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53자)

세 시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탁은담

11월 16일 밤 열한 시⁠, 정자점에서는 병원 소독약 냄새가 났다⁠. 가게 소독약이 아니었다⁠. 금예란의 카디건에서 나는 냄새였다⁠. 예란의 남편은 전날 허리 수술을 받았다⁠. 예란은 병원에서 곧장 가게로 와서 마감을 했다고 했다⁠.

“⁠수술은 잘됐어⁠. 의사가 여섯 주 누워 있으래⁠. 여섯 주면 가게를 나 혼자 봐⁠.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예란은 계산대 위에 봉투를 하나 올려놓았다⁠. 본사 법무팀 봉투였다⁠. 너울마을점에 온 경고장과 같은 봉투였다⁠.

“⁠정자점 인수 제안⁠. 팔천만 원⁠. 그리고 하나 더⁠.⁠”

봉투 밑에서 예란이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정자동 카페거리 입구의 오래된 건물이었다⁠. 일 층 유리창에 민트색 시트가 붙어 있었다⁠. 「⁠달그락커피 정자 직영점 · 2028년 봄 오픈 예정⁠」

“⁠아홉 해 전에 직영점 냈던 그 자리야⁠. 똑같은 자리⁠. 걔들 기억력 좋아⁠.⁠”

도석은 사진을 내려놓았다⁠. 예란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처음으로 도석보다 먼저 앉았다⁠.

“⁠팔 거야⁠.⁠”

“⁠네⁠.⁠”

“⁠말리지 마⁠.⁠”

“⁠안 말립니다⁠.⁠”

“⁠말려 봐⁠. 말리는 척이라도 해⁠.⁠”

“⁠사장님 남편 여섯 주 누워 계십니다⁠. 제가 여섯 주 동안 정자점을 봐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 말립니다⁠.⁠”

예란은 웃다가 그만두었다⁠. 봉투에서 계약서 초안을 꺼내 마지막 장을 펼쳤다⁠. 손톱으로 한 줄을 짚었다⁠.

“⁠여기 봐⁠. 「⁠매도인은 매각 공표 시 점주 단체 탈퇴 사실을 함께 알린다⁠」 팔면서 모임 탈퇴한다고 대화방에 올리래⁠. 정자점 금예란이 나간다고⁠. 구 년 차가 나가면 다른 점주들도 줄줄이 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예란은 계약서를 접었다⁠.

“⁠팔더라도 이렇게는 안 팔아⁠. 내가 아홉 해 전에 세 번째로 깨진 거 말 안 했지⁠? 창피하다고⁠.⁠”

“⁠네⁠.⁠”

“⁠간판 불 끄기였어⁠. 정한 날 정한 시각에 전국 가맹점이 간판 불을 십 분 끄자⁠. 손님은 그대로 받고⁠. 사진만 찍어 올리자⁠. 내가 냈어⁠. 몇 곳 껐는지 알아⁠? 열두 곳⁠. 전국에서 열두 곳⁠. 그중 하나가 우리 가게고⁠.⁠”

예란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녹음 버튼 대신 모임 방을 열었다⁠. 방 인원이 천구백 명을 넘어 있었다⁠.

“⁠다시 하자⁠. 열두 곳이 몇 곳이 되는지 보고 팔지 말지 정할래⁠.⁠”

“⁠열두 곳이면요⁠?⁠”

“⁠그럼 팔아⁠. 아홉 해 동안 내가 틀렸던 거니까⁠. 팔고 남편 옆에 여섯 주 누워 있을 거야⁠. 둘이 나란히⁠.⁠”

“⁠백 곳이면요⁠?⁠”

예란은 도석을 보았다⁠. 소독약 냄새 밑으로 오래 쓴 원두 통의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아홉 해 동안 이 가게가 예란에게 배어 있었다⁠.

“⁠백 곳이면 생각해 볼게⁠. 그 이상은 모르겠다⁠. 아홉 해 동안 그 이상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

*

11월 18일 아침⁠, 반찬가게 셔터에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셔터를 반만 올린 채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깨 볶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깨를 안 볶은 아침은 처음이었다⁠.

