들고 올라와 흙을 버리고, 다시 내려갔다. 사흘째 저녁에 구덩이는 한 길이 안 됐고, 손바닥은 물집이 터져 삽자루에 들러붙었다.

나흘째 아침에 노춘이 삽을 메고 올라왔다.

“혼자 파오?”

“예.”

“물은 세 길 아래 있소. 이 마을 우물이 다 세 길이오. 혼자 파면 겨울까지 가오.”

노춘이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서 두레박 줄을 내렸다.

“댁이 파시오. 내가 받겠소.”

속도가 세 배가 됐다. 혼자 하면 파고, 담고, 들고 올라오고, 버리고, 내려간다. 둘이면 하나는 파고 하나는 올린다. 다섯 가지 일이 두 가지가 됐다. 노춘은 흙 광주리를 받을 때마다 삽질을 가르쳤다. 삽은 팔로 퍼는 게 아니다. 날을 흙에 대고 발로 밟아 밀어 넣은 다음, 자루 끝을 배로 눌러 지렛대로 떠낸다. 하윤은 밀어 넣는 힘이 칼을 칼집에 도로 넣는 힘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뽑는 힘이 아니라 넣는 힘이다.

닷새째에 둘째 집 사내가 나왔다. 이레째에 둘이 더 나왔다. 열흘째에는 여섯 집 사내가 다 나와 교대로 팠고, 아낙들이 밥을 이고 올라왔다. 첫 집 아낙은 부엌에 숨겼던 닭을 잡아 국을 끓였다. 하윤이 그 사발을 안 받으려고 하자 아낙이 사발을 흙더미 위에 탁 내려놓았다.

“굶으면 못 파오.”

“얻어먹으면 갚아야 합니다.”

“댁은 지금 갚고 있잖소. 우물이 빨리 나면 우리 거요. 그러니 이 닭은 우리 거 먹는 거요.”

하윤은 닭국을 먹었다. 먹고 나서 노춘이 옆에서 셈을 해 줬다. 혼자 사흘에 한 길, 둘이 이틀에 한 길, 일곱이 하루에 한 길이다. 깊어질수록 흙이 굳고 퍼 올리는 길이 늘어나니, 혼자 팠으면 스무날도 넘었다. 같은 흙인데 손이 늘면 나누는 게 아니라 불어난다.

*

보름날 오후, 구덩이가 두 길 반에 이르렀을 때 비탈 아래서 사람 셋이 올라왔다. 앞장선 자가 갈칠이었다. 오른 손목을 돌리며 웃었고, 뒤에 선 둘은 박도를 멨다.

“보름이다. 서른 냥 가지러 왔다.”

“달이 바뀌기 전이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기다리다 지쳤대. 여덟째가 우물이나 판다고 소문이 났거든.”

갈칠이 구덩이 가에 선 노춘의 멱살을 잡았다. 노춘의 손에서 두레박 줄이 풀렸고, 흙이 가득 찬 광주리가 구덩이 바닥으로 떨어져 하윤의 발 옆에 부서졌다.

하윤은 구덩이 벽에 박아 둔 발판을 딛고 올라왔다. 두 길 반 아래서 올려다보던 하늘은 동전만 했는데, 올라서자 늦가을 볕이 한꺼번에 눈을 찔렀고 흙냄새 속에 박도의 기름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흙투성이 손이 저절로 허리의 칼자루로 갔다. 칼이 반쯤 뽑혔다. 여기서 끝까지 뽑아 손목을 반 치 풀면 스물다섯이다.

갈칠이 멱살을 잡은 채 박도를 치켜들었다. 노춘의 머리 위였다.

하윤은 뽑던 칼을 멈췄다. 멈춘 자리에서 손목을 뒤집어, 반쯤 나온 칼을 도로 칼집에 밀어 넣으면서 칼집째 앞으로 내질렀다. 삽날을 흙에 밀어 넣던 힘이었다. 칼이 칼집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 힘이 칼집 끝 쇠장식에 실렸고, 쇠장식이 갈칠의 오른 손목 안쪽에 박혔다. 보름 전에 하윤이 벤 바로 그 자리였다.

박도가 떨어졌다. 갈칠이 노춘을 놓고 손목을 감싸 쥐었는데, 이번엔 피가 났다. 쇠장식 모양대로 살갗이 찢어져 붉은 반달이 생겼다. 날은 한 치도 나오지 않았다.

뒤에 선 둘이 박도를 뽑았다. 윗마을 사내 여섯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구덩이를 빙 둘러섰다. 셋째 집 노인은 지팡이를 거꾸로 쥐었다. 둘은 박도를 반쯤 든 채 서로 얼굴을 봤고, 갈칠이 손목을 쥔 채로 먼저 뒷걸음질을 쳤다.

“여덟째, 너 방금 뭘 한 거냐?”

하윤도 몰랐다. 문파에서 배운 초식에는 칼을 도로 넣는 수가 없다. 그날 밤 하윤은 그 동작에 칼을 거둬들이는 수, 납검(納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 베는 수의 첫째였다.

이름을 붙이고 나서 하윤은 구덩이 가에 혼자 서서 그 동작을 스무 번 되풀이했다. 칼을 반쯤 뽑고, 멈추고, 손목을 뒤집어 도로 밀어 넣으며 칼집 끝을 내지른다. 열 번째쯤에 뽑는 손과 넣는 손이 한 호흡에 이어졌고, 스무 번째에는 칼이 칼집에서 반 치밖에 안 나왔다. 반 치만 나와도 상대 눈에는 뽑는 것으로 보인다. 상대가 뽑는 칼을 막으려고 손을 올리는 그 틈에 칼집 끝이 들어간다. 노춘이 횃불을 들고 올라와 그걸 한참 구경하다가 물었다.

