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416자)

동네 시리즈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탁은담

11월 7일 일요일 아침⁠, 너울마을점 계산대 뒤에서 복숭아 핸드크림 냄새가 났다⁠. 윤옥이 연두색 「⁠오늘도 화이팅⁠」 앞치마를 두르고 포스기 앞으로 갔다⁠. 첫 손님은 태권도장에 아이를 올려 보낸 아빠였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사이즈는요⁠? 매장이세요⁠, 포장이세요⁠? 영수증 드릴까요⁠? 적립하세요⁠? 적립은 번호 뒷자리 네 개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뒤에 아무도 없어요⁠.⁠”

아빠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아빠는 번호 네 자리를 누르다 틀려서 다시 눌렀다⁠. 윤옥은 기다렸다⁠. 교무실에서 학부모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두 번째 손님은 “⁠뒷면이요⁠.⁠” 했다⁠. 윤옥은 포스기를 내려다보고 「⁠기타⁠」 버튼에 손가락을 올린 채 도석을 보았다⁠. 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옥이 버튼을 눌렀다⁠. 누르면서 작게 말했다⁠.

“⁠경고 버튼 눌렀다⁠.⁠”

아홉 시에 단미가 출근했다⁠. 일요일 출근은 단미의 일이었다⁠. 단미는 계산대 뒤의 연두색 앞치마를 보고 문 앞에서 멈췄다⁠. 윤옥이 먼저 인사했다⁠.

“⁠단미 씨⁠, 안녕하세요⁠. 저 강재 엄마예요⁠. 오늘부터 주말에 계산 좀 도와요⁠.⁠”

“⁠아⁠, 네⁠. 사모님⁠.⁠”

단미가 도석을 보았다⁠. 도석은 우유 피처를 내려놓고 단미를 창고 앞으로 불렀다⁠. 원두 상자 냄새가 좁은 통로에 꽉 차 있었다⁠.

“⁠다음 주부터 주말은 집사람이 봐⁠. 단미 너는 평일만 해 줘⁠.⁠”

“⁠평일만이면 일주일에 열여섯 시간 빠지네요⁠.⁠”

“⁠미안하다⁠.⁠”

“⁠이자 때문이에요⁠?⁠”

도석은 대답 대신 원두 상자를 바로 놓았다⁠. 단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단미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 대답이 빠르면 생각은 이미 끝나 있는 것이었다⁠. 단미는 앞치마를 두르고 나가 윤옥 옆에서 우유를 데웠다⁠. 윤옥이 주문을 받을 때마다 단미가 반 박자 먼저 컵을 꺼냈다⁠. 둘은 손발이 잘 맞았다⁠. 잘 맞아서 도석은 더 미안했다⁠.

*

수요일 저녁⁠, 경제 신문 인터넷판에 기사가 올라왔다⁠. 「⁠커피 프랜차이즈 달그락⁠, 잘되는 가맹점 옆에 직영점⁠… ‘⁠가맹점 전환⁠’ 의혹⁠」 기사 끝에 본사 답변이 한 줄 붙어 있었다⁠. 「⁠사실무근이며 가맹점과의 상생을 최우선으로 한다⁠」 점주 모임 방은 기사 주소로 도배가 됐다⁠. 광교점 사장이 기사 댓글을 세어 올렸고⁠, 수지점 사장은 댓글 가운데 「⁠그래도 달그락 쿠키는 맛있음⁠」이 제일 많은 추천을 받았다고 화를 냈다⁠.

밤 열 시⁠, 강재가 학원에서 내려와 가게 문을 두드렸다⁠. 강재는 스콘을 하나 꺼내고 오천 원을 놓더니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직영점 스터디존 예약 화면이었다⁠. 「⁠예약 취소가 완료되었습니다⁠」

“⁠엄마가 넣은 거 내가 취소했어⁠.⁠”

“⁠왜⁠? 공짜라며⁠.⁠”

“⁠공짜는 맞는데⁠, 거기 앉아 있으면 창문으로 아빠 가게가 보여⁠. 아빠 가게 보면서 공부하면 공부가 안 돼⁠.⁠”

도석은 오천 원을 다시 밀어 주었다⁠. 강재는 이번에는 돈을 집어 넣었다⁠.

