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44자)

오후 네 시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2월 2일 화요일 오전 열 시⁠, 여의도 금융감독원 본원 분석팀 사무실에서 박선우가 지도 앱 화면을 진경의 모니터 옆에 세웠다⁠.

“⁠선배⁠, 할머니 가게 찾았어요⁠. 금자네 국수⁠. 리뷰가 삼백십이 개예요⁠.⁠”

진경은 묶음 017을 띄운 채로 선우의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리뷰들이 줄줄이 내려갔다⁠. 「⁠국물이 엄마 맛⁠」 「⁠사장님 반말 주의 근데 맛있음⁠」 「⁠곱빼기 시켰는데 할머니가 많이 먹으면 살찐다고 보통 주심⁠」 「⁠계산할 때 공무원이냐고 물어보심⁠」⁠.

“⁠삼백십이면 권인호 씨 주소록이랑 숫자가 같네⁠.⁠”

“⁠선배는 숫자만 보면 신고서가 떠올라요⁠?⁠”

“⁠직업병이야⁠.⁠”

진경은 리뷰를 내리고 계좌 목록을 열었다⁠. 도금자 이름의 계좌 열두 개는 2026년 가을 석 달 사이에 열렸다⁠. 은행은 넷⁠, 지점은 다 부천이었다⁠. 인터넷 뱅킹에 접속한 휴대전화는 세 대뿐이었고⁠, 접속한 자리는 시장이 아니라 부천 상동 일대였다⁠. 일흔네 살 국숫집 주인이 석 달 동안 은행 네 곳을 돌며 계좌를 열고⁠, 상동에서 휴대전화 세 대로 돈을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할머니가 바쁘셨네요⁠.⁠”

“⁠할머니 이름이 바빴지⁠.⁠”

진경은 보고서에 한 줄을 달았다⁠. 「⁠예금주 본인 사용 여부 확인 필요함⁠」⁠. 달고 나서⁠, 확인은 눈으로 하기로 했다⁠.

*

2월 4일 목요일 오후 세 시 반⁠, 부천 원미동 느티나무시장은 설 대목이었다⁠. 천막 지붕 아래로 전 부치는 기름 냄새와 대파 다발과 사람이 한꺼번에 밀려다녔다⁠. 오진경은 박선우와 시장 입구 생선 가게 앞에서 사람 물살에 떠밀리고 있었다⁠. 생선 가게 주인이 선우의 목에 걸린 출입증 줄을 보았다⁠.

“⁠어디서 왔어요⁠?⁠”

“⁠금감원에서요⁠.⁠”

“⁠금 감정⁠? 금은방은 저 끝이야⁠. 요새 금값 올라서 다들 반지 팔러 가⁠.⁠”

선우가 출입증 줄을 패딩 안으로 집어넣었다⁠. 진경은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출입증은 오늘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수사도 점검도 아닌⁠, 눈으로 보러 온 길이었다⁠.

“⁠선배⁠, 저 전 좀 사 가면 안 돼요⁠? 동그랑땡이 저렇게 쌓인 거 처음 봐요⁠.⁠”

“⁠출장비로는 안 돼⁠.⁠”

“⁠제 돈으로요⁠.⁠”

“⁠그럼 돼⁠. 영수증은 받지 마⁠.⁠”

*

시장 한가운데 사거리 모퉁이에 금자네 국수가 있었다⁠. 가게 앞 평상 둘⁠, 가게 안 탁자 넷⁠, 셔터 위에는 「⁠금자네 국수 · 1996⁠」이라는 간판이 빛바랜 채 붙어 있었다⁠. 솥 앞에 선 사람은 키가 작았다⁠. 짧게 볶은 흰 파마머리⁠, 무릎까지 오는 꽃무늬 앞치마⁠. 앞치마 주머니가 불룩했다⁠.

“⁠잔치국수 둘이요⁠.⁠”

“⁠앉아⁠. 금방 돼⁠.⁠”

도금자는 국수를 마는 손을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진경의 굽 닳은 검정 단화와 선우의 새 운동화였다⁠.