「⁠임대료 조정 안내 — 2028년 1월부터 월 임대료를 30% 조정합니다⁠. 주변 상권 변화를 반영한 것입니다⁠. 건물주 대리인 너울부동산⁠」

너울부동산은 번영회장의 가게였다⁠. 도석이 종이를 다 읽었을 때 번영회장이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손에 믹스커피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할머니가 종이를 떼서 번영회장 얼굴 앞에 내밀었다⁠.

“⁠회장⁠. 이게 상권 변화야⁠? 길 건너 큰 거 들어온다고 내 월세가 오르면⁠, 박수 친 사람이 오른 거 내 줘⁠?⁠”

“⁠할머니⁠, 그건 건물주가⁠…⁠…⁠.⁠”

“⁠건물주 대리인이 누구야⁠? 여기 회장 가게 이름 있잖아⁠.⁠”

번영회장은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 믹스커피가 식어 위에 막이 앉아 있었다⁠.

“⁠건물주가 그러는데⁠, 이 층 학원도 오른대⁠. 세탁소도 오르고⁠. 다 오른대⁠. 직영점 들어오면 이 상가 자리가 비싸진다고⁠. 나는 그 말을 스무 해 들었어⁠. 근데 이번엔 우리 상가 사람들이 나가게 생겼어⁠.⁠”

번영회장은 도석에게 몸을 돌렸다⁠.

“⁠마 사장⁠. 나 설명회 때 박수 친 거⁠, 무르자⁠.⁠”

“⁠무를 수 있습니까⁠?⁠”

“⁠못 무르지⁠. 그러니까 다른 거 하자⁠. 본사 외벽 도색⁠, 아직 도장 안 찍었어⁠. 안 찍을 거야⁠. 그리고 마 사장네 그 간판 끄는 거⁠, 금요일 세 시라며⁠? 우리 상가도 끈다⁠. 반찬가게⁠, 꽃집⁠, 학원⁠, 태권도장⁠. 간판 있는 데는 다⁠.⁠”

“⁠세탁소는요⁠?⁠”

“⁠세탁소는 본사 일감 받잖아⁠. 그건 세탁소 사장이 정해야지⁠.⁠”

할머니가 셔터를 끝까지 올렸다⁠. 무쇠 솥을 불에 올렸다⁠. 첫 깨가 톡⁠, 하고 튀었다⁠.

“⁠회장⁠. 커피 한 잔 사 마셔⁠. 저 집에서⁠. 스무 해 동안 믹스만 마셨잖아⁠.⁠”

번영회장은 손에 든 종이컵을 내려다보았다⁠. 스무 해 동안 상가 사람들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마신 믹스커피였다⁠. 번영회장은 식은 믹스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너울마을점 유리문을 밀었다⁠. 석 달 반 만에 처음이었다⁠. 윤옥이 없는 평일이라 도석이 직접 받았다⁠. 번영회장은 메뉴판 앞면을 오래 보더니 말했다⁠.

“⁠뒷면 하나 줘⁠. 아무거나⁠.⁠”

도석은 찬방 참깨를 내렸다⁠. 번영회장은 한 모금 마시고 할머니 반찬가게를 돌아보았다⁠.

“⁠모란시장 냄새네⁠.⁠”

*

11월 19일 금요일 오후 두 시 오십오 분⁠, 너울마을점 계산대 위에 휴대전화 세 대가 나란히 놓였다⁠. 도석의 것⁠, 일찍 퇴근하고 온 윤옥의 것⁠, 그리고 점주 모임 방만 띄워 놓은 가게 태블릿이었다⁠. 윤옥은 연두색 앞치마를 두르고 포스기 앞에 있었다⁠.

“⁠이거 진짜 해⁠? 십 분 동안 간판 끄면 손님이 문 닫은 줄 알잖아⁠.⁠”

“⁠강재가 반 단톡에 올렸대⁠. 세 시에 우리 아빠 가게 간판 끈다고⁠. 애들이 그게 무슨 시위냐고 물었더니⁠, 강재가 「⁠불 끄는 시위⁠」라고 했대⁠. 담임 선생님이 그 방에 있는 줄도 모르고⁠.⁠”

“⁠선생님이 뭐라셔⁠?⁠”

“⁠「⁠강재 아버님 응원합니다⁠」 하트까지 붙여서⁠.⁠”

윤옥은 투덜거리면서 휴대전화 화면을 도석에게 보여 주었다⁠. 하트는 두 개였다⁠.

