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450자)

커트 만 오천 원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1월 26일 화요일 오전 열 시 반⁠, 수원 영통 보영헤어의 의자 셋 가운데 둘이 이미 차 있었다⁠. 문순자는 설 앞 파마를 하러 왔고⁠, 최정희는 순자를 감시하러 왔다고 했다⁠. 창밖 가로수는 여전히 맨가지였다⁠.

“⁠원장⁠, 내가 리딩방 나왔어⁠. 정희 말 듣고⁠.⁠”

“⁠잘하셨어요⁠, 언니⁠.⁠”

“⁠대신 코인방 들어갔어⁠.⁠”

정희가 염색 보자기 안에서 한숨을 쉬었다⁠. 보영은 웃으면서 순자의 머리에 롤을 감았다⁠. 카운터 위 휴대전화에는 토요일 오후의 이체 화면이 아직 떠 있었다⁠. 「⁠이체 300⁠,000원 · 받는 분 도금자⁠」⁠. 1월 23일 이자 육십만 원 가운데 반이었다⁠. 나머지 반은 카드론 결제일인 1월 25일에 카드사로 갔다가⁠, 그래도 모자라서 카드론 결제가 하루 밀려 있었다⁠.

정희가 고개를 빼고 화면을 읽었다⁠.

“⁠도금자⁠? 이름에 금이 들었네⁠. 돈 받기 좋은 이름이다⁠.⁠”

“⁠약제 회사 사장님이에요⁠.⁠”

“⁠약제 회사 사장님이 할머니 이름이네⁠.⁠”

보영은 휴대전화를 엎었다⁠. 예약 앱 알림이 엎은 화면 밑에서 한 번 더 울렸다⁠. 오늘 오전 열한 시에 신규 고객이 하나 있었다⁠. 「⁠나 실장 · 커트 · 15⁠,000원⁠」⁠.

*

오전 열한 시 정각⁠, 계단 스물두 개를 다 올라온 남자는 숨도 고르지 않았다⁠. 마흔 중반⁠, 회색 섞인 머리를 귀가 덮이게 기른 남자였다⁠. 남자는 의자에 앉기 전에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의자 셋⁠, 샴푸대 둘⁠, 롤을 서른여섯 개 단 순자⁠, 보자기 속 정희⁠, 수건을 개는 다은⁠.

“⁠예약한 나 실장입니다⁠. 커트요⁠. 직장 다니는 사람처럼 잘라 주세요⁠.⁠”

보영이 남자의 목에 커트 보를 둘렀다⁠. 거울 속 남자가 웃었다⁠.

“⁠한빛 고객센터 나성태입니다⁠.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원장님 직장이 여기라 그냥 손님으로 왔어요⁠. 지난번에 그러셨다면서요⁠. 찾아오시면 머리나 하고 가라고⁠.⁠”

보영의 손에서 빗이 미끄러졌다⁠. 다은이 개던 수건을 떨어뜨렸다⁠. 순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거울 속 남자에게 물었다⁠.

“⁠고객센터 다니세요⁠? 우리 아들도 고객센터⁠. 통신사⁠.⁠”

“⁠저희도 비슷해요⁠, 어머님⁠. 전화로 사람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요새 코인은 어때요⁠? 고객센터면 정보 빠르잖아⁠.⁠”

“⁠어머님⁠, 전화로 돈 벌게 해 준다는 사람은 대본을 읽는 거예요⁠. 세상에 대본 없는 전화는 없습니다⁠.⁠”

정희가 보자기 안에서 손뼉을 쳤다⁠.

“⁠그거 봐⁠, 언니⁠. 고객센터 사람도 그러잖아⁠.⁠”

보영은 빗을 주워 소독기에 넣고 새 빗을 꺼냈다⁠. 가위를 들고 남자의 옆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토요일에 삼십 들어왔어요⁠. 삼십 남았고요⁠. 목요일까지 연체료 십 붙여서 사십⁠. 다음 주 화요일 2월 2일은 정기 육십입니다⁠.⁠”

“⁠지금 제 손에 가위 있어요⁠.⁠”

“⁠알아요⁠. 원장님 손이 떨리면 제 귀가 다칩니다⁠. 그래서 원장님은 안 떨 거예요⁠. 직업이니까⁠.⁠”

보영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스물두 해 가위를 잡은 손이었다⁠. 가위가 사각 소리를 내며 남자의 귀 위를 지나갔다⁠. 남자는 거울 속에서 가게를 다시 둘러보았다⁠.