“⁠엄마한테는 내가 알아서 말할게⁠. 엄마는 요즘 아빠한테 화내느라 바빠서 내 일은 대충 넘어가⁠.⁠”

*

11월 13일 토요일 오전 열한 시⁠, 길 건너 직영점 이 층에서 시음회가 열렸다⁠. 상가 상인과 동네 주민을 부른 자리였다⁠. 계단을 올라가자 새 원목의 송진 냄새와 볶은 지 이틀 된 원두 냄새가 함께 밀려왔다⁠. 천장이 높았고⁠, 통유리로 너울마을 상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너울마을점 간판이 장난감처럼 작았다⁠.

도석은 할머니와 세탁소 사장과 함께 갔다⁠. 할머니는 쿠키 싸러 간다고 했고⁠, 세탁소 사장은 직영점 세탁 거래처라 초대장을 받았다⁠. 번영회장은 먼저 와서 맨 앞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벽 한 면을 현수막이 덮고 있었다⁠. 「⁠12월 11일 그랜드 오픈 — 싱가포르 파트너와 함께⁠」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 도석은 걸음을 멈췄다⁠. 귤 냄새였다⁠. 귤껍질을 말려 설탕에 재우고 졸인 냄새⁠. 도석이 지난겨울 집 베란다에서 말린 귤껍질과 같은 냄새였다⁠.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시음대 위 메뉴판이 보였다⁠.

「⁠판교 동네 시리즈 — 너울마을의 하루를 한 잔에⁠」

「⁠야근 귤피 라테 · 학원 앞 보리 밀크 · 참깨 크림 라테 · 생강 허니 라테 · 첫눈 시나몬 라테⁠」

다섯 가지였다⁠. 넷은 도석의 칠판 뒷면에 있는 이름을 조금씩 바꾼 것이었다⁠. 다섯 번째는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채홍이 마이크를 들고 시음대 앞으로 나왔다⁠.

“⁠너울마을 이웃 여러분⁠! 오늘 맛보실 「⁠판교 동네 시리즈⁠」는 이 동네의 하루를 한 잔에 담은 메뉴입니다⁠. 야근하는 직장인의 귤⁠, 학원 앞에서 기다리는 부모님의 보리⁠, 시장 방앗간의 참깨⁠! 로컬 감성을 브랜드 경험으로 리디자인했습니다⁠!⁠”

상인들이 박수를 쳤다⁠. 할머니가 도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시장 방앗간이 어디 있어⁠? 이 동네에 방앗간 없어⁠. 우리 영감 방앗간은 모란에 있었어⁠.⁠”

“⁠리디자인했대요⁠.⁠”

“⁠리디자인이 뭐야⁠?⁠”

“⁠남의 거 가져다 이름 바꾸는 거요⁠.⁠”

할머니가 크게 웃었고⁠, 앞줄의 번영회장이 돌아보았다⁠. 할머니가 시음 컵을 하나 집었다⁠. 참깨 크림 라테였다⁠. 냄새를 맡고⁠,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깨를 덜 볶았네⁠.⁠”

“⁠네⁠?⁠”

“⁠귀로 안 볶았어⁠. 기계로 볶았어⁠. 소리를 안 들었어⁠.⁠”

할머니는 쿠키를 냅킨에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세탁소 사장이 생강 허니 라테를 마시고 얼굴을 찌푸렸다⁠.

“⁠생강을 안 쪘네⁠. 매워⁠.⁠”

번영회장이 맨 앞 테이블에서 돌아보았다⁠. 번영회장 앞에 야근 귤피 라테가 놓여 있었다⁠.

“⁠마 사장⁠, 이거 마 사장네 거랑 비슷하네⁠? 마 사장네 게 원조야⁠?⁠”

번영회장이 너울마을점에서 커피를 사 마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조를 알 리가 없었다⁠.

*

시음대 뒤에서 혜지가 나왔다⁠. 오늘은 회색 코트 대신 민트색 카디건이었다⁠. 도석은 시음대 앞으로 갔다⁠. 도석과 혜지 사이에 시음 컵 쉰 개가 줄 맞춰 놓여 있었다⁠.