“⁠문에 써 붙였어⁠.⁠”

유리문에 A4 종이가 붙어 있었다⁠. 「⁠세 시부터 십 분⁠, 간판만 끕니다⁠. 커피는 그대로 내립니다⁠」 반찬가게 할머니의 삐뚤어진 글씨였다⁠. 할머니가 자기가 써야 사람들이 믿는다고 했다⁠.

방에는 점주들이 시간을 맞추느라 시계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부산 서면점 준비 완료⁠」⁠, 「⁠제주 노형점도 해요⁠」⁠, 「⁠강릉점 사장 오늘 생일인데 간판 끄는 생일 처음임⁠」 예란의 음성 메시지가 떴다⁠. 도석은 눌렀다⁠.

“⁠너울마을⁠. 열두 곳만 넘어라⁠. 끊어⁠.⁠”

세 시⁠.

도석은 계산대 밑 스위치를 내렸다⁠. 유리문 위 민트색 간판의 불이 꺼졌다⁠. 같은 순간 복도 건너 반찬가게의 「⁠손맛찬방⁠」 간판이 꺼졌다⁠. 꽃집이 꺼지고⁠, 부동산이 꺼지고⁠, 2층 학원과 태권도장의 간판이 차례로 꺼졌다⁠. 세탁소 간판만 켜져 있었다⁠. 도석이 세탁소를 보았다⁠. 세탁소 유리문 안에서 세탁소 사장이 다리미 플러그를 뽑아 들고 이쪽을 향해 흔들었다⁠.

방에 사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꺼진 간판⁠, 꺼진 간판⁠, 꺼진 간판⁠. 광교점 사장이 숫자를 올렸다⁠. 「⁠300곳⁠」⁠, 「⁠800곳⁠」⁠, 「⁠1⁠,500곳⁠」 윤옥이 포스기에서 손을 떼고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윤옥의 입술이 따라 움직였다⁠.

“⁠이천⁠. 이천이 넘었어⁠.⁠”

세 시 칠 분⁠, 광교점 사장이 마지막 숫자를 올렸다⁠. 「⁠2⁠,317곳⁠」 전국 가맹점 삼천여 곳 가운데 이천삼백 곳이 넘게 간판을 끄고 사진을 보냈다⁠.

예란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왔다⁠. 이번에는 길었다⁠. 도석은 누르지 않았다⁠. 윤옥이 대신 눌렀다⁠. 스피커에서 예란의 목소리가 나왔다⁠. 말이 아니었다⁠. 우는 소리였다⁠. 십 초쯤 우는 소리가 나다가 코를 푸는 소리가 나고⁠, 마지막에 한마디가 들렸다⁠.

“⁠끊어⁠.⁠”

윤옥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도석을 보았다⁠. 윤옥의 눈도 빨갰다⁠.

도석의 휴대전화가 따로 울렸다⁠. 단미였다⁠. 사진이 한 장 왔다⁠. 위에서 내려다본 너울마을 상가였다⁠. 직영점 이 층 통유리 너머로 찍은 사진이었다⁠. 상가 일 층 간판들이 한 줄로 꺼져 있었고⁠, 세탁소 하나만 불이 켜져 있었다⁠. 사진 밑에 글이 한 줄 붙어 있었다⁠.

「⁠위에서 보니까 한 줄로 다 꺼졌어요⁠. 세탁소 사장님 다리미 흔드는 것도 보여요⁠」

도석은 답을 쓰려다 그만두었다⁠. 사진을 오래 보았다⁠. 직영점 유리창에 단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쳐 함께 찍혀 있었다⁠. 민트색 셔츠 가슴에 명찰이 보였다⁠. 손님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꺼진 간판을 올려다보며 들어온 쌍둥이 엄마였다⁠.