“⁠공무원이네⁠.⁠”

“⁠어떻게 아세요⁠?⁠”

“⁠구두 굽 닳은 데가 똑같아⁠. 계단 많은 건물 다니는 사람들이야⁠. 국수는 오천 원씩⁠.⁠”

국수가 나왔다⁠. 멸치 육수 위에 호박과 계란 지단이 얹혀 있었다⁠. 옆 가게에서 반찬 통을 든 여자가 들어와 금자 앞 탁자에 김치 통을 내려놓았다⁠. 쉰 중반⁠, 손등이 고춧가루 물에 붉게 든 여자였다⁠.

“⁠이모⁠, 김치 여기 둬요⁠. 내일 거 깍두기는 저녁에 갖다 드릴게⁠.⁠”

“⁠명숙아⁠, 너 요새 얼굴이 왜 그래⁠? 밤에 잠 안 자⁠?⁠”

“⁠대목이잖아요⁠.⁠”

명숙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 명숙은 꺼내지 않고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명숙이라는 여자는 대답만 하고 서둘러 나갔다⁠. 금자는 여자가 나간 문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국자를 들어 육수를 저었다⁠. 진경은 국수를 한 젓가락 먹었다⁠. 멸치 맛이 진했다⁠.

*

오후 네 시 정각⁠, 금자는 솥 불을 줄이고 앞치마 주머니에서 일수 카드 뭉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카드 마흔 장이 고무줄에 묶여 있었다⁠. 빨간 인주 통 하나⁠, 동그란 나무 도장 하나⁠. 금자가 가게를 나서자 진경과 선우는 국수 그릇을 비우고 뒤를 따라갔다⁠.

첫 집은 맞은편 떡집이었다⁠. 떡집 주인이 손을 앞치마에 닦고 만 이천 원을 내밀었다⁠. 금자는 돈을 주머니에 넣고 카드 한 장을 꺼내 도장을 찍었다⁠. 탁⁠. 카드에는 「⁠1⁠,000⁠,000 · 100일 · 12⁠,000⁠」이라고 볼펜으로 쓰여 있었고⁠, 아래로 작은 동그라미 백 개가 그려져 있었다⁠. 빨간 도장이 스물세 번째 동그라미를 덮었다⁠.

둘째 집은 채소 가게⁠, 셋째 집은 그릇 가게였다⁠. 탁⁠, 탁⁠. 도장 소리는 시장 소음 속에서도 또렷했다⁠. 그릇 가게 할아버지가 카드를 받아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언니⁠, 나 오늘 백 번째야⁠. 졸업이야⁠.⁠”

“⁠졸업하면 또 입학하지⁠.⁠”

금자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새 카드 한 장을 꺼내 그릇 가게 계산대에 놓았다⁠. 동그라미 백 개가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새 카드를 받았다⁠. 졸업식과 입학식이 한 계산대 위에서 일 분 만에 끝났다⁠. 넷째 집 정육점 주인이 진경을 흘끗 보더니 금자에게 물었다⁠.

“⁠언니⁠, 저 사람들 누구야⁠?⁠”

“⁠공무원⁠.⁠”

“⁠단속이야⁠?⁠”

“⁠국수 먹으러 왔대⁠.⁠”

정육점 주인은 웃으며 만 이천 원을 냈다⁠. 진경은 정육점 진열장 옆에 붙은 카드를 보았다⁠. 같은 동그라미 백 개가 있었다⁠. 진경이 물었다⁠.

“⁠이자가 세지 않으세요⁠?⁠”

“⁠이자⁠? 이건 정이야⁠. 은행은 우리한테 안 빌려줘⁠. 매출 보자⁠, 담보 보자⁠, 신용 보자⁠. 금자 언니는 얼굴 보고 빌려줘⁠. 삼십 년을⁠.⁠”

정육점 주인은 칼을 들어 고기를 썰면서 덧붙였다⁠.