“⁠제 메뉴입니다⁠.⁠”

“⁠사장님 메뉴는 「⁠야근 귤⁠」이죠⁠. 저희는 「⁠야근 귤피 라테⁠」예요⁠.⁠”

“⁠귤피라고 두 글자 붙이셨습니다⁠.⁠”

혜지는 컵 하나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사장님⁠. 레시피는 특허가 아니에요⁠. 귤껍질 라테는 세상에 많아요⁠. 참깨 라테도 보리 라테도요⁠. 그리고 저희는 본사 원재료로 다시 만들었어요⁠. 귤피 시럽도⁠, 참깨 페이스트도 본사 공급 업체에서 새로 받은 거예요⁠.⁠”

“⁠제 가게는 같은 걸 만들어서 경고를 두 번 먹었습니다⁠.⁠”

“⁠가맹점이 외부 재료로 만들면 계약 위반이고⁠, 본사가 본사 재료로 만들면 신메뉴예요⁠. 사장님 가게에서 배탈이 나면 사장님이 책임질 수 없어요⁠. 본사에서 배탈이 나면 본사가 책임져요⁠. 그게 차이예요⁠.⁠”

맞는 말이 또 나왔다⁠. 혜지는 늘 맞는 말을 했다⁠. 도석은 컵을 내려다보았다⁠. 컵 안의 귤피 라테는 색이 너울마을점 것보다 진했다⁠. 시럽을 많이 넣은 색이었다⁠.

“⁠상무님⁠. 이 귤피 라테 한 잔에 누가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누가요⁠?⁠”

“⁠길 건너 회사에서 밤새우는 개발자 하나요⁠. 후드 끈이 짝짝이고⁠, 김밥을 식혀 먹습니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만든 겁니다⁠. 상무님 메뉴판에는 그 사람이 없습니다⁠.⁠”

“⁠있어요⁠. 그분도 여기 오실 거예요⁠. 콘센트가 두 개 더 많거든요⁠.⁠”

“⁠어디서 났습니까⁠? 이 다섯 가지⁠.⁠”

혜지는 대답하기 전에 이 층 뒤편을 보았다⁠. 시음대 뒤 직원 통로 앞에 민트색 셔츠를 입은 직원 셋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이 가슴에 새 명찰을 달고 있었다⁠.

“⁠매니저 면접 포트폴리오로 들어왔어요⁠. 본인이 만들어 본 음료 다섯 가지를 내라고 했는데⁠, 가장 좋은 포트폴리오였어요⁠.⁠”

혜지는 시음 컵을 내려놓았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사장님⁠, 그 사람 탓하지 마세요⁠. 저희가 레시피를 달라고 한 적은 없어요⁠. 그 사람이 낸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그게 이력서였어요⁠.⁠”

*

직영점 뒷문은 쓰레기통이 모인 좁은 골목으로 나 있었다⁠. 종이 상자와 우유 팩 냄새가 났다⁠. 주단미는 뒷문 계단에 앉아 있었다⁠. 민트색 셔츠 가슴에 명찰이 있었다⁠. 「⁠매니저 주단미⁠」

도석은 계단 아래에 멈췄다⁠. 단미가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 오실 줄 알았어요⁠. 귤 냄새 맡고 오셨죠⁠?⁠”

“⁠네가 냈어⁠?⁠”

“⁠네⁠.⁠”

단미는 명찰을 손으로 덮었다가 내렸다⁠.

“⁠포트폴리오에 다섯 개 내라고 했어요⁠. 저 혼자 만든 거 하나도 없었어요⁠. 석 달 동안 사장님 옆에서 만든 것밖에 없었어요⁠. 첫눈 시나몬은 제가 만든 거예요⁠. 그거 하나요⁠. 나머지 넷은⁠…⁠…⁠.⁠”

“⁠내 거야⁠.⁠”

“⁠제 것도 맞아요⁠.⁠”

단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보리 우리는 시간 사십 분⁠, 그거 제가 맞췄어요⁠. 사장님은 삼십오 분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사십 분이 낫다고 했고⁠, 사장님이 제 말 들으셨어요⁠. 참깨에 소금 한 꼬집⁠, 할머니 시금치 생각해 낸 거 사장님이지만 그 꼬집 크기 정한 건 저예요⁠. 야근 귤 시럽 한 숟가락 반⁠, 원래 두 숟가락이었어요⁠.⁠”

도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단미가 하는 말이 다 맞았다⁠. 칠판 뒷면 분필 글씨도 절반은 단미의 글씨였다⁠.