“⁠사장님⁠, 뒷면 보리요⁠. 간판 꺼진 거 단톡방에서 보고 왔어요⁠. 다들 사진 찍으러 온대요⁠.⁠”

*

세 시 팔 분⁠, 길 건너 직영점 앞 인도에 회색 코트가 서 있었다⁠. 혜지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을 넘기는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혜지가 고개를 들어 너울마을 상가를 보았다⁠. 꺼진 간판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세탁소 간판 하나만 켜져 있었다⁠.

세 시 십 분⁠, 도석이 스위치를 올렸다⁠.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상가 간판들이 하나씩 따라 켜졌다⁠. 혜지가 찻길을 건넜다⁠. 도석은 유리문을 열고 혜지를 기다렸다⁠. 혜지는 꺼졌다 켜진 간판을 한 번 올려다보고 들어왔다⁠. 윤옥이 포스기 앞에서 허리를 폈다⁠.

“⁠사모님이시죠⁠? 엄혜지입니다⁠. 설명회 때 뵀어요⁠.⁠”

“⁠네⁠. 박수 친 사람이요⁠.⁠”

혜지는 웃지 않았다⁠. 도석 앞으로 왔다⁠.

“⁠이천삼백 곳이 십 분 동안 간판을 껐어요⁠. 싱가포르가 이 사진을 다 봤어요⁠. 실사단이 오늘 저녁 저한테 전화하겠대요⁠. 무슨 일이냐고⁠.⁠”

“⁠무슨 일이라고 하실 겁니까⁠?⁠”

“⁠그건 사장님한테 달렸어요⁠.⁠”

혜지는 서류 봉투를 계산대 위에 올렸다⁠.

“⁠마지막 제안이에요⁠. 인수가 일억 이천⁠. 위약금 면제⁠, 경고 두 번 철회⁠. 직영점 메뉴판에서 「⁠동네 시리즈⁠」라는 이름도 뺄게요⁠. 조건은 둘⁠. 가게를 본사에 넘기시고⁠, 협의회 대표에서 내려오세요⁠.⁠”

윤옥이 봉투를 보았다⁠. 일억 이천⁠. 대출 오천을 갚고도 칠천이 남는 숫자였다⁠. 강재 학원비를 두 해 내고도 남는 숫자였다⁠.

“⁠상무님⁠, 하나만 여쭤볼게요⁠.⁠”

윤옥이 말했다⁠. 학부모 전화를 받을 때의 목소리였다⁠.

“⁠이 돈 받으면 우리 남편은 뭐 해요⁠? 마흔여덟에⁠.⁠”

“⁠원하시면 본사 메뉴 개발팀 계약직 자리를 드릴 수 있어요⁠. 일 년 계약이고 연장할 수 있어요⁠. 동네 시리즈 만드는 일이에요⁠.⁠”

윤옥이 도석을 보았다⁠. 도석은 혜지를 보았다⁠. 제 메뉴를 가져간 회사에서 제 메뉴를 만드는 자리였다⁠. 혜지는 계약직 자리를 진심으로 내밀고 있었다⁠. 진심이라서 더 쓰렸다⁠.

“⁠월요일 오후 두 시까지 답 주세요⁠. 안 받으시면 3차 경고가 나갑니다⁠. 원재료 외부 조달⁠,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잖아요⁠.⁠”

혜지는 칠판을 보았다⁠. 앞면이 보이게 놓여 있었다⁠. 혜지가 손을 뻗어 칠판을 뒤집었다⁠. 뒷면 아홉 줄⁠, 「⁠40분⁠. 35분 아님⁠」까지 보였다⁠.

“⁠3차 경고는 해지예요⁠. 해지되면 일억 이천은 없어요⁠. 인테리어 철거비는 사장님이 내셔야 하고요⁠.⁠”

혜지가 나갔다⁠. 윤옥은 봉투를 집지 않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길 건너 직영점 지붕의 「⁠달그락⁠」 세 글자에 불이 들어왔다⁠. 개점 전 시험 점등이었다⁠. 민트색이 찻길을 건너와 너울마을점 유리문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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