“⁠이 의자에 앉는 손님이 이백열두 명이죠⁠. 예약 앱 목록이 그렇더라고요⁠. 그리고 바깥분 김상훈 씨⁠. 품질팀 내선은 제가 외우진 않았습니다⁠. 화면에 있으니까⁠.⁠”

“⁠그분들은 제 빚이랑 상관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상관없게 해 주세요⁠.⁠”

보영은 뒷머리를 바리캉으로 정리하고 목덜미의 잔털을 털었다⁠. 손거울을 들어 뒷모습을 보여 주었다⁠. 반듯했다⁠. 남자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만족한 얼굴을 했다⁠. 지갑에서 만 원 한 장과 오천 원 한 장을 꺼내 카운터에 놓았다⁠.

“⁠현금영수증 해 드려요⁠?⁠”

“⁠번호 남기는 건 제 일이 아니라서요⁠.⁠”

순자가 웃었다⁠. 남자도 웃었다⁠. 보영만 웃지 않았다⁠.

*

나성태가 나간 뒤⁠, 보영은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 틈을 벌렸다⁠. 상가 앞 도로에 회색 승합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있었다⁠. 운전석 문에 기대 있던 젊은 남자가 몸을 바로 했다⁠. 검은 후드티⁠, 마른 몸⁠, 손에 휴대전화가 두 대였다⁠. 젊은 남자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고 나성태가 탔다⁠. 승합차는 깜빡이를 켜고 반듯하게 차선을 바꾸어 나갔다⁠. 법을 지키는 운전이었다⁠.

“⁠원장⁠, 저 손님 머리숱 좋더라⁠. 다음에 또 온대⁠?⁠”

“⁠네⁠. 열흘마다요⁠.⁠”

순자는 단골 하나 늘었다고 좋아했다⁠. 보영은 카운터의 만 오천 원을 집어 계산대 서랍에 넣지 않고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나성태가 낸 돈이 서랍의 다른 돈과 섞이는 것이 싫었다⁠.

“⁠원장⁠, 저 사람 번호 좀 줘 봐⁠. 우리 아들이 고객센터 그만두고 싶대⁠. 저 회사는 월급 많이 주나 물어보게⁠.⁠”

“⁠언니⁠, 저 회사는 사람 안 뽑아요⁠. 사람을 찾아가요⁠.⁠”

순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롤 서른여섯 개를 단 머리를 갸웃했다⁠. 정희만 보자기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

저녁 여덟 시⁠, 셔터를 반쯤 내린 가게에서 다은이 빗자루를 든 채 말했다⁠.

“⁠원장님⁠, 그 사람 저 알아요⁠.⁠”

보영은 정산 영수증을 접다가 손을 멈췄다⁠. 다은은 빗자루 끝을 바닥에 세웠다⁠. 쓸어 모은 머리카락 위에 나성태의 회색 머리카락도 섞여 있었다⁠.

“⁠얼굴은 몰라요⁠. 목소리요⁠. 시월에 그 번호에서 빌렸어요⁠. 4417⁠. 학자금 이자가 밀려서요⁠. 오십 빌린다고 했는데 삼십오가 들어왔어요⁠. 일주일마다 연장비 내다가 지금 이백팔십이에요⁠. 원장님이 주시는 월급 반이 거기 가요⁠.⁠”

“⁠너 그걸 왜 혼자⁠.⁠”

“⁠원장님도 혼자 하셨잖아요⁠.⁠”

보영은 할 말이 없었다⁠. 다은은 울지 않았다⁠. 빗자루를 꼭 쥔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가 가라앉았다⁠.