“⁠정에 이자 붙는 건 맞아⁠. 정도 공짜는 없어⁠.⁠”

선우가 진경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배⁠, 백만 원 빌려서 백 일에 백이십이면 연 칠십 퍼센트 넘어요⁠. 육십 넘으면 원금까지 무효예요⁠.⁠”

“⁠알아⁠.⁠”

“⁠그럼 이분들 다 안 갚아도 되는 거잖아요⁠.⁠”

“⁠알아⁠. 이분들도 알아⁠.⁠”

금자는 마흔 장을 다 돌고 가게로 돌아왔다⁠. 주머니가 만 원짜리로 두툼해져 있었다⁠.

*

오후 네 시 사십 분⁠, 국수 솥 앞에서 진경이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금자는 보지도 않고 국수 사리를 체에 받쳤다⁠.

“⁠할머니 이름으로 열린 은행 계좌가 열두 개 있습니다⁠.⁠”

금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솥에서 김이 올라와 웃음을 덮었다⁠.

“⁠열둘⁠? 손자가 만들어 줬어⁠. 일수 돈 받기 편하라고⁠. 요새 젊은 상인들은 현금 안 갖고 다녀서 계좌로 넣는다고⁠. 나는 도장만 세⁠. 통장은 안 세⁠.⁠”

“⁠열두 계좌 가운데 하나로 신림동의 스물세 살 청년한테 이십사만 원이 나갔습니다⁠. 일주일 뒤 오십만 원을 갚으라는 돈이었어요⁠. 수원의 미용실 원장한테서는 열흘마다 육십만 원이 들어왔고요⁠.⁠”

금자의 손이 처음으로 멈췄다⁠. 체에서 물이 다 빠질 때까지 금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신림을 가 본 적이 없어⁠.⁠”

“⁠알아요⁠. 할머니 손으로 보낸 돈이 아니에요⁠. 할머니 이름으로 나간 돈이에요⁠.⁠”

“⁠내 이름이 나 없이 혼자 돌아다녔다는 거야⁠?⁠”

“⁠네⁠.⁠”

금자는 사리를 그릇에 담고 육수를 부었다⁠. 손님 없는 탁자에 그릇을 내려놓고 진경을 올려다보았다⁠.

“⁠아가씨⁠, 은행이 안 빌려줄 때 어디서 빌려 봤어⁠?⁠”

진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일흔한 살 엄마의 교회 계가 떠올랐다⁠. 계원 하나가 받았다는 노란 두 마디도 떠올랐다⁠.

“⁠1996년에 이 가게 열 때 은행에 갔어⁠. 남편 없는 여자한테는 안 빌려준대⁠. 시장 사람들이 계를 들어서 보증금을 만들어 줬어⁠. 그 사람들 자식들이 지금 저 가게들 해⁠. 나는 받은 거 돌려주는 거야⁠.⁠”

금자는 앞치마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카드 마흔 장이 사각거렸다⁠.

“⁠내 일수가 법에 안 맞는 거 알아⁠. 서른 해 알았어⁠. 근데 내가 안 빌려주면 쟤들은 저 전단 번호로 가⁠. 아가씨가 오늘 내 도장을 뺏으면⁠, 내일 이 시장에 노란 종이가 붙어⁠.⁠”

금자는 그릇을 진경 앞으로 밀었다⁠. 진경이 시키지 않은 국수였다⁠.

“⁠먹고 가⁠. 공무원은 배고프면 일 못 해⁠.⁠”

*

오후 다섯 시⁠, 시장 뒷골목에서 진경은 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국장은 진경의 보고서를 다 읽은 목소리였다⁠.