“칼을 넣다 뺐다 하는 건 무슨 공부요?”

“안 베는 공부입니다.”

“그런 공부도 있소?”

“오늘 생겼습니다.”

노춘이 횃불을 구덩이 가에 꽂아 두고 내려가면서, 공부가 오늘 생기는 집안도 있느냐고 혼잣말을 했다.

*

열이렛날 새벽에 흙이 젖었고, 해가 산마루에 걸릴 무렵 물이 솟았다. 처음엔 흙물이었다. 한나절을 퍼내니 맑아졌다. 노춘이 첫 두레박을 올려 하윤에게 내밀었다.

“댁이 먼저 마시오.”

하윤은 그 물을 마셨다. 이가 시리게 찼고, 셋째 밤나무 아래서 손바닥으로 짚었던 그 서늘함이 목을 타고 가슴까지 내려갔다.

물을 삼킨 순간 등 가운데가 가벼워졌다. 세 해 전 사시 나루에서 비 오는 밤에 벤 사내의 자리였다. 이어서 왼 발목이, 그다음에 목 뒤가 풀렸다. 하윤은 두레박을 든 채 둘째 집 사내를 돌아봤다. 사내가 제 등을 긁고 있었다.

하윤은 그 집 문 앞으로 갔다. 사내는 마흔쯤이었고, 물지게 멜빵에 닳은 어깨를 하고 있었다.

“세 해 전에 사시 나루에서 다치신 적이 있습니까?”

“있소. 등을. 흉은 없는데 사흘을 앓았소.”

“제가 벴습니다.”

사내가 등을 긁던 손을 멈췄다. 한참 하윤을 봤고, 그동안 마당의 닭이 두 번 울었다. 사내는 문을 닫지 않았다.

“들어오시오.”

사내가 사발에 물을 떠 왔다. 방금 솟은 우물물이었다.

“그 사흘에 무엇을 못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그땐 혼자라 밀릴 일이 없었소. 대신 세 해 동안 밀린 게 있지. 아랫마을에 물 지러 오르내린 거.”

사내가 사발을 하윤 쪽으로 밀었다.

“허락받고 진 물이 아니었소. 아랫마을 사람들이 아무 말 안 해서 계속 졌소. 이제 안 지고 오오. 그걸 댁이 없앴소.”

하윤은 사발을 들지 못했다. 손이 떨려서가 아니라, 무엇을 받았는지 셈이 서지 않아서였다. 사내가 사발을 한 번 더 밀었다. 하윤은 그제야 두 손으로 사발을 들어 물을 마셨다. 사흘을 앓게 한 사람이 떠 준 물이 아니라, 앓은 사람이 떠 준 물이었다. 사발 바닥에 모래 한 톨이 가라앉아 있었고, 하윤은 그 모래까지 마셨다.

*

시월 그믐, 윗마을 여섯 집은 물 지던 반나절로 늦가을 밭을 갈고 밤을 털어 노가촌 장에 냈다. 은 열 냥이 모였다. 나머지 스무 냥은 동지까지 갚겠다는 서약서에 여섯 집이 손도장을 찍었다. 하윤은 은 자루와 서약서를 품에 넣고 사시로 내려갔다. 갈칠이 사흘 동안 하기로 했던 일은 은을 받아 전장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통보전장 계산대에 은 자루를 내려놓는 순간 오른 손목 안쪽의 불이 꺼졌다. 두 달 가까이 살 속에 누워 있던 달군 젓가락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것 같았다. 스물에서 넷이 빠졌다. 열여섯이었다.

안쪽 탁자에서 마종곤이 은을 저울에 올리며 말했다.

“자네가 추심을 했군.”

“아닙니다. 심부름입니다.”

마종곤이 웃었다. 저울 접시에서 은이 가늘게 울었다.

마종곤이 서약서를 펴서 여섯 개의 손도장을 하나씩 짚어 보았다.

“동지까지 스무 냥이라. 못 갚으면 어쩌려고?”

“우물이 났습니다. 사내들이 반나절을 법니다. 갚습니다.”

“못 갚으면 말이오.”

“그러면 그 사흘 일도 제가 하겠습니다.”

마종곤이 서약서를 접어 선반 차용증 뭉치 사이에 꽂았다. 꽂힌 자리가 금세 다른 종이들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자네 같은 사람이 하나 있으면 내 장사가 반으로 줄겠소. 그런데 자네 같은 사람은 하나뿐이지. 호광에 내 차용증이 몇 장인지 아시오? 일만 이천 장이오. 우물을 몇 개 파시려오?”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일만 이천이라는 수가 방 안 선반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밖으로 넘쳐 나가는 것 같았다.

“도겸이를 윗마을 대신 어디로 보낼지 생각해 봐야겠소. 곽 선생 산문 아래 주막이 좋겠군. 거기서 동지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3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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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책상2026.04.29· 3화

    문장이 짧은데 밀도가 있어요. 계속 읽게 됩니다.

    • 한도윤작가2026.04.30

      끝까지 따라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3화는 문장을 덜어 내는 데 시간을 제일 많이 썼어요.

    • 겨울차2026.04.30

      저는 오히려 그 앞 문단이 더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