“⁠저 처음 빌릴 때 아빠 번호 줬어요⁠. 평택에서 세차장 하세요⁠. 아빠는 제가 영통에서 잘 사는 줄 알아요⁠. 미용실 원장님한테 기술 배운다고 동네방네 자랑해요⁠.⁠”

“⁠다은아⁠, 같이 신고하자⁠. 나도 할 거야⁠. 1332에 하면 변호사가 붙는대⁠.⁠”

“⁠원장님은 하세요⁠. 저는 못 해요⁠.⁠”

“⁠왜⁠?⁠”

“⁠신고하면 아빠 세차장 단골들한테 제 사진이 가요⁠. 신림 어떤 라이더는 지점장한테 얼굴 합성 사진이 갔대요⁠. 인터넷에 다 나와요⁠.⁠”

다은은 쓸어 모은 머리카락을 쓰레받기에 담았다⁠. 담다가 몇 가닥을 흘렸다⁠. 흘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집어 쓰레받기에 다시 올렸다⁠. 한 가닥도 남기지 않으려는 손이었다⁠.

“⁠원장님이 신고하셔도⁠, 제 이름은 말하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서 처음으로 무서웠다⁠. 이백열두 명보다 한 사람이 더 무거웠다⁠.

*

1월 28일 목요일 오전 아홉 시 사십 분⁠, 수원 시내 신용회복위원회 상담 창구 앞 대기 의자에서 보영은 번호표 「⁠0047⁠」을 손에 쥐고 있었다⁠. 대기실은 은행처럼 생겼는데 아무도 통장을 들고 있지 않았다⁠. 옆자리 할아버지가 창구 직원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여기 돈 빌려줘요⁠?⁠”

“⁠아버님⁠, 여기는 빚을 나눠 갚게 도와드리는 데예요⁠.⁠”

“⁠빌려주는 데는 어디요⁠?⁠”

직원이 서민금융진흥원 1397 안내문을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안내문을 뒤집어 보고 뒷면에도 번호가 있느냐고 물었다⁠. 대기실 사람들이 웃음을 참느라 다 같이 바닥을 보았다⁠.

번호표가 불렸다⁠. 보영의 상담사는 보영보다 서너 살 아래로 보이는 여자였고⁠, 카드 네 장과 대부업체 두 곳의 이름을 받아 적으며 계산기를 두드렸다⁠.

“⁠카드론 결제가 사흘 밀리셨네요⁠. 연체 삼십 일 이하라 신속채무조정 대상이세요⁠. 원금은 그대로 두고 이자율을 낮춰서⁠, 길게는 십 년까지 나눠 갚게 해 드립니다⁠. 신청하시면 금융회사들 추심도 멈춰요⁠.⁠”

“⁠대가는요⁠?⁠”

상담사가 계산기에서 손을 뗐다⁠.

“⁠신용카드는 못 쓰세요⁠. 조정하는 동안은요⁠.⁠”

보영은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오늘 앞치마를 안 입고 나온 것을 알았다⁠. 파마약도 염색약도 샴푸도 카드로 사 왔다⁠. 카드가 끊기면 가게는 현금으로 돌아가야 했다⁠. 열두 평 가게를 현금으로 돌리는 것은 손님 머리를 손톱으로 자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아까 말씀하신 이백이요⁠. 등록 안 된 데 빚은 여기서 조정을 못 해요⁠. 그건 1332로 거세요⁠. 거기가 더 셉니다⁠.⁠”

“⁠거기가 더 세요⁠?⁠”

“⁠거기는 갚을 돈을 깎는 게 아니라 없애 줘요⁠.⁠”

*

정오⁠, 신용회복위원회가 든 건물 비상계단 층계참에서 보영은 1332를 누르고 3번을 눌렀다⁠. 계단이 층마다 열여섯 개였다⁠. 보영은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위층 계단 수를 세었다⁠. 상담원이 받았다⁠.