“⁠사장님이 한 번이라도 손님 앞에서 이거 우리 둘이 만든 거라고 해 주셨으면⁠, 저 이거 안 냈어요⁠. 사장님은 맨날 ‘⁠사장님이 만들어요⁠, 저는 옆에서 봐요⁠’ 하고 다니는 저를 그냥 두셨어요⁠.⁠”

“⁠단미야⁠.⁠”

“⁠주말 빠진 날⁠, 저 집에 가서 학자금 앱 열고 한 시간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계약서에 서명했어요⁠. 어제요⁠.⁠”

단미는 일어났다⁠. 도석보다 계단 한 칸 위에 있었다⁠.

“⁠사장님 탓하는 거 아니에요⁠. 사장님은 사모님이랑 강재 지키셔야 하잖아요⁠. 저는 저를 지킨 거예요⁠. 다들 자기 거 지키는 거예요⁠.⁠”

뒷문이 열리고 채홍이 고개를 내밀었다⁠.

“⁠매니저님⁠, 시음 끝나요⁠. 마무리 인사 같이하셔야죠⁠.⁠”

단미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전에 도석은 단미 셔츠에서 귤 냄새를 맡았다⁠. 오늘 아침 직영점 주방에서 귤피 시럽을 졸인 냄새였다⁠.

*

밤 열 시⁠, 마감한 너울마을점 유리문이 열렸다⁠. 단미가 들어왔다⁠. 민트색 셔츠 위에 너울마을점 앞치마를 접어 들고 있었다⁠. 글씨가 하나도 없는 앞치마였다⁠.

단미는 앞치마를 계산대 위에 놓았다⁠. 앞치마 위에 열쇠를 올렸다⁠. 개점 날 도석이 건넨 열쇠였다⁠. 민트색 고무 머리가 달려 있었다⁠.

“⁠월요일부터 직영점 출근이에요⁠. 개점 준비요⁠.⁠”

도석은 열쇠를 집지 않았다⁠.

“⁠칠판⁠, 하나만 말씀드리고 갈게요⁠.⁠”

단미는 칠판을 뒤집었다⁠. 뒷면 아홉 줄 가운데 단미 글씨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학원 앞 보리 옆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를 적었다⁠.

「⁠40분⁠. 35분 아님⁠」

“⁠사모님이 토요일 아침에 보리 우리실 때 헷갈리실까 봐요⁠.⁠”

단미가 문을 나갔다⁠. 길 건너 직영점 이 층에 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단미의 그림자가 찻길을 건너 이 층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도석은 계산대 위의 열쇠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고무 머리에 단미의 손때가 까맣게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윤옥이었다⁠.

「⁠단미 씨 그만뒀어⁠? 학부모방에 단미 씨가 직영점 매니저 명찰 단 사진 올라왔어⁠」

도석은 「⁠응⁠」이라고 보냈다⁠. 윤옥의 답은 오래 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한 줄이 왔다⁠.

「⁠내가 주말 맡아서 그래⁠?⁠」

도석은 답을 쓰다가 지웠다⁠.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라서 쓰기가 더 어려웠다⁠. 도석은 칠판을 앞면으로 돌려놓지 않고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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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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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화만더2026.11.01· 9화

    주문 받을 때 질문을 쉬지 않고 하는 윤옥 씨 너무 웃겨요. 카페 알바 해 본 사람은 다 알아요.

    • 탁은담작가2026.11.01

      본사 매뉴얼대로 하면 정말 저렇게 돼요. 손님이 아메리카노 한 잔에 질문 다섯 개를 받습니다.

동네 시리즈 ·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