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72자)

대본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1월 11일 월요일 오전 여덟 시 오십오 분⁠, 부천 상동 오피스텔 3층 한빛 고객센터의 아침 조회는 실장 나성태의 공지로 시작했다⁠. 상담원 열네 사람이 칸막이 책상 앞에 선 채였다⁠. 한세연은 둘째 줄 끝에서 가습기 수증기를 한 뺨으로 맞고 있었다⁠. 나성태가 출력한 종이를 들고 읽었다⁠.

“⁠금일부로 상담원 여러분의 개인 휴대전화는 출입문 옆 보관함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퇴근 시 깨워 가시면 됩니다⁠.⁠”

옆자리 박은주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휴대폰이 휴식을 취하면 나는 뭘 취해⁠?⁠”

“⁠언니는 대본을 취해요⁠.⁠”

나성태가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마흔여섯 살 실장은 공지를 읽을 때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갔고⁠, 중요한 대목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둘⁠. 지난주 우리 번호 열한 개가 끊겼습니다⁠. 금감원이 번호를 정지시키고 있어요⁠. 인공지능으로 우리 번호를 한데 묶는답니다⁠. 셋⁠. 금감원이 우리 번호로 보낸 경고 문자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상담원이 신고 번호를 알려 주었다는 제보가 있다⁠.⁠”

나성태의 손가락이 멈췄다⁠. 조회실 안의 가습기 소리가 커졌다⁠. 열네 사람 가운데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넷⁠. 오늘부터 모니터링 헤드셋은 통화가 끝날 때까지 벗지 않습니다⁠. 통화 종료는 제 화면에서 제가 누릅니다⁠. 여러분 손가락은 번호 누를 때만 쓰세요⁠.⁠”

세연은 손가락을 주먹 안에 말아 넣었다⁠. 삼 초가 사라지는 소리는 아무 소리도 아니었다⁠. 종이 한 장 넘기는 소리였다⁠.

나성태는 공지를 다 읽고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공지에 없는 말을 덧붙였다⁠.

“⁠무등록 대부업 처벌이 십 년으로 늘어난 뒤로 사장님들은 다 숨었어요⁠. 여기 우리는 남의 빚을 대신 받아 주는 직원입니다⁠. 직원은 대본대로 하면 안 다쳐요⁠. 대본 밖으로 나가면 다칩니다⁠. 나도 신용불량 십 년이에요⁠. 여기 아니면 나 받아 주는 데 없어⁠. 여러분도 마찬가지고⁠.⁠”

마지막 말은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다⁠. 고백처럼 들렸고⁠, 그래서 더 무거웠다⁠.

*

오전 열 시 반⁠, 출입문이 열리고 검은 후드티를 입은 마른 남자가 들어왔다⁠. 나성태가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신림에서 온 정우진⁠. 방문 팀 운전 맡는다⁠. 면허 있다길래 뽑았다⁠. 다들 잘 대해 줘⁠.⁠”

우진은 고개만 까딱하고 비품 책상에 앉았다⁠. 휴대전화 두 대를 보관함에 넣으라는 말에 한 대만 넣었다⁠. 다른 한 대는 업무폰이라 실장이 넣지 말라고 했다⁠.

점심 전 정수기 앞에서 세연이 종이컵에 물을 받는데 우진이 옆으로 왔다⁠. 우진은 물을 받지 않고 정수기 버튼만 내려다보았다⁠.

“⁠권인호 알아요⁠?⁠”

세연의 종이컵에서 물이 넘쳤다⁠. 손등이 차가웠다⁠.

“⁠목록에 있던 이름 같은데요⁠.⁠”

“⁠그 사람 전화⁠, 누나가 했죠⁠? 12월 11일 아침에⁠. 걔 내 옆방 살았어요⁠. 걔 신고했어요⁠. 1332로⁠. 누가 끝에 번호를 알려 줬대요⁠.⁠”

세연은 넘친 물을 바닥에 털고 다시 받았다⁠. 우진이 처음으로 세연의 얼굴을 보았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졸린 얼굴도 아니었다⁠.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아무 말 안 해요⁠. 나도 걔 때문에 오십 붙었어요⁠. 근데 나 같으면 끝에 숫자 네 개 말고 다섯 개 불러 줬을 거예요⁠. 1332⁠, 그리고 3번⁠.⁠”

우진은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비품 책상으로 돌아갔다⁠. 세연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물은 미지근했는데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

1월 12일 화요일 오후⁠, 휴대전화 상자 두 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들고 온 사람은 서른쯤 된 남자였다⁠. 갈색 패딩에 운동화가 새것이었고⁠, 상자를 내려놓고는 바로 휴대전화 화면을 닦았다⁠. 나성태가 남자를 도 사장이라고 불렀다⁠.