“⁠일흔넷 할머니⁠, 서른 해 일수⁠, 계좌 열두 개⁠. 오 분석관⁠, 이게 그림이야⁠. 특사경 출범이 3월 22일로 잡혔다⁠. 출범 날 시장을 친다⁠. 할머니가 첫 단속의 얼굴이야⁠.⁠”

“⁠국장님⁠, 할머니는 일수 카드 마흔 장입니다⁠. 계좌 열두 개는 할머니 손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 손인데⁠?⁠”

“⁠아직 모릅니다⁠.⁠”

“⁠그럼 아직은 할머니 손이야⁠. 손 주인 찾아오면 그때 바꿔⁠. 출범까지 일곱 주다⁠.⁠”

전화가 끊겼다⁠. 진경은 휴대전화를 쥔 채 골목 벽에 등을 댔다⁠. 벽에는 떼다 만 전단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맨 위 귀퉁이에 노란 종이 한 조각이 아직 붙어 있었다⁠.

*

골목 끝에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형광 연두 조끼에 회색 넥워머를 한 청년이 오토바이 좌석에 걸터앉아 무릎 위에 작은 검은 가방을 올려 두고 있었다⁠. 진경이 다가가자 청년이 헬멧을 벗었다⁠.

“⁠권인호 씨⁠?⁠”

“⁠어⁠, 금감원 분⁠.⁠”

“⁠여기는 왜요⁠?⁠”

인호는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었다⁠. 「⁠느티나무시장 뒷골목⁠. 네 시 반⁠.⁠」 끝에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옆방 형 가방이요⁠. 사진이 들어 있어서요⁠. 버리라고 했다가 갖고 있으라고 했다가⁠, 어제 여기로 갖고 오래요⁠. 사십 분 늦었는데 아직 안 왔어요⁠.⁠”

“⁠권인호 씨⁠, 신고하신 분이 수금하는 사람을 혼자 만나면 안 돼요⁠.⁠”

“⁠가방만 주고 갈게요⁠. 형이 사진은 못 버려요⁠. 문자도 못 지우는 사람이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떡집 주인이 떡 상자를 안고 골목으로 나왔다⁠. 인호의 조끼를 보더니 반가워했다⁠.

“⁠배달 왔어⁠? 마침 잘 왔네⁠. 이거 길 건너 2층 교회에 좀⁠.⁠”

“⁠사장님⁠, 저 오늘 비번이에요⁠.⁠”

“⁠비번인데 조끼는 왜 입었어⁠?⁠”

“⁠이거 벗으면 추워요⁠.⁠”

떡집 주인은 혀를 차고 들어갔다⁠. 인호가 진경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웃음이 다 끝나기 전에 골목 입구에 검은 후드티가 나타났다⁠.

*

정우진은 인호 앞에 와서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인호가 가방을 건넸다⁠. 우진은 지퍼를 열어 사진부터 확인했다⁠. 식당 앞에 나란히 선 세 사람⁠. 우진의 엄지가 사진 귀퉁이를 한 번 쓸었다⁠.

“⁠고맙다⁠.⁠”

“⁠형⁠, 신고해요⁠. 형 빚도 무효예요⁠.⁠”

“⁠나중에⁠.⁠”

우진은 진경을 보지 못했다⁠. 진경은 골목 벽에 붙은 채 휴대전화를 귀에 댄 시늉을 하고 있었다⁠. 우진은 가방을 메고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금자네 국수의 뒷문 앞에서 멈췄다⁠. 후드 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두 번 노크했다⁠.

뒷문이 열렸다⁠. 서른쯤 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갈색 패딩⁠, 새 운동화⁠. 남자는 봉투를 받아 패딩 안주머니에 넣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게 안에서 금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우야⁠, 육수 떨어졌다⁠. 멸치 한 봉지 갖고 와⁠.⁠”

“⁠네⁠, 할머니⁠.⁠”

남자가 뒷문을 닫았다⁠. 우진은 벌써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진경은 휴대전화를 내리고 국숫집 뒷문을 보았다⁠. 페인트가 벗겨진 철문 너머에서 도장 소리가 한 번 났다⁠. 탁⁠. 금자가 낮에 못 받은 카드 한 장에 마저 도장을 찍는 소리였다⁠. 철문 아래 틈으로 솥의 김이 새어 나와 골목의 찬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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