“⁠이백만 원을 받으셨고 열흘마다 육십만 원이면⁠, 연으로 천 퍼센트가 넘습니다⁠. 연 육십 퍼센트를 넘는 계약은 원금과 이자 모두 무효예요⁠. 이백도 갚으실 의무가 없습니다⁠. 이미 내신 이자는 돌려받는 소송을 법률구조공단에서 무료로 도와드려요⁠. 채무자대리인도 신청하시겠어요⁠?⁠”

“⁠네⁠. 그리고 저희 손님들 번호를 그 사람들이 갖고 있어요⁠. 이백열두 명이요⁠.⁠”

“⁠손님이나 가족한테 빚을 알리면 그것도 불법입니다⁠. 연락이 가면 날짜와 시각을 다 남겨 두세요⁠. 이자를 보내신 계좌 예금주가 누구로 되어 있나요⁠?⁠”

“⁠도금자요⁠.⁠”

상담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잠깐 길어졌다⁠. 보영은 기다리는 동안 아래층 계단까지 다 세었다⁠. 열여섯 개였다⁠.

“⁠같은 이름이 들어온 신고가 있네요⁠. 접수 번호 불러 드릴게요⁠.⁠”

보영은 접수 번호를 손등에 볼펜으로 받아 썼다⁠. 가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 끝자리 4417⁠. 보영은 받지 않았다⁠. 손등의 숫자 위로 엄지를 덮었다⁠.

곧이어 상훈에게서 문자가 왔다⁠. 「⁠점심 먹었어⁠? 오늘 구내식당 제육⁠」⁠. 보영은 「⁠응 먹었어⁠」라고 답했다⁠. 점심은 먹지 않았다⁠. 먹지 않은 점심과 말하지 않은 빚이 하루에 하나씩 늘었다⁠. 버스 창밖으로 영통의 상가들이 지나갔다⁠. 2층 창마다 간판이 있었고⁠, 간판마다 누군가 스물두 계단쯤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

2월 1일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십 분⁠, 여의도 금융감독원 본원 분석팀 사무실에서 진경의 모니터에 묶음 017이 새로 그려지고 있었다⁠. 신고가 삼천육백스물네 건으로 늘어 있었다⁠. 새로 붙은 신고들 가운데 수원 영통의 미용실 원장이 있었다⁠. 진경은 습관대로 소리 내어 읽었다⁠.

“⁠구보영⁠. 영통⁠. 마흔일곱⁠. 이백 받고 열흘에 육십⁠. 손님 목록 이백열두 명⁠. 입금 계좌 예금주 도금자⁠.⁠”

선우가 의자를 굴려 왔다⁠.

“⁠선배⁠, AI가 예금주를 다시 묶었어요⁠. 스물일곱 명이 아니래요⁠.⁠”

화면의 점들이 움직였다⁠. 「⁠입금 계좌 예금주 27명⁠」이라는 점이 쪼개지고⁠, 쪼개진 점들 가운데 하나가 다른 점들을 끌어당겼다⁠. 스물일곱 명 가운데 스물여섯은 계좌가 한두 개였다⁠. 한 사람만 열두 개였다⁠. 열두 계좌로 신림의 라이더에게 돈이 나갔고⁠, 영통의 미용실에서 돈이 들어왔다⁠. 한 이름이 화면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와 자리를 잡았다⁠.

「⁠예금주 도금자 · 74세 · 경기 부천 원미동 · 계좌 12개⁠」

“⁠할머니가 총책이에요⁠?⁠”

“⁠할머니 이름이 한가운데 있는 거야⁠.⁠”

진경은 이름을 한 번 더 소리 내어 읽었다⁠. 도금자⁠. 일흔넷⁠. 부천 원미동⁠. 묶음 017의 점 삼천육백스물네 개가 모두 한 이름을 향해 가는 줄을 달고 있었다⁠. 진경의 믹스커피 위로 하얀 막이 앉았다⁠. 창밖 여의도의 가로수는 아직 맨가지였고⁠, 화면 한가운데의 점 하나만 숨을 쉬듯 천천히 깜빡였다⁠.

6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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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갈피곰2026.11.02· 6화

    실장이 커트 받으면서 단골 목록이랑 남편 회사 번호를 꺼낼 때 가위 든 손이 얼마나 떨렸을까요. 보영 씨 1332에 전화한 거 잘했어요!

    • 서강림작가2026.11.02

      가위를 쥔 채로 웃어야 하는 자리라 더 힘들었을 거예요. 그 전화 한 통이 진경의 화면까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