“⁠끊긴 거 열하나⁠, 새로 스물⁠. 개통한 사람 이름은 다 다르고요⁠. 다음 달에 또 끊기면 또 갖다 드릴게요⁠.⁠”

“⁠도 사장 가게 문 닫은 뒤로 일이 더 빨라졌네⁠.⁠”

“⁠가게 있을 때는 손님을 기다렸고⁠, 지금은 손님이 저를 기다리죠⁠.⁠”

도 사장은 웃으면서 상자 테이프를 뜯었다⁠. 상자 안에 같은 기종의 휴대전화가 비닐째 누워 있었다⁠. 남의 이름으로 개통되어 남의 손을 떠난 전화들이었다⁠. 은주가 세연에게 몸을 기울였다⁠.

“⁠저거 휴대폰깡이지⁠? 뉴스에 나왔잖아⁠. 경찰이 작년 여름에 백몇십 명 잡았다던데⁠.⁠”

“⁠언니⁠, 휴대폰은 휴식 중이에요⁠.⁠”

“⁠내 입은 휴식이 안 돼⁠.⁠”

도 사장이 나가기 전 세연의 책상 옆을 지나갔다⁠. 세연의 대본 첫 장을 흘끗 보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 할머니도 이 동네 장사하시는데⁠.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이거 할머니가 들으면 국자 들고 오시겠다⁠.⁠”

남자는 웃으며 나갔다⁠. 운동화 뒤축에 시장 바닥의 비닐 조각 하나가 붙어 따라갔다⁠.

*

1월 13일 수요일 오후 두 시⁠, 세연은 목록의 넷째 줄을 눌렀다⁠. 「⁠구보영 · 영통 · 200 · 이자 600⁠,000원 · 1/13(⁠수⁠) 18시⁠」⁠. 가위질 소리가 들어왔다⁠.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금일 이자 육십만 원 확인 안내입니다⁠.⁠”

“⁠여섯 시 전에 넣을게요⁠. 미용실 문 닫고요⁠. 지난번에도 넣었잖아요⁠. 이번이 네 번째예요⁠. 이거 넣으면 이백 빌리고 이백사십 넣는 거예요⁠.⁠”

“⁠원금 이백만 원은 그대로입니다⁠.⁠”

“⁠알아요⁠. 그게 제일 무서운 말이에요⁠.⁠”

세연은 대본의 다음 줄을 읽었다⁠. 「⁠고객님의 소중한 상환을 기다립니다⁠」⁠. 헤드셋 안으로 나성태의 숨소리가 들렸다⁠. 실장은 지금 세연의 줄에 붙어 있었고⁠, 끝까지 붙어 있을 것이었다⁠. 세연은 입안에서 숫자 네 개를 굴렸다⁠. 혀 위에 일이 있고⁠, 이 뒤에 삼이 두 개 있고⁠, 목구멍 끝에 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럼 확인 안내 마치겠습니다⁠.⁠”

딸깍⁠. 나성태의 화면에서 통화가 끊겼다⁠. 세연이 말을 멈춘 것은 끊기는 소리보다 반 박자 늦었다⁠. 숫자 네 개는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랫입술 안에 이빨 자국이 났다⁠.

수요일 하루 세연은 백 통을 다 걸었다⁠. 백 통 모두 대본대로 끝났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반⁠, 부천 원미동 다세대 2층 집 부엌에서 김명숙은 내일 가게에 낼 콩자반을 졸이고 있었다⁠. 쉰여섯 살 엄마는 간장 냄비 앞에서 주걱을 놓지 않고 딸에게 말했다⁠.

“⁠너 통신사 다니면 엄마 핸드폰 요금 좀 깎아 줄 수 있지⁠? 직원 할인 같은 거⁠.⁠”

“⁠엄마⁠, 그런 건 본사 사람만 돼⁠.⁠”

“⁠너는 본사 아니야⁠?⁠”

“⁠나는 하청이야⁠.⁠”

거짓말은 하청까지 내려가면 덜 거짓말 같았다⁠. 식탁 위 엄마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엄마가 주걱을 든 채 손등으로 화면을 엎었다⁠. 세연이 보기 전에⁠, 엎는 손이 빨랐다⁠.

“⁠누구야⁠?⁠”

“⁠시장 문자⁠. 금자 할머니가 이번 달은 일수 도장 하루 걸러 찍어도 된대⁠. 설 대목 앞이라고⁠.⁠”

엄마는 시장 국숫집 금자 할머니에게 십 년째 일수를 썼다⁠. 가게 보증금을 올려 줄 때도⁠, 냉장 진열대를 바꿀 때도 금자의 도장이 먼저였다⁠. 세연은 어릴 때 오후 네 시마다 가게 앞에 오는 할머니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빨간 인주 냄새가 났던 것을 기억했다⁠. 엄마는 엎어 둔 휴대전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콩자반을 한 번 더 저었다⁠.

“⁠학자금은 잘 갚고 있지⁠? 너 신용 망가지면 시집도 못 가⁠.⁠”

“⁠요즘은 신용 보고 시집 안 가⁠.⁠”

“⁠신용 보고 가⁠. 엄마 때는 얼굴 보고 갔다가 이렇게 됐잖아⁠.⁠”

세연은 웃었다⁠. 엄마도 웃었다⁠. 냄비 바닥에서 간장이 졸아붙는 소리가 났고⁠, 엄마는 서둘러 불을 껐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한 번 더 떨었다⁠. 엄마는 이번에는 꺼내지 않았다⁠.

*

1월 15일 금요일 저녁 여섯 시 사십 분⁠, 상담원들이 보관함에서 휴대전화를 깨워 가는 사이 나성태가 세연을 실장 책상으로 불렀다⁠. 책상 위 모니터에 녹음 파일 목록이 떠 있었다⁠. 대본 셋째 줄 「⁠본 통화는 녹음되고 있지 않습니다⁠」를 세연은 떠올렸다⁠. 녹음은 다 되고 있었다⁠.

“⁠12월 11일 오전 아홉 시 사 분⁠.⁠”

나성태가 재생을 눌렀다⁠. 세연의 목소리가 관청 말투로 흘러나왔다⁠. 연장비⁠, 상환 의사 확인 단계⁠. 끝 무렵 플라스틱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숨 같은 목소리⁠.

「⁠일⁠, 삼⁠, 삼⁠, 이⁠.⁠」

나성태가 정지를 눌렀다⁠.

“⁠이거 누구 목소리야⁠?⁠”

“⁠제 목소리네요⁠.⁠”

“⁠뭐라고 한 거야⁠?⁠”

세연은 실장 책상 옆에 놓인 통화 목록 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록 맨 왼쪽에는 회사 전체 고객에게 붙은 일련번호가 있었다⁠.

“⁠다음 줄 번호요⁠. 저 목록 번호 읽는 버릇이 있어요⁠. 그날 다음 줄이 천삼백삼십이 번이었을 거예요⁠. 백 통 채우려면 번호를 세야 덜 헷갈려요⁠.⁠”

나성태는 목록 철을 넘겨 12월 11일 장을 찾았다⁠. 권인호 다음 줄⁠, 구보영의 일련번호는 1335였다⁠. 나성태가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삼백삼십오인데⁠.⁠”

“⁠제가 셋을 하나 덜 셌네요⁠. 그래서 그날 백 통을 다 못 채웠나 봐요⁠.⁠”

나성태가 웃었다⁠. 처음으로 이를 보이고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세연 씨⁠. 입사할 때 비상 연락처 써 냈지⁠?⁠”

“⁠네⁠.⁠”

“⁠그거 내가 갖고 있어⁠. 다들 갖고 있어⁠. 나도 사장님한테 내 거 갖다 바쳤어⁠. 다음부터 숫자는 속으로만 세⁠. 속으로 세는 건 녹음이 안 되니까⁠.⁠”

세연은 고개를 숙였다⁠. 모니터 아래 나성태의 책상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고⁠, 서랍 안에 신용회복위원회 상담 안내문 한 장이 구겨진 채 들어 있었다⁠. 「⁠채무조정 상담 예약 · 1600-5500⁠」⁠. 날짜는 삼 년 전이었다⁠.

*

1월 18일 월요일 오전 아홉 시⁠, 세연은 새 주의 통화 목록을 받았다⁠. 첫 장⁠, 둘째 장은 모르는 이름들이었다⁠. 셋째 장 열한째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김명숙 · 원미동 느티나무시장 · 명숙이네 반찬 · 3⁠,000⁠,000 · 연체 2일⁠」

번호는 엄마의 번호였다⁠. 세연이 초등학교 때 외운 번호⁠, 아직도 단축번호 1번인 번호였다⁠. 엄마는 딸이 통신사에 다니는 줄 알았고⁠, 세연은 엄마가 돈을 빌린 줄 몰랐다⁠. 수요일 밤 앞치마 주머니에서 두 번 떨던 휴대전화가 떠올랐다⁠. 손등으로 엎던 빠른 손도⁠.

“⁠세연아⁠, 너 얼굴이 하얘⁠.⁠”

은주가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세연은 대답 대신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출입문 옆 보관함 앞을 지나며 열네 칸 가운데 제 칸을 보았다⁠. 칸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휴대전화로는 엄마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을 틀고 손목을 대었다⁠. 손목의 맥이 물살 밑에서 뛰었다⁠. 세연은 거울 속 제 입술을 보며 숫자 네 개를 소리 없이 한 번 움직여 보았다⁠. 녹음이 안 되는 자리였다⁠.

자리로 돌아오자 셋째 장은 펼쳐 둔 그대로였다⁠. 엄마의 이름도 열한째 줄에 그대로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지워져 있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세연은 한 번 더 보았다⁠.

나성태의 목소리가 사무실 뒤에서 들렸다⁠. 비품 책상의 우진에게 하는 말이었다⁠.

“⁠연체 사흘 넘으면 방문이다⁠. 정우진⁠, 원미동 시장 알지⁠? 길 익혀 둬⁠.⁠”

세연은 헤드셋을 귀에 대고 셋째 장을 엎었다⁠. 엎은 종이 뒷면에 아침 볕이 블라인드 줄무늬로 내려앉았고⁠, 줄무늬는 엄마의 이름이 있는 자리를 정확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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